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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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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대기서 중 하나인 고전소설 '삼국지연의' 역사배경 분석 (4)

[사진 = 구글검색]


또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따르면 대략 임진왜란(壬辰倭亂) 7년 전쟁 막바지였던 무술년(戊戌年)에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인 진린(陳璘)이 조선수군 수영에 온 뒤 이순신(李舜臣)의 인품에 감화된 일화(逸話) 중 하나가 전해진다. 어느 날 진린이 천문(天文)을 봐서 장군성이 흔들리니 이를 이순신 장군의 별이 흔들리는 봐 다가올 전쟁에서 이순신 장군이 크게 다치거나 전사할 위험에 대한 조짐이니 이순신에게 제갈무후(諸葛武侯)의 고사를 들며 이순신에게도 기도(祈禱)를 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순신 장군은 본인의 능력과 업적(業績)은 무후만도 못할진대 어찌 감히 무후처럼 기도를 올리겠냐며 정중히 사양(辭讓)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일화를 보면 알듯이 적어도 당시 충무공 또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읽었고 삼국지 속 인물들이나 일화들을 알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집집마다 이 책이 있었고 그 내용이 과거시험 문제(科擧試驗問題)로 출제될 정도로 인기(人氣)를 끌었다고 한다. 

현대에 들어서도 한국(韓國)에선 월탄 박종화, 김구용 등 많은 작가들이 삼국지 번역(三國志飜譯)을 시도했으며 근래에는 이문열 평역 삼국지, 황석영 삼국지 등이 현대어로 번역하면서 문학적 가치(文學的價値)를 높였다 하여 유명해졌다. 하지만 의미를 올바르게 번역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제기되어 본삼국지(本三國志), 정원기 교수의 정역 삼국지, 그리고 박기봉의 완역(完譯) 삼국연의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2019년에는 정사와 연의를 함께 읽는 송도진 삼국지도 나오기도 했다 

삼국지 번역자들을 살펴보면 박종화, 이문열, 황석영 같은 소설가들도 있는데 어째서 한학(漢學)이나 중문학(中文學)을 전공하지 않았을 이들 작가들이 삼국지를 번역하는가 하는 의문(疑問)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지연의" 원문은 사서삼경(四書三經) 원문을 독해(讀解)할 정도의 실력이면 한학이나 중문학 전공자(專攻者)가 아니라도 어렵지 않게 읽어 나갈 수 있다. 다만 한자학(漢字學), 중국어문학(中國語文學), 역사학(歷史學) 등 전문적인 배경 지식(背景知識)을 갖고 번역된 게 아니므로 이들 작가들의 번역본에는 대개 '평역(評譯)'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말하자면 아마추어 번역이다. 대신 작가들이 번역한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읽기 쉬운 문장을 쓰기 때문에 진입 장벽(進入障壁)이 낮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한학이나 중문학 전공자들이 번역한 작품은 번역이 충실(充實)하고 오류가 적지만 대체적으로 문장이 딱딱하고 읽기 어렵다는 단점이 생긴다. 

일본의 경우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는 제목으로 에도 시대에 널리 퍼졌다. 근대에는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가 번역한 판본(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이 널리 읽혀졌으며 이것이 우리나라에도 수입(收入)되어 국내 삼국지 번역계(飜譯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우영 삼국지 등 만화로 번역되는 경우도 많다. 대상 연령층(年齡層)을 낮게 잡은 것이 많으며 이해하기 쉽다는 장점(長點)이 있지만 재미없을 것 같거나 만화로 표현하기 적당치 않은 부분을 뭉텅 잘라먹는 경우가 많다. 심할 경우 왜곡(歪曲)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입문서(入門書)로는 쓰되 맹신하지 말자. 또한 대부분 모본이 요시카와 삼국지가 많다보니 제갈량(諸葛亮) 사후부터는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평역 과정에서 뒷심 부족 현상을 일으킨다. 작가들은 초반부(初盤部)에는 오리지널 에피소드를 적극적으로 섞으며 맛깔나게 창작한다. 이때는 자신이 나관중(羅貫中)을 능가할 수 있다는 패기가 느껴진다. 이 패기는 대개 적벽대전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적벽대전(赤壁大戰)이 끝나고 나면 모든 작가들은 이 마귀 같은 대하소설(大河小說)에 손댔다는 것을 후회하며 때려치우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게 되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적벽대전을 지나도 삼국정립(三國鼎立)까지는 한참 멀었다. 원판 연의, 이하 회수는 모종강본(毛宗崗本) 기준에선 삼고초려(三顧草廬)가 37회에 펼쳐지고 화용도(華容道)가 50회인데, 추풍오장원(秋風五丈原)이 104회다. 즉,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절반에 조금 못 미친다. 추풍오장원(秋風五丈原)까지만 쓰더라도 지금까지 쓴 만큼 더 써야 한다. 

