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허난성에 삼국지 조조 무덤 확인…두 부인 유해도 발견 글: 정주호 맏아들 조앙(曹昻) 의관총도 확인…中당국 확인에도 진위논란 지속 발굴단장 "성대한 장례 후 도굴 우려 부근 건축물 철거 추정" 중국 허난(河南)성의 평원지대에서 발견된 고분이 삼국지 위나라의 시조인 조조(曹操 155∼220)의 묘로 최종 확인됐다. 26일 베이징 청년보에 따르면 허난성 문화재 고고연구원은 허난성 안양현 안펑(安豊)향 시가오쉐(西高穴)촌에 위치한 동한(東漢)시대 무덤군에서 조조와 조조 부인 2명의 무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허난성은 지난 2009년 12월 이 지역 무덤군을 발굴(發掘)하는 과정에서 조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릉(高陵)을 발견, 연구 분석 작업을 진행해왔다. 발굴팀은 고릉 주변의 분토 기반, 천도통로, 동..
제갈량과 이엄의 갈등은 촉국 인재고갈의 원인이었을까? 글: 의사리(衣賜履) 230년, 이엄(李儼)은 제갈량(諸葛亮)에 의해 한중으로 옮겨가고, 중도호의 신분으로 승상부를 관리한다. 231년, 봄에 제갈량은 다시 기산을 나선다(제4차북벌). 이엄은 양초의 운송을 책임진다. 이번 북벌은 제갈량과 사마의가 처음으로 맞붙은 전투였다. 구체적인 전황은 여기에서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여름,가을이 교체하는 시기에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리고, 양식운송이 되지 않았다. 이엄은 참군 마충, 독군 성번을 보내 제갈량에게 철군하도록 말을 전한다. 제갈량은 그리하여 철군한다. [의사리] 이엄이 제갈량에게 철군을 통지하였다는 내용의 원문은 이러하다: "평견참군호충(平遣參軍狐忠) 독군성번유지(督軍成藩喩指), 호량내환(呼亮來還)" ..
삼국지 대인물 대부분은 군국대사를 먼저 선택하고 후에 가족 친척을 선택 '삼국연의'는 '대인물'에 관한 책이다. 그 안의 주요인물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군국대사(軍國大事)이다. 다만 "대인물(大人物)"도 사람이므로 가정과 친척이 있다. 능력이 우수한 것을 제외하고 그들은 사업과 가정 간에 모순(矛盾)이 생기면 일반적으로 그들은 전자(前者)를 선택한다. 중국인들은 역대이래로 친자(親子)간의 정을 중시했다. 부자자효(父慈子孝)를 강조했다.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인물들 중에서 "효(孝)"로 유명한 사람도 적지 않다. 다만 구체적인 상황과 방식은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유비(劉備), 제갈량(諸葛亮), 강유(姜維) 및 서서(徐庶)는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그중 유비와 강유(姜維)는 소설에 나올 때 "모친을 ..
조조 팔호기와 오자양장, 원소 하북사정주, 유비 오호상장, 손권 강표십이호신 조조(曹操)에게는 "팔호기(八虎騎)"와 "오자양장(五子良將)"이 있고 원소(袁紹)에게는 "하북사정주(河北四庭柱)"가 있으며 유비(劉備)에게는 "오호상장(五虎上將)"이 있다. 그렇다면 손권(孫權)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원래 손권에게도 "강표십이호신(江表十二虎臣)"이 있다. 강동십이호신(江東十二虎臣) 또는 동오십이호신(東吳十二虎臣), 혹은 강표지호신(江表之虎臣)은 오에서 활약(活躍)이 뛰어났던 열두 명의 장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진수(陳遂)가 지은 정사 “삼국지(三國志)”의 오서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程黃韓蔣周陳董甘陵徐潘丁傳)'에서 비롯한 말로 촉한(蜀漢)의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 조위(曹魏)의 오자양장(五子良將)과 같..
