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3명 보좌한 살아있는 제갈량”...시진핑主義 띄우는 황제의 책사 ‘살아있는 제갈량(諸葛亮).’ 중국 공산당 서열 4위 왕후닝(王滬寧·68) 정치국 상무위원이 10일 중국 국정 자문 기구인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에 취임했다. 시진핑(習近平)이 왕후닝에게 여론·사상을 통합하는 기구인 정협을 맡긴 것은 ‘시진핑 사상’을 공고히 하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 중국 안팎의 주목을 받고 있다. 왕후닝은 지난해 10월 20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20차 당대회)에서 동갑인 리커창(李克强), 왕양(汪洋)을 제치고 최고 지도부(상무위원 7인)에 잔류했다. 왕후닝은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시진핑 등 중국 최고 지도자 3대의 브레인으로 활동해 ‘황제들의 책사’로 불린다. 장쩌민의 ‘3개 대표론(..
제갈량과 이엄의 갈등은 촉국 인재고갈의 원인이었을까? 글: 의사리(衣賜履) 230년, 이엄(李儼)은 제갈량(諸葛亮)에 의해 한중으로 옮겨가고, 중도호의 신분으로 승상부를 관리한다. 231년, 봄에 제갈량은 다시 기산을 나선다(제4차북벌). 이엄은 양초의 운송을 책임진다. 이번 북벌은 제갈량과 사마의가 처음으로 맞붙은 전투였다. 구체적인 전황은 여기에서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여름,가을이 교체하는 시기에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리고, 양식운송이 되지 않았다. 이엄은 참군 마충, 독군 성번을 보내 제갈량에게 철군하도록 말을 전한다. 제갈량은 그리하여 철군한다. [의사리] 이엄이 제갈량에게 철군을 통지하였다는 내용의 원문은 이러하다: "평견참군호충(平遣參軍狐忠) 독군성번유지(督軍成藩喩指), 호량내환(呼亮來還)" ..
삼국시대 최대 승리자 사마의(司馬懿)의 스승은 덕망과 절조로 세상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호소(胡昭)이다 글: 위문한사(魏門寒士) 삼국시대의 사마의는 아마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삼국시대에 사마씨가족은 최대의 승리자이니까. 이는 사마의가 지닌 능력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이렇게 보면 사마의는 분명 명사(名師)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같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제갈량, 방통의 두 천재는 모두 사마휘(司馬徽)의 제자이다. 사마휘는 사마의와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사마의는 사마휘를 스승으로 모시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사마의의 스승은 누구일까? 기실 사마의의 두 아들의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마의의 가장 유명한 두 아들은 바로 사마사(司馬師)와 사마소(司馬昭) 둘일 것이다. 두 사람은 적..
춘추시대부터 무묘에 들어갈 자격 있는 중국역사상 전신(戰神) 될만한 72명 장수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홍콩대작영화를 보면 우리는 경찰이건 흑사회이건 모두 관공(關公)을 모신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인상 속에서 무묘(武廟)에 대한 것은 모두 청나라때부터 시작된 관공무묘(關公武廟)에 머물러 있다. 혹은 아마도 살신(殺神) 백기(白起)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기실, 중국에 자고이래로 군사기재는 적지 않았다. 여기에서 필자는 춘추시대부터 무묘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전신'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춘추시대 4명 조귀(曹劌): 장작지전(長勺之戰).,재쇠삼갈(再衰三竭, 공격의 북소리가 한번 울리면 사기가 오르지만, 두번째 울리면 사기가 약간 떨어지고, 세번째 울리면 시가가 바닥난다). 이는 초..
