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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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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이 만든 경국지색 비운 주인공인 역사 속 중국 4대 미녀와 3대 악녀

서시, 왕소군, 양귀비 / 경국지색을 읊다


어떠한 사물이나 사실이 존재해 온 연혁(沿革)과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을 기록하며 한 시대를 풍미(風味)한 역사 속의 인물들 중 대다수가 남성들이다. 하지만 중국 역사를 들여다보면 여성들의 등장(登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 역사 속의 여인들은 때로는 아름다운 미모(美貌)로 권력을 좌지우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잔혹(殘酷)한 방식으로 한 시대를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 여인들의 삶이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 여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짜 모습(模襲)을 볼 수 있다. 

경국지색의 주인공 서시(西施) 
중국의 4대 미녀 중 빼어난 외모를 자랑하는 서시(西施)는 춘추전국시대 말, 월(越)나라의 미녀이다. 하루는 그녀가 강변에 있는데 맑고 투명한 물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자 수중에 있던 물고기가 그 미모에 놀라 헤엄치는 것을 잊고 물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녀의 미모에 비단 물고기만 놀란 것이 아니다. 당시 오(吳)나라의 왕 부차와 월(越)나라의 왕 구천이 싸우던 중 구천이 패하게 되어 항복(降伏)하고 부차의 신하가 될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구천(句踐)은 치욕을 씻기 위해 뛰어난 미모를 소유한 서시를 부차에게 바치면서 미인계를 쓰고 부차(夫差)는 서시의 미색에 빠져 국정은 돌보지 않고 정치를 태만(怠慢)하게 한다. 그 틈을 타 구천은 부차를 공격하여 오나라를 패망시킨다. 오나라가 패망(敗亡)한 뒤 서시는 구천의 후궁이 되어 총애(寵愛)를 받지만 구천의 정부인에게 비밀리에 제거 당한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주인공이자 영웅호걸들의 애간장을 녹인 장본인 서시(西施)의 아름답고 화려한 외면 속에 남모를 슬픔이 서려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미인계(美人計)란 바라는 목적이 있을 때 아름다운 여인으로 하여금 상대를 유혹하게 하여 뜻하는 바를 성취하는 건데 이를 저속하게는 ‘성 상납(性上納)’이라고 표현한다. 여자의 인격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단지 임무와 사명감(使命感)만으로 마음에도 없는 남자를 유혹하고 때로는 몸까지 허락해야 하는 비운(悲運)이 서려있다. 서시와 같은 인물이 오늘날에도 암암리에 존재(存在)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뇌물을 주지 못해 추녀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던 왕소군(王昭君) 
한(漢)나라의 왕소군은 재주와 용모를 두루 갖춘 팔방미인(八方美人)이다. 당시 한나라의 원제는 궁녀들의 초상화(肖像畵)를 화공에게 그리게 하여 초상화를 보고 아름다운 궁녀를 골라 총애(寵愛)하였다. 궁녀들은 자신들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화공에게 앞 다투어 뇌물(賂物)을 바쳤다. 그러나 가난했던 왕소군(王昭君)은 뇌물을 주지 못해 본인의 외모와는 상반되는 미운 초상화가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화친(和親)을 위해 북쪽 흉노왕(匈奴王)에게 궁녀를 보내려던 원제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못생긴 왕소군을 뽑아서 보내도록 하였다. 원제는 이별의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야 비로소 왕소군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 미모(美貌)에 반하지만 어쩔 수 없이 흉노왕에게 보내고 만다. 결국 그녀는 흉노왕의 아내가 되어 싸움이 빈번하던 두 나라를 50년 이상 원만한 관계로 유지시킨다. 현대 중국인들은 왕소군(王昭君)을 고대 영웅 중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한다. 

앞서 궁녀들이 화공에게 자신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치는 모습을 보니 예나 지금이나 뇌물수수(賂物授受)는 가장 만연하게 행해지는 비리인 듯하다. 그래서 그만큼 더 뿌리 뽑기 힘든 부정행위(不正行爲)이다. 비록 가난했던 왕소군(王昭君)은 뇌물을 바치질 못해 오랑캐의 땅으로 보내졌지만 탁월한 국정능력(國政能力)을 보여주었다. 어찌 보면 그녀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지도자의 양상(樣相)인지도 모르겠다. 

