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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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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법가의 대표자이자 선진 시기 최후의 대사상가인 한비자 (2)


현명한 군주가 신하를 제어하기 위하여 의존할 것은 두 개의 권병(權柄)뿐이다. 두 개의 권병이란 형(刑)과 덕(德)이다. 무엇을 일컬어 형과 덕이라 하는가? 처벌하여 죽이는 것을 ‘형’이라 하고 칭찬(稱讚)하여 상 주는 일을 ‘덕’이라 한다. 신하 된 자는 처벌을 두려워하고 상 받는 것을 이득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군주(君主)가 직접 형을 집행하고 덕을 베푼다면 신하들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이득을 얻는 쪽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권병(權柄)이란 ‘권력의 수단’을 의미한다. 한비자(韓非子)가 ‘덕’의 의미를 “칭찬하여 상 주는 일”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데서 우리는 그의 ‘덕’ 개념이 이미 유가적인 ‘내면으로부터 발현되는 도덕 의지’의 범주를 벗어나서 ‘공리적 수단’의 의미로 전이(轉移)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비자의 어법(語法)을 관찰해볼 때, 그가 ‘덕’을 부정할 때는 ‘내면에서 발현되는 도덕 의지’의 공소성(空疎性)을 지적하지만, 그는 ‘공적에 상응하는 대가’(賞)의 의미로 여전히 ‘덕’ 개념(槪念)을 운용하기도 한다. 그가 사용하는 ‘덕’ 개념은 인간의 내면에서 발현(發現)되는 도덕 의지가 아니라 객관적 공적에 상응하는 물질적 대가(物質的代價)임을 알 수 있다. 

(4) 백성들의 인성(人性)은 비열하기 때문에 인애(仁愛)로 교화할 수 없다 
한비자(韓非子)가 ‘인의’를 배격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인성에 대한 불신(不信)에서 연유한다. 한비자에 의하면, 부모가 사랑을 베푼다고 해서 불초(不肖)한 자식이 바르게 고쳐지는 것은 아니며, 군주가 ‘인’을 베푼다고 해서 백성들이 질서를 지키게 되는 것은 아니다. 불초한 자식을 길들이기 위해서 부모의 사랑이나 스승의 가르침과 같은 ‘교화(敎化)’의 방식은 별 효과가 없으며 차라리 ‘법’이 더욱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고 본다. 그는 백성들이란 사랑해주면 오히려 기어오르려 하고, 힘으로 위압(威壓)할 때 비로소 고개를 조아리는 비열(鄙劣)한 존재라고 여긴다. 불초한 자식이 있어 부모가 노해도 고치려 하지 않고, 마을 사람이 꾸짖어도 움직이지 않으며, 스승이나 어른이 가르쳐도 바뀌려 하지 않는다고 하자. 부모의 사랑이나 마을 사람의 지도와 스승과 어른의 지혜라는 세 가지 미덕(美德)이 가해져도 움직이지 않고 고치지 않다가, 지방 관청의 관리가 관병을 이끌고 공법(公法)을 내세워 간악한 행동을 바로잡으려고 하면 그때서야 비로소 두려워하며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고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의 사랑도 자식 가르치기에는 부족하며, 반드시 관청(官廳)의 엄한 형벌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백성은 본래 사랑에는 기어오르고 위압에는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군주라면 법을 험준(險峻)하게 하고 형벌을 엄격하게 한다. 

