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원하지 않는다" 중국 '백지 시위', 3연임 시진핑 '첫 시험대'로 글 : 김효진 기자 검열 저항 '빈 종이' 들고 시진핑·공산당 퇴진 외쳐…"무자비한 진압" 전망 가운데 일부 '방역 완화' 움직임도 중국 신장 아파트 화재 참사로 촉발된 '제로 코로나' 반대 시위가 상하이를 비롯해 곳곳에서 주말 내내 이어지며 시진핑 국가주석 퇴진 요구 및 장기집권 반대, 표현의 자유 보장 등 폭넓은 반체제 구호로 번졌다. 이번 시위가 최근 3연임을 확정 지은 시 주석이 직면한 첫 번째 도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27일(현지시각) 미국 CNN 방송, 영국 BBC 방송 등 외신을 종합하면 26일 밤 상하이 우루무치중루에서 신장 화재 참사를 추모하는 것으로 시작된 시위는 27일 새벽 경찰에 의해 일단 해산된 뒤 이날 ..
청나라황제중 수명이 가장 짧은 황제인 동치제(同治帝)의 사인은 매독인가 천연두인가? 글: 시습사사(時拾史事) 동치13년말, 대청은 다시 한번 황제가 바뀌게 된다. 조정은 대행황제(사망한 전임황제를 가리킴)의 유조(遺詔)를 반포한다.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짐은 몸이 원래 강건했으나, 금년 십일월에 천화(천연두)에 걸렸다. 조심해서 조리했으나, 날이 갈수록 원기가 약해지고 목숨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전에 우리는 얘기했었다. 청나라황제의 유조에 사인을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동치제는 명확하게 유조에서 자신이 천연두로 사망한다고 적었다. 에도 편자는 다시 한번 동치제가 천연두고 사망했다고 적는다: "천연두에 걸려 성체가 나빠지고 결국 신민을 떠나게..
장생(長生)은 인류의 오래된 꿈이라 고대인들의 장수(長壽)에 관하여 글: 강효원(江曉原) 장생(長生)은 인류의 오래된 꿈이다. 이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오늘날 축하할 때 많이 쓰는 "영월불멸하라" "XX에 영원히 살아있으리라"는 등과 같은 말의 최초의 쓰임을 소급해서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하나의 오래된 신념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고대인들은 영생(永生)이 가능하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서방의 기독교에는 예수부활과 같은 류의 것도 영생의 관념과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비교적 실질을 숭상했다. 영생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한 걸음 물러나서 차선, 즉 장수를 추구했다. 고대 중국인들의 이 방면에서 이상적인 전설적 인물은 바로 팽조(彭祖)이다. 그는 800살..
문자가 쉽게 화를 불러오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글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 글: 주운(周雲) 자신이 글을 쓰면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쓴다? 이런 일은 계속 있어왔다. 그리고 고대에는 현대보다 더욱 자주 나타났다.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장지동(張之洞)은 그래서 이런 말도 했다: "진위를 한번 나누기 시작하면, 고서의 절반은 버려야 한다." 고대에 이런 현상이 성행한 원인은 아주 복잡하다. 첫째, 문자는 쉽게 화를 불러올 수 있었다. 잘못하면 황제에게 죄를 짓고, 머리가 떨어져 나가거나, 집안이 멸문의 화를 입었다. 비록 이렇게 큰 리스크가 있었지만, 글쟁이들은 천성적으로 글쓰기를 좋아한다. 글을 쓰지 않으면 참지를 못한다. 그래서 이해득실을 고려한 후,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황제와 태상황이 싸울 때는 관망하라? 상령명절불타지(常令名節不墮地) / 학계영(郝啓榮) 왕흔(王欣) 명나라때의 명신 우겸(于謙)의 는 이렇게 쓰여 있다: 호화일거난재득(豪華一去難再得) 장기소침토일구(壯氣銷沉土一丘) 단령명절불타지(但令名節不墮地) 신외구구안용구(身外區區安用求) 대체적인 뜻은 부귀는 한번 잃으면 다시 얻기 힘들고, 사람은 뜻을 잃어버리게 되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오직 명절(명성과 절개)을 지켜야하며, 나머지 모든 것은 따질 필요가 없다. 상령명절불타지.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실적인 의미가 있다. 명절은 태산보다 무겁다. 이욕(利慾)은 홍모(鴻毛)보다 가볍다. 우겸은 관직에 여러 해동안 있으면서, 시종 청렴했으며, 명절을 지켰다. 그가 죽은 후에도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선양을 생각한 적 있었고 분서갱유 사건은 천고일제의 일생에서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다. 진시황, ‘선양’ 생각한 적 있다? ‘분서갱유’ 다른 내막 있다 천 년에 한 번 나옴직한 황제라는 뜻의 ‘천고일제(千古一帝)’ 호칭을 얻은 진시황(秦始皇)은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상 최초의 황제이자 가장 논쟁거리가 많은 황제 중 한 명이다. 그를 칭송하는 사람들은 그가 천하를 통일하고 문자, 수레바퀴 폭, 도량형을 통일했다는 등 공적이 과실보다 많다고 변호한다. 반면 폄훼하는 이들은 그가 음험하고 잔혹하고 포악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잔인한 품성을 가진 군주의 전제통치에서 벌어졌던 잔학하고 피비린내 나는 일들은 신기할 것이 못 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은 진시황의 ..