서천 정벌 이후 관우(關羽), 장비(張飛), 유비(劉備)가 차례대로 죽고 메인 악역인 조조(曹操)마저도 죽어버리는 84회의 이릉대전(夷陵大戰), 85회의 유비 사망에 이르면 처참한 비극(悲劇)에 작가는 정신적 충격을 받아 의욕(意欲)을 상실한다. 거기다 이릉대전에서 승리한 오는 이후부터 활약 없이 겉돌게 되는 탓에 대활약(大活躍)할 계기조차 없으니 이에 따라 비중(比重)도 급감한다. 

그 뒤로는 어떻게든 한시라도 빨리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 본래(本來) 연의의 내용에 따라 적당히 진행(進行)하게 된다. 다행히도 2부의 주인공 포지션이라 볼 수 있는 제갈량(諸葛亮)이 있어서 아직은 버틸 수 있다. 이 때문에 상당수(相當數)의 작품들은 이 시점부터 제갈량 원톱 구도로 쓰여진다. 사실 연의에서 제갈량이 유독 띄워진 건 후반의 재미를 책임(責任)져야 할 원톱이라 그런 건지도 모른다. 

남만 정벌(南蠻征伐)은 개그 캐릭터 맹획(孟獲)과 타사대왕(朶思大王), 올돌골 같은 정겨운 이민족(異民族)들의 도움으로 근성(根性) 있게 버텨나간다. 사실 이미 판타지 소설이 되었으나 작가들은 아무런 위화감(違和感)도 느끼지 못한다. 바로 전의 이릉대전이 줄초상인 걸 감안(勘案)해 남만 정벌은 특별히 죽는 네임드 없이 가볍게 진행된다. 

그리고 제갈량(諸葛亮)의 북벌 이때부터 2부의 최종보스 포지션인 사마의(司馬懿)가 등장한다. 제갈량과 사마의의 치열한 대결(對決)이 벌어지자 작가들은 가까스로 남만의 독기(毒氣)에서 빠져나와 그나마 제정신인 내용을 쓰기 시작한다. 상대가 조조(曹操)의 뒤를 책임질 "지장 스타일의 적"인 사마의라서 제갈량과 계략을 주고받으며 싸운다. 조조와 유관장 시절만큼의 간지폭풍 전개는 아니더라도 군담다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전의 이야기들이 호쾌(豪快)한 활약으로 앞날이 기대되는 희망찬 전개였다면 북벌은 그 제갈량이 나섰는데도 온갖 사건사고(事件事故)로 발목 잡히고 조운(趙雲)도 세상 뜨고 제갈량의 뒤를 이어야 할 2세대 중에서도 제갈량 보다 먼저 가는 인물이 나오는 등,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속 터지는 전개이다. 