여포와 동탁의 그녀 초선(貂蟬) 
초선은 중국의 4대 미녀 중 유일한 가상인물(假想人物)이다. 초선은 삼국지 초기에 나오는 인물로 한(漢)나라의 대신 왕윤(王允)의 수양딸로 용모가 명월 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 하루는 초선(貂蟬)이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는데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우자 그 모습을 본 왕윤은 "달도 내 딸에게는 비할 수가 없네. 달이 부끄러워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구나."라고 말해, 이때부터 초선은 폐월(閉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비록 양아버지였지만 초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었고 그녀 또한 그를 잘 따랐다. 훗날 초선은 왕윤의 부탁(付託)을 받고 은혜에 보답하고자 그의 계략(計略)을 실행에 옮긴다. 미인계를 써서 동탁(董卓)과 여포를 이간질 시켜 서로 질투하게 하고 배신하게 하여 결국 여포(呂布)로 하여금 섬겨야 할 주인인 동탁을 칼로 베어 죽이게 한다. 동탁을 죽게 만든 후 초선 또한 의로운 목숨을 거둔다. 

아름다운 여자는 수명이 길지 않거나 운명이 기구하다더니 ‘미인박명(美人薄命)’은 초선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비록 남들보다 일찍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누구보다 용기(勇氣) 있는 여인이었다. 당시 동탁은 권력의 찬탈(簒奪)과 폭정으로 후한을 멸망시키고 제국을 분열(分裂)시키는 등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던 터였다. 다들 동탁이 죽기만을 바라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맞서 싸우는 이는 없었다. 그 찰나 초선(貂蟬)이 개입돼 동탁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아무리 아버지의 부탁이라지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후한 말 ‘폭정(暴政)’과 ‘권력찬탈의 쿠데타’를 멈추게 한 1등 공신(功臣)은 초선이 아닌가 싶다.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절세미인 양귀비(楊貴妃) 
‘자질풍염(資質豐艶)’미인으로 유명한 양귀비는 당 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이며, 본명은 양옥환(楊玉環)이다. 본래 현종과 무혜비(武惠妃)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수왕의 비로 17세 때 궁에 들어왔으나 시와 노래에 뛰어난 보기 드문 절세미인(絶世美人)으로 현종의 눈에 들게 되어 간택되었다. 현종이 양귀비(楊貴妃)를 무척 사랑한 나머지 그녀의 딸들도 현종의 비로 맞아들여졌고, 사촌오빠인 양국충은 재상이 되었다. 한편 돌궐족(突厥族) 출신인 젊은 장군 안녹산은 양귀비가 무척 예뻐하던 양자였는데 양귀비의 득세를 등에 업고 엄청난 권세를 누리게 된다. 양국충(楊國忠)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자 안녹산을 제거하려고 하지만 이를 눈치 챈 안녹산(安祿山)이 ‘안사의 난’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수도가 점령(占領)당하자 현종과 황실은 피신해야만 했고 도망가던 중 현종의 친위병(親衛兵)들은 황실의 몰락이 양씨 일가 때문이라고 여겨 양귀비와 양국충을 처형하라고 현종(玄宗)에게 제기한다. 목숨과 사랑 중 목숨을 택한 현종은 결국 양귀비를 처형(處刑)하는데 동의하고 양귀비는 자결 아닌 자결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현종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기적(利己的)이고 대범하지 못한 남자였다. 어찌 보면 본인이 여자의 치마폭에 싸여 정치를 소홀히 한 과실을 양귀비(楊貴妃)에 떠넘긴 비겁한 남자이기도 하다. 사실 현종은 소싯적 정치에 꽤나 소질이 있는 황제였다. 중국 역사상 몇 안 되는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룩한 장본인(張本人)이지만 양귀비에게 빠지면서부터 점점 정세가 기울게 된다. 나아가 ‘양국충’과 ‘안녹산’을 비롯해 양귀비의 일가친척 환관과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득세하게 되고 부정부패(不正腐敗)가 만연한 망국으로 치닫게 된다. 혈연, 학연, 지연을 중심으로 한 국가는 결국에는 망하게 되어있다. 혹시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몸도 마음도 가벼웠던 조비연(趙飛燕) 
아쉽게 중국의 4대 미녀에서 탈락한 자가 있었으니 바로 조비연(趙飛燕)이다. ‘연수환비(燕瘦環肥)’ 즉 조비연은 말랐으나 미인이었고 양귀비는 뚱뚱했으나 미인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항상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 명인 양귀비(楊貴妃)와 더불어 거론된다. 조비연은 ‘날으는 제비’라는 뜻으로 본명인 조의주 대신 조비연으로 불렸다. 뛰어난 몸매와 가무로 그녀는 한(漢)나라 성황제의 총애(寵愛)를 받아 황후의 지위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자신의 힘만으로 지위를 지키는 것이 벅차게 되자 동생인 조합덕(趙合德)을 불러들인다. 언니와는 달리 풍만한 몸매를 지녔던 조합덕은 성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고 이를 질투(嫉妬)한 조비연은 욕정을 풀기 위해 외간남자들을 불러들여 정을 통한다. 하지만 임신(妊娠)을 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던 그녀는 임신을 한 후비들을 살해하거나 그 자식들을 살해(殺害)한다. 훗날 성황제가 죽자 지지 기반을 잃은 조비연은 황후에서 서인으로 신분이 강등되고 끝내 자결(自決)하고 만다. 

