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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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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식 없는 문장의 진실내용은 사물가치나 진위를 감정 식별해야 (1)

일찍 누군가 작가는 ‘생활 속에 다가가 생활을 잘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글쓰기는 소설이든 에세이든 실생활 속에 다가가 실재 진실을 글에 담는 데서 출발(出發)합니다. 세계 지평(地平)을 여는 작가는 넉넉한 입담을 재치 있게 풀어내는 변설가이어야 합니다. 또한 파란만장(波瀾萬丈)한 현실생활 속에서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며 살아온 인생의 신산(辛酸)한 삶을 따뜻한 인간애와 넘치는 해학(諧謔)으로 엮어내는 특기를 가져야 합니다.  

세계적 작가의 작품은 독자가 입가에 미소(微笑)를 띠게 하고 가슴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작가가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 언제나 공감과 연민(憐愍)의 끈을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사건들에는 본인의 감정이나 주관(主觀) 또는 입장이 개입(介入)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노련한 작가는 서술되는 이야기 속에서 최대한 자기 목소리를 배제(排除)하려고 무척 공을 들입니다. 이는 전개되는 대상과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고 객관성(客觀性)을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주관을 철저히 배제한 전달방식은 오히려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더 진솔(眞率)하고 감동적인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예리한 언어적 감식안(鑑識眼)을 보여주는 작가는 생활 속에서 ‘진수(眞髓)’를 발견할 줄 압니다. ‘사물이나 현상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뜻인 진수는 생활의 내면에 숨어있는 진실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을 문장 전체에 함축(含蓄)합니다. 작가는 사물이나 현상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을 한 문장에 구사(驅使)하여 진실에 가깝도록 표현하는 기교(技巧)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문장은 하나의 글자가 되어 그 의미의 자장(字章)으로 보자면 그것은 문자를 넘어 깊은 심연의 내용과 맞닿아 있다는 말과 상통(相通)합니다. 또 그것은 어떤 표현으로도 작가가 고심하는 문장의 갈림길 그 사이에 놓인 까마득한 심연(深淵)을 재현할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옛사람이 말했듯이 종이위에 쓰인 ‘새’라는 글자가 우짖지 못하는 이치(理致)와도 같습니다. 이제 서서히 생활을 그려내는 작가의 글자는 진수를 한 문장에 압축(壓縮)하고 그 위에 끝도 없는 물곬을 냅니다. 하여 글자 위에는 한 인물의 다양한 풍경이 포개지고 운명대로 살아가는 한 인간에 대한 묘사기법(描寫技法)이 겹쳐지는 것입니다. 이때 자연을 전체 풍경으로 읽어내는 독자의 ‘관망(觀望)’ 즉 무거운 시선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독자의 시선이 엄습(掩襲)해 오는 두려운 대상에 대한 일종의 제어장치(制御裝置)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작가의 감식안으로 축소(縮小)되는 것은 단순한 외적대상(外的對象)이 아니라 폭넓은 지각이 포착해 낸 다양한 생활이고 무정형(無定形)의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찮은 안목과 식견이 대상과 마주한 일별(一瞥)의 순간 생활의 흐름은 현실의 위력 앞에 노출된 인물의 왜소(矮小)함에 몸을 떨지만 동시에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감(存在感)을 확인하는 찰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식별(識別)할 수 없는 일정한 형식이나 모양이 없는 생활을 주인공의 언어로 읽어내는 순간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인식(認識)한 불행한 작가가 되는 것입니다. 

주지하듯이 작가의 글은 가늠할 수 없는 것들과 규정(糾正)할 수 없이 모호한 것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그 세계는 오로지 인물들의 동체(動體)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미끄러져 나오는 담금질을 반복하고 있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소설 속에서 동체를 감지(感知)하는 감각은 아름답지만 고정되지 않은 채로 세계를 배회합니다. 평론가의 서평에 따르면 작가의 미학적 성과는 미문(美文)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문장력은 삶을 향한 일종의 ‘탐미적(耽美的)’인 성향에서 극점에 이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자면 작가는 생존을 향해가는 인간의 본질적 생활을 내면화하는 견자(見者)의 허무를 보여주는 문장가이며 장인의 기율(紀律)을 성취하고 있으면서도 소멸(消滅)해가는 사물의 외로운 신화를 상연(上演)하는 중견작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요컨대 이러한 명명이 작가를 미학적 성취를 완성한 한 작가로 이름 하는 성숙(成熟)의 근거들입니다. 그럼에도 미학적 차원(次元)에서 작가의 글을 말한다는 것은 문장 전체를 아우르는 데 충분하지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인물들이 세계와 독대(獨對)하면서 보여주는 끈질긴 사투(死鬪)는 근접할 수 없는 세계 쪽에 무게를 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무력하게나마 그것에 응답하는 인간적인 열정 쪽에 방점(傍點)을 찍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생활 그 활동의 순간에 대한 관심보다는 방법적 몸부림 이후의 ‘삶’에 대해 집착(執着)을 보이고 있다는 측면과도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삶 앞에 선 인물들은 사변적(思辨的)이고 관념적인 인물로 몸부림을 조망(眺望)하는 구도자(求道者)의 자리를 내주고 몸부림이라는 외적 세계를 인정하면서 삶이라는 내적 승리를 성취하게 되는 모순적 상황 속에 연루(連累)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인물들의 감각적인 경험들은 그 자체로 세계가 가진 모순의 증표(證票)이고 결핍의 징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운명적 통증은 죽음과 삶이 접 붙은 시간대로 이들을 몰고 가는 원동력입니다. 