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전기(金笠傳記) 12부 김삿갓 전기(金笠傳記) 12부 111. 헤어질까 두려워(心裏畏空房) 정성을 다해 받들어 모시는 추월(秋月)에게 김삿갓은 얼이 빠져 버렸다. 그러기에 밤마다 춘정(春情)을 무르녹도록 나누다가 어느 날 밤에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추월을 예찬(禮讚)했다. 옛날부터 가을은 쓸쓸하다 하지만 나는 가을을 봄보다 좋아하노라 맑은 하늘에 학이 구름을 타고 내려와 나의 시정은 하늘에 솟는 것만 같구나. 自古逢秋悲寂寥 我言秋日勝春朝 晴空一鶴徘雲上 便引詩情到碧宵 추월(秋月)이라는 이름의 ‘秋’자를 따 가지고 추월을 하늘에서 내려오는 학에 비유(比喩)하여 그를 한껏 예찬(禮讚)한 것이었다. 사세가 이렇게 되고 보니 추월도 한 마디 없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시로서 화답(..
김삿갓 전기(金笠傳記) 11부 김삿갓 전기(金笠傳記) 11부 101. 내 눈(眼)이 어느새 이렇게 ... 김삿갓이 묘향산(妙香山)을 떠나 희천(熙川)을 지나서 강계(江界)로 들어섰을 때에는 아직 입동(立冬)도 안 되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얼음이 얼기 시작하였다. 북쪽지방은 계절이 유난히 빠르다. “오동 잎 하나 떨어지면 모두 가을임을 안다.(梧桐一葉落 天下盡知秋)”고했으니 이제 그도 겨울 준비를 해야 할 시기(時期)가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삿갓이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을 형편이 아니니 헤진 옷이라도 기워 입으려고 바늘귀를 꿰려 했으나 눈이 가물가물 좀처럼 꿰여지지 않는다. ‘내 눈이 어느새 이렇게 어두워졌는가.’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뿐이랴. 글자도 잘 안보이고, 이를 잡으려고 ..
김삿갓 전기(金笠傳記) 10부 91. 장기(象棋) 개성(開城)을 벗어나 북으로 올라가니 바로 황해도(黃海道) 땅이다. 황해도 곡산(曲山)의 천동마을이 김삿갓의 마음의 고향(故鄕)이다.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이 대역죄(大逆罪)를 입어 가문이 파멸(破滅)될 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 머슴의 고향(故鄕)이던 곡산(曲山)의 천동마을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그 이전의 서울에서 산 기억은 너무 어려서 나지 않고, 그 이후로도 영월(寧越)로 갈 때까지 양주(楊州), 광주(廣州) 등지를 전전했었지만 기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기억이 없으며, 오직 황해도(黃海道) 곡산의 천동마을만이 기억에 생생하여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천동마을에는 본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꺾쇠, 왕눈이, 개똥이 하고 별명으로 부르던 친구(親舊..
김삿갓 전기(金笠傳記) 9부 81. 창호(窓戶) 범어(梵魚)스님의 지극한 간호(看護)로 김삿갓의 발목은 많이 나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범어스님은 문종이와 풀을 가지고 와서 뚫어진 창구멍을 말끔히 발라놓고는 창(窓)을 활짝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밖에는 바람이 몹시 불어 나무 가지가 흔들리는데 때마침 산머리에는 달이 솟아오르고 골짜기에서는 물소리마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범어(梵魚)는 즉흥시(卽興詩)를 한 수 지어 김삿갓에게 내밀며 시평(詩評)을 청했다. 바람이 부니 나무 가지가 흔들리고 달이 솟아오르니 물결이 높아지네. 風動樹枝動 月昇水波昇 범어스님은 원래 시에는 능하지 못한 편이었다. 이 시 또한 아무리 보아도 좋은 시라고 할 수는 없었다. 시상(詩想)이 너무 단조로운데다가 표현..
김삿갓 전기(金笠傳記) 8부 71. 이천(利川)의 곽봉헌(郭風憲) 영감 여주 신륵사(神勒寺)를 떠난 김삿갓은 서울을 향하여 가다가 이천(利川)의 어느 선비 집에서 며칠을 묵었다. 길에서 한 선비를 만나 따라 갔으나 사랑에는 그의 아버지 84세의 노인이 홀로 앉아 있었다. 방방곡곡(坊坊曲曲)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노인을 만났지만 이토록 장수(長壽)한 노인을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젊어서는 향소직(鄕所職)의 하나인 봉헌(風憲) 벼슬까지 했다는 이 노인은 이제는 다리에 힘이 없어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눈이 어둡고 귀가 멀어 잘 보고 듣지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글을 읽던 버릇만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황제내경(黃帝內經; 중국의 가장 오래된 의학서)을 읽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오히려 처량(..
김삿갓 전기(金笠傳記) 7부 61. 닭(鷄) 김삿갓은 오랜만에 아늑한 가정(家庭)의 즐거움을 맛보고 있었다. 따뜻한 아내의 보살핌을 받는 것도 즐거움이려니와 어린 아들과 어울려 시를 지어 보는 것도 처음이요 어려운 서어(詩語)들을 하나하나 이해시키는 것도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었다. 어느 날, 익균(翼均)과 함께 앞마당을 거닐고 있는데 많은 암탉을 거느린 수탉이 날개를 탁탁 치더니 목을 길게 늘이고 ‘꼬끼오’ 하고 울어 대고 있었다. 이것을 본 익균(翼均)이 닭에 대한 시를 한 수 지어 달라고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었다. 새벽을 알려 줌은 수탉의 특권인가 붉은 벼슬 푸른 발톱 잘도 생겼구나. 달빛이 질 때면 자주 자주 놀래다가 붉은 햇살 비쳐오면 번번이 울어 대네. 擅主司晨獨擅雄 絳冠蒼距拔於叢 頻驚玉兎旋..