결국 제갈량(諸葛亮)은 가을바람 타고 세상을 떠나버린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가들은 여기에서 제갈량의 죽음과 함께 자신도 한계(限界)를 느껴 붓을 꺾고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차라리 죽여라 사마의(司馬懿)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싶어도 후반부(後半部)에 툭 튀어나온 감이 있고, 상대하는 인물이 기껏해야 조상 정도인데 다만 하후돈(夏侯惇), 조인(曹仁), 조진(曹眞), 조휴(曹休), 조상(曹爽) 등으로 이어지는 범 조씨 일족(曺氏一族)과 사마씨 일족(司馬氏一族) 사이의 병권 다툼은 정치적인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계략(計略)들이 나와서 충분히 많은 내용을 쓸 수 있다. 연의에서도 일단 고평릉 사변(高平陵事變)의 내막은 다루어주긴 했다. 이미 최강자인 제갈량(諸葛亮)과 맞수로 싸웠기에 독자들에게 관심(關心)을 끌만한 새로운 상대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나관중(羅貫中)도 제갈량(諸葛亮) 사후는 지루했는지 1권으로 압축(壓縮)했다. 제갈량이 죽는 부분이 연의 104회인데, 나머지 10여 회가 그 후 46년을 다룬다. 시대 전체로 보면 제갈량이 사망한 시점(時點)은 삼국지에서 다루는 시기의 중간쯤이다. 연의가 총 96년의 역사를 다루는데 제갈량이 사망한 시점이 50년이 흘렀을 때다. 역사적으로 분량(分量)을 제대로 맞추려면 제갈량이 죽었는데 지금까지 쓴 만큼 더 써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1권의 비중도 편차(偏差)가 심하다. 대부분이 제갈량이 사망한 뒤 촉이 멸망하는 30년 정도만 크게 다루고 위의 멸망부터 진이 오를 정벌(征伐)하여 천하 통일하는 부분은 119회 마지막 몇 장 정도와 120회로 압축되었으며 1권의 20분의 1 분량에 불과하다. 

물론 후반부에도 강유(姜維)나 등애(鄧艾) 등 흥미를 끌 수 있는 인물들은 많으나 이전 세대의 인물들이 워낙 캐사기급 포스를 가지고 있어서 묻히는 감이 없잖아 있다. 무엇보다도 제갈량(諸葛亮) 사후의 삼국은 전쟁을 일으키는 횟수가 많지 않았다. 촉은 다시 내정에 힘썼고 위와 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삼국이 개국 초기의 혼란기(混亂期)를 지나 안정기에 들 시기였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狀況)에서는 예전만큼의 재미난 장면인 전쟁, 암투가 많이 나올 수도 없다. 애초에 강유나 등애 또는 다른 인물들이 자신의 포스를 발휘(發揮)할 무대 자체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아예 재미나게 쓰기가 힘든 부분이다. 

그래도 나관중(羅貫中)은 조방(曹芳)의 폐위와 사마소(司馬昭)의 위왕 시해(弑害), 제갈탄(諸葛誕)의 난 제갈각(諸葛恪), 손준(孫峻)의 분쟁 등 위나라와 오나라의 중요 사건들도 한 둘씩 다루며 어떻게든 결말(結末)을 맺었다. 하지만 다른 작가들은 여기에서 근성이 다 떨어지며 제갈량(諸葛亮) 사후는 다룰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삼국지 관련 창작물(創作物)들이 제갈량(諸葛亮)의 죽음을 삼국지의 종료로 취급(取扱)하고 있다. 책에서는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 영웅 삼국지, 드라마 삼국은 제갈량이 죽고 다음 화에서 사마의(司馬懿)가 쿠데타에 성공한 직후 사망하며 끝난다. 

