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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甲辰年 새해 하시는 일들이 日就月將하시고 乘勝長驅.하시고 萬事亨通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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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숙(未熟)한 글이 나중엔 완숙(完熟)한 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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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완벽(完璧)하지 않다. 또 아무리 잘 쓴 글도 완전무결(完全無缺)하지 않다. 내가 쓴 글을 보면 기분이 상한다. 다시 읽어 보면 허술함이 많아서이다. 그래서 좀 더 잘 썼을 걸 하고 후회(後悔)하고 자책(自責)도 한다. 그러나 오타(誤打)만 없다면 두 번 다시 손을 대지 않는다. 못나도 내 글이니까.

이처럼 미숙한 글에 대한 반성(反省)은 앞으로 좀 더 잘 쓰자는 자신과의 약속(約束)이다. 글의 성패(成敗)는 인간내면과 의식세계(意識世界)에 잠재한 정신적인 완숙과 미완숙(未完熟)이 결정(決定)한다. 나는 자신을 미완성된 인간 혹은 미성숙 사람이라고 자인(自認)한다, 내 글과 내 심성은 아직 치기(稚氣)와 동취(童趣)에 머물러 있다. 미성숙(未成熟)의 치졸(稚拙)함은 내가 글쓰기에서 자아를 완성(完成)해가는 과정을 밀어주는 원동력(原動力)이 된다. 당연히 나이와 신체 그리고 정신의 미완성 뿐 만 아니다. 나는 내 사색의 주재자(主宰者)인 내면의 세계가 미완성에서 완성에로 농익는 성숙한 계절(季節)로 접근한다고 본다.

나는 성숙되고 완벽하고 완성된 인격에 대해 거부감(拒否感)을 느낀다. 차라리 허물 많어도 독특한 개성을 소유한 것에 더 공감(共感)한다. 그래서 멋있게 완성된 문장(文章)보다도 미숙하고 허물 많은 글이 더 좋다. 그러는 중에서 독특한 사고, 기발(奇拔)한 견해, 독자적(獨自的) 관점을 수립(樹立)할 수 있다. 노란 자위가 없는 계란(鷄卵)이 아무리 크고 보기 좋아도 별로 영양가(營養價)는 없다.

술도 그렇고 안주도 그렇다. 주향(酒香)이 있는 술이 좋고 구미(口味)가 동하는 안주가 좋다. 유명브랜드가 아니어도 독특한 제품이라면 다 선호(選好)한다. 그리고 이성(異性)에 대해서도 그렇다. 너무 완벽(完璧)한 여인이나 너무 똑똑한 여성은 위압감(威壓感)에 눌린다. 또한 모종 거리감이 있어 영 부담스럽다. 오히려 미인은 아니지만 어딘가 품위(品位)와 센스가 있는 여자가 좋다. 젊어서는 우아(優雅)한 미인을 선호했다. 지금은 용모보다 심성(心性)을 더 선호(選好)하게 된다.

나 주관적인 관점으로 볼 때, 뭐든지 흠이 있어야 아름답다. 세상은 추(醜)가 있어서 미(美)가 동반한다. 흔히들 “옥에 티”라고 한다. 일종 티를 꺼리는 경향(傾向)이다. 오히려 매끈한 옥보다도 여인의 코밑에 점 하나 붙은 그런 “티”가 더 매력(魅力) 있다. 그래서일까? 홍자성(洪自誠)은 채근담(菜根譚)에서 “화간반개(花看半開), 주음미취(酒飮微醉)”라고 했은즉 “꽃은 절반 핀 꽃이 곱고, 술은 약간 취함이 좋다”고 피력(披瀝)했다. 또 그 뒤 구절에서는 영만(盈滿)을 바라는 자는 심사숙려(深思熟慮)할 것”을 권장(勸獎)했다.