조비연(趙飛燕)이 4대 미녀에서 탈락하게 된 이유는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 악덕 행위(惡德行爲)와 가벼운 행동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올곧은 품성과 마음가짐을 가진 자로서 도덕적(道德的)으로 행동했더라면 황제가 죽었다 한들 그녀를 반대하는 세력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여전히 황후(皇后)의 자리를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식(常識) 밖의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많이 했던 그녀는 유일한 지지 기반(支持基盤)을 잃게 되자 권력도 잃고 그 동안의 죗값을 치르게 되는 최후를 맞게 된다. 옛말에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말이 있듯이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서 엉성한 듯하지만 잘못에 대해서는 빠뜨리지 않고 벌(罰)을 내린다고 한다. 제아무리 뛰어난 사람이고 이 세상을 지배(支配)하는 사람이라고 한들 악덕하고 부도덕적인 행위를 일삼는다면 하늘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사람돼지를 만든 여태후(呂后) 
여태후(呂太后)는 중국 한나라 시조 유방의 조강지처(糟糠之妻)로 유방이 죽은 뒤 실권을 잡고 온갖 악행(惡行)을 서슴지 않은 인물이다. 사실 여태후는 유방이 죽기 전부터도 잔인(殘忍)한 면모를 드러내왔다. 한나라가 안정을 찾자 여태후는 장래에 후환(後患)이 될 것을 우려하여 한신(韓信)을 비롯한 개국공신(開國功臣)들을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이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토사구팽(兔死狗烹)’의 유래이다. 

유방(劉邦)이 죽고 자신의 어린 아들이 왕위에 즉위(卽位)하자 여태후는 본격적으로 악랄(惡辣)함을 드러냈다. 여태후는 유방이 죽기 전에 자신의 권력을 넘보았던 유방의 첩 척부인을 잡아다가 팔다리와 두 귀를 자르고 눈알을 뽑아버린 뒤 벙어리가 되게 하는 약을 먹여 변소(便所)에 던져 놓았다. 그도 모자라 척부인의 아들 혜제에게 보여주며 ‘사람돼지’라고 소개한다. 이것은 일종의 ‘협박(脅迫)’이었다. 그 후로도 여태후(呂太后)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여씨 일족을 왕후로 책봉(冊封)했다. 그 과정에서 피바람이 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태후의 ‘국정 운영(國政運營)’ 능력이다. 그녀는 악녀 중의 악녀였지만 백성들에게는 매우 ‘이상적(理想的)’이었다. 민생안정 정책(民生安定政策)을 강화하고 가혹한 형벌(刑罰)을 폐지하여 경제를 회복시키고 사회를 점차 안정시켰다. 그녀는 개인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정책만큼은 유토피아를 꿈꿔왔었는지도 모르겠다. 통치자 혹은 CEO가 최우선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德目)은 무엇일까. 만약 그녀가 21세기에 태어났더라면 법적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결단력(決斷力)이 남다른’ 통치자나 CEO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권력을 위해서 친자식도 살해한 측천무후(則天武後) 
중국에서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일개 궁녀에 불과했었다. 측천무후(則天武後)는 태종이 죽은 후 당시 관례에 따라 다른 궁녀들처럼 비구니가 되었지만 태종의 아들인 고종(高宗)과의 은밀한 관계 덕분에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시 궁으로 돌아온 그녀는 고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승승장구(乘勝長驅)했다. 하지만 측전무후의 야심은 끝이 없었다. 왕황후가 자신의 아이를 보러 왔다가 돌아가자 생후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은 자신의 딸을 목 졸라 죽였다. 왕황후를 모함(謀陷)하기 위하여 자식을 도구로 삼은 것이다. 측전무후(則天武後)는 결국 황후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황후의 자리를 차지했다. 황후가 된 측천무후는 고종을 압박(壓迫)하기 시작했다. 천후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실권은 사실상 측천무후에게 있었다. 황태자를 책봉(冊封)하는 일에서도 고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측천무후는 자신에게 복종(服從)하지 않으면 자신의 친아들이라도 죽이고야 말았다. 황태자를 몇 번이나 갈아치운 끝에 여덟 번째 아들 단이 황제에 올랐다. 측천무후(則天武後)는 황제가 된 아들의 성을 자신의 성으로 바꾸고 당나라 이름을 주나라로 바꾸며 자신이 최고 황제라고 선포했다. 