삼국지 인물사전 - 서성(徐盛) 서성(徐盛)은 중국 후한 말 ~ 동오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문향(文響)이며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거현(莒縣) 사람이다. 생애 전란(戰亂)을 피해 강동으로 이주했는데 손권(孫權)에게 등용되어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된 후 병사 5백을 받고 시상장(柴桑長)으로서 황역(黃射)이 이끄는 수천 군사의 공격(攻擊)을 물리쳤다. 손권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교위(校尉), 무호령(蕪湖令)으로 임명했다. 또 임성 남쪽의 산월을 친 공로로 중랑장(中郞將)으로 임명되었다. 213년 1월 조조(曹操)가 유수구(濡須口)에 쳐들어왔을 때 폭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군을 향해 돌격하여 손권(孫權)의 칭찬을 받았으며 221년 7월 유비(劉備)가 형주를 공격해 왔을 때 육의(陸議)의 지휘를 받으며..
삼국지 인물사전 - 진무(陳武) 진무(陳武, ? ~ 215년)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자열(子烈)이며 양주 여강군(廬江郡) 송자현(松滋縣) 사람이다. 진수(陳脩)와 진표(陳表)의 아버지이다. 생애 손책(孫策)이 수춘에 있을 시절에 손책은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는 양주 여강군 서현에 살다가 아버지를 장사(葬事)하고 흥평 원년(194년)에 비로소 원술(袁術)을 섬겼으며 또 흥평 원년에 원술의 명령을 받고 양쯔강(揚子江)을 동쪽으로 건너 양주자사 유요 등 원술을 따르지 않는 세력(勢力)들을 쳤고 이후 다시 수춘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이때는 194년으로 추측(推測)된다. 손책을 찾아가 스스로 그 가신(家臣)이 되었는데 당시 18세였으며 신장(身長)이 7척 7촌에 달했다. 이후 손책을 따라 양쯔강..
삼국지 인물사전 - 장흠(蔣欽) 장흠(蔣欽, ? ~ 219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字)는 공혁(公奕)이며 양주(揚州) 구강군(九江郡) 수춘현(壽春縣) 사람이다. 생애 흥평(興平) 원년(194년), 손책(孫策)이 원술(袁術)에게 의탁하고 있을 무렵에 손책(孫策)의 측근이 되었고 흥평 2년(195년), 손책이 강동(江東)으로 진출할 때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되어 병사를 받았고 손책의 측근이였던 주태(周泰)와 함께 손책을 따라 단양, 오, 회계 3군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예장 공격에도 참가했다. 갈양위(葛陽尉)가 된 뒤로 세 현의 장을 역임(歷任)하여 도둑을 잡았고 서부도위로 승진(昇進)했다. 동야에서 여합(呂合)과 진랑(秦狼) 등이 손씨에 복종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토..
삼국지 인물사전 - 허저(許褚) 허저(許褚)는 후한 ~ 위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중강(仲康)이며 예주 초국(譙國) 초현(譙縣) 사람이다. 호치(虎癡)란 별명이 있다. 우월한 완력(腕力)과 우직한 성품으로 조조의 신임(信任)을 받아 그 경호(警護)를 맡았으며 용맹을 떨쳤다. 생애 괴력의 사내 : 후한 말 수천 명으로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해 도적을 방비(防備)했다. 여남군(汝南郡) 갈피(葛陂)의 도적 1만여 명이 쳐들어오니 비록 수는 적었지만 극한(極限)에 다다를 때까지 사력을 다해 싸웠다. 화살이 떨어졌어도 돌을 던지며 저항(抵抗)하니 도적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식량마저 동나자 일단 강화(强化)하고 소를 주는 대신 먹을 것을 받기로 했다. 도적(盜賊)이 와서 소를 몰고 가려 했는데 자꾸 도망치는..