‘인애’에 의한 도덕적 교화가 불가능하다는 한비자(韓非子)의 입장은 자연히 ‘형벌과 포상’ 즉 ‘당근과 채찍’이라는 공리적 수단(公利的手段)을 사용하여 백성들을 제어하는 통치 방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형벌과 포상이라는 두 수단 가운데, 한비자는 특히 형벌을 주된 수단으로 삼아야 하며 포상(褒賞)은 자주 내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형벌을 가함은 백성을 미워함이 아니라 사랑의 근본(根本)이 된다. 형벌을 우위로 하면 백성이 안정되고, 포상을 빈번히 하면 간악이 생긴다. 그러므로 백성을 다스릴 때 형벌을 우위로 함이 다스림의 첫째이며, 포상을 빈번히 함은 혼란(混亂)의 근본이다. 도대체 백성의 심성은 혼란을 좋아하고 법에 친숙하지가 않다. 그러므로 현명한 군주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포상을 분명히 하면 백성이 공을 세우려 힘쓰고, 형벌(刑罰)을 엄격히 하면 백성이 법에 친숙해진다. 백성들의 본성을 “사랑에는 기어오르고, 위압에는 굴복(屈伏)하는 비열한 존재”로 여기거나 “혼란을 좋아하고 법에 친숙하지 않은 존재”로 파악하는 한비자의 관점(觀點)은 자연스럽게 ‘상과 벌’이라는 공리적 수단을 가장 유효한 통치 방법으로 채택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한비자는 “군주가 불인(不仁)해야 오히려 패업(霸業)을 이룰 수 있다”라고 역설하는 것이다. 

(5) ‘인의’라는 사적 도덕은 법의 공공성을 파괴한다 
위에서 보았듯이, 한비자는 신하에 의해 시행되는 ‘인’은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에 불과하다고 파악했다. 이런 관점에서 파악된 ‘인’은 보편적 도덕규범(道德規範)의 성격을 띠지 못하고 편파적(偏頗的)이거나 파당적(派黨的)인 사덕(私德)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담당하고 있는 관직을 이용하여 지인이나 친인척에게 베푸는 은덕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파괴하고 특정 집단에만 이익을 몰아다주는 정실주의(情實主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한비자(韓非子)는 공직에 몸담고 있는 관리가 ‘인’과 ‘애’를 베푸는 일은 곧 ‘공공 재화의 유용’과 ‘편파적인 특혜’로 귀결(歸結)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오랜 친구라 하여 사적 은혜를 베풀면 ‘자기를 잊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공공의 재화를 마구 흩뿌리면 이를 가리켜 ‘인자한 사람’이라 한다. 봉록(俸祿)을 가볍게 여기고 처신을 중시하면 이를 가리켜 ‘군자’라고 한다. 법을 왜곡하여 친족을 곡진(曲盡)하게 대하면 이를 가리켜 ‘덕이 있다’라고 한다. 오랜 친구를 버리지 않는 자는 관리로서 악을 저지르는 자이다. 인자한 사람이란 공공의 재화(財貨)를 손상시키는 자이다. 군자는 백성을 부리기 어렵게 만드는 자이다. 친족에게 곡진히 대하는 자는 법의 공정성을 훼손(毁損)하는 자이다. 