측천무후(則天武後)는 냉철했다. 그간 악명 높은 ‘악녀’들이 질투(嫉妬) 등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움직였다면 이 여인은 철저하게 권력(權力)을 위해 움직였다. 또한 측전무후는 인재등용(人才登用)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신분제도에 대하여 한(恨)이 서려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신분보다 능력을 우선시 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破格的)인 시도였을 것이다. 역사는 그녀를 권력에 눈이 멀어 친자식도 살해하는 냉혹(冷酷)한 여인으로 기억하지만, 비천한 궁녀가 황제에 오르기까지 겪었을 수많은 역경(逆境)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측천무후는 신분차별(身分差別),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가 만들어낸 폐해가 아닐까 싶다. 신분제도가 없어진 지금 우리 사회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신분제도(身分制度)’가 얼굴만 바꾼 채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청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 서태후(西太后) 
몰락(沒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나 16세에 궁녀가 된 서태후는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함풍제(咸豊帝)의 눈에 들어 후궁으로 간택(揀擇)된 후부터 그녀는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함풍제의 본처 ‘동태후(東太后)’가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아이가 없어서 함풍제가 죽은 뒤 서태후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는 동태후를 더 좋아했고 황후 간택 문제에서 조차 동태후의 선택을 따랐다. 서태후는 그 ‘억울함’을 사치(奢侈)스러운 생활로 보상받으려 했다. 그녀의 사치스러움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이화원(颐和园)이다. 이화원의 인공호수는 바다를 연상케 할 만큼이니 동양의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칭호(稱號)가 걸맞겠다. 이 여인은 오로지 자신의 ‘사치’를 위하여 청일 전쟁(淸日戰爭)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리는 엽기적(獵奇的)인 행각을 벌였고 국고를 탕진하여 청나라를 파국(破局)으로 치닫게 했다. 이 뿐만 아니라 나라는 몰락(沒落)하건 말건 외간 남자를 궁에 들여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자기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곧바로 죽여 버렸다. 결정적으로 시대착오적(時代錯誤的)인 정책으로 청나라를 궁지(窮地)에 빠지게 하면서 역사는 그녀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서태후(西太后)에 대한 평가는 중국 내에서도 극과 극(極)을 달린다. 일각에서는 서태후를 비극적(悲劇的)인 삶을 살아온 ‘외로운 여인’으로 보기도 하지만 청나라를 망친 장본인으로 악녀의 화신(化身)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한 나라를 좌지우지(左之右之) 했지만 녹록하지 않았을 이 여인의 개인적인 삶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날마다 진수성찬(珍羞盛饌)을 즐기고 값비싼 옷을 입었지만 어쩌면 그녀는 정말로 외로웠을 수도 있겠다. 역사의 평가가 때로는 너무나 잔혹(殘酷)하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주인공, 달기(妲己) 
중국 역사에 대한 조예(造詣)가 있는 사람이라면 ‘악녀의 아이콘’ 달기의 극악무도(極惡無道)한 행위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달기(妲己)는 중국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의 애첩(愛妾)으로 미모가 아주 빼어났다고 한다. 달기를 보고 한 눈에 반한 주왕(紂王)은 여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다. 술이 연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을 이룬다는 뜻의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사자성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사치는 상상을 초월(超越)했다고 한다. 이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잔인한 형벌(刑罰)을 가하는 것을 즐겨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반기를 드는 자가 있으면 ‘포락형((炮烙刑)’을 내렸다. ‘포락형’은 구리 기둥 위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 위를 걷게 하여 미끄러져서 타 죽게 하는 잔혹한 형벌이다. 달기는 주로 고통을 줌으로써 쾌감(快感)을 얻는 사디스트적인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역사적 자료에 달기에 대한 언급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상나라를 멸망(滅亡)시킨 주나라가 윤리적인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허구의 인물’이라고도 한다. 

