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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7.17 동진시기 유명한 서법가 왕희지(王羲之)
posted by 알짜 정보 岳岩 2016. 7. 17. 18:30

인민망 제공


글자풀이: 임금 왕() 숨 희() 갈 지()

임금 왕()에 대해 허신(許愼)"설문(說文)"에서 ()은 천하가 돌아가는 곳이라며, 가로의 삼 획(三劃)이 의미(意味)하는 하늘 땅 사람을 관통(貫通)하는 것이 왕()이라고 규정(規定)하고 있다. 즉 제일 상부의 일()은 하늘(), 가운데 일()은 땅(), 제일 아래 일()은 사람()을 의미(意味)하는데, 이 셋을 아울러 관통()할 수 있는 사람이 곧 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천지인(天地人)을 관통(貫通)한 왕()은 하늘의 천신(天神)을 향해서는 천제(天祭), 곡식(穀食)을 관장(官藏)하는 지신(地神)을 위해 지제(地祭), 왕실(王室)을 있게 한 인신(人神)에 해당(該當)하는 조상신(祖上神)을 위해 종묘(宗廟)에서 제사(祭祀)를 주관(主官)하게 된다. 또 다른 해석은 임금 왕()자는 선비 사()자와 마찬가지로 자루가 없는 큰 도끼날의 모양(模樣)을 본떠 만든 글자다. 도끼는 무력(武力)을 상징(象徵)으로 하는 것으로, ()을 뜻하게 되었다. '() 중의 왕()'이란 뜻의 왕수(王水)는 진한 염산(鹽酸)과 진한 질산(窒酸)31 정도(程度)의 비율(比率)로 혼합(混合)한 액체(液體), ()한 산화제(酸化劑)이다. 염산(鹽酸)이나 질산(窒酸)에도 녹지 않는 금()이나 백금(白金)과 같은 귀금속(貴金屬)도 녹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임금 왕()자를 자전(字典)에서 찾으려면 구슬 옥() 변에서 찾아야 한다. 임금 왕()자의 획수(劃數)4획으로 자신의 부수()보다 적다. 구슬 옥(/)자는 실에 옥()으로 만든 구슬 3개를 꿰어 놓은 모습(模襲)을 본떠 만들 글자다. ()은 구슬(), ()은 실()을 나타내고, 임금 왕()자와 구분(區分)하기 위해 점()을 하나 더해 놓았다. 하지만 다른 글자를 만나 사용(使用)될 때, 공 구(), 나타날 현()자에서와 같이 임금 왕()자로 표기(表記)한다. 진주(珍珠)나 호박(琥珀)과 같은 보석(寶石)이나 장신구(, ), 노리개(, )를 의미(意味)하는 글자에 들어간다. ()이라는 문자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의 어원(語源)의 의미(意味)를 살펴보면 두 가지 의견(意見)이 있다. 하나는 문자(文字)가 생기기 전에 왕을 상징(象徵)하는 것은 최고의 권력자(權力者)만이 가질 수 있었던 무기인 도끼()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왕은 도끼날()과 도끼자루()의 형상(形象)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象形文字)에서 기원(起源)된 글자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 유학자(儒學者)들이 주장(主張)하는 것으로 왕()이 하늘을 의미(意味)하는 천()과 땅을 의미(意味)하는 지(), 그리고 사람을 의미(意味)하는 인() 등 이렇게 세 가지를 뜻하는 석 삼()에 이 세 가지를 뚫는 힘을 가졌다는 뜻으로 뚫을 곤 ()을 합해서 왕()이라는 글자를 만들었다는 의견(意見)이다. 이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의 힘을 능가(凌駕)하는 대단한 능력(能力)을 가진 존재(存在)라는 뜻이라고 한다

