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 휘하의 팔대금강(蔣介石麾下八大金剛) 글: 강남재자 고축동, 유치, 장개석, 장정문, 장치중, 전대균, 진계승, 진성, 팔대금강, 하응흠 중화민국시대에, 일련의 풍운인물들이 등장했으며, 그들에게는 몇가지 별호가 붙었다. 계계삼거두(桂係三巨頭), 천군사거두(川軍四巨頭), 황포삼걸사흉(黃埔三傑四凶), 그리고 풍옥상의 십삼태보, 서북군오호, 당생지후하의 형합이장, 장개석의 팔대금강, 삼거두등등이 있다. 그중 장개석의 팔대금강에 대하여 알아본다. 첫째, 팔대금강의 첫째인물은 하응흠(何應欽)이다. 이 사람은 동맹회원, 황포군관학교총교관을 지내 장기간 장개석 수하의 2호인물이었다. 육해공삼군참모총장, 군정부장을 역임했다. 나중에 을 체결하여 매국노, 친일파로 낙인찍히지만, 계속하여 권력을 장악했고, 위세는 꺽..
왕정위(汪精衛)의 용모(容貌), 재주(才干)와 인품(人品) 글: 장이화 초등학교에 다닐 때, 중국에 대매국노가 있는데, 왕정위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중일전쟁기간동안, 전국인민이 공산당의 영도하에 일치하여 대일항전을 벌이는데, 오직 그만이 일본에 빌붙어서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하였다. 장개석도 가짜로 대일항전을 하고, 진짜로는 반공에 열을 올렸다고 하였다. 그때는 교과서에 모두 이렇게 쓰여 있었고, 이렇게 선전했다.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드니, 그는 가가대소를 하면서 말했다: "교과서는 틀렸다. 선생님도 틀리게 말했다. 실제상황은 그렇지 않다." "선생님과 교과서가 모두 잘못되었다니요?" 나는 놀라서 물었다. "틀렸다." 부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투는 아주 확신에 차 있었다. "장개석이 반공..
장개석의 '학력(蔣介石學歷)' 글: 유계흥(劉繼興) 요즘은 가짜가 횡행한다. 학력은 더욱 그러하다. 특히 일부 해외에서의 학력은 정보불균형으로 더더욱 진위를 구분하기 어려워 중국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클라이든대학"과같이 세상을 속이는 사기꾼이 적지 않다. 외국유학으로 얻은 학력은 근대에 들어서 비로소 시작된 것이고, 중국에서 겨우 100여년의 역사가 있을 뿐이다. 근대 중국의 대인물들도 학력위조가 있었다. 그는 바로 풍운을 질타한 불가일세의 장개석(蔣介石)이다. 가장 먼저 장개석의 가짜학력을 폭로한 사람은 이종인(李宗仁)이다. 이종인의 구술을 당덕강이 쓴 에 따르면, 이런 이종인의 회고가 있다: "장선생의 원래 이름은 지청(志淸)이다. 약관의 나이로 보정육군속성학당에 입학했으나, 학당의..
장개석은 어떻게 황포군관학교 교장이 되었는가? 글: 녕녕(寧寧) 상해로 물러난 손중산은 냉정하게 반성하며 생각을 거듭한다. 손중산은 이 때 북대의 저명한 교수이자 중국공산당 북방지구 지도자인 이대쇠를 만난다. 그는 손중산을 만나기 위하여 일부러 찾아왔다. 중국지부에서는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에서 보낸 지령을 받았는데, 중국공산당원은 개인신분으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대쇠가 찾아온 것은 패배한지 얼마되지 않은 손중산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그는 러시아혁명에서 경험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가장 좋은 것은 소련이 도움을 받는 것이다. 오랫동안 손중산은 수중에 군대가 없었다. 혁명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남방과 북방 양파의 군벌을 도발하며 하루종일 이리저리..
장개석의 7가지 역사적 공헌 작자: 미상 필자는 장개석의 공덕을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쓴 것을 그저 한 중국인의 양심의 발로이다. 장개석은 잘못한 것이 있으나, 여전히 민족지도자로서의 자격은 있다. 장개석이 중국역사상의 위인이었다고 말하더라도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현재 필자는 장개석의 중화민족에 대한 공헌을 하나하나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최대의 공적은 청나라말기의 군벌할거의 난세에서 두 차례의 북벌을 이끌고, 난세중의 중국을 통일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시 중국의 혼란정도는 중국역사상 드물게 보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두번의 북벌을 사실 모두 아주 성공적이었다. 북벌후의 결과는 바로 군벌의 수가 많이 감소하고, 혼란정도도 아주 잘 통제되었으며, 기..
양영태(楊永泰): 장개석의 제일모사 글: 유계흥(劉繼興) 역사상 일종의 지식엘리트들은 "문객(門客)", "군사(軍師)", "막료(幕僚)"등의 신분으로 자신의 '주인', '주공'을 위하여 계책을 내고, 근심거리와 어려움을 해결해주는데, 이들을 "모사(謀士)"라고 불렀다. 고대의 저명한 모사로는 범증, 진평, 곽가, 가후(賈詡)등이 있다. 이들에게는 하나의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지모가 출중하고, 기계묘책(奇計妙策)을 많이 내놓았다. 장개석의 곁에도 국민당정계에서 '제일모사"라고 불리던 사람이 있었다. 장개석의 수석지낭(首席智囊)"으로 이름은 양영태이다. 1928년, 장개석이 일찌감치 결의형제를 맺은 당시 국민정부 외교부장 황부(黃郛)는 장개석에게 지식이 뛰어난 양영태를 추천한다. 그러나 장개석은 그다지 중..