중국역사상 가장 흥성했던 당나라때 당선종(唐宣宗) 이침(李忱)은 당나라 멸망을 초래한 최대 책임자로 주목 글: 화운초(和運超) 당선종 이침이 즉위한 후,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사람들을 회유하여, 이덕유(李德裕)에게 악의적인 보복을 진행하며, 그가 했던 것은 모조리 반배하며 회창(會昌)연간의 인원을 축소정비하는 책략을 바꾸어 버린다. 대중원년(847년) 하반기, 이부(吏部)에서 "회창4년에 주현 관내에서 감원했던 383명을 다시 증원했다"고 보고한다. 문학가인 마식(馬植)은 과거에 이덕유에게 중용되지 못했는데, 당선종은 그를 형부시랑으로 삼고, 염철전운사를 맡긴다. 취원식(崔元式), 위종(韋琮)등 신진관리도 대부분 이덕유가 있을 때는 중시되지 않던 자들이다. 위모(魏謨, 위징의 오대손, 대중후기에 서..
중국 역사에서 황제는 약 550명이 있었고 아들에게 살해 당한 황제는 6명이었다 글: 이자지(李子遲) 첫째, 남북조시대 북위(北魏) 천사(天嗣)6년(409년) 십월 십삼일. 객황제 도무제(道武帝) 탁발규(拓拔珪)는 그의 차남인 청하황(淸河王) 탁발소(拓拔紹)의 모친 하부인(賀夫人)이 큰 잘못을 저질러 그녀를 궁안에 구금시킨다. 그리고 그녀를 죽이라고 명한다: 그러나 이미 날이 어두워져서 바로 처형을 집행하지는 않았다. 하부인은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탁발소에세 자신을 구해달라고 알린다. 그날 밤 탁발소는 부하무사 및 환관등 수인과 연락한 후 담장을 넘어 궁안으로 들어가서 천안전(天安殿)으로 간다. 도무제를 좌우에서 모시던 시위는 적구(賊寇)가 왔다고 고함친다. 도무제는 놀라서 몸을 일으켰으나 주변이 활이..
항우(項羽)의 패망후 그 휘하의 4대맹장은 어떻게 되었는가? 글: 종횡오천년(縱橫五千年) 서초패왕 항우는 힘이 남달라서, 상대가 두려움을 느끼던 맹장이다. 동시에 항우의 휘하에는 4명의 맹장이 있었다. 그들은 항우를 따라 동정서토, 남정북전하였다. 거록지전에서는 진군 40만을 격파하기도 했고, 팽성지전에서는 유방의 56만대군을 물리쳐서 위명을 천하에 떨친다. 그러나, 항우는 결국 패망했다. 그렇다면 그의 휘하에 있던 4대맹장은 어떤 최후를 맞이했을까? 가장 먼저 얘기해아할 맹장은 용차(龍且)이다. 용차에 관한 사료는 많지 않다. 그는 분명 일찌감치 항량, 항우를 따랐을 것이고, 계속하여 항씨집안이 심복이었다. 용차는 항량의 휘하에서 사마(司馬)를 맡았고, 동아전투에 참가하여 진군을 대파한다. 항우의 용인..
