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물가 상승, 농산물이 부추겨 가처분소득 찔끔 증가, 쓸 돈 부족 "이젠 정말 아낄 때란 생각 퍼져"
8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사과를 고르고 있다. 연합뉴스
# 30대 정모씨가 요즘 쌍둥이인 두 딸을 어린이집에 등원하고 오전마다 하는 일은 맘카페 '핫딜방' 접속이다. 주스용으로 갈아먹는 못난이 사과를 싸게 구하기 위해서다. 1년 전 1만 원이면 20개를 샀지만 최근 14개에 2만 원대로 껑충 뛴 마트 사과는 선뜻 손이 안 간다. 올해 들어 식비를 아끼려고 빵, 돈가스, 잼 등 가공 식품도 직접 만들어 먹는다. 그는 "그런데도 재료 가격이 올라 쓰는 돈은 지난해와 비슷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 40대 박모씨는 이달 초 중국 이커머스 알리익스프레스에서 과일을 싸게 판다는 소식에 애플리케이션(앱)을 깔았다. 아들이 좋아하는 충남 논산의 설향 딸기가 750g에 1만999원. 쿠팡 등 다른 온라인 쇼핑앱과 비교하니 5,000원 정도 쌌다. 저렴한 가격 앞에서 다른 곳보다 느린 배송 기간 2, 3일은 문제가 아니었다.
고물가 시대를 맞은 지 2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물가 상승을 이끌고 있는 품목은 사과, 배, 파 같은 과일과 채소다. 2022년 휘발유·경유, 지난해 외식에 이어 올 들어서는 밥상 먹거리가 소비자를 시름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한 푼이라도 절약하려는 소비 습관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또다시 전 국민의 '짠돌이·짠순이화(化)'다.
10일 통계청에 따르면 1월에 2%대로 떨어졌던 물가 상승률은 2월에 3.1%로 3%대에 다시 진입했다. 품목별 물가 기여도는 농산물이 0.8%포인트로 가장 컸다. 물가 기여도가 가장 높은 품목은 2022년 석유류, 지난해 외식에 이어 농산물로 바뀌었다. 요즘 물가를 올리는 주범은 농산물이란 뜻이다.
먹거리 수요가 많아지는 설 연휴가 지나면 농산물 가격이 꺾일 것이란 전망이 빗나가면서 소비자들은 충격과 함께 울상이다. 이에 아껴 쓰고, 나눠 사고, 바꿔 사는 '아나바 구매'로 고물가에 대처하고 있다. 지출 자체를 줄이거나 같은 품목이라도 싼 상품을 사는 게 한 예다. 물가만큼 월급이 오르지 않으면서 소비에 쓸 수 있는 가처분소득이 찔끔 증가한 여파다.
이마트가 1일부터 9,980원에 팔고 있는 '두마리 옛날통닭'은 출시 6일 만에 4만 세트가 팔리는 등 없어서 못 살 정도다. 저가 상점인 다이소에선 2,000원 이하 상품의 매출 비중이 전체의 60%를 차지한다.
허리띠 졸라매기, 이젠 일상적 풍경
8일 서울 이마트 용산점에서 시민들이 할인 상품인 '두마리 옛날통닭' 등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식재료를 일주일치에서 하루치로 나눠 구매하는 방식도 포착된다. 다 쓰지 못하고 버리는 식재료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쌍둥이 딸을 키우는 정씨는 "한꺼번에 많이 사는 마트 대신 저녁거리로 필요한 채소, 과일, 고기를 구매할 수 있는 집 앞 기업형슈퍼마켓(SSM)을 주로 간다"고 말했다.
먹거리를 값싼 수입산으로 바꾸거나 알리처럼 저가 상품을 파는 곳으로 쇼핑앱을 갈아타는 경우도 있다. 60대 유모씨가 이런 소비자다. 국내산 냉장 삼겹살만 고집하던 그는 미국, 스페인 등에서 넘어온 냉동 삼겹살도 종종 산다. 유씨는 "수입 삼겹살은 때로 고기 잡내가 나긴 하지만 값이 싸고 맛도 나쁘지 않다"며 "채소값이 오르면서 수입 삼겹살을 더 찾게 됐다"고 말했다.
소비자가 허리띠를 졸라매는 건 일상 풍경이 됐다. 지난해 외출 시 돈을 아예 안 쓰는 '무지출 챌린지'가 유행한 데 이어 최근 20, 30대 사이에선 현금으로만 생활하는 '현생 챌린지'가 뜨고 있다. 카드를 집에 놓고 나와 쓸데없는 지출을 막겠다는 도전이다. 외식비를 아끼기 위해 점심으로 편의점 도시락을 먹는 직장인도 흔해졌다. 지난해 편의점 CU의 도시락 매출은 전년 대비 26.8% 뛰었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물가 상승으로 쓸 돈이 부족해도 소비를 곧바로 줄이진 않는데 그런 시기는 지난 것 같다"며 "이젠 정말 아낄 때란 생각이 소비자 사이에 넓게 퍼진 모습"이라고 말했다. / 박경담기자wall@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