신하가 사사로이 덕을 베푸는 일도 불공정성의 의혹(疑惑)을 낳지만, 군주 자신에 의해 시행되는 ‘인’도 이와 비슷한 결과를 초래한다. 한비자는 제왕(齊王)의 인자함을 예로 들어, 군주에 의한 ‘인’의 시행은 특정 집단에게만 특혜(特惠)를 가져다줌으로써 사회 질서의 공정성을 파괴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성환(成驩)이 왕에게 말하기를 “왕께서는 너무 인자(仁)하시고 지나치게 남을 동정하십니다(不忍)”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인자함이 많고 동정심이 많은 것은 좋은 일 아닌가?” 성환이 답하기를 “왕께서는 설공(薛公)에게 너무 인자하시고 전(田) 씨 일족에게는 지나치게 동정을 베푸십니다. 설공에게 너무 인자하시면 (설공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다른 중신들의 권위가 없어지고, 전 씨 일족에게만 동정을 베푸시면 그 일족의 장로들이 법을 어기게 될 것입니다. 이는 나라가 망하는 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볼 때 한비자가 ‘인’을 배격(排擊)하는 또 다른 이유는, 국가라는 공적 영역에서 ‘인애’라는 사적 규범이 작동하게 되면 편파성과 파당성이 발생하여 객관성과 공정성(公正性)을 상실하게 될 뿐 아니라 특정 가문이나 집단에 힘을 실어주게 되어, 결국은 공적 질서가 무너지고 군주의 권위(權威)가 약화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한비자(韓非子)는 국가라는 공적 영역에서 관철되어야 할 유일한 규범은 오직 ‘법’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6) 효율적인 지배 질서 확립을 위해서는 인애(仁愛)보다 중형(重刑)이 효율적이다 
백성들의 본성을 “사랑에는 기어오르고 위압에는 굴복(屈伏)하는 비열한 존재”로 파악하는 한비자(韓非子)의 입장은 자연히 ‘인애’에 의한 교화 대신 관료 체제의 ‘위엄’과 형벌 제도의 ‘엄격함’에 의거한 권위주의적 통치를 선호(選好)하기 마련이다. 백성을 법으로 금하지 염치(廉)로 그만두게 할 수는 없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아버지의 곱절이나 되지만, 아버지의 명령(命令)이 자식에게 행해지는 것은 어머니의 열 배나 된다. 관리가 백성들에게 애정은 없지만 명령이 백성들에게 행해지는 것은 아버지의 만 배나 된다. 어머니가 사랑을 쌓더라도 명령이 통하지 않지만, 관리는 ‘위엄’을 사용하므로 백성이 따르게 된다. ‘위엄’의 방법과 ‘애정’은 방법은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이다.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애정’보다는 ‘위엄(威嚴)’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위하주의(威嚇主義)적 통치 이념은 자연히 엄격한 법 집행과 무거운 형벌을 선호하는 중형주의적 통치 방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중형주의(中刑主義)는 전기 법가인 상앙(商鞅)에 그 기원을 둔다. 한비자(韓非子)는 상앙(商鞅)의 법을 예로 들어 중형주의적 통치 방식을 이렇게 정당화한다. 공손앙(公孫鞅)의 법에서는 작은 잘못도 무거운 형벌로 다루었다. 중죄(重罪)는 사람이 범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작은 잘못은 사람이 쉽게 피해갈 수 있는 것이다. 쉽게 피할 수 있는 작은 잘못을 피하도록 함으로써 범하기 어려운 큰 죄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잘 다스리는 길이다. 작은 잘못이 일어나지 않음으로써 큰 죄에 이르지 않게 한다면,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혼란(混亂)도 발생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작은 잘못에도 무거운 형벌을 부과(附過)함으로써 큰 잘못을 사전에 예방하자는 것이 중형주의의 요점이다. 한비자(韓非子)는 백성을 가엾게 여겨 형벌을 감면해준 제(齊) 경공(景公)을 예로 들면서, 인애(仁愛)의 정치는 오히려 악한 자를 이롭게 하고 선한 자를 해치게 되어 공적 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고 비판한다. 한비자가 제시하는 일화에 의하면, 제 경공에게 안영(晏嬰)이 형벌을 낮추어 주기를 청했다. ‘다리 잘리는 형벌’(刖刑)을 받은 사람이 늘어나 의족 값이 등귀하고 신발값은 폭락(暴落)할 정도로 형벌 받은 사람이 많아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제 경공은 자신의 포학(暴虐)함에 놀라며 형벌을 한 단계를 낮추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한비자는 경공의 처사를 이렇게 비판한다. “형벌이 정당(正當)하다면 많더라도 많은 것이 아니며, 정당하지 못하다면 적더라도 적은 것이 아니다. 형벌을 느슨히 하고 너그럽게 은혜(恩惠)를 베푼다면 이는 간악한 자를 이롭게 하고 선량한 사람을 해치게 된다. 이는 잘 다스리는 길이 아니다.” 

한비자(韓非子)는 공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엄격한 법집행’과 ‘무거운 형벌’을 제안하는 외에도, 주민들 사이에 ‘상호 감시 체제’를 도입(導入)할 것을 주장한다. 훗날 진(秦)이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한비자의 이러한 주장이 채택되어 ‘연좌제’(連坐制)의 형식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봉건 시대의 악법(惡法)이라고 평가되는 이러한 제도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7) 공공성의 확립을 위해서는 평등하고 엄격한 법 집행이 필요하다 
사회 규범의 공공성은 ‘규범의 보편적 적용’이라는 절차적 합리성(合理性)에서 찾을 수 있다. 상과 벌은 반드시 공정하고 엄격한 원칙(原則)에 따라 시행되어야 하며, 신분의 상·하나 친분 관계의 친·소에 따라 다르게 적용(適用)되어서는 안 된다. 한비자는 법 적용의 엄격성(嚴格性에) 대하여 이렇게 설파한다. 

