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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사전 - 우금(于禁)

[삼국지 인물사전 - 우금(于禁)] 


우금(于禁, ? ~ 221년)은 중국 삼국 시대의 위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문칙(文則)이며 연주(兗州) 태산군(泰山郡) 거평현(鉅平縣) 사람이다. 위나라 오장군(五將軍)의 한 명이다. 

생애
처음에는 포신(鮑信)을 섬겼다. 포신이 전사하자 장군 왕랑(王朗)의 휘하에 있다가 조조(曹操)에게 우금이 대장군을 맡을 능력이 된다고 추천(推薦)하여 조조의 부하가 된다. 이후 조조를 수행하여 여포(呂布), 장초(張超)를 공격하여 연주 탈환에 공을 세웠고 황건 잔당인 황소(黃巢), 유벽(劉辟)을 격파했고 진국을 침공한 원술의 교유를 포함한 4명의 장수를 붙잡아 참수하였다.

건안(建安) 2년(197년), 장수(張繡)가 항복했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하후돈(夏侯惇)(夏侯惇)이 거느린 청주병들이 약탈을 일삼자 그들을 죽였다. 살아남은 청주병들은 그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고하나 우금(于禁)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적을 막을 영채를 쌓았다. 장수군이 쳐들어오자 그들에게 반격(反擊)해 조조가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조조가 유비(劉備)를 공격하러 떠났을 때 오직 2천의 군사만으로 연진을 지켜 원소(袁紹)의 군세를 막아내고, 오히려 5천을 이끌고 북상하여 황하 강변 원소군의 수많은 별영을 격파하는 등 맹활약했다. 관도대전(官渡大戰)에서도 점점 전세가 불리해져 모두가 두려워하는데도, 우금은 심히 기백을 떨치며 분전한다. 장패(臧覇)와 같이 매성(梅成)을 공격하고 장료(張遼)와 장합(張郃)은 진란(陳蘭)을 공격하는 데 우금이 도착하자 매성은 항복하나 후에 다시 진란에게로 도망간다. 장료 등은 진란과 대치하면서 군량(軍糧)이 부족했는데 우금이 군량을 계속 대주어 마침내 진란, 매성을 참수(斬首)한다.

이후 하후돈을 따라 박망파 전투(博望坡戰鬪)에 종군하나 패배한다. 삼국지연의에서와는 달리 유비의 선공이 이 전투의 발단이며 제갈량(諸葛亮)이 아직 유비를 따르기 전의 일이다. 유비가 진지를 불태우고 후퇴하는 척하여 하후돈을 유인하자 이에 하후돈이 유비의 계책에 휘말려 추격하나 역공을 한 유비에게 패한다. 이 전투에서 우금(于禁)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좌장군(左將軍)이 되고 가절월(假節鉞)을 받는다. 건안 24년(219년), 관우(關羽)가 양양을 점령하고 명장 조인(曹仁)이 지키는 번성(樊城)을 포위하자 위기감을 느낀 조조는 우금과 7군을 구원병으로 보내는데 10여 일 동안 내린 비에 한수가 범람하여 7군이 모두 물에 잠긴다. 관우(關羽)가 큰 배를 타고 와서 우금 등을 공격하자 결국은 투항(投降)해서 옥에 갇힌다. 오래도록 자신을 섬긴 우금이 항복했다는 소식에 조조(曹操)는 “내가 우금을 30년 동안 알고 지냈지만 위난에 처하자 방덕(龐德)보다 못하리라는 것을 어찌 짐작했겠는가.”며 탄식했다.

관우는 이 때 포로로 잡은 우금(于禁)의 3만 병사를 먹이는 데 군량이 부족하여 손권(孫權)이 상관에 보관해 둔 쌀을 탈취(奪取)하는데 이에 크게 분노한 손권이 관우를 공격했다. 손권이 형주(荊州)를 점령한 후 손권에게 인계되었다, 조비(曹丕)가 즉위한 이듬해인 황초(黃初) 2년(221년), 본국으로 돌아갔다. 조비는 순림보(荀林父)와 맹명시(孟明視)의 고사를 들며 우금을 안원장군(安遠將軍)에 임명한다. 그러나 후에 오에 사자로 보내면서 조조의 능묘에 참배하도록 했는데 조비(曹丕)는 미리 관우가 싸움에서 이기고 방덕(龐德)이 분노하며 우금이 항복하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우금은 이를 보고 부끄럽고 분한 마음에 병을 얻어 죽었고 시호(諡號)를 여(厲)라 하였다.