숨 희()는 옳을 의()와 어조사 혜()의 된 글자이다. ()는 양()과 아()가 어우어진 것에 다시 혜()의 생략형인 교()의 세 글자가 합쳐진 글자로, ()는 본디 톱의 모양(模樣)을 본 뜬 것이다. 즉 톱으로 양()을 톱질하여 희생물(犧牲物)로 삼는 것을, 옳을 의()나 숨 희() 등의 글자에도 알 수가 있다. ()는 희생으로 봉헌(奉獻)한 것이 신의 뜻에 부합(符合)하여 올바른 상태(狀態)에 있는 것을 의미(意味)하며 뒤에는 올바른 희생(犧牲)이란 의미(意味)에서 정의(正義)라는 낱말이 생겨났다. 숨 희()는 톱니바퀴 아래에 양()의 아랫몸()이 여전히 남아 있는 형태(形態)로 지금의 희생 희()로 굳어진 것이다. 희생(犧牲)이란 어떤 사물(事物)이나 사람을 위해 자기(自己)의 몸을 돌보지 않고 뛰어 든다는 말인데 희생(犧牲)의 희()와 생()과 같은 희생의 의미(意味)를 가지고 있지만 그 낱글자의 의미(意味)는 다소 차이(差異)가 있다. ()는 김이 오르는 모양(模樣)이다. ()는 본래 혜()의 생략체(省略體)로 날이 들쑥날쑥한 톱 따위의 날붙이로 양()을 베어서 째다는 뜻으로 바친 양의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모양(模樣)을 나타낸 것이다. ‘설문(說文)’을 해설(解說)한 단옥재(段玉裁)의 주석(注釋)에서는 기야(氣也) 위기지취허야(謂氣之吹噓也), 즉 기이다, () 내불어 쉬는 것을 기()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때문에 희()는 숨 쉴 희()로 쓰이고 있으나 현재(現在)는 복희씨(伏羲氏)나 왕희지(王羲之)처럼 사람 이름 희()로 많이 쓰이고 있다. 여기서 희화(羲和)는 중국 요() 임금 때 천문의 일을 관장(管掌)하던 희중(羲中), 희숙(羲叔), 화중(和中), 화숙(和叔) 네 형제를 통틀어 이르던 말이다. 또한 희황상인(羲皇上人)은 복희씨(伏羲氏) 시대 때인 태고 적의 사람이라는 뜻으로, 속세(俗世)를 떠나서 한가하게 지내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갈 지(之)는 발 모양(模樣)을 상형(象形)한 지(止) 아래에 출발선(出發線)을 뜻하는 ‘일(一)’ 모양(模樣)을 더한 글자가 ‘지(之)’의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에 나타난 자형(字形)인데, 어디론가 ‘가다’는 의미(意味)를 담았다. 특(特)히 발모양을 본뜬 지(止)의 갑골문(甲骨文)을 보면 자형(字形) 우측(右側)의 옆으로 뻗는 모양(-)은 앞으로 향(向)한 엄지발가락이며 중앙(中央)의 세로(丨)와 좌측(左側)의 작은 세로(丨)는 각각 발등과 나머지 발가락을, 자형(字形) 하부(下部)의 가로(一)는 발뒤꿈치를 나타내며 앞으로 향(向)한 좌측(左側) 발의 모습(模襲)을 그려내고 있다. 지(之)자는 삐침 별(丿)部 글자로 발(止)과 그 아래에 땅(一)을 그린 회의자이다. 후에 변한 꼴은 마치 땅(一)에서 풀(屮)이 뻗어나가는 꼴이 지금의 ‘갈 지(之)자가 되었다. 갈 지(之) 자는 ‘가다 또는 영향을 미치다’의 의미가 있다. 지남지북(之南之北)이나 지동지서(之東之西)에서는 행동(行動)을 묘사(描寫)하고 있다. 늦은 밤술에 취한 사람들이 중심(中心)을 잡지 못하고 걷는 모습(模襲)을 연상(聯想)하면 지(之)의 의미(意味)를 쉽게 이해(理解)할 수 있다. 또한 '애지중지(愛之重之), 감지덕지(感之德之), 전지도지(顚之倒之), 좌지우지(左之右之)' 등이 있다.

설명: 중국(中國)에서는 서예를 서법(書法)이라고 한다. 서체(書體)의 발달사에서 가장 중대(重大)한 변화는 왕희지(王羲之) 의 등장(登場)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왕희지(王羲之) 등장으로 서법(書法)이 단순한 문자 기록(記錄)이 아닌 하나의 예술(藝術)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였다. 

해설: 왕희지(王羲之)는 낭야 림이(瑯邪臨沂) 출신이며 자는 일소(逸少)이다. 원제(元帝) 때 우군장군(友軍將軍), 회계내사(會稽內史)를 지내 흔히 왕우군(王友軍)이라고도 한다.