달기(妲己)라는 여인이 실존인물이라면 그것도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달기가 주나라의 ‘명분(名分)’을 위해 만들어진 허구적 인물(虛構的人物)이라면 조금 다른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어떠한 윤리적 타당성(妥當性)을 위하여 또 다른 윤리가 퇴색(退色)되어 버리는 일은 오늘 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폭군이 만든 경국지색 
역사는 반복된다. 상조(商朝)에 폭군 주왕(纣王)이 있었다면 주나라엔 유왕(幽王)이 있었다. 주왕에게는 달기(妲己)라는 희첩이 있었고 유왕에게는 포사(褒姒)라는 희첩이 있었다. 달기와 포사는 모두 나라를 멸망시킨 희대의 요녀라고 불리운다. 

소달기(苏妲己)는 기주후(冀州侯) 소후(苏护)의 딸로서 은(殷)나라(상조를 은상이라고도 불렀다)의 유소 소장 (有苏苏庄—지금의 하남성 초작시 온현 소왕촌)에서 출생했다. 달기는 용모가 선녀와 같고 노래와 춤에 능했는데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의 애비(爱妃)가 되였다고 전해진다. 

주왕이 소유씨(有苏氏—지금의 하남성 무척동)를 정복했을 때 소유씨는 주왕에게 미녀 달기를 바쳤다. 주왕은 원래 문무를 겸비한 현명한 군주여서 동남을 통일한 후 동이(东夷)와 평원통일을 공고히 하였고 사회진보(社會進步)와 경제발전을 추진하였지만 재위말기에 자고자대(自高自大)하며 폭군으로 되였다. 주왕은 천하의 절색(絶色)인 달기를 보자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달기는 소문이 무색할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왔다. 주왕은 달기에게 완전히 넋을 잃었다. 갸름한 얼굴과 신비(神祕)스럽게 반짝이는 눈, 도화처럼 붉은 입술, 봉긋한 유방과 버들가지처럼 하늘거리는 허리, 풍만한 둔부는 주왕이 그동안 본 어떤 미인보다 백배(百倍)나 더 아름다웠다. 

주왕은 밤마다 달기(妲己)에게 달려들었고 달기는 기기묘묘한 방중술(房中術)로 주왕을 사로잡았다. 달기는 사내를 녹일 요부(妖婦)의 기질을 갖고 있었다. 주왕은 달기와 음락(淫樂)에 빠져 석 달이나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달기는 지상의 여자가 아니라 하늘이 내게 보낸 선녀이다!” 주왕(紂王)은 달기에게 깊이 빠져들어 갔다. 주왕은 달기가 기뻐하는 일이면 무슨 짓이든 서슴치 않았다. 