대장군의 재목
영제 때 기도위 포신의 모병(募兵)에 응하여 따랐다. 192년(초평 3년) 제북상 포신(鮑信)이 연주를 침입한 청주의 황건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도백(都伯)이 되어 왕랑에 속하였다. 왕랑의 추천으로 조조에게 불려가 면담(面談)을 가지고 군사마를 받았으며 서주를 칠 때 따라가 광척(廣戚)을 함락한 공으로 함진도위(陷陳都尉)에 올랐다. 조조가 본거지인 연주를 비운 사이 장막·장초 형제가 여포를 끌어들여 난을 일으켰다. 조조를 수행하여 복양, 수창(須昌, 지금의 산둥성 둥핑 현), 수장(壽張), 정도, 이호(離狐), 옹구(雍丘, 지금의 허난성 치현) 등에서 싸우고 연주 탈환(兗州奪還)에 공을 세웠다. 196년(건안 원년) 조조가 영천에서 준동하던 황건 잔당 황소 · 유벽 등을 토벌할 때도 활약하여 평로교위(平虜校尉)로 승진하였다.

197년 완(宛)에서 반항하던 장수(張繡)를 조조가 정벌하러 갈 때도 참여하였다. 장수는 일단 항복했다가 다시 마음을 바꿔 조조(曹操)를 기습하였다. 난리가 난 와중에도 우금(于禁)은 수백 명을 거느리고 꿋꿋이 싸우며 천천히 철수하였다. 그 길에 부상(負傷)을 당한 채 알몸으로 달아나는 이들을 목격하였다. 그 연유를 물으니 청주병 일부가 약탈(掠奪)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전에 청주의 황건적(黃巾賊)들이 조조에게 투항했었는데 그중 병력으로 흡수된 자들을 청주병(靑州兵)이라 하였다. 이에 죄 있는 자들을 토벌(討伐)하였다. 청주병들이 급히 조조에게로 가 고소하였다. 이윽고 우금도 당도해서는 조조를 배알(拜謁)하기 전에 보루부터 쌓았다. 빨리 변론부터 해야 한다는 혹자의 말에 “지금 배후에 적들이 있어 불시에 닥칠 수 있는데 방비(防備) 먼저 안 하면 어찌 대적하겠소?”라고 답하였다. 해자(垓字)까지 파고 군영을 정비한 후 조조에게 나아가 진술하였다. 조조(曹操)로부터 칭찬을 들으며 익수정후(益壽亭侯)에 봉해졌다.

9월(음력) 원술이 진국 호현(苦縣)을 공략하고 남겨놓은 교유 · 이풍 · 양강 · 악취를 조조가 파하고 죄다 참수할 때도 종군(從軍)하였다. 198년 조조가 장수를 잡으러 다시 양(穰, 지금의 허난성 덩저우 시)으로 진격할 때도 하비(下邳)에서 여포를 정벌할 때도 참전하였다. 장양 사후 원소에 속한 수고(휴고)를 199년 사환, 조인과 함께 사견(射犬, 지금의 허난성 보아이 현)에서 쳐부수고 참하였다.

관도 대전
원소(袁紹)의 강성함에도 불구하고 일선에 서기를 원하여 2,000명으로 연진(延津)을 방어하였다. 조조는 관도(官渡, 지금의 허난성 중무 현)에 있었는데 유비가 서주에서 독립하였다. 200년 조조가 이를 평정하는 사이 원소의 견제를 막아냈다. 다시 조조군이 백마(白馬)에서 원소군과 겨루는 동안 악진과 함께 5,000명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연진 서남쪽으로 강변을 따라 급(汲)과 획가(獲嘉)에 이르기까지 30여 둔을 불살랐다. 죽이거나 생포(生捕)한 자가 각각 수천 명에, 하무(何茂) · 왕마(王摩) 등 장수 20여 명은 항복하였다. 이후 원무(原武, 지금의 허난성 위안양현)에 주둔하며 두씨진(杜氏津)에서 원소의 별영을 격파하였다. 이와 같은 공으로 비장군(裨將軍)에 임명되었다. 관도로 합류해서는 수적 열세 속에서도 기백을 떨치며 분전하여 조조군이 쌓아놓은 토산을 지켰다. 결국 조조가 승리하고 우금(于禁)은 편장군(偏―)으로 옮겼다.