말하자면 소멸점(消滅點)에 거의 다다른 순간에야 드러나는 위기(危機)의 존재론이라는 표현으로 작가의 인간학을 함축(含蓄)할 수 있을 듯합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아름다움은 관조(觀照)할 수 있는 거리를 통해 발생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감성분열(感性分裂)의 지점과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주체는 틈새의 흡입력에 저항(抵抗)하며 질식할 것 같은 고통을 감수하게 됩니다. 때문에 관망대를 빼앗긴 헐벗은 주체는 집 없는 신세로 세계를 정처 없이 유랑(流浪)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작가의 문장은 최근 생기발랄한 상상력의 형식으로 신종 유목민(遊牧民)을 자처하는 젊은 작가들의 행보와 차별점(差別點)을 갖습니다. 요컨대 그것은 목동의 설렘이 아닌 목자의 연대별로 유행이 다시 돌아오는 것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작가의 인물들은 이미 유랑민(流浪民)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아니라 이 땅의 토착민(土着民)으로 대를 이으며 살다가 고독한 유랑 길에 오른 어른들이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초라한 생존의 부재를 준비하는 인물들의 무참한 인생은 문장의 장기(長技)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여기서 다시 생활적인 문장상황을 통해 작가가 일종의 허무주의(虛無主義)를 문제 삼는 심층적인 동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삶의 허무를 부정하고 세계의 혼란과 모순(矛盾)을 제어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하여 인물들의 묘사적 허무는 작가가 세계의 역설(逆說)을 견디는 무기가 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인물의 입을 빌어 세계를 향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추측(推測)하건대 그것은 이제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들 닳고 닳아 무력해진 질문들일 듯합니다. 예컨대 소설은 무엇인가? 소설(小說)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소설은 무엇을 재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언어와 세계의 근본적인 불일치를 목도(目睹)하고 재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의심조차 통념(通念)이 되어버린 지금 여기에 자신의 죽을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노숙(露宿)하는 문학의 장소에 대해서 작가가 새삼스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은 일견(一見) 공허한 냉소를 전제한 노숙(老熟)한 질문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학에 대한 정직한 자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솔직하고도 성실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이미 패배(敗北)가 전제된 문장 혹은 퇴출을 강요(强要)하는 문장이라는 불우한 정황 속에 소설적 거점(據點)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보수적인 논객(論客)을 자처하는 작가의 낡은 질문들이 어떤 방식으로 신생(新生)하게 되는지 살펴보도록 합니다. 

숭고한 이본(異本)이 달라 보이나 다르지 않은 문제는 출발점(出發點)에 있습니다. 주지하듯이 무서우면서 아름다운 세계라는 역설적 공간에서 살아가면서 신생하는 모순적 순간에서 작가의 소설은 시작합니다. 인물이 서 있는 공간은 ‘나와 너의 사이’에 삶과 삶이 맞닿은 ‘틈새’와 생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가랑이입니다. 이러한 모호(模糊)한 대상은 환유적(換喩的)으로 소설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작가에게 삶은 언제나 낯선 태초의 삶일 뿐인데 그것은 삶에서 경계(警戒)는 늘 불분명했고 경계의 불분명함은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경계 위에 선 자만이 경계의 모호함을 확인할 수 있듯이 “나인지 너인지 식별”할 수 없기에 조준(照準)조차 할 수 없는 삶은 이제 “전방위적”인 삶이 되고 “무정형”의 삶이 됩니다. 이러한 단순한 문장구조 안에는 압도적인 대상과 대결(對決)하는 인물의 내면이 공존합니다. 이때 한 문장 안에 배치(排置)된 모순적인 감정은 ‘나는 삶이 가여웠고, 삶이 무서웠다. 가여움과 무서움이 같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식의 표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립(對立)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감정이 대위법적(對位法的)으로 공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주제적인 함의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문장은 작품 전체를 지고 가는 무게를 갖게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작가는 이러한 긴장(緊張)을 문장의 구성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간(行間)으로 번지고 문단으로 퍼져서 작품을 통어하는 하나의 구성 원리로 확장시키고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역설적(逆說的)인 문장은 작가를 감각적이고 주관적인 묘사를 하는 작가로 말하게 하면서 동시에 객관적이고 냉철한 묘사를 보여준다는 이중적(二重的)인 평가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러한 특징은 세계 앞에서 한없이 보잘것없는 주인공이 왜소하면 할수록 더욱 강력해지는 일인칭(一人稱)의 세계를 가시화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작가는 구사하는 인간의 삶과 더불어 그 이면의 쓸쓸한 그림자를 주목(注目)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대적인 삶의 주인공과 나약(懦弱)한 인간인 ‘나’가 조우(遭遇)하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마감할 수 없는 선택된 운명을 사는 존재입니다. 