중국역사로 본 추녀(醜女)의 아름다움-제갈량 부인 황월영 글: 매상유(梅桑楡) 중국고대의 사대미녀가 있다. 서시, 초선, 왕소군, 양옥환. 그녀들의 미모는 전설이 되었지만, 초상화나 사진이 남아 있지는 않다. 초상화가 없기 때문에, 후세에 무한한 상상의 여지를 남겨 주었다. 누구든지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그녀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상상해볼 수 있다. 만일 백명의 마음 속에 백명의 햄릿이 있다면, 천명의 마음 속에는 천명의 사대미녀가 있을 것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이 4명의 미녀중 앞의 3명은 정치적 공로가 있다. 서시는 월을 도와 오를 멸망시킨 공이 있고, 초선은 왕윤을 도와 동탁을 죽인 공이 있다. 왕소군은 변방의 충돌위험을 없애고, 한나라와 흉노간의 우호를 건립시킨 공이 있다. 양옥환은 아..
삼국연의 촉나라 최고급 모사인 방통의 양모(陽謀)와 제갈량의 음모(陰謀) ‘삼국연의(三國演義)’는 서기 184년 황건적(黃巾賊)의 난부터 서기 280년까지 중국 대륙(大陸)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집필한 중국의 대표적 연의(고전역사소설)로 명나라 때 나관중(羅貫中)이 쓴 책이다.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집필한 ‘삼국지(三國志)’와 배송지(裴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註)’에 수록된 야사(野史)와 잡기(雜記)를 근거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의 줄거리를 취하여 쓴 작품이다. 원래 이름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 하여 모두 24권 240칙(則)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제갈량과 방통은 모두 ‘삼국연의’의 최고급 모사(謀士)이다. 나란히 일룡일봉(一龍一鳳)으로 불린다. 대은사(大..
삼국지 인물사전 - 서성(徐盛) 서성(徐盛)은 중국 후한 말 ~ 동오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문향(文響)이며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거현(莒縣) 사람이다. 생애 전란(戰亂)을 피해 강동으로 이주했는데 손권(孫權)에게 등용되어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된 후 병사 5백을 받고 시상장(柴桑長)으로서 황역(黃射)이 이끄는 수천 군사의 공격(攻擊)을 물리쳤다. 손권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교위(校尉), 무호령(蕪湖令)으로 임명했다. 또 임성 남쪽의 산월을 친 공로로 중랑장(中郞將)으로 임명되었다. 213년 1월 조조(曹操)가 유수구(濡須口)에 쳐들어왔을 때 폭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군을 향해 돌격하여 손권(孫權)의 칭찬을 받았으며 221년 7월 유비(劉備)가 형주를 공격해 왔을 때 육의(陸議)의 지휘를 받으며..
삼국지 인물사전 - 황개(黃蓋) 황개(黃蓋)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공복(公覆)이며 영릉군 천릉현 사람이다. 생애 처음에는 영릉군의 군리로 있었다. 이후 자신을 초빙(招聘)하려는 지방관에게 찾아가려고 했으나 난을 일으킨 도적패들에게 막혀서 못가고 있었다. 그 난을 일으킨 무리를 손견(孫堅)이 격파하자 그 때 손견을 처음 만나게 되었으며 이후 손견이 의병(義兵)을 일으키자 이를 따라갔다. 손견이 죽은 후 손책(孫策)과 손권(孫權)을 따랐다. 당시 산월이 복종하지 않고 도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현이 있었으므로 황개(黃蓋)는 그 곳의 수장이 되었다. 석성현에 현리 둘을 임명했는데 부정부패가 심하였으므로 둘을 주살(誅殺)했고 춘곡현장, 심양현령으로 전임되었다. 모두 아홉 현을 지켰는데 가는 곳마다..
삼국지 인물사전 - 하후돈(夏侯惇) 하후돈(夏侯惇, ? ~ 220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위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원양(元讓)이다. 조조(曹操)의 거병에 참여하여 수많은 전투를 치렀으며 전투 도중 한쪽 눈에 화살이 박히자 그 화살을 뽑아 눈알을 삼켰다는 일화(逸話)로 유명하다. 초한지((楚漢志))에 등장하는 유방(劉邦)의 부하 하후영(夏侯嬰)의 후손이다. 생애 패국(沛國) 초현(譙縣)에서 태어났으며 전한 명장 하후영의 후예로, 조조(曹操)의 신하 하후연의 동고조(同高祖) 팔촌 형이며 조조에게는 이종사촌 동생이 된다. 그러나 일설(一說)에는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嵩)의 친조카, 즉 조조의 친가 사촌 형제라는 설도 있다. 조숭의 집안은 본래 하후씨로 환관인 조등의 양자가 되었다. 등용 14살 ..