원말명초(元末明初)에 나관중(羅貫中)이 집필한 원본은 현재 소실되었다. 워낙 대작인 터라 이에 얽힌 야사(野史)도 많은데 나관중이 이걸 쓰는 동안 반쯤 미쳐서 돌아다녔다든가 뭘 묻기만 하면 소설 내용(小說內容)을 그것도 앞뒤가 안 맞게 이야기했다는 정도로 처음에는 관우(關羽)를 신나게 비판하다가 진짜 관우의 혼령(魂靈)이 내려와 버려서 크게 놀라 다시 썼다든가하는 이야기 등이 전해내려 온다. 물론 이는 그만큼 나관중이 이 작품을 잘 썼다는 이야기로 요약(要約)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하도 유명하다 보니 중국의 모든 역사적 시기를 통틀어 정사와 소설을 혼동(混同)하는 사람들이 단연코 독보적(獨步的)으로 많다. 사실 삼국시대가 역사적(歷史的)으로는 시기가 짧고 비중도 적은 시대인데 소설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런 현상이 더 커지는 것이다. 웬만큼 배웠다는 사람도 자주 혼란(混亂)을 일으키며 정사 삼국지를 조금 읽은 사람은 무슨 마공인지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서 연의와 정사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이 돼버리는 건 예사다.  

마오쩌둥(毛澤東)이 가장 좋아한 소설이다. 어린 시절부터 읽었다고 한다. 작품 내에서 상대보다 압도적(壓倒的)인 전력을 이끌고 온 군주가 오히려 적은 수의 적군에게 지는 경우가 많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관도대전(官渡大戰)의 원소, 적벽대전(赤壁大戰)의 조조, 이릉대전(夷陵大戰의 유비 등, 사실 대군이 패배한 경우가 묘사가 많고 임팩트가 크게 남아서 그렇지 실제 연의에서는 대병력(大兵力)에 밀리거나 항복하는 약소군주(弱小君主)가 훨씬 많다. 유대(劉岱), 교모(橋瑁), 한복(韓馥), 여포(呂布), 원술(袁術), 유표(劉表), 마초(馬超), 장로(張魯), 맹획(孟獲), 공손연(公孫淵) 등 이외에도 대군에게 발린 경우가 수도 없이 많고 유비(劉備)조차 조조(曹操)의 대병력에 숱하게 박살나며 초창기의 조조 역시 서영(徐榮)의 대병력에게 박살난다. 선택적 기억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군담소설(軍談小說)이기 때문에 문신들은 비중이 거의 없다. 제갈량이 군략가(軍略家)의 포지션이 된 것은 그가 역사대로 문관(文官)이 되면 후반부에는 혼자 비중이 적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그나마 문신(文臣)들이 비중이 높은 편에 속한다는 말이 있다. 당연한 것이 이것은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이고 더 넓게는 대중문학(大衆文學)이다. 이전에는 판소리처럼 이야기꾼이 이야기하는 형식(形式)이었고 원대에는 잡극(雜劇)이라고 해서 연극으로 다루는 내용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돈 받고 하면서 읽는 사람, 듣는 사람, 보는 사람에게 임팩트와 재미를 주려면 내정보다는 전쟁, 전쟁보다는 일기초(日記抄)라고 불리는 일대일 결투를 벌여야 한다. 특히 원나라 시대를 주름잡았던 원대 잡극의 경우는 어지간한 것은 다 일기초(日記抄)로 때워버리는데 연극하면서 관객들 하품할 내정 장면을 넣거나 돈 많이 주고 엑스트라 동원해봐야 규모(規模)가 얼마 될 수 없는 전투 장면 넣느니 차라리 장군 둘이 맞싸움 벌이는 것이 보는 사람 이해하기 편한 것이다. 제갈량(諸葛亮)이 대놓고 칼싸움 안하고 도술 안 부린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단적으로 삼국지평화의 제갈량과 방통은 완전한 신선처럼 묘사되니 말이다. 삼국지의 제갈량은 수호전(水滸傳)의 오용(吳用)과 공손승(公孫勝)을 8대 2 내지 9대 1정도 비율로 섞어놓은 듯한 이미지인데, 여기서 비율을 1대1로만 조절해도 봉신연의를 향해 달려가게 된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착각(錯覺)하는 게 삼국지연의를 하나의 역사서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엄연히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첫 문장으로 1회에 실렸고 첫 문장이 유명한 작품에도 수록(蒐錄)되어 있다. 후한 말~삼국시대 그리고 이후 청나라 멸망까지의 중국사까지를 함축적(含蓄的)으로 표현한 명문으로 꼽힌다. 다만 국내외 삼국지 평역 작품들 중에 이 문장이 그대로 수록되는 경우는 드물다. 아무래도 서두에 해당되는지라 작가마다 개인의 감상을 적어 넣기 때문인 듯하다. 평역이 아닌 일반적인 번역의 삼국지는 이 문장이 있다. 와이파이 삼국지의 슬로건이기도 하다. 