삼국지 인물사전 - 장료(張遼) 장료(張遼, 169년? 170년? 171년? ~ 222년)는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三國時代) 위(魏)나라의 장수로 자는 문원(文遠)이며 병주(幷州) 안문군(雁門郡) 마읍현(馬邑縣) 사람이다. 생애 장료의 선조(先祖)는 전한의 섭일(聶壹)로 섭일이 흉노(匈奴)를 해치려 했던 일 때문에 원수(怨讎)를 피하여 성씨를 고쳤다. 젊어서 군리가 되었으며 병주자사 정원(丁原)이 종사로 삼아 군을 이끌고 수도로 가게 했다. 대장군 하진(何進)은 장료를 하북으로 보내 병사 천 명을 모았다. 그러나 돌아왔을 때에는 하진이 십상시에게 암살(暗殺)당하고 정국이 혼미한 틈을 타 동탁(董卓)이 조정과 중앙군을 장악한 상태여서 장료도 동탁(董卓)에게 속했다. 동탁이 패망한 후 여포(呂布)를 좇..
삼국지 인물사전 - 조운(趙雲) 조운(趙雲, ? ~ 229년 11월)은 중국 후한 말 ~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으로, 자는 자룡(子龍)이며 기주(冀州) 상산군(常山郡) 진정현(眞定縣) 사람이다. 생애 초반 조운은 처음에 원소(袁紹)에게 졸백(卒伯-병졸의 우두머리)으로 임관하였으나 원소의 그릇이 크지 않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看破)하여 공손찬(公孫瓚) 아래로 들어갔다. 소설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창술(槍術)의 명수로 등장(登場)하며 처음에는 원소의 부하였으나 스스로 공손찬 밑으로 달려가고 문추(文醜)를 상대하여 공손찬(公孫瓚)을 궁지에서 구하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 유비와의 만남 그 무렵 유비(劉備) 또한 공손찬(公孫瓚) 밑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공손찬이..
삼국지 인물사전 - 황충(黃忠) 황충(黃忠, ? ~ 220년)은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한승(漢升)이며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 사람이다. 생애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가 그를 중랑장(中郞將)으로 삼아 유반(劉磐)과 함께 유현(攸縣)을 수비하게 했다. 조조(曹操)가 형주를 점령하자 임시로 비장군(裨將軍) 직을 대행하게 하니 예전 임무에 종사(從事)하며 장사태수(長沙太守) 한현(韓玄)에 속하게 되었다. 유비(劉備)가 남쪽으로 여러 군(郡)을 평정하자 황충(黃忠)이 마침내 몸을 맡기기로 하고는 그를 수행해 촉(蜀)으로 들어갔다. 가맹(葭萌)에서 임무를 받아 군대를 돌려 유장(劉璋)을 공격하니 황충은 늘 앞장서서 적진에 올라 함락(陷落)시켰고 용맹하고 굳셈이 삼군(三軍)의 으뜸이었다. 익주(益..
삼국지 인물사전 - 마초(馬超) 마초(馬超, 175년 ~ 222년)는 중국 후한 말기의 군벌(軍閥)이며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다. 자는 맹기(孟起)이다. 관우(關羽), 장비(張飛), 황충(黃忠), 조운(趙雲)과 더불어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으로 불렸다. 생애 마초는 192년(초평 3년) 마등과 한수(韓遂)가 군대를 이끌고 장안(長安)으로 진입하자 한 왕조는 한수를 진서장군(鎭西將軍)에 임명해 금성으로 귀환(歸還)시키고 마등을 정서장군에 임명해 미에 주둔시킨다. 192년 한수(韓遂,와 마등(馬騰)이 서로 불화해지자 군을 이끌고 대립(對立)하였다. 이때 마초와 염행(閻行)이 1대1로 붙어 마초가 크게 패하고 죽기직전까지 패하였다. 사례교위 종요(鍾繇)가 관중으로 부임해 한수와 마등에게 서신을 보내 복종하는 ..