“상을 아무렇게나 주면 공신(功臣)도 그가 할 일을 게을리 하게 되고, 형벌(刑罰)을 용서하면 간악한 신하(臣下)가 쉽게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정말 공이 있다면 비록 멀고 낮은 신분의 사람이라도 반드시 상을 주어야 하며, 정말로 허물이 있다면 비록 친하고 총애(寵愛)하는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신분의 상하에 관계없이 평등하고 엄격하게 법 적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예로, 한비자는 초(楚) 장왕(莊王)의 태자가 법 규정을 어긴 일을 든다. 초나라에는 궁전 출입에 관한 규정이 있었다. 규정(規定)에 의하면 “여러 신하와 대부 그리고 공자(公子)들이 조회에 들어올 때 말발굽으로 빗물받이를 밟는 자가 있으면 수레 채를 자르고 수레 모는 종을 죽인다.”라고 되어 있었다. 하루는 태자가 조회에 들어올 때 잘못하여 말발굽으로 빗물받이를 밟자, 지키던 관리가 태자의 수레 채를 자르고 종을 죽였다. 이에 태자가 왕에게 달려가 그 관리를 죽여 달라고 읍소(泣訴)했다. 그러나 왕은 법이 지켜지지 않으면 신하가 군주(君主)를 넘보게 되고, 신하가 군주를 넘보게 되면 사직이 망하게 된다는 이유를 들어 태자의 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태자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是認)하고 3일 동안이나 궁 밖에서 자면서 죽을죄를 청하였다. 이처럼 지위의 상·하나 친분관계의 친·소에 관계없이 엄격한 법 집행(執行)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한비자의 정치사상은 진보적(進步的)인 성격을 지닌다. 

한비자(韓非子)는 엄격한 법 집행과 관련하여, 아무리 ‘좋은 동기’에서 나온 행위라 할지라도 이러한 행위가 정해진 규정을 넘어서거나 직분을 위반한 것이라면 가차 없이 처벌해야 한다고 본다. 한비자는 그 예로 한(韓) 소후(昭侯)의 궁전에서 일어난 일을 든다. 한의 소후가 술에 취하여 잠이 들었다. 관(冠)을 담당하는 시종이 군주가 추울 것을 염려하여 몸 위에 옷을 덮어주었다. 소후가 잠에서 깨어나 옷을 덮어준 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좌우가 “관을 담당하는 자”라고 답하였다. 이에 소후는 옷을 담당하는 시종과 관을 담당하는 시종을 함께 처벌(處罰)하였다. 옷을 담당하는 시종을 처벌한 것은 그가 수행해야 할 직무를 게을리 했기 때문이며, 관을 담당하는 시종을 처벌한 것은 그가 직분(職分)을 넘어서는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이를 예로 들면서, 아무리 좋은 동기에서 나온 선행(善行)일지라도 직분을 넘어서거나 규정을 위반하는 행위에는 가차 없는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고 강조(强調)한다. 

엄격한 법 집행과 관련된 한비자의 언급 가운데 흥미 있는 점은 “규정보다 더 잘해도 안 된다”는 점이다. “한비자(韓非子)”에서는 이와 관련된 예로, 오기(吳起)와 그의 처에 관한 이야기를 들고 있다. 오기가 그의 처에게 관에 매는 끈을 보여주며 똑같은 것으로 하나 만들어주기를 부탁(付託)했다. 끈이 완성되어 받아보니 자기가 이전에 썼던 것보다 유달리 좋았다. 오기가 처에게 “내가 그대에게 보여준 것과 똑같이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는데 이것은 유달리 좋으니 어찌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처가 말하기를 “사용한 재료는 한가지이나 제가 정성(精誠)을 더하여 만들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오기가 말하기를 “내가 부탁한 것과 다르오!” 하고서는 처를 친정으로 쫓아 보냈다. 이에 장인(丈人)이 달려와 용서해줄 것을 청하자, 오기는 “저의 집안은 거짓말을 못 합니다.”라고 하며 용서해주기를 거절(拒絶)하였다. 엄격하다 못해 자신을 배려하려는 선한 동기까지도 배격하려는 이러한 법 집행의 자세는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疑問)스럽다. 

