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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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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대기서 중 하나인 고전소설 '삼국지연의' 역사배경 분석 (3)

[사진 = 구글 검색]


조조(曹操)가 백사 일가(伯奢一家) 사람들을 죽인 것은 실수였으므로 양해해줄 수 도 있다. 그러나 백사까지 죽이는 데 이르러서는 그 악독(惡毒)함은 극에 달했다. 그래놓고서는 다시 "차라리 내가 남을 배반(背反)할지언정 남이 나를 배반하지는 못하도록 하겠다"고까지 말하는데 독자들은 이에 이르러서는 그를 나무라고 욕하면서 그를 죽이려고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이야말로 조조가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라는 사실(事實)은 알지 못한다. 

시험 삼아 천하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 그리고 감히 입을 열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도덕(道德)과 학문을 강의하는 사람들은 일단 이 말을 뒤집어서 "차라리 남이 나를 배반하게 할지언정 내가 남을 배반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듣는 이는 나쁘지 않겠지만 그들이 하는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반대(反對)로 하는 일 하나하나가 모두 조조의 이 두 마디 말을 몰래 배우고 있다. 그러므로 조조(曹操)는 말과 마음이 일치한 소인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무리들은 입은 옳아도 마음이 글러서 그 말과 행동이 직설적(直說的)이고 통쾌한 조조보다 도리어 못하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이것이 오히려 조조가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다." ― 삼국지연의 4회, 모종강(毛宗崗)의 서시평- 

감히 말하건대 과거 왕침(王沈)의 위서(魏舒)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종강의 이 평가를 능가하는 해석이 나왔던가? 아니 오히려 현대의 조조(曹操) 재평가들이라는 것들이 나관중(羅貫中)과 모종강(毛宗崗)이 수백 년 전에 짜놓은 그물에 걸려서 허우적거리는 꼴이 아닌가? 

한편 모종강본(毛宗崗本)의 특징 중 하나는 각 화마다 실린 서시평들과 본문 중간중간에 적혀있는 협평(夾評)들이다. 서시평은 각 화에 대한 모종강의 감상이고 협평은 적절한 해설과 농담(弄談)이 섞인 문장들이다. 1화의 몇몇 협평들 예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건녕 2년 4월 보름날 황제(皇帝)가 온덕전(溫德殿)에 나와 옥좌(玉座)에 앉으려고 할 때 전각 모퉁이로부터 광풍(狂風)이 일더니 푸른 구렁이 한 마리가 대들보 위에서 스르르 내려와서 옥좌 위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백사(白蛇)를 베어죽인 후 한나라가 일어났는데 청사(靑蛇)가 나타나자 한나라가 위태로워진다. 청사와 백사가 멀찍이서 서로 대(對)를 이루고 있다. 

광화 원년에는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일이 있었다. 이 징조는 더욱 환관(宦官)들에게 들어맞는 것이다. 남자가 거세(去勢)를 당하는 것은 곧 수컷이 암컷으로 변하는 것이다. 환관들이 정사에 관여(關與)하는 것은 곧 암컷이 또 수컷으로 변하는 것이다. 

황제는 일개 환관에 지나지 않는 장양(張楊)을 높여서 아버지라 부르기까지 했다. 이러한 장씨(張氏) 아비가 있으므로 자연히 장각(張角) 등 장씨 형제 세 사람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당주(黃巾賊)는 곧장 궁중으로 가서 거사계획을 고해 바쳤다. 환관(宦官)은 반대로 첩자가 되고 첩자(諜者)는 반대로 자수(自首)를 하는데 이를 통해 내부의 도적이 바깥의 도적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덕 曰: 나는 본래 한 황실의 종친(宗親)으로 성은 유, 이름은 비라고 하오. 지금 들으니 황건적(黃巾賊)이 난을 일으키고 있다는데 도적들을 깨뜨려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뜻은 있으나 다만 내게 힘이 없어서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워서 길게 탄식(歎息)을 했던 것이오." 

장비 曰: "나에게 어느 정도 재산(財産)이 있으니 고을 안의 용사들을 불러 모아 공과 함께 큰일을 도모(圖謀)해보는 게 어떻겠소?" 결국 재산이 있는 사람은 큰일을 하기가 쉽다. 

황제는 대장군 하진(何進)을 불러서 군사를 동원하여 마원의(馬元義)를 잡아다가 목을 베도록 했다. 그 다음에는 봉서 등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하옥(下獄)시키도록 했다. 왜 즉시 죽여 버리지 않는가? 