삼국지 인물사전 - 장비(張飛) 장비(張飛, 165년 ~ 221년 6월)는 후한 말 ~ 촉한의 군인으로, 자는 익덕(益德)이며 유주(幽州) 탁군(涿郡) 사람이다. 유비(劉備), 관우(關羽)와 함께 황건적(黃巾賊) 토벌에 나서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장판교에서 기지를 발휘해서 조조(曹操)의 대군을 막았으며 서촉정벌 시 엄안(嚴顔)을 회유하여 파촉정벌(巴蜀征伐)에 큰 공로를 세웠다. 이후 파서태수(巴西太守)의 자리에 올랐고 한중정벌 당시 위나라의 장합(張郃)과 맞서 싸워 승리하였다. 그러나 관우의 복수(復讎)를 위해 출정을 준비하던 도중 휘하 무장 범강(范疆)과 장달(張達)에게 암살당했다. 장남 장포(張苞)가 장비보다 (약간) 일찍 요절(夭折)하여 차남인 장소(張紹)가 가계를 이었다. 장비의 장녀와 차녀..
삼국지 인물사전 - 관우(關羽) 관우(關羽, 162년? ~ 219년 음력 12월)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자(字)는 운장(雲長)이며 본래의 자는 장생(長生)이다. 사례(司隷)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 사람이다. 동생 장비(張飛)와 더불어 유비(劉備)를 오랫동안 섬기며 촉한(蜀漢) 건국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충성심(忠誠心)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將帥)로 손꼽히며 한대(漢代) 이후로 남송(南宋)의 악비(岳飛)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각 중국사서(中國史書)에 등장하는 후세사람들은 ‘용맹한 자’ 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관우(關羽), 장비(張飛)의 경우를 들어 말하였다고 한다. 의리(義理)의 화신(化身)으로 중국의 민담(民譚)이나 민간전승(民間傳承), ..
삼국지 인물사전 - 여포 (呂布) 여포(呂布)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자는 봉선(奉先)이며 병주(幷州)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縣) 사람이다. ‘마중적토 인중여포(馬中赤兎 人中呂布)’라는 말로 표상되듯 신기에 가까운 무예로 천하의 명성(名聲)을 얻었다. 동탁(董卓)의 부하였으나 왕윤(王允)과 공모하고 동탁을 죽여 왕윤 정권의 군사적 중추(中樞)에 있었으며 이각(李傕) · 곽사(郭汜) · 장제(張濟) · 번조(樊稠)와 싸워 져 왕윤 정권을 몰락(沒落)시켰다. 이후 각지를 떠돌다 서주(徐州)를 근거지로 조조(曹操)와 맞섰으나 패망(敗亡)하고 처형되었다. 여포의 생애 힘이 세고 궁마술(弓馬術)에 능숙하여 전한 무제 때의 명장(名將)인 이광(李廣)에 비유되며 비장(飛將)이라 일컬어졌다. 병주자사(幷州刺史..
삼국지 인물사전 - 육손(陸遜) 육손(陸遜, 183년 ~ 245년 2월)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오나라(吳)의 정치가로 자는 백언(伯言)이며 양주(揚州) 오군(吳郡) 오현(吳縣) 사람이다. 촉한과 위나라의 침공을 여러 차례 격퇴(擊退)하여 오나라를 지켜냈으며 여몽(呂蒙)을 도와 관우(關羽)를 사로잡는데 공을 세웠고 이후 원한을 갚고자 침공(侵攻)한 유비군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원래 이름은 육의(陸議)로 병법에 능통했고 기계(奇計)를 잘 썼다. 처음에는 유생으로 알려졌지만 웅재(雄才)와 대략(大略)을 품었었다. 편장군(偏將軍), 우도독(右都督)이 되어 여몽(呂蒙)을 대신하여 육구(陸口)에 둔병하였으며 형주(荊州)를 함락시켜 관우(關羽)를 죽게 한 것은 그의 지모(智謀)에서 나온 것이다. 뒤..
삼국지 인물사전 - 노숙(魯肅) 노숙(魯肅, 172년 ~ 217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이자 정치가(政治家)로 자는 자경(子敬)이며 양주(楊州) 임회군(臨淮郡) 동성현(東城縣) 사람이다. 생애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모(祖母)와 함께 살았다. 집안이 부유(富裕)하며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고 돈을 풀어 가난한 자를 구휼(救恤)하고 인재들과 교제(交際)를 쌓아 고을의 환심(歡心)을 샀다. 주유(周瑜)가 거소장(居巢長; 거소현의 현장)일 때 노숙(魯肅)에게 군량을 요청하였고 노숙은 각각 3천곡의 곡식이 있는 창고 둘 중 하나를 주유에게 아주 내어 주어 이로써 주유와 친교(親交)를 쌓았다. 원술(袁術)이 불러서 동성장(東城長; 동성현의 현장)으로 삼았으나 원술의 통치에 기강이 해이해진 것을 보고 ..