그는 사구(沙丘)에 큰 놀이터와 별궁을 지어두고 많은 들짐승과 새들을 거기에 놓아길렀다. 그는 또 위주(卫州—지금의 하남성 기현)에 술로 못을 만들어 주지(酒池)라 하고 고기를 매달아 숲을 만들어 육림(肉林)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이다. 그는 이 주지육림에서 매일 연회(宴會)를 차려놓고 즐겼는데 많을 때에는 3000명의 남녀가 발가벗고 그 사이에서 밤낮없이 술을 퍼마시며 즐겼는데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봉지가 지금의 하남성 임장현에 있는 구후(九侯)에게는 매우 예쁜 딸이 있었는데 입궁하여 궁녀로 되였다. 구후의 딸은 달기(妲己)의 음탕한 행위를 보다 못해 몇 마디 했다가 당장에서 죽음을 당했다. 주왕은 달기가 시키는 대로 궁녀의 아버지 구후도 죽인 후 고기를 잘게 썰어 젓갈을 만들어 제후(諸侯)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주왕은 폭정(暴政)을 그만두도록 간하는 충신들의 말은 듣지 않고 달기(妲己)의 말만 잘 들었다. 달기는 사람들에게 잔인한 형벌(刑罰)을 가하는 것을 즐겼는데  구리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위에 걸쳐놓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 우를 걷게 하여 미끄러져서 타죽게 하는 포락의 형(炮烙之刑)을 구경하면서 즐기거나 너비 10메터, 깊이 3메터 되는 구덩이를 파놓고 독사와 전갈(全蠍)을 집어넣은 후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을 그 구덩이에 떨어뜨리는 돈분(趸盆)이란 형을 구경하기를 즐겼다. 달기가 사람들이 타죽거나 독사에게 물려 괴로워하며 죽는 것을 보고 웃었다. 그 후 주왕은 달기가 웃는 것을 보기 위해 아무 사람이나 불러서 포락의 형이거나 돈분의 형에 처했다. 

충신 비간(比干)이 여러 번이나 간언했지만 주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비간은 승상에 해당되는 관직소사(官职少师)였으며 주왕의 숙부이기도 했다. 주왕이 간언을 듣지 않았지만 비간은 “신하는 죽더라도 임금께 충간(忠諫)해야 한다”며 계속 주왕에게 간언(諫言)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달기는 주왕에게 자신의 심장병(心臟病)이 나으려면 비간의 심장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 후 비간이 또 간언을 하자 주왕은 화를 내며 “성인(圣人)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다. 너의 충심이 진짜인지를 확인하겠다”고 하며 그를 해부(解剖)하여 심장을 꺼내 달기에게 주었다.  

주무왕(周武王)이 조가(朝歌)를 공격해오자 주왕은 록대(鹿台)에서 뛰어내려 분신자살(焚身自殺)했다. 달기는 주무왕에 의해 살해(殺害)되었다는 설도 있고 주무왕이 달기를 취하여 시녀(侍女)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주유왕에게 거짓봉화를 올리게 한 포사(褒姒) 
주선왕(周宣王)은 재위 46년 동안 주나라를 반석에 올렸지만 그의 아들 주유왕(기원전 795년~기원전 771년)의 대에 와서 주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주선왕이 죽고 주유왕 희궁열(姬宫涅)이 즉위(卽位)한지 2년째 되던 어느 날에 지진이 일어나자 당시 백양보(伯阳甫)란 대부가 “양기가 자리를 잃고 음기아래에 있으면 반드시 근원(根源)이 막히고 그 근원이 막히면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면서 방법을 대지 않으면 10년 내에 주나라가 멸망(滅亡)된다고 예언했다. 

그러나 폭군(暴君)의 기질이 다분했던 유왕은 그런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재위 3년이 되던 해에 포사(褒姒)라는 천하절색의 희첩(姬妾)이 생기자 그는 주지육림에 빠져들었다. 포사는 포나라(褒国)의 미인이다. 이 미인이 세상에 등장하게 된 계기에 대해 사마천(司馬遷)은 매우 신비적으로 그려냈다. 