202년[6] 조조가 여양(黎陽, 지금의 허난성 쉰 현)에서 원담·원상 형제와 일진일퇴를 거듭할 동안 유표(劉表)에게 의탁하고 있던 유비가 섭현(葉縣)까지 치고 올라왔다. 하후돈을 따라 막으러 가니 유비가 자기 진지를 불태우고 박망(博望)으로 퇴각하였다. 이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후돈과 함께 쫓았다가 복병에 당하였다. 진영(陣營)에 남아있던 이전이 구하러 달려온 덕분에 유비(劉備)가 물러났다.

201년에 조조(曹操)에게 귀부했었던 동해군의 창희가 206년 다시 반기를 들었기에 장패, 하후연과 같이 평정하였다. 창희는 평소 친분이 있었던 우금(于禁)에게 투항하였다. 창희를 조조에게 호송(護送)해야 한다는 장수들의 의견(意見)을 내치고 눈물을 흘리며 바로 참수하였다. 순우(淳于)에 와있던 조조는 우금을 더욱 중히 여기고 표를 올려 칭찬하였다. 이에 호위장군(虎威―)이 되었다.

209년 진란과 매성(梅成)이 육안(六安)에서 들고일어났다. 우금(于禁)과 장패가 매성을 맡고 장료와 장합이 진란을 맡았다. 매성은 우금에게 거짓 항복하여 3,000명의 전력을 보전했다가 진란에게 합류(合流)하였다. 우금은 장료에게 군량을 계속 대주어 장료가 마음 놓고 작전할 수 있도록 도왔다. 비로소 장료가 진란과 매성을 베어 진압하였다. 식읍 200호를 더해 모두 1,200호가 되었다.

몰락
마침내 좌장군까지 오르고 가절월(假節鉞)도 받았다. 식읍 500호를 나누어 아들 한 명이 열후에 봉해졌다. 219년(건안 24년) 조조가 장안에 있을 때 번성(樊城)의 조인으로 하여금 관우를 치게 하고 우금은 이를 도우라 하였다. 8월(음력) 많은 비가 쏟아져 한수가 범람하는 바람에 우금 등 일곱 군이 물에 잠겼다. 우금(于禁) 등이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니 피할 곳이 없는데 관우가 큰 배를 타고 공격해왔다. 결국 우금은 항복(降伏)한 반면 방덕은 굽히지 않고 처형되었다. 이 소식에 조조는 "30년간 알고 지냈던 우금이 위난에 처하자 방덕만도 못하단 말인가."며 오래도록 탄식했다. 우금과 3만 명의 포로는 강릉(江陵,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 구)으로 보내졌다. 강릉에서는 이들을 먹일 식량이 부족하여 손권이 소유한 상관(湘關, 영릉군 소재)의 쌀을 멋대로 취했다. 은밀히 전쟁 준비를 하고 있던 여몽이 이를 핑계로 바로 진공하여 형주(荊州)를 점령하였다. 덕분에 우금은 풀려나 오나라로 인계되었다.

어느 날 손권(孫權)과 나란히 말을 타고 외출하였다. 우번이 “너는 죽지도 못한 포로면서 어찌 감히 우리 주군과 말 머리를 나란히 하느냐!”라고 꾸짖으며 채찍을 휘두르려 하자 손권이 제지(制止)하였다. 다른 날 손권이 누선에서 신하들과 술을 마셨다. 우금(于禁)이 음악을 듣다 눈물을 떨궜다. 우번이 또 빈정대므로 손권이 불편해했다. 221년(황초 2년) 손권이 위에 칭번하며 우금을 송환하려 하였다. 우번이 반대하기를 그렇게 해봤자 군사에 익숙한 위는 우리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며 차라리 우금을 베어 두 마음을 품은 이들에게 보이자고 했는데 손권(孫權)은 듣지 않았다. 우금은 우번(虞翻)에게 많은 지탄(指彈)을 받았음에도 돌아가 우번을 칭찬하였다.