(8) 시대의 변천으로 말미암아 인과 예의 도덕 정치는 효력을 상실했다 
한비자(韓非子)는 ‘인’이나 ‘예’에 의한 도덕 정치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시대의 변천’을 든다. 옛날처럼 인구가 적고 소규모의 공동체 안에서 모두가 친하게 지내던 시절에는, 자원도 풍부하고 이기심도 적어서 서로 양보하는 일이 가능했다고 본다. 이런 시절에는 ‘예’를 중시하고 임금 자리를 선양(禪讓)하는 일도 가능했다. 그러나 ‘인’과 ‘예’는 이처럼 소박한 시대에나 가능했던 덕목(德目)이지, 현대의 시대적 조건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구가 증가하고 생산력이 발달하여 서로가 이익을 다투는 상황(狀況)에서는 ‘인’이나 ‘예’ 대신 ‘법’이라는 객관적이고 강제적인 규범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한비자는 상고에서 중세를 거쳐 자기 시대에 이르는 역사의 변천을 이렇게 설명한다. “상고 때는 도덕(道德)을 가지고 경쟁했고 중세에는 지모(智謀)를 가지고 겨루었지만, 오늘날에는 기력(氣力)으로 다툰다. 지금 시대에 인의(仁義)나 변지(辯智)는 나라를 지탱하는 수단이 못 된다.” 

‘도덕’의 시대는 가고 ‘기력’으로 다투는 시대가 되었다는 한비자(韓非子)의 역사 인식은 매우 현실적이다. 한비자가 설명하는 것처럼, 혈연 공동체에 기초한 서주(西周) 시대에는 ‘인’이나 ‘예’와 같은 도덕규범(道德規範)을 확장하여 정치 영역에까지 적용하는 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혈연 공동체(血緣共同體)와 종법 제도가 무너져버린 전국 말기의 상황에서는 ‘이익 분쟁(利益分爭)’과 ‘힘의 다툼’이라는 객관 현실에 기반(基盤)한 새로운 규범의 탄생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이익’을 둘러싸고 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는 ‘객관성’과 ‘강제성(强制性)’을 담보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 규범으로 ‘법’이 요청될 수밖에 없었다. 한비자는 이러한 역사 인식에 의거하여, ‘인의’와 같은 도덕적 가치는 더 이상 효율적인 사회 규범(社會規範)으로 작동될 수 없다고 여긴다. 

4. 덕치(德治)와 법치(法治) 그리고 왕도(王道)와 패도(覇道)의 갈림길에서 
이상에서 우리는 한비자(韓非子)가 ‘덕치’를 배격하고 ‘법치’를 주장하는 이유를 여덟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한비자가 제시한 이유들은 나름대로 강한 설득력(說得力)을 지니고 있으며, 그가 처했던 현실 속에서 객관적이고 효율적(效率的)인 사회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절실하게 요청되는 제안이었다고 여겨진다. 더욱이 강대국 사이에 끼어 국가의 존립(存立)이 위협받던 한나라의 공자였던 한비자로서는 공권력을 확보하고 군비를 강화하기 위해 ‘인의’(德治) 대신에 ‘신상필벌’을 골자로 하는 공리적 사회 규범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한비자보다 조금 앞서 전국 시기를 살았던 맹자는 ‘인의’를 부정하는 한비자의 견해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과연 인정(仁政)과 덕치를 이상으로 삼는 맹자는 ‘인애’의 시행으로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신뢰의 훼손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리고 시대의 변천(變遷)으로 말미암아 ‘인의’의 정치는 효력을 상실했다고 여기는 한비자에 대하여 맹자는 어떠한 응답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일까? 

