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허난성에 삼국지 조조 무덤 확인…두 부인 유해도 발견 글: 정주호 맏아들 조앙(曹昻) 의관총도 확인…中당국 확인에도 진위논란 지속 발굴단장 "성대한 장례 후 도굴 우려 부근 건축물 철거 추정" 중국 허난(河南)성의 평원지대에서 발견된 고분이 삼국지 위나라의 시조인 조조(曹操 155∼220)의 묘로 최종 확인됐다. 26일 베이징 청년보에 따르면 허난성 문화재 고고연구원은 허난성 안양현 안펑(安豊)향 시가오쉐(西高穴)촌에 위치한 동한(東漢)시대 무덤군에서 조조와 조조 부인 2명의 무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허난성은 지난 2009년 12월 이 지역 무덤군을 발굴(發掘)하는 과정에서 조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릉(高陵)을 발견, 연구 분석 작업을 진행해왔다. 발굴팀은 고릉 주변의 분토 기반, 천도통로, 동..
조운은 손견의 딸이며 손책 손권의 이복 여동생이자 유비의 부인 손상향을 짝사랑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조운(趙雲)은 무예가 고강할 뿐 아니라 미남이다. 이런 사람을 어느 여인인들 보고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조운(趙雲)이 명을 받아 계양(桂陽)을 공격할 때 이런 난감(難堪)한 일이 벌어졌다. 각설하고 조운(趙雲)이 계양을 공격할 때 계양태수 조범(趙範)은 스스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와 투항(投降)한다. 그리고 주인의 예를 다하기 위하여 조범은 조운을 집안으로 모셔서 대접한다. 두 사람은 모두 성이 조씨이므로 조범(趙範)은 두 사람이 결의형제(結義兄弟)를 맺자고 제안한다. 조운은 호쾌한 사람이어서 즉시 시원스럽게 응락(應诺)한다. 다만 술을 어느 정도 마셨을 때 ..
삼국시대 손권(孫權)은 '삼국연의'에서 가장 왜소화된 영웅으로 주목 삼국시대(三國時代)가 근 이천년 동안 가장 주목받는 역사가 된 근본원인은 두 부의 유명한 저작 때문이다. 하나는 바로 나관중(羅貫中)이 쓴 중국 고대 사대명저 중 하나인 '삼국연의(三國演義)'이고 다른 하나는 진수(陳壽)가 쓴 역사서 ‘삼국지(三國志)’이다. 비록 한 부는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삼국역사를 쓰고 다른 한부는 정통사서(正統史書)라는 이름으로 삼국역사를 쓰지만 자세히 이 두 부의 위대한 저작을 읽어보면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소설도 좋고 사서도 좋고 그들은 최소한 세 가지 공통적인 특색(特色)이 있다. 첫째는 한 사람이 독립적(獨立的)으로 완성했고 둘째는 인물을 잘 표현(表現)하는 것을 최대의 특징으로 삼았다. 셋째는 많..
조조 팔호기와 오자양장, 원소 하북사정주, 유비 오호상장, 손권 강표십이호신 조조(曹操)에게는 "팔호기(八虎騎)"와 "오자양장(五子良將)"이 있고 원소(袁紹)에게는 "하북사정주(河北四庭柱)"가 있으며 유비(劉備)에게는 "오호상장(五虎上將)"이 있다. 그렇다면 손권(孫權)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원래 손권에게도 "강표십이호신(江表十二虎臣)"이 있다. 강동십이호신(江東十二虎臣) 또는 동오십이호신(東吳十二虎臣), 혹은 강표지호신(江表之虎臣)은 오에서 활약(活躍)이 뛰어났던 열두 명의 장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진수(陳遂)가 지은 정사 “삼국지(三國志)”의 오서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程黃韓蔣周陳董甘陵徐潘丁傳)'에서 비롯한 말로 촉한(蜀漢)의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 조위(曹魏)의 오자양장(五子良將)과 같..
삼국지 인물사전 - 반장(潘璋) 반장(潘璋, ? ~ 234년)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將帥)로 자는 문규(文珪)이며 연주(兗州) 동군(東郡) 발간현(發干縣) 사람이다. 생애 손권(孫權)이 양선현의 장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나가 손권을 따랐다. 손권은 그를 기이하게 여겨 아꼈고 그에게 병사를 모집(募集)하도록 하여 백여 명을 얻게 되자 부장으로 삼았다. 산월의 적을 토벌(討伐)하여 공로를 세웠으므로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됐다. 이후에 오군의 큰 저자에서 침입자(侵入者)를 죽이자 이로부터 도적은 단절(斷切)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이름이 났으며 예장군 서안현의 장으로 승진했다. 유표(劉表)가 형주에 있을 때 백성들은 여러 차례 그들의 침략을 당했다. 반장(潘璋)이 일을 맡은 이후부터 침략자들은 ..