또한 탐관오리(貪官汚吏) 독오가 유비(劉備)에게 뇌물을 요구하다가 트러블이 일어나고는 장비(張飛)에게 매질을 당하는 유명한 에피소드에서는 이런 식으로 적기도 했다. 

독오가 큰 소리를 버럭 지르며 말했다: "네가 황제의 종친을 사칭(詐稱)하면서 공적을 거짓으로 보고하는가? 이번에 조정(朝廷)에서 조서를 내린 것도 바로 너 같은 엉터리 관리들을 가려내서 퇴출(退出)시키려는 것이다." 
(중략) 
독오가 사정했다: "현덕공(玄德公), 제발 날 좀 살려주십시오!" 내가 어찌 감히! 나는 본래 황제를 사칭하고 공적(功績)을 거짓 보고했던 사람인데 어찌 감히 공을 구해줄 수 있겠는가? 

현덕(玄德)은 본디 마음이 인자한 사람인지라 급히 장비(張飛)를 꾸짖어 매질하는 손을 멈추도록 했다. 

즉 협평의 용도(用途)는 나무위키의 주석 및 취소선과 비슷하다. 권선징악적 주제라는 평 때문에 무겁게 느껴질 수 있지만 협평의 문체(文體)는 매우 유쾌하고 농담(弄談)이 많은 편이다. 

김운회는 2003년에 장정일, 서동훈과 공저(共著)한 삼국지 해제(解題)에서 연의가 한족 민족주의(民族主義) 서사를 담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연의가 의도된 정치적 확장운동(擴張運動), 반외세적인 성격을 띤 민족주의적 서사라고 볼 근거는 없다. 우선 연의에 영향을 준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는) 이민족 왕조인 원(元)나라 때 유행했다. 황실과 주군에 대한 충성과 권신에 대한 차가운 시선은 고대부터 중국의 전통적 관념(傳統的觀念)이었고 이를 굳이 외세에 저항(抵抗)하는 민족주의 구도에 끼워 맞출 필요나 재료가 없다. 왕조 사회서 찬탈자(簒奪者)가 이야기의 악역 되는 건 반외세 민족주의와 상관없는 이야기다. 조조(曹操)가 이민족인 것도 아니고 찬탈자 악역 세팅이 딱히 원명 교체기(交替期)라 그런 것도 아니다. 찬탈자가 악역이 되는 세계관이 유학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고 지적할 수는 있어도 그걸 반외세 민족주의와 동일시(同一視)할 이유는 없다. 

전근대 사회에서 왕과 국가는 맞지만 그게 민족하고 일치하는 개념(槪念)이 아니다. 나관중(羅貫中)이 연의에서 그걸 의도한 정황도 없고 유교의 국가 개념은 현대 민족 관념처럼 특정 혈통(血統)이나 역사, 언어, 문화에 기반(基盤)한 민족국가 개념과 다르다. 그래서 조조(曹操)가 악역이어도 굳이 외래 민족으로 세팅될 필요가 없고 한 외부 피가 섞인 왕조인 당이나 진(한나라 이전)도 정통(正統)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민족이 국가를 구성한다는 개념은 근대의 창작품(創作品; 논의의 여지는 있지만)에 가깝고 삼국지연의는 전근대인 원명 교체기 때 나온 소설이라서 근현대에 부각(浮刻)된 한족 민족주의와 거리가 멀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중화는 혈통(血統)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었다. 오랑캐여도 예 받아들이면 중화(中華)가 되는 개념이고 삼국시대(三國時代) 이전인 이위공문대(李衞公問對)나 진(秦), 당(唐)의 정통 왕조 인정에서 보인다. 즉 연의의 서사가 왕조의 정통성 개념(正統性槪念)에 영향을 받은 건 맞지만, 근현대 민족주의와는 다른 개념인 것이다. 서양에서 중화와 가장 흡사(恰似)한 관념은 로마 제국 계승 관념(觀念)인데 두 관념의 특징은 그 계승이 문화적 이념적 개념이지 역사적 혈통적 개념이 아니며 민족과 달리 외부 혈통집단(血統集團)에 열려 있는 개념이었다.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은 동진연간(東晉年間)부터 나타났는데 이는 북방민족(北方民族)의 침공 보다는 연달아 터지는 선양(宣揚)을 빙자한 찬탈 행각에 대한 경각심 때문이다. 삼국연의도 북방민족의 비중이 극도로 약하다보니 한족 민족주의 경향(傾向)이 있다고 볼만한 요소가 없고 중심되는 사상은 찬탈자에 대한 대항일 뿐이다. 모종강 평본(毛宗岡評本)은 최근에는 정통, 천하, 대의명분(大義名分) 등의 해석을 두고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시기에 따라 다르게 보는 관점도 있다. 