‘인의’와 같은 도덕 가치를 배격(排擊)하고 법만을 유일한 규범으로 강조하는 한비자(韓非子)의 입장에는 비인도적(非人道的)이고 가혹한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강대국에 둘러싸여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있던 한나라의 상황에서는 타당한 제안이었다고 여겨진다. 특히 사집단의 발호에 의해 군주의 통치권이 위협받고, 세력집단(勢力集團) 간의 정실주의와 연고주의(緣故主義)로 사회 규범의 공공성이 심각하게 위협받던 당시의 상황에서 한비자의 제안은 상당히 호소력(呼訴力)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의’에 의한 덕치를 주장하는 맹자의 입장은 너무도 인도적이고 도덕적인 제안이어서 현실성이 떨어져 보이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강대국 간의 쟁탈전(爭奪戰)으로 인하여 무고한 생명이 죽어나가던 전국 시대의 상황에서는 또한 정당한 주장이었다고 여겨진다. 통치 계급에 의해 자행되는 잔혹한 형벌과 무자비(無慈悲)한 수탈을 종식시키고 군주들에게 ‘인의’의 정치를 시행하도록 촉구하는 맹자의 입장은 당시의 상황에서도 정당한 주장이었을 뿐 아니라 시대를 넘어서는 보편적(普遍的)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인의’를 배격하는 한비자(韓非子)와 ‘인의’를 옹호하는 맹자의 입장은 겉으로 볼 때 서로 정면적으로 충돌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 두 사상가가 발언(發言)하는 담론적 상황을 살펴본다면,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이는 주장들이 결코 화해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길 필요는 없다. 가령, 신하가 ‘인의’를 가장하고 세력을 확대하여 군주의 권위를 침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한비자뿐 아니라 맹자 역시 비판적(批判的) 눈길로 바라볼 것이다. 또한 인정(仁)과 의리(義)라는 이름으로 사집단 사이에 특혜를 주고받는 정실주의적(情實主義的) 행태에 대해서는 한비자뿐 아니라 맹자 역시 비판의 화살을 보낼 것이 틀림없다. 

한비자(韓非子)와 맹자의 상충(相衝)하는 듯 보이는 입장들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각기 정당성을 확보한다. 한비자는 군주권(君主權)을 확립하기 위해 발호하는 중신(重臣) 세력과 사가(私家) 집단을 약화시키고자 했지만, 맹자는 군주를 선정(善政)으로 이끌기 위해 어진 신하를 중용하여 군주권을 견제하고자 했다. 군주권을 강화하여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려는 한비자의 입장과 군주권을 견제하여 선정으로 이끌려는 맹자의 입장은 각기 ‘자국의 안전 도모’와 ‘폭정의 방지’라는 합목적성을 지닌다. 이러한 두 가지 합목적성(合目的性)은 결코 평면적 차원에서 대립되는 것은 아니며, 각기 다른 차원에서 정당성을 지닌다. 

엄격한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을 적용하여 공리주의적 통치 체계를 확립하려던 한비자(韓非子)의 입장은 외세의 침략에 의하여 국가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운명에 처했던 한나라의 상황에서는 지극히 타당한 제안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인한 정치’에 의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복지 사회를 이룩하려는 맹자의 입장은 통치 계급에 의해 잔혹한 처벌과 수탈(收奪)이 자행되던 전국 시대의 현실에서 보자면 이 또한 지극히 정당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한비자(韓非子)와 맹자가 지녔던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의식과 해결 방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겨진다. 국제적으로는 강대국(强大國)의 약소국에 대한 침략이 자행되고 국내적으로는 부패 권력의 서민에 대한 침탈(侵奪)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현실에 직면해서 과연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현명한 길일까? 우리는 한비자의 입장과 맹자의 입장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국내적으로는 부패한 권력구조(權力構造)를 공정하고 객관적인 모습으로 개혁해나가면서 국방력과 경제력을 강화해나가야 하고, 국제적으로는 강대국의 횡포(橫暴)를 견제하고 약소국을 지원할 수 있는 인도적 수단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힘과 힘이 다투는 냉엄(冷嚴)한 현실에 직면(直面)해서, 약자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힘을 기르면서” 동시에 강자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함께 강구(講究)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안이 서로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힘 기르기”와 “힘 약화시키기”는 서로 다른 차원에서 요구되는, 하지만 동일한 목적을 위해 결국은 서로 만날 수밖에 없는 해결책들이다. ‘덕치(德治)’와 ‘법치(法治)’의 관계 역시 이와 마찬가지라고 보인다. 

