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병자구(無病自灸)란 불편한 질병(疾病)도 없는데 괜히 뜸을 뜬다는 뜻으로, “장자(莊子)·잡편(雜篇)” 제29 ‘도척편(盜跖篇)‘의 “유하계(柳下季)가 걱정스레 다시 묻습니다. ‘도척(盜跖) 그놈이 전에 말한 것처럼 자네 뜻을 거역(拒逆)했겠지?’ 이에 공자(孔子)가 대답합니다. ‘그렇다네. 말하자면 나는 아프지도 않은데, 괜히 뜸을 뜬 꼴이 되었어. 재빨리 내달려 호랑이 머릴 건드리고 수염을 잡아당겼으니, 하마터면 호랑이 밥을 면치 못할 뻔했다네.’” 라는 대목에서 유래(由來)했습니다.
없을 무(無)의 구성(構成)은 자형상부의 모양과 불 화(灬)로 짜여 있다하여 회의글자(會意文字)로 분류(分類)하고 있지만, 갑골문(甲骨文)이나 금문(金文)을 보면 사람(大)이 양 손에 대나무 가지 등으로 만든 도구(丰)를 들고서 춤추는 무녀(巫女)의 모습을 그려낸 상형글자(象形文字)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형하부의 ‘灬’는 불의 의미(意味)로 쓰인 게 아니라 사람의 발과 양 손에 든 장신구(裝身具)를 나타내려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신이 내려 춤을 추는 무녀의 모습(模襲)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몰아(沒我)의 경지에서 춤을 춥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자아가 없이 춤추는 무녀의 모습을 보고서 ‘없다’라는 뜻이 발생(發生)했습니다. 무(無)가 본디 ‘춤추다’였으나 ‘없다’ 혹은 ‘아니다’라는 뜻으로 쓰이자, 두 발모양을 본뜬 어그러질 천(舛)을 더해 ‘춤출 舞(무)’를 별도로 제작(製作)하였답니다.
병 병(病)은 병들어 기댈 녁(疒)과 셋째 천간 병(丙)으로 구성(構成)되었습니다. 녁(疒)은 사람이 질병(疾病)에 걸려 침상에 드러누운 모양을 본떴죠. 자형 중에 ‘亠’모양은 침대(ㅡ)에 누워 있는 환자(丶)를 뜻하고 나뭇조각 장(爿)의 간체자(簡體字) 모양인 ‘장(丬)’은 다리가 달린 침대인데, 붓으로 쓰기에 편리하게 세워 놓은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역(疒)자가 다른 자형에 더해지면 대부분 질병(疾病)과 관련한 뜻을 지니게 됩니다. 갑을병정(甲乙丙丁)으로 시작되는 천간(天干)은 식물의 성장과정을 본떠 만든 상형글자(象形文字)들인데, 씨앗에 뿌리가 내리고(甲), 싹이 움터 자라나(乙), 땅속(內)으로부터 나무줄기(一)가 형성된 모습이 바로 병(丙)자에 해당합니다. 이에 따라 병(病)자에는 부상(負傷)이 아닌 몸 속 장부의 부조화(不調和)로 발생된 내과(內)과적 질환(一)으로 병석에 누워(疒)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스스로 자(自)는 사람의 얼굴 중앙(中央)에 위치한 코를 본뜬 상형글자(象形文字)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코’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境遇)는 드물고 별도(別途)로 제작된 코 비(鼻)를 쓰죠. 비(鼻)는 ‘코밑 진상’이라는 의미를 적나라(赤裸裸)하게 드러낸 글자입니다. 비(鼻)는 코를 뜻하는 자(自)와 누구에게 무엇을 준다는 의미의 줄 비(畀)로 짜여 있는데, 코(自)아래 입(田=口)으로 먹을 것을 바치게(두 손으로 받들 공:廾) 되면 안 넘어 갈 사람이 없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自’는 ‘--로부터’ 와 ‘자기 자신’, 그리고 ‘저절로’ ‘스스로’라는 뜻으로 활용(活用)되고 있습니다.
뜸 구(灸)의 구성(構成)은 오랠 구(久)와 불 화(火)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久)에 대해 허신(許愼)은 “설문(說文)”에서 “久는 사람을 뒤에서 받치고 있는 모습(模襲)이다. 사람의 두 정강이 뒤에 뭔가 달려있는 모양(模樣)을 본떴다.”고 하였습니다. 갑골문(甲骨文)이나 금문(金文)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구(久)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說)이 있는데, 첫째는 한 쪽 다리를 잘랐으니 그 걸음걸이 더뎌 목적지(目的地)에 다다르기 까지는 ‘오래’ 걸린다는 것, 둘째는 다리에 족쇄(足鎖)를 채웠으니 또한 그 걸음걸이가 ‘오래’ 걸린다는 것, 셋째는 사람의 뒤꽁무니를 붙들고서 놓아주지 않으니 당사자로서는 아주 ‘길고 오래’동안 붙들린 것처럼 느낀다는 것, 마지막으로 사람의 등이나 엉덩이에 불에 달군 쇠붙이로 낙인(烙印)을 찍게 되면 그 흔적(痕迹)이 ‘오래 간다’는 것 등 입니다. 필자가 보기에는 마지막 주장(主張)이 보다 설득력(說得力)을 갖게 했답니다. 처음에는 죄수(罪囚)나 노예(奴隸)를 구별(區別)하기 위한 낙인이었지만, 후에는 뜸과 치료술(治療術)로도 쓰였을 겁이다. 그런데 구(久)자가 이러한 본뜻과는 달리 ‘오래’라는 의미(意味)로 쓰이자, 원래의 뜻을 살리기 위해 불 화(火)를 더해 ‘뜸 구(灸)’를 따로 만든 겁니다.