삼국연의는 청대 금서(禁書)였지만(판본에 상관없이), 워낙 재미있다보니 널리 유통되었고 단연 모종강 평본(毛宗岡評本)이 인기였다. 느슨한 금서였던 셈인데 만약 연의 속에 이민족(異民族)을 배척하자는 의도가 있었거나 그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읽혀졌다면 적어도 청나라 중기까지 책이 유통(流通)되기 힘들었다. 위, 촉, 오(魏蜀吳)가 벌인 전쟁은 한족끼리 대의명분을 놓고 벌인 것인데, 이 안에 이민족을 설정해 읽는 것도 좀 이상하다.  

삼국지연의는 한마디로 말해서 비극 작품(悲劇作品)이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나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 謀事在人成事在天(모사재인성사재천)은 제갈량(諸葛亮)이 연의 103회에서 호로곡(葫蘆谷)에 갇힌 사마의(司馬懿)가 살아남자 탄식(歎息)하며 한 말이다. 

사마염(司馬炎)이 중국을 통일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내용은 결국 유비(劉備), 조조(曹操), 손권(孫權) 등 모든 영웅들의 노력이 대부분 허사로 끝났음을 보여주며 이는 연의 맨 앞에 나오는 '합해지면 나뉘고 나뉘면 합해지기 마련'이라는 말과 수미상관(首尾相關)을 이루기도 한다. 삼국지연의의 마지막은 연의의 모든 줄거리를 되돌아보는 "고풍(古風)"이라는 장편 시로 마무리되는데, 마지막 수인 뒷사람들 탄식(歎息)하며 공연히 가슴 설레네!(後人憑弔空牢騷)는 상당히 허무주의적(虛無主義的)으로 느껴진다. 사실 처음 삼국지를 읽은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허무하게 사라지고 실패하는 영웅들의 최후를 보면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데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비극 작품들과 비극 공연(悲劇公演)들도 그렇고 옛사람들은 비극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을 좋아한 것 같다. 

실제로 유비(劉備)의 촉한은 명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없어 망해버리고 조조(曹操)의 위나라는 힘은 강했지만 찬탈(簒奪)로 건설된 나라인 만큼 신하였던 司馬氏에게 무력하게 찬탈 당한다. 작중 묘사(作中描寫)를 보면 헌제가 동한을 빼앗기는 모습과 비슷하게 묘사하는데 아예 사마소(司馬昭)가 "너희도 한에게서 찬탈했잖느냐"면서 빈정거리는 걸 보면 가히 역사는 반복된다는 걸 실감(實感)할 수 있다. 오나라도 결국엔 세력(勢力)이 밀려서 멸망한다. 

중국 현대 정치사상사 전공 학자인 피터 R. 무디 주니어는 "삼국지연의와 대중성 그리고 중국의 정치사상"라는 글에서 이 엔딩과 전체 구성(全體構成)을 보고 시니컬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라는 문학 작품에 드러난 심성에 대한 평가(評價)다. 

이는 동양의 군담(東洋軍談)과 서양의 기사(西洋騎士) 이야기들은 그 테마가 좀 다른 데서 기인(起因)하는 평가로 삼국지에 대해 서양식 기사 이야기를 일컫는 단어인 로맨스(Romance)를 붙여 번역(飜譯)하긴 하지만 서양식 기사 이야기가 강적(强敵), 특히 이교도(異敎徒)와 맞서 싸우며 기사도(騎士道)를 지켜내는 절대선(絶對線)에 가까운 용사를 칭송하는 이야기라고 하면 동양식 군담은 대개 권력다툼과 영웅들의 활약이 긴 역사 안에서 갖는 본질적인 허망함을 강조(强調)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선악 대립(善惡對立)에 익숙한 서양인들이 선악의 구별(善惡區別)이 희미하고 선도 악도 세월 속에서 스러져버리는 동양식 세계관을 염세주의적(厭世主義的)이라고 느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아주 잘 나타냈다고 평가받는 명문으로 시작하는 헤이케모노가타리나 뒷사람들이 영웅들을 추억(追憶)하는 쓸쓸한 이야기라 강조하며 시작하고 끝나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대표적인 예시다. 