신해혁명 후 남경임시정부 법제원 원장 송교인 암살사건의 진상 글: 대중일보 1913년 3월 20일 밤, 후닝(滬寧)기차역은 평소처럼 사람들로 붐볐고, 인파는 끊이지 않았다. 기차가 내는 기적소리와 함께, 송교인은 배웅나온 황흥, 우우임 그리고 요중개등과 손을 흔들어 작별하고, 검표소로 들어갔다. 바로 이 때,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검표소에서 돌연 세 발의 총성이 들리더니 송교인이 핏물 속으로 쓰러진 것이다. 기차역은 졸지에 혼란에 빠지고, 여행객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암살범도 그 틈을 타서 사라져서 행방이 묘연해진다. 송교인은 자가 둔초(遁初)이고 호는 어부(漁父)이다. 호남 도원사람으로, 1905년 일본에서 동맹회에 참가하고, 1910년에서 1911년 의 주필을 지낸다. 신해혁명후, 임..
장개석이 손자 3명을 후계자로 양성하려던 계획은 어떻게 실패하였는가? 글: 우인연화(愚人煙火) 장경국(蔣經國)의 부인 장방량(蔣方良)은 모두 4명의 자식을 낳았다. 각각 장효문(蔣孝文, 장남), 장효장(蔣孝章, 장녀), 장효무(蔣孝武, 차남), 장효용(蔣孝勇, 막내아들)로 3남1녀이다. 이 세 아들에 대하여 장경국은 일기에서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효문은 멍청하고, 효무는 황당하며, 효용은 귀엽다." 장개석은 대만으로 패퇴한 후, 한때 3명의 손자를 후계자로 양성하고자 했다. 그들을 전후로 까오슝(高雄)의 봉산군관학교(鳳山軍官學校)로 보내어 공부하게 했는데, 아쉽게도, 장남, 차남은 전형적인 버릇없는 도련님타입이었다. 군사학교의 엄격한 기율을 견디지 못하고, 몇달도 되지 않아 둘은 학교에서 도망치고 ..
1905년 동맹회를 발기하고 설립한 원로인 왕정위(汪精衛)가 잘못된 곳에 도박을 걸었기 때문에 매국노로 전락 글: 양각목염자(楊康穆念慈) 어떤 사람은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인구, 자원, 공업생산능력에서 자신보다 몇 배나 큰 미국에 전쟁을 건 것은 이성을 잃은 미치광이짓이라고 본다. 그런, 그런 생각은 일면적이고, '사후제갈량'이다. 전쟁의 승리는 단순히 '물량'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의 방면이다. 만일 전쟁이 항상 '물량'의 방면에서 우세한 측, 즉 사람이 많고, 총이 많고, 돈이 많은 쪽에서 승리한다면, 인류의 역사는 아주 간단해질 것이다. 고금중외의 전쟁역사에서, 이소승다(以少勝多), 이약승강(以弱勝强)의 사례는 아주 많다. 이들 전투의 성공은 모두 '사람'의 우세로 '..
그는 송미령의 장가를 거절하고 황포군관학교 교장을 그만두고, 강산과 미인통은 장제스에게 양보하였다 출처: 0점사설 사람의 이 일생은 아마 대동소이하다.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투지 않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욕심을 적게 내는 반면 있다의욕만만한 사람은 창조하고 싶어 한다.담이 개와 장개석을 연기한 것과 같다. 그러나 장제스 하면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는 중국 근대 역사상의 한 세대이다모르는 것은 야심이 발설하다는 것이다발(發)의 장제스 뒤에는 담연개(潭延開)가 두 차례나 쑨원을 거절하는 계기가 됐다. 비로소 장제스(蔣介石)가 황포군관학교 교장이 되어 미인 송미령(宋美嶺)을 얻었는데, 송가(宋家)의 막강한 배경이 있었다세력. 담연개(談延開)를 빌어 야심은 없다장제스는 은강호에서 물러나기 위해 일약 국민당의..
장개석 총통의 장남인 장경국은 장씨후손을 후계자로 고려하지 않고 대만성출신인사 이등휘를 후계자로 삼기로 확정 글: 도함(陶涵) 장경국은 8월 타임지 인터뷰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는 장씨집안후손을 후계자로 삼는 것을 전혀 고려해본 적이 없다고. 장경국은 장효무, 장효용 형제가 국민당 '중앙위원' 경선에 참가할 뜻이 있음을 알게 되자, 비서장 마수례(馬樹禮)를 시켜 제지하게 한다. 장경국의 건강은 날로 나빠졌고, 여기에 왕승(王昇)사건이 더하여 후계자를 정해야할 필요가 더욱 두드러졌다. 장경국이 지난번에 입원했던 기간동안 '총통부 비서장'은 '8인소조'를 만들어 '총통'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거나 직무를 집행할 수 없을 경우에 대비했다. 이를 통하여 집단지도체제를 취하려 한 것이다. 장경국은 이런 움직임..
장개석과 송미령의 저금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국민당이 왜 결국 실패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글: 옌펑 러브 바 이자하오 "자해"에서 "관료제"라는 용어는 이렇게 설명됩니다. 즉, 관료이자 주인인 사람들의 지도력 스타일을 말합니다. 현실과 단절될 뿐만 아니라 대중과도 동떨어져 있습니다. 매우 무책임한 리더십 스타일. 그리고 우리가 이 용어를 Lao Jiang과 그의 아내 Soong Meiling에게 적용하고 싶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자본"이라는 용어를 추가하고 마침내 그들을 "관료적 자본주의"로 결합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이는 적절한 설명입니다. 이 중앙정부의 최고 지도자와 그의 아내가 계속해서 돈을 쟁취하여 중앙정부의 경제구조에 막대한 허점과 허점을 낳고 있습니다. 당시의 사건을 현재의 눈으로 살펴보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