반대로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은 이와는 상대를 하지 말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삼국지에 워낙 온갖 교활(狡猾)한 술수와 책략들이 넘쳐 흐르다보니 삼국지를 3번 이상 열독한 사람이라면 그만큼 사기꾼지략가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각자 특색이 강했던 동아시아 문화권(文化圈)이지만 삼국지에 등장하는 개개인의 인물상이나 명언, 사건 등을 공유하고 있고 생활에 적용하는 등, 동아시아 문화권을 하나로 잇는 대표적인 아이콘이기도 하다. 다만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를 읽어보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다. 

참고로 보통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난 184년부터 오가 멸망하는 280년까지를 연의의 배경으로 삼는데 이 기간 중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사람은 사마부(司馬孚; 180년 ~ 272년)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태어나서 서진 건국까지 보고 죽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마지막 주인공이 강유(姜維)인 점도 납득할 수 있다. 그는 높은 뜻을 품은 사대부이자 신의를 위해 목숨도 태연히 버리는 남자였으니까 말이다. 

수호지(水滸志)의 작가 시내암(施耐庵)은 삼국지연의의 저자 나관중(羅貫中)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속어 중에는 유비(劉備)가 아두(阿斗)를 땅에 던진 것은 인심을 매수(買收)하기 위해서라거나 유비는 울어서 강산을 차지했다는 말이 있듯이 이 속담(俗談)들은 연의의 유행 이후 등장한 것이다. 

물론 중국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교(儒敎)나 도교(道敎) 단 하나만이 아닌 유불도(儒佛道) 삼교를 모두 이해해야만 하며 무위의 치 개념(槪念)도 따라서 유교와 도교 양쪽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도교적 해석(道敎的解釋)의 무위의 치는 다스리지 않으면서 다스리는 즉 순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정치를 말한다. 유교적 해석(儒敎的解釋)으로는 공자(孔子)가 요순(堯舜)에 대해 평가했듯이 공손하게 자신의 몸을 낮추고 자신의 몸  가짐을 바르게 하며 어진 이들을 불러 모으는 정치를 말한다. 그러므로 요순시대(堯舜時代)를 극찬(極讚)하던 것도 공자이기도 하고 여기서의 무위의 치 개념은 도교라기보다는 유교적 개념에 가깝다. 다만 그렇다고 도교와는 전혀 관련 없는 개념(槪念)이라는 것도 물론 아니다. 노자(老子)와 공자(孔子)의 대화, 혹은 대화했다는 전설(傳說)의 초기 유교와 도교 개념들은 상당히 겹치는 것들이 많다. 

본디 나관중본(羅貫中本)은 구전적 성격(口傳的性格)이 많이 남아있었고 당연히 통속적(通俗的)인 성격을 지닌다. 때문에 위, 촉, 오의 구성이 비교적 평균적이라 어느 소속이든 슬기롭고 충성스러우면 칭찬(稱讚)을 아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통속연의(通俗演義)'이고 아무튼 각 인물들이 멋있으면 그만이었다. 나관중본의 경우는 관우(關羽)의 죽음도 그냥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 것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이를 적토마(赤土馬)가 올가미에 걸려 넘어져 관우가 붙잡히고 손권(孫權) 앞에서 영웅적 최후를 맞는 것으로 소설적 성격이 강하게 각색한 것은 모종강본(毛宗崗本)이다. 한편으론 모종강이라고 100% 촉을 쉴드치진 않았다. 일례로 관우가 손권의 딸을 개의 딸 운운하며 모욕(侮辱)하는 장면에선 협평으로 그럼 유비는 그 개의 딸과 결혼한 거냐며 비판(批判)한다. 여기에 노숙(魯肅)이 유비(劉備) 측이 익주(益州)를 먹으면 형주(荊州)를 돌려주겠다는 문서를 가지고 오자 주유(周瑜)는 이런 종이 쪼가리를 어떻게 믿냐며 분노하는데 여기서 “원래 문서란 믿을 게 못 된다. 형주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협평이 들어간다. 유비(劉備) 측을 은근히 사기꾼처럼 볼 수도 있는 협평(狹評)이다. 