황제가 하사한 천리마 척설오추의 실제 이름은 적토마라는 일부 견해에 대하여 오추마(烏騅馬)의 실제 이름은 "추(騅)"로, 관련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사마천의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서 항우가 해하 전투에서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했을 당시에 최후를 직감하고 부른 ‘해하가(垓下歌)에서 그 애첩이었던 미녀 우희(虞姬)와 함께 언급될 뿐이다. 이 대목에서 사마천(司馬遷)이 덧붙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후 항우는 마지막에 자신에게 강동으로 피신 할 것을 권한 오강의 정장에게 천리마를 주었는데 이 '추(騅)' 라는 언급은 없지만 항우가 타고 다니던 명마였다고 하니 아마 정장에게 준 말이 바로 오추마(烏騅馬)였을 것이다. "추(騅)"에 대한 기록은 고작 이것 뿐 인지라 이 말이 나름 준수..
강희제의 넷째 아들이며 효공인황후 우야씨의 소생인 청나라 제5대 황제 옹정제 청나라 제5대 황제이다.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로 청의 전성기(全盛期)를 이끌었다. 중국 역사에서 제갈량(諸葛亮)과 쌍벽을 이룰법한 지독한 일 중독자(中毒者)이다. 다만 성격은 상반되는 게 함정 강희제(康熙帝)의 치세가 워낙 길었기 때문에 1722년 즉위했을 때 이미 45세였으며 그 후 13년 동안 재위했다. 강희제 17년인 1678년 12월 13일, 강희제의 4남으로 후궁 우야씨(烏雅氏)가 자금성에서 그를 낳았다. 당시 우야씨는 서비(庶妃)로 옹정제를 기를 수 없었다. 이 시기에 황귀비이자 내궁을 관리하던 동가씨(佟佳氏)의 유일한 자녀가 요절했는데 강희제는 그녀에게 옹정제를 양자로 줘 버렸다. 동가씨는 옹정제(雍正帝)를 ..
제갈량이 유비에게 추천한 군사후계자에 대한 엉터리계책 서서(徐庶)는 언제 제갈량(諸葛亮)을 유비(劉備)에게 추천하였는가? 제갈량(諸葛亮)이 출도하기 전에 유비에 관한 멋진 장면은 당연히 서서가 조조군을 격파(擊破)한 것이다. 명사 서서는 선복(單福)이라는 가명으로 스스로 유비(劉備)를 찾아온다. 그리고 유비의 군사참모(軍事參謀)가 되어 조조군에 두 번이나 승리를 거둔다. 그리하여 조조(曹操)가 그를 주목하게 되고 서서의 진실한 신분을 알아내고 나서 서서의 모친을 인질(人質)로 잡아 서서를 조조군영으로 오도록 만든다. 유비(劉備)는 겨우 쓸 만한 모사(謀士)를 한명 구했는데 부득이 조조군영으로 보내야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안타까운 심경(心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계속 보내는 것을 아쉬워했다. 서서(徐庶)가..
역사속에 묻혀버린 서요제국(西遼帝國, Kara Kitan)글: 황수(黃帥)1211년(서요 천희34년) 가을, 후시호르도(虎思斡爾朶, 지금의 키르키즈스탄 부라나성)의 날씨는 여전히 매우 더웠다. 서요황제 야율직로고(耶律直魯古)는 자신의 점점 늙어가는 신체를 보면서, 더 이상 거란선조의 위업을 재건할 용기와 결심이 서지 않았다. 황궁안에서는 비록 가무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이 마음 속에는 산하가 무너진 광경만 남아 있었다. 호화로운 장식의 창문을 통해 그는 궁밖의 길거리에서 행인들이 오가는 것을 바라 보았다. 마치 병황마란(兵荒馬亂)의 시대가 점점 다가오는 듯했다. 땅에 흩어져 있는 서역과일은 뜨거운 태양아래 점점 썩어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일찌기 가졌던 방대한 제국처럼... 지금은 이미 몽골과 호르즘..
곽수경(郭守敬) 고대천문학자(古代天文學者) 곽수경(郭守敬) 중국은 자고로 농업대국(農業大國)입니다. 농업생산과 일기의 밀접한 관계로 중국고대의 천문학(天文學)은 아주 발달했습니다. 13세기 중국의 유명한 천문학자 곽수경(郭守敬)은 역법을 제정하고 365.2425를 일 년으로 계산했는데 지구가 태양을 에워싸고 공전(公轉)하는 1주일과 26초밖에 차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그레고리력 즉 양력(陽曆)보다 약 3백여 년 앞서 출시된 것입니다. 곽수경(郭守敬)(1231-1316)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형대(邢臺)인입니다. 그에 관한 어린 시절의 기재는 지금까지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현존하고 있는 자료에 근거하면 어린 시절부터 곽수경(郭守敬)은 머리 쓰기를 매우 좋아했으며 여러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