한비자(韓非子)와 맹자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평면적인 차원에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맹자는 탐욕스럽고 포악한 군주들의 내면에 ‘가능성’(端)으로만 잠재하고 있는 측은지심을 계발하여 인정(仁政)의 형태로 실현해내고자 유도하였다. 반면에 한비자가 자기 시대의 인간에게서 발견했던 것은 세(勢)를 확보하고자 연고 집단끼리 결탁 관계를 맺고 있는 중신 세력들의 정실주의, 그리고 추위와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기회만을 엿보는 백성들의 비열(鄙劣)한 행태였다. 인성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맹자의 주된 관심이 군주의 측은지심을 계발하여 선정으로 유도하는 데 있었다면, 한비자의 관심은 중신 집단과 우중(愚衆)들의 속성을 간파해서 이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맹자의 인성은 가능성 또는 잠재태로서 ‘군주’의 인성이지만, 한비자의 인성은 현실태로 드러나 있는 민(民) 계층의 인성이다. 서로 충돌하는 듯이 보이는 한비자와 맹자의 인성관은 “누구의 인성인가?” 그리고 “왜 인성이 문제인가?” “현실적으로 드러나 있는 인간의 모습인가, 장차 계발이 가능한 잠재적(潛在的) 인성인가?”라는 물음이 풀릴 때 비로소 평면적으로 충돌하는 것이 아님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물론 한비자(韓非子)와 맹자에게는 결코 화해(和解)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인성을 철저하게 불신하는 한비자의 입장은 인성의 교화 가능성을 신뢰(信賴)하는 맹자의 입장과 선명하게 상충한다. 탐욕과 폭력(暴力)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를 피할 수 없는 역사의 법칙이라고 보는 한비자의 입장은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맹자의 입장과 상충(相衝)한다. 도덕과 인의를 도구적 수단으로 간주하려는 한비자의 입장은 도덕과 인의를 궁극적 가치라고 믿는 맹자의 입장과 상충한다. 이렇게 서로 대립하는 두 입장은 단지 한비자와 맹자(孟子)의 시대에만 제기되었던 특수한 대립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입장 차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공적 세계’에 속한 모든 인간들이 숙명적으로 부닥쳐온 문제이며 헤어나고자 고뇌해온 문제이다. 우리는 후대의 지성사 속에서 이러한 두 입장을 하나의 체계 안으로 융섭(融燮)하려는 노력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법가의 ‘법치’ 이념과 유가의 ‘덕치’ 이념을 하나의 체계 안으로 융섭하려는 한 대의 ‘유법합류’(儒法合流)의 흐름, 인성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의리지성(義理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설명하려는 성리학자(性理學者)들의 노력, 그리고 왕도 정치와 패도 정치 사이에 가교를 놓으려는 주희-진량 사이의 왕패 논쟁(王霸論爭) 등은 그러한 고뇌가 남긴 사상사적 흔적(痕迹)이라고 할 수 있다. 

한비자(韓非子)의 방략에 입각하여 천하를 통일했던 진나라의 단명(短命)은 잊을 수 없는 역사적 교훈을 남겨주었다. 천하를 힘으로 얻을 수는 있어도 힘만으로는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인의’가 결여(缺如)된 세상은 동물의 세계이지 인간의 세계는 아니다. 공적 세계의 합리화(合理化)는 도덕을 배제한 힘의 논리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으며, 역으로 힘을 무시한 도덕적 호소만으로도 가능하지 않다. 공적 세계의 합리화는 “힘과 탐욕(貪慾)이 난무하는 이 현실을 어떻게 정치적 · 도덕적으로 원만하게 질서지울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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