다만 사마의(司馬懿)의 전술적 패배가 그렇게 크진 않았고 제갈량(諸葛亮)을 교전으로 이기기 힘들다고 생각해 요충지(要衝地)를 수비하는 전략을 취해 제갈량의 전략적 공세 목표(장안 공략)는 돈좌(頓挫)시키는데 성공했다. 또 상방곡 전투(上方谷戰鬪)에서 제갈량이 사마의를 상대로 대승을 거둬서 죽음의 위기(危機)까지 몰아넣는 등, 대승(大勝)을 거두는 장면들도 대부분 연의의 창작이다. 

서진(西晉)의 후신인 동진(東晉)의 진명제가 그것과 관련된 진실을 듣고는 "그게 사실이면 그 진나라가 오래 못 간 건 당연하고 이 진나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오" 라고 한탄했을 정도로 사마씨(司馬氏)의 찬탈은 탈법의 정수(精髓)였다. 그러니 진수가 그걸 그대로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구비 문학(口碑文學)으로 시작한 문학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이를 나관중(羅貫中), 모종강(毛宗崗) 같은 이가 정리한다고 해도 개개의 화소들이 흥미를 불러일으키는지라 통일성(統一性)을 해친다고 무작정 쳐내지는 못하니 앞뒤가 맞지 않는 서술(敍述)들이 남게 되는 것이다. 

나관중(羅貫中)은 과거를 여러 차례 응시했으나 한 번도 붙지 못했다. 이를 반영한 삼국지 5에서는 황건적(黃巾賊)의 난 시나리오의 정원이 신야에 위치한 군웅(群雄)으로 등장한다. 사실 고증오류(考證誤謬)가 아닐 수도 있는 게 현대식으로 축척(縮尺)을 잰 지도가 나오는 건 한참 후다. 관우(關羽)가 지도도 없이 잘 모르는 곳에서 가고 있다면 빙빙 돌아가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또 다른 설은 연의가 창작될 당시에 황하(黃河)의 흐름이 지금과는 같지 않아서 당시의 길도 현대와는 달랐을 것이라는 설이다. 실제 황하는 물길이 자주 변했다. 

이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적벽대전(赤壁大戰)의 동남풍을 기도는 페이크였고 천문관측(天文觀測)으로 일시적인 풍향변화(風向變化)를 예측한 결과라는 설명을 덧붙이는 경우도 있다. 이 부분도 허구(虛構)이다. 실제로는 복병을 만나기 전에 조조군(曹操軍)이 무사히 퇴각하고 이후 뒤늦게 도착한 유비군(劉備軍)이 불을 질렀다고 한다. 물론 정사에서 유비가 공을 날로 먹은 건 아니고 강남을 장악한 손권(孫權)이 겨우 3만 군사를 준비해올 때 한낱 객장 신분으로 2만 명이나 되는 군사(휘하 명장들)를 동원해서 온다. 