삼국지 인물사전 - 능통(淩統) 능통(淩統, 189년 ~ 237년)은 후한 말, 중국 삼국시대 동오의 장군(將軍)이다. 자는 공적(公績)이다. 능조(淩操)의 아들이며 양주 오군 여항현 사람이다. 일생 아버지 능조(淩操)는 오나라의 손책(孫策)과 손권(孫權)을 2대에 걸쳐 섬겼다. 그런데 203년 능조가 황조(黃祖)를 공격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삼국지"에서는 누구에게 죽었는지를 밝히지 않았으나, 위요의 "오서"에는 능조를 죽게 한 것이 감녕(甘寧)이라 했다). 당시 능통(淩統)은 15세였으나 주변 사람들이 능통을 칭찬했고 능조가 국사(國事)를 위해 죽었으므로 손권은 능통을 별부사마에 제수하고 파적도위를 겸임하여 아버지의 병사를 거느리게 했다. 손권(孫權)이 보둔과 마둔을 공격할 때 따라갔는데..
삼국지 인물사전 - 동습(董襲) 동습(董襲,? ~ 215년)은 중국 후한 말기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원대(元代)이며 회계군(會稽郡) 여요현(餘姚縣) 사람이다. 생애 손책(孫策)이 원술의 허락을 받고 강동(江東)으로 진격하여 회계에 이르렀을 때 고천정(高遷亭)에서 손책을 맞이했고 손책의 눈에 들어 문하적조(門下賊曹)가 되었다. 손책이 산음(山陰)의 오래된 도둑 황룡라(黃龍羅)와 주발(周勃)을 쳤고 동습(董襲)은 손수 황룡라와 주발을 베어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어 병사 수천 명을 받았다. 동습은 오나라의 장수로 손책과 손권(孫權)을 섬겼으며 황조를 토벌하는 선봉(先鋒)에 섰다. 동습은 회계군 여요현 사람이다. 키는 8척이며 완력(腕力)이 다른 사람들을 능가했다. 동습(董襲)은 지조와 절개가 강개하고 굳세..
삼국지 인물사전 - 주태(周泰) 주태(周泰, ? ~ 229년)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유평(幼平)이며 양주(揚州) 구강군(九江郡) 하채현(下蔡縣) 사람이다. 손권(孫權)이 나중에 주태의 공을 치하하며 한 말에 따르면 출신이 한미(寒微)했다. 생애 처음에 장흠(蔣欽)과 함께 손책(孫策)의 측근이 되었다. 손책이 회계태수 왕랑을 무찌르고 회계군을 점유(占有)하면서 별부사마가 되어 병사를 받았다. 손권(孫權)과 주태가 처음 조우했는데 손권이 주태(周泰)의 풍채를 마음에 들어하여 형에게 주태를 달라고 요청(要請)했다. 손책이 육현(六縣)의 반란을 토벌하러 간 차에 주태는 손권과 함께 천 명이 되지 않는 병사를 이끌고 선성(宣城)을 지키다가 방어 태세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산월 수천 명의 갑작..
삼국지 인물사전 - 장흠(蔣欽) 장흠(蔣欽, ? ~ 219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字)는 공혁(公奕)이며 양주(揚州) 구강군(九江郡) 수춘현(壽春縣) 사람이다. 생애 흥평(興平) 원년(194년), 손책(孫策)이 원술(袁術)에게 의탁하고 있을 무렵에 손책(孫策)의 측근이 되었고 흥평 2년(195년), 손책이 강동(江東)으로 진출할 때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되어 병사를 받았고 손책의 측근이였던 주태(周泰)와 함께 손책을 따라 단양, 오, 회계 3군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예장 공격에도 참가했다. 갈양위(葛陽尉)가 된 뒤로 세 현의 장을 역임(歷任)하여 도둑을 잡았고 서부도위로 승진(昇進)했다. 동야에서 여합(呂合)과 진랑(秦狼) 등이 손씨에 복종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토..