그러나 서양의 기사로맨스는 '선악구분이 확실하고 절대선을 칭송', '동양식 군담은 허무주의'라는 이분법적 분류(二分法的分類)는 지나친 감이 있다. 동양 군담소설(軍談小說)만 해도 결말이 정해진 역사 군담 소설이 아니라 창작 군담 소설(유충렬전 같은)들은 서양식 기사 이야기와 비슷하게 볼 수 있는 면도 꽤 많다. 거기다 역사 군담 소설도 정사가 해피엔딩이면 당연히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정사 삼국지(三國志)부터 서진의 승리로 끝나고 심지어 서진(西晉)조차 자기들의 병크와 소빙하기의 발생으로 인한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서막으로 순식간에 망해서 자동으로 비극이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양의 기사전설(騎士傳說)도 새드 엔딩과 허무한 성격을 띄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중세 유럽 기사 로맨스의 대표격인 아서 왕 전설만 해도 아서 왕이 자식인 모드레드의 반역(反逆)으로 목숨을 잃는 새드 엔딩으로 끝나며 그 외에도 기사들의 이루지 못한 꿈이나 사랑 등을 노래하는 전설이나 문학은 꽤 많다. 역시 대표적(代表的)인 기사 문학인 니벨룽의 노래도 선악 구분 따위는 없으며 마지막은 허무하기 짝이 없다.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의 보편적 정서는 그리 다르지 않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삼국지연의를 집필할 때 예전부터 구전(口傳)되어오던 화소들을 상당부분 채택한 결과이다. 개개의 구전 화소(口傳話素)들을 부분부분 붙이다 보면 역사적 사실이라든지 다른 화소들과 비교할 때 일관성(一貫性)이 없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다루는 현대의 매체들은 이 부분들을 합리적으로 해석(解釋)하려는 시도를 많이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제갈량(諸葛亮)의 동남풍 사건은 사실 천문을 유심히 관찰(觀察)해서 타이밍에 맞춘 연출이었다든가. 

장각(張角)이 과거에서 떨어졌다고 서술(敍述)이 나오는데 실제로 과거제(科擧制)는 수나라 때부터 나온다. 나본 선생의 자학(自學)이 아닐까. 정원의 관직은 병주자사(幷州刺史)이며 형주자사(荊州刺史)가 아니다.(낙양입성 직후 집금오에 임명) 참고로 형주자사로 유명한 유표(劉表)는 동탁(董卓) 집권기에 형주자사로 임명된 사람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마의(司馬懿)가 후반에 꾀병을 할 때에도 일부러 병주(幷州)와 형주를 헷갈리는 장면이 있다. 

관우(關羽)의 천리행을 지도에 그려보면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빙빙 돌면서 가고 있다. 서서(徐庶)가 계책으로 조인(曹仁)을 물리치던 시점에 조인이 뜬금없이 번성에 주둔하고 있다. 번성은 유표(劉表)의 거점인 양양의 바로 이웃에 있는 성인만큼 유비(劉備)가 주둔한 신야보다 남쪽에 위치하고 길도 하나뿐이라 조인이 신야를 우회(迂回)해 번성으로 가서 주둔(駐屯)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제갈량(諸葛亮)이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동남풍을 불게 하여 이 동남풍을 이용하여 화공(火攻)을 사용해 조조군(曹操軍)을 격퇴시켰다고 묘사되었지만 그런 능력을 장합(張郃)이나 사마의(司馬懿)에게는 써먹지 못했다. 심지어 안개가 낄 것을 예측한 젊은 시절과는 달리 북벌 중에는 노망난 건지 소나기가 내릴 것도 예측(豫測) 못해 상방곡(上方谷)에서 거의 다 잡을 뻔한 사마의(司馬懿)를 놓치기도 한다. 

조조(曹操)가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화공을 받은 직후 패주(敗走)하다가 복병(伏兵)을 여러 번 만나는데 연의 내용을 보면 조조(曹操)는 남군(南郡) 강릉(江陵)으로 가기 위해 남이릉(南夷陵) 길을 택(擇)하는데 하늘에 기도를 해 동남풍을 불게하고 유비 진영(劉備陣營)으로 귀환한 제갈량(諸葛亮)이 조운(趙雲)에게 형주/남군 가는 길 중 형주(荊州) 가는 길을 막고 장비(張飛)에게 남이릉(南夷陵)·북이릉(北夷陵) 가는 길 중 북이릉 길로 가라고 한다. 그리고 퇴각하던 조조(曹操)는 조운(趙雲)을 만나 털리고 남이릉 길로 가던 중 장비(張飛)에게 습격당한다. 

적벽대전(赤壁大戰) 이후 주유(周瑜)가 남군성을 공략하는 도중에 유비군(劉備軍)에게 강릉, 양양, 남군을 스틸당하는데 그중 양양은 어느새 관우(關羽)가 형주공방전으로 공격할 때 어느새 조조(曹操)의 땅으로 나온다. 서촉의 54주(州)니, 강동의 81주니 드립이 작중 인물(作中人物)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일과 가끔 역주(易州)나 포주(褒州)니 식으로 나오는데 그곳은 당시 시대상이 반영된 오류(誤謬)라 볼 수 있다. 