삼국지 인물사전 - 장합(張郃) 장합(張郃, ? ~ 231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준예(儁乂)이며 기주(冀州) 하간국(河間國) 막현(鄚縣) 사람이다. 생애 원소의 수하시절 : 젊은 시절에 황건적(黃巾賊)의 난에서 반란군 진압의 모병(募兵)에 응하여 한복(韓馥)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한복의 몰락 후에는 원소(袁紹)을 섬겨 교위(校尉)에 임명되었다. 공손찬(公孫瓚)과의 싸움 등에서 활약한 공적으로 영국중랑장(寧國中郞將)까지 출세하였다. 200년 관도대전(官渡)의 오소(烏巢) 공방전에서 조조(曹操)의 군세는 강하므로 오소를 지키는 순우경(淳于瓊)에게 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원소(袁紹)에게 진언하였으나 동료인 곽도(郭圖)는 반대하며 조조의 본진을 공격(攻擊)하는 것이..
삼국지 인물사전 - 우금(于禁) 우금(于禁, ? ~ 221년)은 중국 삼국 시대의 위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문칙(文則)이며 연주(兗州) 태산군(泰山郡) 거평현(鉅平縣) 사람이다. 위나라 오장군(五將軍)의 한 명이다. 생애 처음에는 포신(鮑信)을 섬겼다. 포신이 전사하자 장군 왕랑(王朗)의 휘하에 있다가 조조(曹操)에게 우금이 대장군을 맡을 능력이 된다고 추천(推薦)하여 조조의 부하가 된다. 이후 조조를 수행하여 여포(呂布), 장초(張超)를 공격하여 연주 탈환에 공을 세웠고 황건 잔당인 황소(黃巢), 유벽(劉辟)을 격파했고 진국을 침공한 원술의 교유를 포함한 4명의 장수를 붙잡아 참수하였다. 건안(建安) 2년(197년), 장수(張繡)가 항복했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하후돈(夏侯惇)(夏侯惇)이 거느린 ..
삼국지 인물사전 - 마초(馬超) 마초(馬超, 175년 ~ 222년)는 중국 후한 말기의 군벌(軍閥)이며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다. 자는 맹기(孟起)이다. 관우(關羽), 장비(張飛), 황충(黃忠), 조운(趙雲)과 더불어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으로 불렸다. 생애 마초는 192년(초평 3년) 마등과 한수(韓遂)가 군대를 이끌고 장안(長安)으로 진입하자 한 왕조는 한수를 진서장군(鎭西將軍)에 임명해 금성으로 귀환(歸還)시키고 마등을 정서장군에 임명해 미에 주둔시킨다. 192년 한수(韓遂,와 마등(馬騰)이 서로 불화해지자 군을 이끌고 대립(對立)하였다. 이때 마초와 염행(閻行)이 1대1로 붙어 마초가 크게 패하고 죽기직전까지 패하였다. 사례교위 종요(鍾繇)가 관중으로 부임해 한수와 마등에게 서신을 보내 복종하는 ..
삼국지 인물사전 - 장비(張飛) 장비(張飛, 165년 ~ 221년 6월)는 후한 말 ~ 촉한의 군인으로, 자는 익덕(益德)이며 유주(幽州) 탁군(涿郡) 사람이다. 유비(劉備), 관우(關羽)와 함께 황건적(黃巾賊) 토벌에 나서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장판교에서 기지를 발휘해서 조조(曹操)의 대군을 막았으며 서촉정벌 시 엄안(嚴顔)을 회유하여 파촉정벌(巴蜀征伐)에 큰 공로를 세웠다. 이후 파서태수(巴西太守)의 자리에 올랐고 한중정벌 당시 위나라의 장합(張郃)과 맞서 싸워 승리하였다. 그러나 관우의 복수(復讎)를 위해 출정을 준비하던 도중 휘하 무장 범강(范疆)과 장달(張達)에게 암살당했다. 장남 장포(張苞)가 장비보다 (약간) 일찍 요절(夭折)하여 차남인 장소(張紹)가 가계를 이었다. 장비의 장녀와 차녀..