삼국지 인물사전 - 정보(程普) 정보(程普)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덕모(德謨)이며 유주(幽州) 우북평군(右北平郡) 토은현(土垠縣) 사람이다. 행적 본래는 지방의 하급 관리로 손견(孫堅)이 하비승일 때 그의 부하로 처음 들어왔으며 그것을 계기(契機)로 평생 손씨 일족을 섬겼다. 손견을 따라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진압했고 양인 전투에 참전해 동탁(董卓)을 격파하고 부상을 입었다. 정보(程普)는 “여정 장수들 중 가장 먼저 나와서 정보의 나이가 제일 많았기에 당시 사람들을 모두 정공(程公)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므로 황개, 한당, 조무보다도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손견이 죽은 후 손책(孫策)을 따랐다. 손책이 원술(袁術)의 명령을 받아 여강(廬江)을 함락하는 데에 종군했으며 손책이 장..
삼국지 인물사전 - 손책(孫策) 오 장사환왕 손책(吳 長沙桓王 孫策, 175년 ~ 200년 4월)은 중국 후한 말의 군벌이자 오(吳)나라의 추존왕으로 198년 조조에 의해 오후에 봉(封)해졌다. 자는 백부(伯符)이며 양주(揚州)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사람이다. 손견(孫堅)의 장남이자 오 대제 손권(孫權)의 형이다. 손견 사후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도 강동의 호걸들을 불러모아 강동(江東)을 정벌하여 오나라의 기반을 닦아 소패왕이라 불렸으며 198년 조조와 원술(袁術)과의 교전 중 조조를 도와 그의 천거로 토역장군(討逆將軍)의 칭호와 함께 오후(吳侯)의 작위를 받았다. 나중에 손권이 동오의 황제가 되자 장사환왕(長沙桓王)에 추존하였다. 생애 초반 "삼국지" 손파로토역전에 따르면 손견(孫堅)이 처음 의병..
삼국지 인물사전 - 손견(孫堅) 오 시조 무열황제 손견(吳 始祖 武烈皇帝 孫堅, 156년 ~ 192년 1월 7일)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이자 동오의 추존황제(推尊皇帝)로 자는 문대(文臺)이며 양주(揚州)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사람이다. 손종(孫鍾)의 차남이며 손책(孫策), 손권(孫權)의 아버지로 묘호는 시조(始祖)며 시호는 무열황제(武烈皇帝)다. 생애 생애 초반 : 출신에 대해선 춘추 시대(春秋時代)의 명장 손자의 후손일 것이라고도 한다. 17세 때 전당에서 약탈(掠奪)을 일삼던 해적을 죽여 유명해졌다. 회계에서 허창(許昌)이 난을 일으켜 스스로 양명황제(陽名皇帝)라 칭하자 손견은 군사마로서 정병을 모아 주·군의 군사와 함께 허창을 토벌(討伐)했다. 이로 인해 염독승이 되었고 다시 우이승,..
삼국지 인물사전 - 황충(黃忠) 황충(黃忠, ? ~ 220년)은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한승(漢升)이며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 사람이다. 생애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가 그를 중랑장(中郞將)으로 삼아 유반(劉磐)과 함께 유현(攸縣)을 수비하게 했다. 조조(曹操)가 형주를 점령하자 임시로 비장군(裨將軍) 직을 대행하게 하니 예전 임무에 종사(從事)하며 장사태수(長沙太守) 한현(韓玄)에 속하게 되었다. 유비(劉備)가 남쪽으로 여러 군(郡)을 평정하자 황충(黃忠)이 마침내 몸을 맡기기로 하고는 그를 수행해 촉(蜀)으로 들어갔다. 가맹(葭萌)에서 임무를 받아 군대를 돌려 유장(劉璋)을 공격하니 황충은 늘 앞장서서 적진에 올라 함락(陷落)시켰고 용맹하고 굳셈이 삼군(三軍)의 으뜸이었다. 익주(益..
삼국지 인물사전 - 육손(陸遜) 육손(陸遜, 183년 ~ 245년 2월)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오나라(吳)의 정치가로 자는 백언(伯言)이며 양주(揚州) 오군(吳郡) 오현(吳縣) 사람이다. 촉한과 위나라의 침공을 여러 차례 격퇴(擊退)하여 오나라를 지켜냈으며 여몽(呂蒙)을 도와 관우(關羽)를 사로잡는데 공을 세웠고 이후 원한을 갚고자 침공(侵攻)한 유비군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원래 이름은 육의(陸議)로 병법에 능통했고 기계(奇計)를 잘 썼다. 처음에는 유생으로 알려졌지만 웅재(雄才)와 대략(大略)을 품었었다. 편장군(偏將軍), 우도독(右都督)이 되어 여몽(呂蒙)을 대신하여 육구(陸口)에 둔병하였으며 형주(荊州)를 함락시켜 관우(關羽)를 죽게 한 것은 그의 지모(智謀)에서 나온 것이다. 뒤..