왕희지(王羲之)7살부터 서법을 배웠는데 그의 계몽(啓蒙) 스승은 왕희지(王羲之)의 숙부이다. 그 후 왕희지(王羲之)는 이모인 위부인(衛夫人)한테서 서법을 익혔다. 동진시기(東晉時期) 유명(有名)한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은 왕희지(王羲之)가 커서 서예 예술가(藝術家)로 그 지위를 확립(確立)하는데 큰 영향(影響)을 미쳤다. 

왕희지(王羲之)는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재주가 널리 알려져 많은 조정(朝廷)의 권신들은 그를 벼슬자리에 천거(薦擧)했다. 그러나 왕희지(王羲之)는 권신(權臣)들의 권유(勸誘)를 완곡히 거절(拒絶)했다. 그가 관리(官吏)로 되는 것을 거절한 이유(理由)는 당시 조정의 부패상(腐敗相)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희지(王羲之)는 높은 관직(官職)을 포기(抛棄)하고 북방(北方)으로 가서 검소(儉素)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호젓한 지방(地方)으로 가서 순박(淳朴)한 백성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속세(俗世)에 물들지 않는 소탈(疏脫)한 왕희지(王羲之)의 성격과 태도에 대해 시인 이백(李白)"왕우군(王友軍)"이라는 시에서 "우군(友軍)은 본래 맑고 진실하며 풍진(風塵) 속에서도 소탈하다."고 읊었다. 왕희지(王羲之)45살 나던 해에 우군장군(友軍將軍)과 회계내사(會稽內史)로 임명되어 임지(任地)로 떠나게 되었다. 그가 간 곳은 전란(戰亂)의 흔적(痕迹)을 찾아볼 수 없고 풍경이 수려한 곳이었다.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으로 하여 명사들이 찾아들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정치가 사안(謝安), 도사 허순(許詢), 승려 지둔(支遁) 등이 있다. 왕희지(王羲之)는 내사 재직 중이던 353년 늦봄에, 회계의 난정(蘭亭)에서 있었던 연회(燕會)에 참석했다. 그때 모인 41인 명사(名士)들의 시를 모아 만든 책머리에 그는 스스로 붓을 들어 서문(序文)을 썼다. 왕희지(王羲之)는 난정(蘭亭) 주변의 산수의 아름다움과 자신의 정감(情感)을 글에 남았는데 그 글이 바로. 유명한 "난정집서(蘭亭集序)"이다. "천하제일 글"로 평가받는 "난정집서(蘭亭集序)"는 왕희지(王羲之)의 대표작이다.

 

여기에 이런 일화가 있다. "난정집서(蘭亭集序)"는 왕희지(王羲之)가 취중에 쓴 글이라고 한다. 술기운이 가신 후 왕희지(王羲之)는 취중에 쓴 "난정집서(蘭亭集序)"를 보고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멋진 글이었다고 무릎을 쳤다고 한다. 또 이런 일화(逸話)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특별히 좋아했던 당태종(唐太宗)은 왕희지(王羲之) 서예작품을 즐겨 감상했다. 당태종(唐太宗)은 생을 마감하기 전에 아들 고종(高宗)에게 명하여 왕희지(王羲之)"난정집서(蘭亭集序)"를 순장품(殉葬品)으로 소능(昭陵)에 묻게 했다고 한다.

 

중국의 서법사(書法史)에서 서법예술의 아름다움을 창조(創造)해 내 서성(書聖)으로 추앙(推仰)받아온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는 정신과 기교가 조화(調和)를 이루어 수려하고 우아(優雅)하면서도 강한 힘을 내포(內包)하고 있어 사람들은 그의 서체가 신선(神仙)의 기운이 갖추어져 있다고 칭송(稱頌)했다.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는 예술로 승화되어 감상(鑑賞)의 대상이 될 만큼 그 위치가 확립(確立)되었는데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는 지금까지도 왕희지(王羲之) 서법을 유일한 규범(規範)으로 삼고 있다. 왕희지(王羲之) 작품으로 해서의 "낙곡론(樂穀論)", 행서의 "난정집서(蘭亭集序)""상란첩(喪亂帖)", 초서의 "십칠첩(十七帖)" 등은 특별히 유명(有名)하다. 

왕희지(王羲之)한테 서법을 배운 일곱 번째 아들 왕헌지(王獻之)는 커서 유명한 서법가(書法家)가 되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왕희지(王羲之) 부자를 이왕(二王), 또는 희헌(羲獻)으로 불렀다. 인물


자료 제공 : (중국국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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