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장개석의 공덕을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쓴 것을 그저 한 중국인의 양심의 발로이다. 장개석은 잘못한 것이 있으나, 여전히 민족지도자로서의 자격은 있다. 장개석이 중국역사상의 위인이었다고 말하더라도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현재 필자는 장개석의 중화민족에 대한 공헌을 하나하나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최대의 공적은 청나라말기의 군벌할거의 난세에서 두 차례의 북벌을 이끌고, 난세중의 중국을 통일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시 중국의 혼란정도는 중국역사상 드물게 보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두번의 북벌을 사실 모두 아주 성공적이었다. 북벌후의 결과는 바로 군벌의 수가 많이 감소하고, 혼란정도도 아주 잘 통제되었으며, 기본적으로 통일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장개석의 군사적 재능이 모택동에 비하여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군벌을 다루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이로 인하여 민족응집력은 아주 강화되었고, 중국의 국제상의 지위도 많이 제고되었다.
둘째, 일련의 효과적인 경제정책을 시행하였다는 것이다. 이로써 부국강병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장개석이 계승한 것은 엉망인 나라였다. 모택동과 주은래는 묵은 채무를 하나도 떠앉지 않았지만, 국민정부는 남경에 수도를 정하면서, 북경정부의 누계 6억7천만달러의 채무를 떠안았던 것이다. 당시의 중국은 그저 표면상의 통일이었고, 남경정부가 통제하는 국가자원은 아주 유한했으며, 많은 돈을 투입하여 군벌전쟁을 치러야 했다. 장개석이국민경제건설운동을 하면서 "법정화폐정책"을 추진했다. 1935년말부터 법정화폐를 발행하였고, 공채채권의 권위를 수립했다. 동시에 외채를 적극적으로 상환하였다. 항전전날까지, 이미 90%의 외채를 상환하였다. 중국채권은 런던시장에 상장되었고, 가격은 일본채권보다 높이 인정받았다. 이것은 사실이다. 법정화폐는 원래 영, 미, 일화폐가 대공황시기에 가치절하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고, 미국이 고가로 중국백성의 백은을 매입하는 것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권위가 수립된 후에는 지방화폐를 통용시키던 성들도 속속 법정화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8년항전승리를 위한 물질적인 기초를 닦았다. 법정화폐제도는 중일전쟁의 필요충분조건이었고, 신속히 발전한 법정화폐는 중국통일의 기초를 이루었다. 법정화폐가 없었더라면 항전군비는 마련한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셋째, 대대적으로 문화교육사업을 추진하였다. 북대, 청화, 서남연합대학등 학술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특히 음미할만한 것은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장개석정부는 먼저 고려한 것이 학교와 교육사업이 중단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이 침략한 도시의 학교들이 남으로 이전하도록 도와주었다. 일본의 공습시에도 당국의 첫번째 임무는 중소학교 교사학생을 대피시키는 일이었다. 일찌기 그는 황포군관학교교장을 맡은 바 있고, 혁명군대를 건립하고 군사핵심역량을 교육시키는데 노력했다.
넷째, 내우외환의 곤란한 상황하에서 변경을 안정시키고, 중앙정부의 통치를 공고히 했으며, 국가분열을 방지했다. 당시 동북(만주), 내외몽고, 신강, 티벳은 모두 외국배경이 있었다. 장개석은 몽고, 티벳에 대한 통치를 강화했고, 국민정부는 1929년 몽고/티벳위원회를 설립하였으며, 몽고/티벳의 소수민족지역행정사무를 담당했다. 1938년 9월 24일, 라마환생방법 13조를 반포하여 달라이라마, 판첸라마등이 원적한 후에는 반드시 현지지방의 최고행정기관이 몽고/티벳위원회에 신고하도록 했으며, 환생한 영동(靈童)을 찾은 후, 당해 지방최고행정기관은 몽고/티벳위원회에 보고하여 조사확인받도록 하였다. 1928년, 국민정부는 사천의 서부와 티벳동부를 하나의 새로운 성으로 만들어 서강성(西康省)이라고 하였다. 1928년 9월 국민당중앙정치회의 제153차회의는 영하와 청해를 각각 별도의 행성으로 나누어 설립하는 것으로 하였다. 1929년 1월, 청해는 정식으로 성이 되었고, 시닝(西寧)이 성회가 되었다. 그중 청해성을 건립한 것은 의미가 컸다. 남쪽의 서강성과 함께 티벳의 국면에 영향을 끼치고 서로는 신강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소련독일전쟁이 폭발한 후, 장개석은 군대를 보내어 신강으로 들어갔고, 성세재를 통하여 신강은 마침내 중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다섯째, 중화민족 지도자의 신분으로 중국인민의 일본침략자들과의 목숨을 건 투쟁을 이끌었다. 그리고 40여만의 원정군을 두 번에 걸쳐 버마로 들여보내 작전했고, 버마독립해방과 세계반파시스트전쟁에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항일전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모택동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장개석은 민족지도자이고 최고사령관이다. 국민당에는 전후 두 명의 위대한 지도자가 있는데 첫번째는 손중산이고, 두번째는 바로 장개석이다라고. 장개석은 항일전쟁에서 일본군의 70%의 병력을 막아냈고, 대량의 일본군을 격파했다. 이는 중국의 독립에 거대한 공헌이다. 버마에 출병하여, 중국의 이익을 보호하면서 국제적으로 좋은 명성도 얻었다. 이는 중국이 이차대전후에 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데 좋은 바탕이 되었다.
여섯째, 청나라가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폐지하였다. 동북, 대만 및 팽호열도의 주권을 회복하였다. 약소국에서 세계제2차세계대전의 4대지도자국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1946년 유엔이 설립된 후 오개상임이사국중 하나가 되었다. 카이로선언으로 주권과 영토를 회복하게 된 것은 장개석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적극 노력한 결과였다.
일곱째, 장개석은 일생동안 중국영토의 통일과 완정을 굳건히 유지보호했다. 나중에 대만으로 물러나기는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대만을 중국의 일부분으로 보았다. 비록 대만을 반공대륙의 기지로 삼았지만, 이등휘, 천수이벤과는 달랐다. 월남, 인도가 중국의 주권을 침해할 때 책상을 치며 "대륙이 파병하지 않으면 내가 군대를 보내겠다"고 하였다. 장개석이 대만과 대륙은 불가분이고 전체 중국의 일부를 이룬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는 대만에서 중화민족의 전통이 연면히 이어질 수 있도록 해주었고, 오랫동안 대만인들이 중국의 일부분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이것은 이후 중국통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역사를 회고하면 장개석이 잘못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국가에 부끄럽지 않았던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중화민족에 대한 걸출한 공헌을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