삼국지 인물사전 - 노숙(魯肅) 노숙(魯肅, 172년 ~ 217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이자 정치가(政治家)로 자는 자경(子敬)이며 양주(楊州) 임회군(臨淮郡) 동성현(東城縣) 사람이다. 생애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모(祖母)와 함께 살았다. 집안이 부유(富裕)하며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고 돈을 풀어 가난한 자를 구휼(救恤)하고 인재들과 교제(交際)를 쌓아 고을의 환심(歡心)을 샀다. 주유(周瑜)가 거소장(居巢長; 거소현의 현장)일 때 노숙(魯肅)에게 군량을 요청하였고 노숙은 각각 3천곡의 곡식이 있는 창고 둘 중 하나를 주유에게 아주 내어 주어 이로써 주유와 친교(親交)를 쌓았다. 원술(袁術)이 불러서 동성장(東城長; 동성현의 현장)으로 삼았으나 원술의 통치에 기강이 해이해진 것을 보고 ..
삼국지 인물사전 - 주유(周瑜) 주유(周瑜, 175년 ~ 210년)는 중국 후한 말(後漢末)의 무장(武將)이며 양주(楊州) 여강군(廬江郡) 서현(舒縣) 사람으로 자는 공근(公瑾)이다. 종조부(從祖父) 주경(周景), 주경의 아들 주충(周忠)은 모두 한의 태위(太尉)를 지냈고 부친 주이(周異) 낙양현령(洛陽 縣令)을 지냈다. 주유(周瑜)는 건장하며 빼어난 자태(姿態)가 있었다. 처음 손견(孫堅)이 의병을 일으켜 동탁(董託)을 토벌하매 집을 서(舒)으로 옮겼다. 손견의 아들 손책(孫策)과 주유는 동년배로 둘의 우의(友誼)는 깊어서 주유가 길가 남쪽의 큰 집을 옮겨다 손책(孫策)에게 주고, 당위에 올라가 손책의 모친에게 절 하였다. 서로 있고 없는 바를 같이 융통(融通)하였다. 생애 청년기 초평 원년(190년)..
삼국지 인물사전 - 손권(孫權) 오태조 대황제 손권(吳太祖 大皇帝 孫權, 182년 음력 5월 18일 ~ 252년 음력 4월 16일)은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오나라의 초대 황제로 자는 중모(仲謀)이며 양주(揚州)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사람이다. 손견(孫堅)의 차남으로 손책(孫策)의 동생이며. 200년에 형 손책이 급사(急死)하자 오후(吳侯)의 자리에 올라 강동(江東)을 다스렸다. 수성(守成)의 명수로 평가되고 있다. 묘호는 태조(太祖)이고 시호는 대황제(大皇帝)이다. 생애 손권(孫權)이 태어날 당시 아버지 손견(孫堅)은 갓 태어난 그의 풍모(風貌)를 보고 고귀(高貴)한 위치에 오를 상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초평 3년(192년)에 아버지 손견(孫堅)이 전사하고 원술(袁術) 밑에서 몸을 의지하고 ..
삼국지 인물사전 - 조조(曹操) 조위 태조 무황제 조조(曹魏 太祖 武皇帝 曹操, 155년 음력 6월 3일 ~ 220년 음력 1월 23일)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시인이다. 자는 맹덕(孟德)이며 훗날 위가 건국된 이후 추증(追贈)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후한이 그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비상하고 탁월(卓越)한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 여러 제후(諸侯)들을 연달아 격파(擊破)하고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위(魏)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조조(曹操)는 삼국지의 영웅들 가운데 패자(覇者)로 우뚝 솟은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는 평가와 후한을 멸망시킨 난세의 간웅(奸雄)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과 시인 두보(杜甫) 는 나..
김삿갓 전기(金笠傳記) 8부 71. 이천(利川)의 곽봉헌(郭風憲) 영감 여주 신륵사(神勒寺)를 떠난 김삿갓은 서울을 향하여 가다가 이천(利川)의 어느 선비 집에서 며칠을 묵었다. 길에서 한 선비를 만나 따라 갔으나 사랑에는 그의 아버지 84세의 노인이 홀로 앉아 있었다. 방방곡곡(坊坊曲曲)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노인을 만났지만 이토록 장수(長壽)한 노인을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젊어서는 향소직(鄕所職)의 하나인 봉헌(風憲) 벼슬까지 했다는 이 노인은 이제는 다리에 힘이 없어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눈이 어둡고 귀가 멀어 잘 보고 듣지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글을 읽던 버릇만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황제내경(黃帝內經; 중국의 가장 오래된 의학서)을 읽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오히려 처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