머리와 수염은 하얗게 세고 몰골은 초췌(憔悴)해진 채 눈물을 흘리며 조비를 알현(謁見)했다. 조비는 “진나라(晉)는 순림보가 패했어도 다시 기용하여 북적의 땅을 얻었고, 진나라(秦)는 맹명시(孟明視)가 군대를 잃었어도 다시 써 서융을 제패했다. 소국들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만승의 제국이랴? 번성에서의 패전은 수재로 인한 것이지 그대의 과실이 아니다.”며 우금(于禁)을 위로하고 안원장군(安遠―)에 앉혔다. 또 조서에 ‘한고제는 옷을 벗어 한신에게 입히고 광무제는 수(綬)를 풀어 이충(李忠)에게 둘러주어 그 공로를 공경(恭敬)하였다’라고 하며 무려 원유관(遠遊冠)까지 하사하였다. 이후 오나라에 사자로 보내면서 그 전에 업에 있는 조조의 능묘, 고릉(高陵)을 참배하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미리 관우가 싸움에서 이기고 방덕이 분노하며 우금이 항복하는 그림을 그려놓았다. 우금이 이를 보고 부끄럽고 분한 마음에 병이 나 죽었다. 시호는 여(厲)라 하였고 익수정후는 아들 우규(于圭)가 이었다.

성품과 평가
교범대로 군대를 엄격하게 다뤄 적의 재물(財物)도 사사로이 취하지 않아 중용받았다. 그랬기에 그다지 병사들의 마음까지는 얻지 못했다. 조조(曹操)가 주령의 병력을 우금에 붙여주고자 했다. 우금이 명령(命令)을 받들어 수십 기만을 데리고 달려가 그대로 집행하였다. 주령과 그 부하들은 감히 반항(反抗)하지 못하고 복종하였다. 우금의 위중함이 이와 같았다.

왕랑은 우금(于禁)을 조조에게 추천할 때 대장군을 맡을 능력이 있다고 하였다. 완에서 장수에게 죽을 뻔한 조조는 청주병 건을 진술(陳述)하는 우금에게 “육수(淯水)에서의 난으로 급박한 와중에도 우금은 군사를 정돈해 적들과 싸우고 보루를 단단히 했다. 망령되이 움직이지 않는 절도(節度)가 있으니 역사 속 명장이라 한들 이보다 뛰어나겠는가!”라고 극찬(極讚)하였다. 206년에는 헌제에게 올리는 표에서 우금(于禁), 악진, 장료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들은 무력이 걸출할 뿐더러 계략까지 능합니다. 충성심(忠誠心)도 한결같아 절의를 지킵니다. 싸울 때마다 병사를 지휘하여 어떠한 강한 적이라도 분격(奮擊)하여 물리치고 스스로 북을 쳐 지치지도 않습니다. 원정(遠征)을 가면 군대를 어루만져 화합하게 하고 법을 받듭니다. 적을 만나면 과감하게 결단(決斷)하면서도 실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금은 호위장군, 악진은 절충장군(折衝―), 장료는 탕구장군(盪寇―)에 임명됐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는 조조 휘하의 훌륭한 장수로는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 5명이 으뜸으로 우금은 가장 굳세면서도 엄중하다 하였으나 그 명성을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다고 하였다. 배송지(裴松之)는 ‘교분이 있던 창희를 중론을 내치면서까지 이송하지 않고 바로 참했으면서 자신은 살아서 적의 포로가 되었으니 나쁜 시호를 받은 것이 당연하다’고 하였다. 사마광(司馬光) 역시 ‘수만을 거느리고 패해 죽지도 않고 살아서 항복했으니 조비가 폐하는 것도 옳고, 죽이는 것도 옳다’고 하였다. 다만 고릉에 그림을 그려놓아 능욕(凌辱)한 것은 임금이 할 짓이 아니라는 말도 남겼다.

"삼국지연의" 속 우금
포신의 부하였을 때의 행적은 나오지 않는다. 유종(劉琮)이 항복한 뒤 조조의 명령으로 유종과 그의 모친인 채씨(蔡氏)를 죽인다.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는 모개(毛玠)와 함께 수군 도독(水軍都督)으로 세워지지만 제갈량(諸葛亮)의 계략에 속아 많은 화살을 잃는다. 건안 16년(211년), 마초(馬超)가 부친 마등(馬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장안(長安)을 공격해 함락하고 동관을 함락(陷落)했다. 그때 마초와 싸우나 패한다. 한수(韓遂)의 부장인 이감(李堪)이 마초의 추격에서 달아날 때 마초에게 활을 쏘나 마초가 피해 이감을 맞춘다. 마초가 그에게 덤벼들자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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