삼국지 인물사전 - 노숙(魯肅) 노숙(魯肅, 172년 ~ 217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이자 정치가(政治家)로 자는 자경(子敬)이며 양주(楊州) 임회군(臨淮郡) 동성현(東城縣) 사람이다. 생애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모(祖母)와 함께 살았다. 집안이 부유(富裕)하며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고 돈을 풀어 가난한 자를 구휼(救恤)하고 인재들과 교제(交際)를 쌓아 고을의 환심(歡心)을 샀다. 주유(周瑜)가 거소장(居巢長; 거소현의 현장)일 때 노숙(魯肅)에게 군량을 요청하였고 노숙은 각각 3천곡의 곡식이 있는 창고 둘 중 하나를 주유에게 아주 내어 주어 이로써 주유와 친교(親交)를 쌓았다. 원술(袁術)이 불러서 동성장(東城長; 동성현의 현장)으로 삼았으나 원술의 통치에 기강이 해이해진 것을 보고 ..
삼국지 인물사전 - 주유(周瑜) 주유(周瑜, 175년 ~ 210년)는 중국 후한 말(後漢末)의 무장(武將)이며 양주(楊州) 여강군(廬江郡) 서현(舒縣) 사람으로 자는 공근(公瑾)이다. 종조부(從祖父) 주경(周景), 주경의 아들 주충(周忠)은 모두 한의 태위(太尉)를 지냈고 부친 주이(周異) 낙양현령(洛陽 縣令)을 지냈다. 주유(周瑜)는 건장하며 빼어난 자태(姿態)가 있었다. 처음 손견(孫堅)이 의병을 일으켜 동탁(董託)을 토벌하매 집을 서(舒)으로 옮겼다. 손견의 아들 손책(孫策)과 주유는 동년배로 둘의 우의(友誼)는 깊어서 주유가 길가 남쪽의 큰 집을 옮겨다 손책(孫策)에게 주고, 당위에 올라가 손책의 모친에게 절 하였다. 서로 있고 없는 바를 같이 융통(融通)하였다. 생애 청년기 초평 원년(190년)..
삼국지 인물사전 - 제갈량 (諸葛亮) 제갈량(諸葛亮, 181년 음력 7월 23일 ~ 234년 음력 8월 28일)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모신(謨臣)이다. 자는 공명(孔明)이며 별호는 와룡(臥龍) 또는 복룡(伏龍)이고 후한 말 군웅(群雄)인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蜀漢)을 건국하는 제업(帝業)을 이루었다. 형주(荊州) 남부 4군을 발판으로 유비의 익천(翼千)을 도왔다. 221년 유비가 제위(諸位)에 오르자 승상(丞相)에 취임하였고 유비 사후 유선(劉禪)을 보좌하여 촉한(蜀漢)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227년부터 지속적인 북벌(北伐)을 일으켜 8년 동안 5번에 걸쳐 위(魏)나라의 옹·양주 지역을 공략(攻略)하였다. 234년 5차 북벌 중 오장원(五丈原) 진중에서 54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하였다. 중국 역사..
삼국지 인물사전 - 조조(曹操) 조위 태조 무황제 조조(曹魏 太祖 武皇帝 曹操, 155년 음력 6월 3일 ~ 220년 음력 1월 23일)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시인이다. 자는 맹덕(孟德)이며 훗날 위가 건국된 이후 추증(追贈)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후한이 그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비상하고 탁월(卓越)한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 여러 제후(諸侯)들을 연달아 격파(擊破)하고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위(魏)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조조(曹操)는 삼국지의 영웅들 가운데 패자(覇者)로 우뚝 솟은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는 평가와 후한을 멸망시킨 난세의 간웅(奸雄)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과 시인 두보(杜甫) 는 나..
