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남부 레바논 시돈 인근 알아크비에 마을에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파괴된 건물./EPA 연합뉴스
이스라엘이 레바논의 이슬람 무장 세력 헤즈볼라와 전면전을 앞두고 대규모 폭격을 연일 이어가고 있다. 23일부터 1600여 곳에 대한 정밀폭격으로 헤즈볼라의 군사 시설과 민가에 은닉된 미사일 발사대까지 공격했다. 핵심 지휘관에 대한 표적 공습도 계속됐다.
이스라엘은 지난 20일부터 헤즈볼라에 전례 없는 고강도 선제 공습을 퍼붓고 있다. 17·18일 무선호출기와 무전기 폭발로 헤즈볼라 조직원 3000여 명이 죽거나 다친 뒤 하산 나스랄라 최고지도자(사무총장)가 ‘보복’을 천명하자 기다렸다는 듯 전방위적 공습에 나섰다. 지상군 투입 등 전면전을 염두에 두고 헤즈볼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무력화하려는 의도로 분석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24일 “어제부터 레바논의 헤즈볼라 목표물 1600개를 겨냥해 650회의 정밀폭격을 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 7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무장 세력 하마스와 전쟁 발발 이후 레바논에 대한 공격으로는 최대 규모다. 작전에는 ‘북쪽의 화살(Northern Arrows)’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니엘 하가리 이스라엘군 수석 대변인은 전날 레바논 남부 한 마을의 주택 다락방에 헤즈볼라의 장거리 미사일이 설치된 사진을 공개하며 “이렇게 은닉된 순항미사일과 중거리 로켓, 무인기 등을 집중 파괴했다”고 밝혔다. 민간인 거주 지역이 타격을 입으면서 많은 사상자도 발생했다. 레바논 보건부는 이틀간 어린이 50명을 포함한 564명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공격의 핵심에는 헤즈볼라 최고 지휘관들에 대한 ‘참수 작전’이 있다. 이스라엘은 요르단 수도 베이루트에서 23일 남부 지역 사령관 알리 카라키를, 24일에는 미사일부대 사령관 이브라힘 쿠바이시를 겨냥한 표적 공습을 했다. 헤즈볼라는 “카라키는 무사하다”고 주장했으나 아직 생사 여부가 확실치는 않다. 반면 쿠바이시는 “공습으로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이스라엘군이 밝혔다.
그래픽=이철원
이스라엘은 헤즈볼라가 하마스 편을 들며 이스라엘 북부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자 지휘관에 대한 표적 공습을 이어왔다. 지난 7월 말 헤즈볼라 최고 사령관 푸아드 슈크르가 사망했고 지난 20일엔 군부 2인자였던 이브라힘 아킬이 폭사했다. 타임스오브이스라엘 등은 “나스랄라 주변의 핵심 지휘관 8명 중 6명이 이미 제거된 상황”이라며 “카라키까지 사망하면 나스랄라는 사실상 고립무원의 상황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헤즈볼라의 지휘 체계에 공백이 오고 나스랄라가 군 조직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헤즈볼라와 하마스 등 이슬람 무장 세력들은 일반 국가의 정규군과 달리 최고지도자와 그를 둘러싼 소수 지휘관들이 집단적 지휘 체계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헤즈볼라에서 이 역할을 하는 최고 군사 기구 ‘지하드(성전) 위원회’ 멤버들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대거 사망하면서 지휘 체계가 마비 직전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 장관도 이날 “이제 테러 단체(헤즈볼라)의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만이 홀로 남아 지휘봉을 잡고 있다”며 이를 시사했다.
실제로 헤즈볼라는 아직 이렇다 할 반격을 못 하고 있다. 헤즈볼라는 이날 “이스라엘 내 군수 시설 등을 목표로 미사일과 로켓 공격을 가했다”고 밝혔다. 헤즈볼라는 매일 100여 발의 로켓과 미사일을 발사하며 하이파 등 이스라엘 북부 주요 도시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매체들은 “지휘 체계 혼란으로 레바논 곳곳에 산재된 공격 자원이 제대로 동원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17·18일 벌어진 무선호출기·무전기 폭발 사고도 지휘 체계의 혼란을 가중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와의 전쟁, 이란과의 분쟁에서도 집요하게 지휘관들을 노려왔다. 지난 7월 하마스의 군사 지도자 무함마드 데이프와 라파 살라메가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에서 벌어진 표적 공습으로 폭사했다. 같은 달 31일엔 하마스 정치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가 이란 테헤란 교외에서 암살당했다. 이스라엘은 또 올해 1월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를 공습해 이란 혁명수비대 고위 지휘관 5명을, 이어서 4월에는 같은 지역에서 이란 영사관을 폭격해 모하마드 레자 자헤디 혁명수비대 준장을 폭살했다.
하지만 헤즈볼라의 반격 능력이 만만치 않다는 주장도 많다. 지휘 체계의 혼란이 가라앉고 전열이 정비되면 본격적인 반격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해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직전 헤즈볼라가 보유한 포탄과 로켓, 미사일의 수는 15만발에 달한다”고 전했다. 또 헤즈볼라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의 전술을 모방해 일시에 1000기 이상의 로켓과 미사일, 드론을 퍼붓는 방식으로 이스라엘 방공망을 뚫고 군 기지와 전력망 등을 타격하려 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특히 헤즈볼라는 2006년 이스라엘의 침공 당시 땅굴을 이용한 게릴라전으로 이스라엘군을 괴롭힌 끝에 한 달여 만에 전쟁을 끝낸 전력이 있다. 따라서 이번에도 지상전이 벌어질 경우 정면 대결 대신 소모전과 진흙탕 싸움으로 이스라엘군을 공략할 가능성이 크다고 WSJ는 평가했다.
한편 이스라엘은 이번 공격 과정에서 레바논 남부와 동부, 베이루트 인근 민간인을 대상으로 “헤즈볼라 무기가 있는 건물로부터 피하라”는 아랍어 경고 메시지 수만 통을 보냈다.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에서도 공격 대상 지역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대상으로 문자·음성 메시지를 보내 왔다. 레바논과 아랍권 매체들은 “이스라엘이 통신망을 해킹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국제사회는 전면전을 막기 위한 중재에 뛰어들었다. 프랑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이스라엘-레바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긴급회의를 요청했다. 유엔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 뉴욕에 모인 G7(7국) 외교 장관들도 성명을 통해 “중동 지역의 확전은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등 아랍 국가들도 “양측 충돌이 지역 내 확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미국 등 주요국과 국제사회의 개입을 요청했다.
그래픽=이철원
☞헤즈볼라
레바논의 이슬람 무장 단체. 아랍어로 ‘신의 당(黨)’이라는 뜻이다. 1982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팔레스타인 난민이 많은 레바논을 침공하자 이에 대항해 창설됐다. 조직원이 10만명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이란 정부로부터 자금과 군사력을 지원받고 있어 레바논 정부조차 간섭하지 못하는 자체적 정치 체계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