공자 도척(盜跖)을 설득하러 가다 - 장자(잡편) 제29편 도척-
공자에게 유하계(柳下季)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아우의 이름은 도척(盜跖)이라 했다. 도척은 9천명의 졸개를 거느리고 천하를 횡행(橫行)하면서 제후들의 영토를 침범(侵犯)하여 그들을 털었다. 남의 집에 구멍을 뚫고 문을 부수고 들어가 남의 소와 말을 훔치고 남의 부녀자들을 약탈(掠奪)했다. 이익(利益)을 탐하느라 친척도 잊었으며, 부모형제(父母兄弟)도 돌아보지 않았고, 조상들에게 제사(祭祀)도 지내지 않았다. 그가 지나가는 곳에서는 큰 나라는 성을 지키고, 작은 나라는 성안으로 도망쳐 난을 피했다. 그래서 온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했다.
공자가 유하계(柳下季)에게 말했다.
“한 사람의 아버지 된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 아들을 훈계(訓戒)할 수 있을 것이요. 한 사람의 형 된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 아우를 가르칠 수 있을 것일세. 만약 아버지로서 그 자식을 훈계할 수 없고, 형으로서 그 아우를 가르칠 수 없다면, 부자와 형제(兄弟)간의 친애(親愛)도 그리 대수로운 것이 못 될 것이네. 지금 자네는 세상이 알아주는 재사(才士)이면서, 그 아우는 도척이라는 대도(大盜)가 되어 천하에 해를 끼치고 있는데도 그를 가르치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속으로 자네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네. 내 그대를 대신해 가서 그를 설득(說得)해 보겠네.”
유하계(柳下季)가 말했다.
“자네는 한 사람의 아비 된 사람은 반드시 그 자식을 훈계(訓戒)할 수 있고, 한 사람의 형 된 사람은 그 아우를 가르칠 수 있다 하였네만, 만약 자식이 아버지의 훈계를 듣지 않고 동생이 형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나? 또 도척(盜跖)이란 녀석의 사람됨은 마음은 용솟음치는 샘물같이 끝이 없고, 의지(意志)는 회오리바람같이 사나우며, 완력(腕力)은 어떤 적이라도 막아내기에 충분(充分)하고, 그 언변(言辯)은 자기의 비행(非行)을 꾸며대기에 충분하다네, 제 마음에 들면 좋아하지만, 제 마음에 듣지 않으면 성을 내며 함부로 욕을 해대니, 부디 가지 말게나.”
그러나 공자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안회(顔回)에게 수레를 몰게 하고 자공(子貢)을 오른편에 앉힌 뒤 도척(盜跖)을 만나러 갔다.
공자는 도척(盜跖)보다 위선자(僞善者)이다 - 장자(잡편) 제29편 도척 -
도척(盜跖)이 한창 태산(泰山)의 남쪽에서 졸개들을 쉬게 하고, 자신은 사람의 간(肝)을 회를 쳐 먹고 있었다. 공자(孔子)가 수레에서 내려 앞으로 나아가 도척(盜跖)의 졸개를 보고 말했다. “노나라에 사는 공구(孔丘)라는 사람이 장군(將軍)의 높은 의기(義氣)를 듣고 삼가 재배(再拜)로써 알현(謁見)코자 합니다.”
졸개가 들어가 아뢰니, 도척(盜跖)이 그 말을 듣고 노하여 눈은 샛별같이 번뜩이고, 머리카락이 치솟아 관을 찌를 듯했다. “그건 저 노(魯)나라의 위선자(僞善者) 공구가 아니냐? 내 대신 그에게 전하라. 너는 적당(適當)히 말을 만들고 지어내어 함부로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칭송(稱頌)하며, 머리에는 나뭇가지 같이 이것저것 장식(裝飾)한 관을 쓰고, 허리에는 죽은 소의 가죽으로 만든 띠를 하고 다니면서, 부질없는 소리를 멋대로 지껄이고, 농사를 짓지도 않으면서 먹고살며, 길쌈을 하지도 않으면서 옷을 입는다. 입술을 놀리고 혀를 차면서 제멋대로 옳다 그르다 판단(判斷)을 내려 천하의 군주(君主)들을 미혹(迷惑)시키고, 학자들로 하여금 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면서, 함부로 효니 공손(恭遜)함이니 우애(友愛)니 하는 것을 정해놓고 제후(諸侯)들에게 요행히 인정을 받아 부귀(富貴)라도 누려볼까 하는 속셈을 갖고 있다. 네 죄는 참으로 무겁다. 당장 돌아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네 간(肝)으로 점심반찬을 만들 것이다.”
공자가 다시 졸개를 통해 말했다. “저는 장군의 형님인 유하계(柳下季)와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부디 장군(將軍)의 신발이라도 쳐다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졸개가 다시 전하니 도척(盜跖)이 말했다. “이리 데려 오너라.”
공자(孔子)는 총총걸음으로 나아가 자리를 피해 물러서면서 도척(盜跖)에게 크게 두 번 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