제갈량이 유비에게 추천한 군사후계자에 대한 엉터리계책 서서(徐庶)는 언제 제갈량(諸葛亮)을 유비(劉備)에게 추천하였는가? 제갈량(諸葛亮)이 출도하기 전에 유비에 관한 멋진 장면은 당연히 서서가 조조군을 격파(擊破)한 것이다. 명사 서서는 선복(單福)이라는 가명으로 스스로 유비(劉備)를 찾아온다. 그리고 유비의 군사참모(軍事參謀)가 되어 조조군에 두 번이나 승리를 거둔다. 그리하여 조조(曹操)가 그를 주목하게 되고 서서의 진실한 신분을 알아내고 나서 서서의 모친을 인질(人質)로 잡아 서서를 조조군영으로 오도록 만든다. 유비(劉備)는 겨우 쓸 만한 모사(謀士)를 한명 구했는데 부득이 조조군영으로 보내야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안타까운 심경(心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계속 보내는 것을 아쉬워했다. 서서(徐庶)가..
인재 발굴과 등용 면에서의 사마의와 제갈량의 현저한 차이점 1. 들어가는 말 한때 인기리에 방영된 ‘대군사 사마의의 군사연맹’은 다시 한 번 사마의(司馬懿)와 제갈량(諸葛亮) 중 누가 더 대단한지에 관한 논쟁(論爭)에 불을 붙였다. ‘삼국연의(三國演義)’에는 두 명의 경쟁자(競爭者)가 있다. 한 명은 제갈량이고, 다른 한 명은 사마의이다. 두 경쟁대상(競爭對象)이 맞장 뜨면 도대체 누가 더 대단할까?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그에 관해서 줄줄이 말을 늘어놓으면서 얼굴을 붉히고 목에 힘을 주기까지 한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제갈량(諸葛亮)은 "다지이근신(多智而近神)" 즉 지혜(知慧)가 많고 거의 신격인 존재인 비범(非凡)한 인물이다. 민간에서는 그를 "지성(智聖)"이라고 부른다. 그..
방통과 제갈량은 똑같은 명성을 가졌지만 삼국지는 왜 방통을 저평가했는가? 형주(荊州)의 상황에 대한 판단은 제갈량과 방통 중 누가 정확했을까? 제갈량(諸葛亮)의 융중대(隆中對)에서는 형주(荊州)에 대하여 "북거한면(北據漢沔), 이진남해(利盡南海)"라고 하면서 그 땅의 주인인 유표(劉表)는 지킬 능력이 없어 하늘이 유비(劉備)에게 준 자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방통(龐統)은 이렇게 말한다. "형주황잔(荊州荒殘)" 이미 이곳을 차지한다고 하여 정족지세(鼎足之勢)를 만들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누군가 이를 근거로 방통(龐統)이 형주를 더욱 정확하게 보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형주는 도대체 부유(富裕)한 땅인가 아니면 황량한 땅인가? 혹은 방통과 제갈량 중 누구의 말이 더 맞았을까? 한 사람이 한 말이 정확한지..
삼국시대 제갈량의 무덤과 가족들 그리고 4명의 자녀에 대한 내력 제갈량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제갈량(諸葛亮)의 북벌은 삼국시기 촉한승상(蜀漢丞相)으로 광부한실(匡扶漢室)로 천하통일을 위하여 228년 봄부터 234년 겨울까지 전후로 한중(漢中)을 출발하여 조위(曹魏)에 일으킨 5차례의 전쟁을 말한다. 그러나 제갈량의 북벌(北伐)에 대하여 결국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마침내 피로가 누적(累積)되어 병이 되었고 촉 건흥12년(234년) 오장원(五丈原; 지금의 섬서성 보계 기산경내)에서 병사한다. 향년 54세이다. ‘삼국지(三國志)’ 등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제갈량은 유언(遺言)으로 부하에게 자신을 한중의 정군산(定軍山)에 묻으라고 했다고 한다. 거기에 산사에 의존하여 분묘(墳墓)를 만들고 묘혈(墓穴)은 단..