당시에는 익주(益州)의 한중군(漢中郡)에 속한 포중현(褒中縣)으로 짐작(斟酌)된다. 그것을 간단히 알아보려면 주가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삼국시대(三國時代)를 거치면서 주가 서서히 늘어나 결국은 주가 엄청난 수로 난립(亂立)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을 재통일하는데 성공한 수문제(隋文帝)는 군을 폐지하고 전국을 9주로 나누었으며, 그 밑에 바로 현을 두어 정리하게 된다. 그러다가 수양제(隋煬帝)가 다시 그 사이에 군을 두는 것으로 정리하여 한나라대로 잠시 돌아갔으나 당나라 때 도, 주, 현제를 확립했고 광역행정구역(廣域行政區域)의 명칭이 도에서 로, 그리고 로에서 성으로 바뀐 것을 제외(除外)하고는 명, 청 때까지 그대로 쓰이게 된다. 

작중에 나오는 서주성(徐州城)도 팽성군(彭城國)을 일컫는 것이다. 그럼에도 본문에 적지 않은 이유는 서주는 당시에는 팽성국과 하비국(下邳國) 낭야국(琅邪國) 등이 속한 광역행정구역을 일컫는 용어로도 존재해서 역주와 포주 등의 사례와는 다르다. 그리고 또 하나 정조 임금은 이순신(李舜臣)을 제갈량보다 높게 봤지만 정작 이순신은 자신을 제갈량(諸葛亮)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물론 사회상 겸손의 의미일 수도 있긴 하지만 전술과 병기를 창안(創案)하고 군대를 조련하여 적과 맞서는 수준을 넘어 국가 전체의 운영을 혼자 도맡아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뤄낸 제갈량이니만큼 그런 자리에까지 가보지도 못했던 이순신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낙곡대전(駱谷大戰)을 제대로 그려내려면 반드시 사천성(四川省)의 위험천만한 산악지대(山岳地帶)에서 촬영해야 하는 데 그러면 시간과 돈이 엄청 많이 소요된다. 실제로 구삼국 드라마는 등애(鄧艾)의 촉한 정복을 재현하고자 실제 등애와 휘하 군사들이 올랐던 산악지대에서 촬영을 했다. 

사실 약간 억지인 부분도 있다. 권모술수(權謀術數)라는 말은 오히려 병법의 기본이고 당시 시대상(時代相)으로는 오히려 자신과 부하를 위하는 것이 중요했다. 한고제(漢高帝)가 자기가 자식들을 버린 것은 유명한 일화(逸話)이다. 심지어 유선(劉禪)을 구해온 조운(趙雲)은 유비(劉備)와 가족 같은 관계 였고 유비가 가장 신임하는 자였다. 오히려 대표적(代表的)으로 서서(徐庶) 같은 인물은 자신의 모친을 생각해서 유비의 신임을 얻고서도 유비에서 조조(曹操)로 간 자도 있다. 이중 잣대라 하면 오히려 이 책을 쓴 류짜이푸(刘再复)가 유비에게 대는 것이 아닐까? 제갈량(諸葛亮)과 사마의(司馬懿)에 관해서는 제갈량은 남만(南蠻)을 해결하기 위해 제압 도중 저항하다 죽는 남만인들을 보고 언제까지 저들을 죽어야 하나라고 탄식(歎息) 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가혹한 계책은 오히려 적에게 하고 백성들을 보살폈다. 한편 사마의는 자신의 입지(立地)가 부족해지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가혹한 계책(計策)을 내서 확실하게 입지를 다져야 했다. 

여기에 나관중(羅貫中) 이전의 삼국지인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 같은 경우는 역사왜곡(歷史歪曲)을 하면서까지 결국엔 촉한(蜀漢)의 후예가 승리한다고 억지 해피엔딩을 만들었다. 끝으로 정사(正史)를 참고하면서도 진나라 사관이었던 진수(陳壽)가 차마 건들 수 없었던 사마씨(司馬氏)의 찬탈(簒奪)이나 기전체 사료의 특성인 뒤죽박죽한 부분들을 나름대로 매끄럽게 정리(整理)함으로서 정사보다도 서술이 낫다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도 없진 않다. 당대에 이런 민담 수준(民譚水準)을 뛰어넘는 고퀄리티의 역사소설(歷史小說)을 남길 수 있다는 게 놀라운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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