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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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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거장인 제백석과 서비홍의 우정은 중국 화단의 미담(美談)


제백석(齊白石, 1863~1957)과 서비홍(徐悲鴻, 1894~1953)은 상해를 무대로 활약했던 중국 화단의 거장으로, 중국의 전통 회화(繪畫)를 근대화시킨 공로가 평가된다. 제백석은 호남(湖南)성 상담(湘潭)현 행자오성두당(杏子塢星斗塘)의 농촌에서 태어났으며, 원명은 순지(純芝), 호는 백석노인(白石老人)·노평(老萍)·아지(阿芝) 등이 있다.

제백석은 예술적 성취(成就)에 단계적 변화를 보여주는데, 제1단계는 27세 이전으로, 민간 문예와 심미관(審美觀)을 학습했다. 제2단계인 27~40세까지는 민간 화상(畵像)·민간 공예에 종사하는 한편 전문적으로 문인화(文人畵)·시서화(詩書畵)·전각(篆刻) 등을 학습했다. 제3단계인 40~50세에는 문인 화가의 신분으로, 여러 지역을 유람(遊覽)하고 각계 인사들과 교류하는 한편, 공필(工筆)에서 대사의(大寫意)로 화풍을 전환했다. 제4단계인 55~65세까지는, 북경에서 생활하며 '변법(變法)'을 고심했다. 제5단계인 65~94세까지는, 회화 창작의 최고봉(最高峰)에 이르렀다.

이런 그의 예술적 연원은 명·청 이래 혁신 정신이 투철한 화가, 즉 서위(徐渭)·석도(石濤)·금농(金農)·오창석(吳昌碩) 등을 계승했으며, 절파(浙派)에서 조지겸까지, 그리고 다시 진한비(秦漢碑)의 전각법을 계승하고, 위비(魏碑)를 융합시켜 새로운 전각의 일가를 형성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또한 전통적인 문인들의 교양과 농민의 기질을 융합(融合)시켜 아속(雅俗)을 겸비했으며, 특히 매미와 새우 등 화조초충(花鳥草蟲)에 두각을 나타냈다.

서비홍(徐悲鴻)은 미술가면서 미술행정가 겸 교육가로, 24세 때 프랑스로 유학(留學)했다. 9년간 근대 서양화(西洋畵)를 배웠으며, 귀국 후에 중국화 창작에 서양화 기법을 도입(導入)했다. 최초로 서양에 유학한 중국의 화가로, 서양 그림의 관념(觀念)과 기법·도구 등을 중국에 소개했으며, 미술 교육에 헌신적(獻身的)인 노력을 기울여 현재 중국 미술교육(美術敎育)의 기반을 마련했다.

해부학(解剖學)·색채학(色彩學)·소묘(素描)·비례법(比例法) 등을 강조했으며, 단순히 서양의 유화에 머무르지 않고 중국의 수묵화와의 접목을 시도해 새로운 수묵화(水墨畫)의 세계를 개척하기도 했다. 특히 그의 말 그림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제백석과 서비홍은 30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막역지교(莫逆之交)로 지냈다. 1920년대에 제백석은 이미 60대가 된 외로운 노인으로, 북경에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 반면 서비홍은 북평예술학원장(北平藝術學院長)을 맡은 저명한 미술행정가(美術行政家)였다. 그러나 서비홍은 제백석의 참신(斬新)하고 창조적인 그림에 감동해, 직접 그를 찾아가 예술원 교수로 초빙했으며, 여러 차례 거절했던 제백석도 마침내 감화(感化)되어 응하게 되었다.

제백석의 시범과 서비홍의 설명으로 이루어진 강의 형식은 학생들에게 큰 호응(呼應)을 얻었다. 그 일로 보수 세력의 비난(非難)을 받아 결국에는 원장직을 사임(辭任)하고 상해로 내려가게 되었지만, 이후에도 서비홍은 여러 글을 통해 제백석의 예술적 성취를 소개했을 뿐 아니라 중화서국에 제백석의 그림을 추천, 출판할 수 있게 했다. 제백석의 첫 번째 화집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 화집으로 제백석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의 우정(友情)은 아직까지 중국 화단의 미담(美談)으로 남아있다.