인간일 뿐 아니라 한 나라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뼈대는 파국적(破局的) 구성을 이룹니다. 인물이 ‘삶’에 허위로 가득 찼다는 가정은 주인공을 허수아비로 만든 치명적인 근거가 됩니다. 실상 ‘허수아비’는 인간과 인간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고안되고 조작(造作)된 것입니다. 삶이 인물에게 내린 허수아비 면모가 아닌 한시적인 가정(假定)이라는 점에서 불안한 존재조건을 환기시킵니다. 예를 들어 소설 ‘이순신’은 “나는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고 술회(述懷)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여기서 ‘나는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문장은 소설전체에서 역설적(逆說的)으로 존재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절망적 상황을 말함과 동시에 무의미한 죽음에 대한 저항(抵抗)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여야 할 것들을 다 죽여서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 있게 된 연후에”야 죽겠다는 비관의 전언(傳言)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물의 삶이 점차 광기(狂氣)로 변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나는 누구냐? 라는 질문은 누가 나이냐? 라는 질문으로 바뀌었습니다. 질문의 구조가 바뀌자 나의 허깨비는 피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권력과 관념이 스스로 자신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삶의 무력(無力)은 누구든 삶을 포기할 수 있는 실망의 존재를 과시합니다. 역설적으로 그 절망이 조작된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무력(無力)함을 시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삶의 과정이 노출된 이상 그것은 제 힘을 갖지 못합니다. 스스로 정당성(正當性)을 확보하지 못한 삶은 수많은 불행을 부릅니다. 허깨비가 실체로 그 실체가 환영(幻影)으로 떠돌아다니는 것을 확인하면서 자신의 정체성(正體性)도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삶은 생의 정당성을 사수(死守)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현실구조가 절대 원칙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인물은 절망의 나락(奈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파국(破局)의 의미가 단순한 불행이 아니라 근거의 몰락(沒落)에 닿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운명은 삶을 생으로 삼을 수 없게 하고 헛것인 나와는 대결(對決)이 불가능합니다. 또 삶은 나의 존재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역설적(逆說的) 위치를 인식합니다. ‘너의 나’로 규정된 정체성은 정체성 자체의 분열(分裂)을 함축합니다. 따라서 삶은 생이 아닌 ‘자신이 수긍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절망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이때 나의 ‘상징적’인 절망(絶望)은 시작됩니다. 그의 삶은 생의 규율을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완성됩니다. 법에 적극적으로 저항함으로써 그 불합리성(不合理性)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가장 충실히 준수함으로써 법의 부조리함과 균열(均熱)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삶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이제 위대한 이름의 영웅적인 삶에서 고독한 한 남자의 절망으로 눈을 돌리기로 합니다. 삶이 생을 벗어나 여인과 사랑을 나눌 때 남자는 ‘지금 인간이 아니다.’ 남자가 ‘여인’을 안았을 때의 느낌은 몸이 기억하는 감각들입니다. 그 감각은 몸이 기억한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일인칭(一人稱)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대의명분을 대표하는 인간의 세계에서 눈물 흘리는 한 남성의 세계로 옮겨오면서 정열(情熱)로서의 상징은 성기로서의 상징으로 몸을 갖습니다. 여인에게 느낀 안온함과 애정은 그녀의 비참한 생과 함께 참을 수 없는 ‘젓국냄새’와 누린내로 남습니다. 이들 ‘사랑’의 비극과 불행의 시작은 개개인의 운명, 그 ‘개별성’의 질문으로 되돌아옵니다. 다시 누구를 위한 사랑인가. 성적인 상징으로 육체를 입은 ‘사랑’은 불행이라는 공간을 약육강식(弱肉强食)이 지배하는 남자의 세계로 확장시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여기 남자의 세계란 강자의 세계가 아닙니다. 비극의 인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약자의 세계이고 쫓겨난 자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참혹(慘酷)하게 고통스러워하는 실존적인 인간의 절망적인 심정을 드러내는 데 소설의 상당 부분이 할애(割愛)됩니다. ‘무고한 사랑’이라는 모순적인 수사는 의미 없는 비극을 함축(含蓄)합니다. 동시에 ‘비극적인 사랑’이라는 사회적 호명에 값합니다. ‘죽을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한 남성의 질문은 자신의 근거를 잃은 신음소리이며 사랑의 의미를 회의(懷疑)하는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가치를 갖기 위해 버린다’는 비극적인 대답은 내면적인 불행의 의미로 응답(應答)합니다. 내면적인 비극을 성취함으로써 외면적인 불행의 무의미함을 극복(克服)하는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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