하왕조(夏王朝)의 뒤를 이어 은나라가 등장하고 다시 주나라의 주려왕(周厉王)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전해내려 온 한 상자가 있었는데 그 속에는 소장하고 있으면 나라에 길조가 든다는 용의 침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함부로 열어보아서는 안 된다는 금기사안(禁忌事案)이 있었다. 그런데 서주의 제10대 왕(재위기간 기원전878년~841년)이였던 주려왕 희호(姬胡)가 말년에 이 상자를 열었다. 여왕이 상자를 여는 순간 용의 침이 궁궐(宮闕)의 뜰로 흘러들어왔는데 아무리 없애려 해도 없어지지 않았다. 물론 이런 것에 개의할 여왕(呂王)이 아니었다. 여왕이 여자들을 발가벗겨 큰 소리로 떠들게 하자 침이 문득 검은 자라로 변해 후궁(後宮)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후궁에 있던 17살가량의 어린 계집이 그 검은 자라와 마주쳤는데 시집갈 나이가 되여 남자도 없이 아이를 잉태(孕胎)했다. 그때는 여왕이 죽고 그의 아들 주선왕 희정(姬静)이 왕위에 올랐을 때였다. 그 후 아이를 낳은 후궁은 두려워 아이를 아무도 모르게 내다버렸다. 

그 무렵에 선왕은 어린 여자애들이 부르는 “산뽕나무로 만든 활과 콩대로 만든 화살통이 주나라를 망하게 하리라”는 동요(童謠)를 듣게 되였다. 뒤이어 길에서 활과 화살통을 파는 부부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왕은 신하들을 불러 그들을 즉시 죽이라고 명령했다. 활과 화살통을 파는 부부는 도망(逃亡)을 치다가 우연히 길에서 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들 부부는 그 여자아이를 불쌍하게 여겨 업어다가 길렀다. 그 아이가 바로 후궁이 버린 아이였다. 

그 후 그들 부부는 포나라에 숨어살면서 여자아이의 이름을 포나라에서 성장했다고 하여 “포사(褒姒)”라고 지었다. 포사가 자색이 뛰어난 처녀로 자랐을 때는 주선왕이 죽고 그의 아들 주유왕(周幽王)이 왕위에 올랐을 때였다. 어느 날에 포사의 양부모는 자신들이 지은 죗값으로 포사를 유왕에게 바쳤다. 

여색을 특별히 좋아한 유왕은 포사(褒姒)를 보자마자 반하여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밤낮으로 포사와 붙어살다가 어느새 백복(伯服)이란 아들을 얻었다. 기쁜 마음에 왕후를 폐위(廢位)하고 포사를 왕후로 삼더니 태자 의구(宜臼)마저 폐위하고 백복을 태자 자리에 두었다. 이에 주나라 태사인 백양(伯阳)이 역사책의 기록을 들어가며 주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탄식(歎息)했다. 

사마천(司馬遷)의 기록에 의하면 포사(褒姒)는 잘 웃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려고 유왕은 온갖 방법을 다 썼으나 끝내 웃길 수 없었다. 유왕은 포사를 웃게 하기 위해 거짓으로 봉화(烽火)를 올리고 북을 쳐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러자 사방의 제후(諸侯)들이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섰다가 헛걸음을 쳤다. 그런 장면을 본 포사는 마침내 웃었다. 포사의 웃는 모습에 넋을 잃은 유왕은 이런 짓을 여러 차례나 일삼았다. 더구나 주유왕(周幽王)은 아첨만 일삼는 괵석보(虢石父)에게 나라의 정사를 맡기고 밤낮 포사를 안고 즐겼다. 그러자 민심이 들끓었다. 

결국 무너진 민심을 등에 업고 신후가 적국인 증나라(缯国),서이(西夷),견융족(犬戎族)과 함께 유왕을 공격했다. 급해난 유왕이 봉화를 올리고 북을 쳐 군대를 소집했으나 제후들은 유왕이 또 포사(褒姒)를 웃게 하기 위해 거짓봉화를 올리는 줄로 알고 도우러 오지 않았다. 결국 신후는 여산(骊山)아래에서 유왕을 살해하고 포사를 사로잡았으며 폐위된 태자 의구를 왕으로 옹립(擁立)하였다. 의구가 바로 평왕(平王)이다. 

동서고금의 역사 고증을 보면 엄연히 권력자들의 추잡한 치정(癡情)노름은 한때의 경거망동(輕擧妄動)으로 빚어진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여 우둔한 희극으로 음락(淫樂)의 서막을 열었다가 미욱한 활극(活劇)으로 결국 파멸의 종막(終幕)을 닫게 되었다. 

이를 경계하여 일찍 루쉰 선생은 철 같은 계언(戒言)을 남긴 적이 있다. "무릇 세상 남자들이 모두 여색을 경계(警戒)한다면 누구나 다 성인이 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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