삼국지 인물사전 - 제갈량 (諸葛亮) 제갈량(諸葛亮, 181년 음력 7월 23일 ~ 234년 음력 8월 28일)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모신(謨臣)이다. 자는 공명(孔明)이며 별호는 와룡(臥龍) 또는 복룡(伏龍)이고 후한 말 군웅(群雄)인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蜀漢)을 건국하는 제업(帝業)을 이루었다. 형주(荊州) 남부 4군을 발판으로 유비의 익천(翼千)을 도왔다. 221년 유비가 제위(諸位)에 오르자 승상(丞相)에 취임하였고 유비 사후 유선(劉禪)을 보좌하여 촉한(蜀漢)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227년부터 지속적인 북벌(北伐)을 일으켜 8년 동안 5번에 걸쳐 위(魏)나라의 옹·양주 지역을 공략(攻略)하였다. 234년 5차 북벌 중 오장원(五丈原) 진중에서 54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하였다. 중국 역사..
삼국지 인물사전 - 조조(曹操) 조위 태조 무황제 조조(曹魏 太祖 武皇帝 曹操, 155년 음력 6월 3일 ~ 220년 음력 1월 23일)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시인이다. 자는 맹덕(孟德)이며 훗날 위가 건국된 이후 추증(追贈)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후한이 그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비상하고 탁월(卓越)한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 여러 제후(諸侯)들을 연달아 격파(擊破)하고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위(魏)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조조(曹操)는 삼국지의 영웅들 가운데 패자(覇者)로 우뚝 솟은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는 평가와 후한을 멸망시킨 난세의 간웅(奸雄)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과 시인 두보(杜甫) 는 나..
삼국지 인물사전 - 유비(劉備) 유비(劉備)의 생애 유비(劉備, 161년 음력 6월 7일 ~ 223년 음력 4월 24일)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초대 황제(재위: 221년 음력 4월 6일 ~ 223년 음력 4월 24일)이다. 자는 현덕(玄德)이다.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조위가 한나라의 대통(大統, 임금의 계통)을 계승한 정통 국가라 보았으므로 유비를 황제(皇帝)로 존칭하지 않고 선주(先主)라고 불렀다. 진서 열전(晉書列傳)에서 유비의 묘호(廟號)를 열조라고 칭한 바가 있으나 이것은 그의 정식 묘호가 아니고 후세의 역사가들이 추증(追贈)한 묘호이다. 유주 황건적 평정 이후 그 세력이 한창 상승할 때에는 유예주(劉豫州), 유좌장군(劉左將軍), 의성정후(宜城亭侯)라고도 불렸다. 유비는 어릴 때 돗자리를..
제갈량이 유비에게 추천한 군사후계자에 대한 엉터리계책 서서(徐庶)는 언제 제갈량(諸葛亮)을 유비(劉備)에게 추천하였는가? 제갈량(諸葛亮)이 출도하기 전에 유비에 관한 멋진 장면은 당연히 서서가 조조군을 격파(擊破)한 것이다. 명사 서서는 선복(單福)이라는 가명으로 스스로 유비(劉備)를 찾아온다. 그리고 유비의 군사참모(軍事參謀)가 되어 조조군에 두 번이나 승리를 거둔다. 그리하여 조조(曹操)가 그를 주목하게 되고 서서의 진실한 신분을 알아내고 나서 서서의 모친을 인질(人質)로 잡아 서서를 조조군영으로 오도록 만든다. 유비(劉備)는 겨우 쓸 만한 모사(謀士)를 한명 구했는데 부득이 조조군영으로 보내야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안타까운 심경(心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계속 보내는 것을 아쉬워했다. 서서(徐庶)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