그렇다. 꽉 차지 않고 어딘가 빈 구석이 있고 흠 있어도 좋다. 만약 내게 사상(思想)이 있다면 늘 변하는 흐름의 과정(過程) 속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변하는 과정이 언제 어떻게 어떤 방향(方向)으로 바뀔지 모른다. 때문에 나는 내 주관(主觀)을 미성숙으로 규정(規定)해도 좋을 만큼 “미완”을 즐긴다. 무릇 사물(事物)이나 사상은 단번에 완성(完成)된 것이 아니다. 완성되는 과정에 의의(意義)가 있고 보람이 있다. 

나는 완숙한 홍시(紅柿)가 농익어 땅에 떨어지는 모습을 상상(想像)해본다. 그러면 완숙의 종말(終末)이 보인다. 샛노란 은행나무 잎들, 빨갛게 물든 단풍잎이 우수수 낙엽으로 떨어지는 모습에서 자연 섭리(自然攝理)에 따라 만물도 완숙의 계절에 이르면 곧 사명(使命)을 다 했구나 하고 깨닫는다. 

사라짐의 종내(終乃)는 죽음이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의 존시가 병상(病床)에 누워 한 잎 남은 마지막 나뭇잎에 온 신경(神經)을 다 쓴다. 그런 존시를 위해 잎새를 그려준 베어면의 마음씨가 아름답다. 또 사라질 때면 사라지는 낙엽도 아름답다. 낙엽이 아름다운 까닭은 자신의 죽음으로 봄이 오면 신록이 피는 희망을 묻었기 때문이다.

희망은 죽음과 미완에서도 살아난다. 글쓰기에서 꺾기지 않고 완강히 버티는 굵은 심(芯)이 있어야 한다. 그 어떤 관념적인 제약이 아니라 완성된 완숙이 아닌 미숙과 미완의 완성이다. 아직 부족하다. 아직 모자라다. 아직 꽉 차지 않은 빈구석이 많이 드러난다. 그러니 좀 더 잘 쓰고 좀 더 많이 써야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독서하고 글쓰기를 해야 한다. 빈 계단의 공백을 메우려고 애써야 한다. 한 층 또 한 층 위로 오르는 희열, 변하고 또 변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은 이루다 표달할 수 없다. 변하지 않으면 도태(淘汰)된다. 그래서 좀 더 변하려고 사람마다 애써 층계를 오르는 것이다.

생활에서의 자유분방(自由奔放)은 어찌 보면 일종의 방종(放縱)이다. 그러나 사람은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면 안 된다. 이곳저곳 여러 곳에서 살아야 잠재(潛在)된 특성을 발휘(發揮)할 수 있다. 다름 아닌 미완성된 인간이기에 자신에 대해 자부 아닌 만족을 못 느낀다. 자신(自信)하면서도 불만형(不滿型)이다. 자부(自負)는 있되 자족(自足)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미완숙한 야심가는 아니다. 어느 철학자는 ‘인간, 그 본성과 세계의 위치’에서 “인간은 생리학적 결함을 문화적 행동(文化的行動)으로 메우고 있는 존재로서, 원숭이 태아가 문화적으로 훈육(訓育)된 것이다”고 천명(闡明)했다. 즉 “결함적인 동물(動物)”인 인간은 누구나 그 결함(缺陷)에 메우는 행동을 하도록 숙명(宿命)을 타고 난 생물(生物)이라는 말이 된다. 이처럼 “결함적인 동물”의 설법 같이 나는 자신의 미완의 “빈칸”을 한 칸 또 한 칸씩 메우는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한 칸 한 칸씩 사상은 바뀌고 인간은 변한다.

빈틈이 있어야 할 일이 많다. 나는 우물에서 숭늉 찾는 성급함보다 천천히 서두르는 유유자적(悠悠自適) 행동원리를 준수(遵守)한다. 물론 준비 없는 성급함은 금물(禁物)이다. 그래서 성급한 토끼보다 거북 같이 완만히 미완성(未完成)의 길을 걷고 싶다. 그리고 완숙한 홍시(紅柿)보다 아직 떫은 청시(靑枾)가 되고 싶다. 그러노라면 공기와 수분과 햇빛 속에서 점차 완숙(完熟)되어 갈 것이라는 기대(期待)를 품고 오늘도 열심히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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