서비홍(徐悲鴻)의 '분마도'(奔馬圖)

 

휘날리는 갈기며, 웅비하는 말발굽 등 바람처럼 달리는 말의 체형 묘사(體型描寫)는 세찬 형세의 실물과 견주어 봐도 손색(遜色)이 없다. 너무도 사실적인 이 작품은 수분이 충분한 발묵(潑墨)을 사용해 한달음에 그려낸 수작으로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에 한 번 감상해 볼 만한 작품이다. 중국의 현대 회화가로 널리 알려진 서비홍(1894~1953)이 그린 말 그림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분마도(奔馬圖)'.

 

서비홍(徐悲鴻)의 '분마도'(奔馬圖)
중일전쟁이 치열하던 1941년 싱가포르에서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신사년(1941년) 8월 10일 후난성 창사에서 두 번째 전투가 있었다. 내 가슴은 걱정으로 애가 탔다. 이 전투의 결과는 아마도 이전의 전투와 같을 것이다. 나는 희망적이다'라는 친필로 쓴 분마제시(奔馬題詩)도 작품과 함께 남겼다. 당시 싱가포르로 피난(避難) 가있던 서비홍이 인민해방군의 영웅적 투쟁정신을 말의 속성(屬性)에 견주어 표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작가 서비홍은 네 살 때부터 화가인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웠고, 일본과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온 데 이어 1921년에는 베를린 미술학원을 나왔다. 말을 끔찍이도 아끼고 좋아했던 그는 말의 동적인 느낌을 해부학적으로 관찰하며 발묵(潑墨)을 자유자재로 구사(構思)해 감히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특징적인 기법(技法)을 고집했다. 말 그림을 통해 자신을 세계적인 작가로 알리는 계기(契機)가 됐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중앙미술학원장(中央美術學院長)을 거쳐 중화문화예술활동가 대표대회 주석까지 올랐다.

제백석(齊白石)의 군하(群蝦)와 청전호접(蜻蜓胡蹀)

새우(군하群蝦)
제백석은 인물, 산수, 화조, 초충 등의 모든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주관적인 표현을 중시한 사의화조화(寫意花鳥畵)가 가장 대표적이다. 작품 활동 초기에는 초상화를 비롯하여 화조와 초충의 공필화(工筆畵; 대상을 정교하고 세밀하게 그리는 기법)를 그렸다. 그 후 표현의 한계(限界)를 느끼고 자연의 여러 모습과 생물들의 특성을 관찰하여 수묵(水墨)과 채색으로 사의화조화(寫意花鳥畵)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의 화조화(花鳥畵)에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소재(素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특히 새우는 제백석이 가장 즐겨 그리던 소재이다.

이 그림은 새우의 무리를 수묵으로 자유분방(自由奔放)한 필치로 생동감(生動感) 있게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수묵의 농담효과(濃淡效果)를 이용해 새우몸체의 투명감(透明感)을 표현해 그의 비범한 필묵법(筆墨法)을 볼 수 있다.

잠자리와 나비(청전호접蜻蜓胡蹀)
제백석(1863~1957)은 20세기 중국의 저명한 화가로 후난 성 샹탄 현 출신이며, 시문(詩文), 서화(書畵), 전각(篆刻)에 모두 능통하였다. 본명은 순지(蒓芝)였으나, 나중에 황(璜)으로 바꾸었다. 자는 위청(渭靑)이며, 호는 백석(白石)이다. 가난한 목공(木工) 출신이었던 그는 서위(徐渭), 팔대산인(八大山人), 석도(石濤), 오창석(吳昌碩) 등의 화법을 계승하면서도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활달한 필치와 강한 채색을 통하여 자신만의 개성(個性) 있는 화풍을 이루었다. 사생을 중시하여 여행을 많이 하고 자연대상(自然對象)을 세심하게 관찰하였다. 특히 화조화(花鳥畵)에서 중국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寄與)를 했는데 그림의 소재(素材), 내용(內容), 형식(形式) 등에서 보수적인 화가들의 그림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 그림은 활달(豁達)하고 능숙한 필치(筆致)로 표현한 붉은꽃과 정교하게 묘사한 곤충(昆蟲)의 표현(表現)이 매우 뛰어나다. 간결하고 세련(洗練)된 구도에 선명하면서도 화려한 색채(色彩)의 표현으로 활면전체에 생기가 넘친다. 관기(款記)에 ‘갑술춘이월(甲戌春二月)’이라 적혀있어 1934년 봄에 그렸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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