김삿갓 전기(金笠傳記) 6부 51. 가련의 문전에서 가련과 이별하니(可憐門前別可憐) 김삿갓이 행장을 꾸리고 뜰 아래로 내려서자 가련(可憐)은 치마귀로 입을 가리며 눈물만 글썽거릴 뿐 아무 말도 못했다. 김삿갓도 그 모양(模樣)을 보고서는 발길을 돌리기가 거북하여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 사람아! 불전(佛典)에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만나면 헤어지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무얼 그리 섭섭해 하는가. 자네는 시를 좋아하니 내 떠나기 전에 자네한테 옛 시 한 수 읊어 줌세." 새들은 같은 나무에서 잠을 자도 날이 밝으면 뿔뿔이 헤어지네. 인생의 만남과 헤어짐도 그와 같으니 어쩌다 눈물 흘려 옷깃 적시나. 衆鳥同枝宿 天明各自飛 人生亦如此 何必淚沾衣 가련(可憐)은 그 시를 듣자 마음이 한결..
김삿갓 전기(金笠傳記) 5부 41. 벼룩(蚤) 시를 읊는 사이에 이란 놈은 옷깃 속으로 기어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장단지가 바늘로 찔리는 듯이 따끔해 온다. 말할 것도 없이 벼룩이란 놈이 쏘아 대고 있는 것이다. 김삿갓은 은근히 화가 동해 이번에는 '벼룩' 이란 제목으로 즉흥시(卽興詩)를 이렇게 읊었다. 대추씨 같은 꼴에 날래기는 대단하다 이하고는 친구요 빈대와는 사촌이라 낮에는 죽은 듯이 자리 틈에 숨었다가 밤만 되면 이불 속에서 다리를 물어뜯네. 貌似棗仁勇絶倫 半蝨爲友蝎爲隣 朝從席隙藏身密 暮向衾中犯脚親 주둥이가 뾰족하여 물리면 따끔하고 펄떡펄떡 뛸 때마다 단꿈을 놀래 깬다. 날이 밝아 살펴보면 온몸이 만신창이 복사꽃이 만발한 듯 울긋불긋하구나. 尖嘴嚼時心動索 赤身躍處夢驚頻 平明點檢肌膚上 剩得桃花萬片春 ..
김삿갓 전기(金笠傳記) 4부 31. 하늘은 높아 잡을 수 없고 (天長去無執) ‘관북천리(關北千里)’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는 이태조(李太祖)의 건국설화(建國說話)가 서려 있는 명소요, 길주(吉州), 명천(明川)은 수많은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유배(流配)를 갔던 역사의 고장이 아니던가. 그러나 당장 시급(時急)한 문제는 우선 오늘밤 잠자리였다. 불영암(佛影庵)에 유숙할 때는 잠자리 걱정도, 끼니 걱정도 없었다. 그러나 공허(空虛)스님과 헤어진 오늘부터는 모든 것을 그날그날의 운수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날은 저문 데 깊은 산속에 오막살이 한 채가 나온다. 사립문도 없는 단칸 두옥(斗屋)이다. 다행이 혼자 사는 노파가 반갑게 맞아 주면서 화로에 불을 피워 들여오고, 저녁 걱..
김삿갓 전기(金笠傳記) 3부 21. 하나 둘 셋 넷 봉우리(一峰二峰三四峰) 명종(明宗) 때의 명필(名筆)이요 풍류객(風流客)이었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수십 질 높이의 암벽(岩壁)에 새겼다는 ‘만폭동(萬瀑洞)’ 세 글자를 바라보며 일만 이천 봉우리 중에서 47개의 봉우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게성루(偈惺樓)가 여기에서 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금강산의 참된 면목을 알려거든 석양 무렵에 게성루에 올라 보라(欲識金剛眞面目 夕陽須上偈惺樓)“는 옛 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약사암(藥師庵), 백운암(白雲庵), 도솔암(兜率庵), 가엽암(迦葉庵) 등 수없이 많은 암자(庵子)를 지나 드디어 게성루(偈惺樓)에 올랐다. 남쪽으로 보이는 것은 릉허봉(凌虛峰)과 영랑봉(永郞峰)이요, 동쪽으로 보이는..
김삿갓 전기(金笠傳記) 1부 김삿갓 전기(金笠傳記) 1부 1. 비운(悲運)의 잉태(孕胎)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불리는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은 조선조 후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대가(勢道大家) 안동김씨(安東金氏) 문중에서 태어났다. TV사극 '명성황후'에 등장했던 김병익(金炳冀), 김병학(金炳學), 김병국(金炳國) 등과 같은 ‘炳’자 항렬이요, 그의 아버지 김안근(金安根)은 하옥대감(荷屋大監)으로 불리는 김좌근(金佐根)을 비롯하여 김문근(金汶根). 김수근(金洙根)과 같은 항렬이며,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은 순조(純祖)임금의 장인으로서 안동김씨 세도를 창시했던 김조순(金祖淳)과 같은 항렬이었다. 그토록 60년 세도가문의 한 허리에 태어나서 탄탄대로(坦坦大路; 장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