궁경농무 출신인 제갈량이 관직에 오른 후 황제 꿈을 가진 적 있었는가? 제갈량은 관직에 나가기 전에 농사를 지었을까? 제갈량을 얘기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 중국에서는 ‘三顧茅廬’라 한다)로 관직에 나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초려(草廬, 중국에서는 ‘茅廬’)라는 단어가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印象)은 바로 농촌의 초가집이다. 그렇다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은 당연히 농민이다. 사서(史書)에서도 제갈량은 남양(南陽)에서 "궁경농무(躬耕隴畝)"했다고 하고 제갈량도 스스로 자기는 원래 "포의(布衣)"라고 말해서 더더욱 사람들로 하여금 제갈량(諸葛亮)은 관직에 나오기 전에 농사를 지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그러했을까? 제갈량은 낭야 양도(琅邪陽都) 사람이다. 조상은..
중국 사대기서 중 하나인 고전소설 '삼국지연의' 역사배경 분석 (1) 14세기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이 저술한 역사 소설이다. 중국의 서적 중에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적 중 하나이며 이른바 중국사대기서(中國四大奇書)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동아시아권(東亞細亞圈)에서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읽는 고전소설(古典小說)이다. 황건적의 난, 도원결의(1회~2회) 후한 말 십상시(十常侍)의 부정부패(不正腐敗)가 극에 달하며 기강이 문란해지자 백성들은 점점 불만을 품기 시작하며 전국은 극도로 혼란(混亂)해졌다. 이런 가운데 태평도의 교주 장각(張角)이 이끄는 황건적(黃巾賊)의 난이라는 대규모 농민 반란(農民反亂)이 발생한다. 황실의 먼 후손인 유비(劉備)는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형제..
중국 삼국시대 유명한 참모 제갈량과 의기투합 다재다능한 아내 황월영 중국 삼국 시대의 유명한 참모 제갈량(諸葛亮)은 풍채도 당당하고 씩씩한 남자였다. 하지만 아내의 추함은 역사서에 기록(記錄)될 정도였다. 제갈량 아내 황씨는 제갈량의 은사 황승언(黃承彦)의 딸로서 이 둘의 결혼은 당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됐다. 심지어 제갈량의 고향(故鄕)에서는 “제갈량처럼 신부(新婦)를 고르지 마라, 아승(阿承-황승언)의 못난 딸을 얻을 것이니”라는 속담(俗談)이 유행했다. 황씨는 피부가 검고 머리칼은 붉은 보기 드문 흉한 여자였지만 기인 제갈량과는 궁합(宮合)은 좋았다. 제갈량(諸葛亮)이 처음 황씨를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천재성(天才性)이 드러났다. 어느 날 제갈량은 인사차 황승언(黃承彦)의 집을 방문했다. 문을 연 ..
모사 제갈량, 세객 제갈근이 “삼국지연의”에서 미치는 영향과 특수 관계 제가 어려서부터 제일 좋아한 책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이고 또 제일 많이 읽은 책이 “삼국지연의”입니다. 아마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거의 오백 번 이상은 읽은 것 같습니다. 너무 뒤지고 만지다 보니 책은 그만 너덜너덜해졌습니다. 그래서 찢어진 부분을 밥풀로 붙였는데 참 가관(可觀)이었습니다. 이렇듯 “삼국지연의“는 저의 인생행로(人生行路)에 도움이 되는 양서(良書)라 생각되어 여기서 모사 제갈량과 세객 제갈근이 “삼국지연의”에서 미치는 영향과 특수 관계(特殊關係)에 대해 알아봅니다. 제갈 근(諸葛瑾, 174년 ~ 241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吳)나라의 정치가로 자는 자유(子瑜)이며 서주 낭야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