형남 4군 정벌 당시 관우(關羽)가 황충(黃忠)과 맞붙고 서로를 인정(認定)하는 장면이 창작되었는데 나중에 황충이 관우와 같은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의 반열에 오르자 실제 역사대로 관우가 왜 저 노병(老兵)이 나랑 동급이냐며 화낸다. 

말의 수명은 길어야 30년 이내고 전투마(戰鬪馬)로 쓰려면 그보다 훨씬 더 짧은 기간 밖에 쓸 수 없으며 일상에서 흔히 말을 볼 수 있었을 나관중(羅貫中)이 이런 상식(常識)을 몰랐을 리 없지만 여포(呂布)가 189년에 받은 적토마(赤兔馬)는 30년이 지난 219년 관우(關羽)가 죽고 나서야 스스로 굶어죽는다. 

조비(曹丕)가 사마의(司馬懿)의 조언(助言)을 받아 오로침공전(五路侵攻戰)에 선비와 남만에게 촉(蜀)을 공격(攻擊)하라고 애기하는데 일단 낙양(洛陽)과 남만의 거리가 멀고 가는 길이 험하고 사신(使臣)이 남만에 도착한다고 해도 최소 1년이 걸린다. 그렇다고 인접지역(隣接地域)인 손권(孫權)이나 사섭을 시켜서 남중의 반란(反亂)을 획책(劃策)한 것도 아니다. 실제로 위나라의 오로침공(五路侵攻)은 허구이며 연의에서 촉을 치는 것으로 되어 있는 선비의 족장(族長)인 가비능(軻比能)은 오히려 촉한의 동맹(同盟)이었다. 맹획(孟獲)의 거병은 손권(孫權)의 명을 받고 사섭(士燮)의 권유로 통해 옹개(雍闓)가 끌어들여서 한 것이다. 그래도 워낙에 유명한 에피소드라 정조와 경연하는 자리에서 신하가 정사가 아님에도 이 에피소드를 인용(引用)할 정도였다. 

대략적으로 연의가 조선(朝鮮)에 들어온 시기는 16세기 초중엽쯤으로 추정되는데 2000년대에 16세기 중엽 판본(板本)으로 추정되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금속활자본(金屬活字本)이 발견된 적이 있다. 해당기사 이후에도 적벽가(赤壁歌) 등에서 보듯이 어느 정도 조선만의 독자적(獨自的)인 삼국지 관이 형성되었던 듯하다. 

비슷한 시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잠깐 언급되는데 선조 2년(1569년)에 기대승이 선조 앞에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라는 이 책이 나온 지가 오래되지 아니하여 소신(所信)은 아직 보지 못하였으나 간혹 친구들에게 들으니 허망하고 터무니없는 말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라고 이런 책이 인출(印出, 인쇄)되기까지 했다며 개탄(慨嘆)하고 연의와 함께 초한지(楚漢志), 전등신화(剪燈新話)와 태평광기(太平廣記)까지 깡그리 모아서 깐다. 이 말 이전에 선조가 '장비(張飛)의 고함에 만군이 달아났다고 한 말은 정사에는 보이지 아니하는데 연의에는 있다고 들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어쨌거나 임금인 선조(宣祖)도 연의가 유행한 것을 주위에서 들었을 정도로 금세 알려진 책이든지 아니면 선조도 실제로 봤는데 대놓고 봤다고 하면 좀 그러니까 그렇게 언급(言及)한 것일 수도 있다. 해당 실록기사(實錄紀事) 어쨌거나 유학자의 입장에서 실제의 역사가 아닌 창작물(創作物)이 그럴싸하게 회자(膾炙)되는 세태가 우려되었던 듯 하다. 근데 솔직히 그만큼 재미있긴 하다. 온갖 오락물(娛樂物)이 넘쳐나는 지금도 수많은 삼국지덕후가 양산(量産)될 정도인데 조선시대 사람에게 이게 얼마나 흥미진진(興味津津)했을지는 알 만하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자료를 접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삼국지 문화는 현대에 별로 전달되지 못했다. 후일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일으켰을 정도로 문체적으로 보수적(保守的)이었던 정조(正祖)는 삼국지를 잡스러운 책이라고 나는 삼국지(연의)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는 이순신(李舜臣)을 칭찬하면서 '제갈공명(諸葛孔明)과 싸워도 누가 이길지 모른다'고도 했다지만 애시당초 조선이 성리학(性理學) 국가였고 그 때문에 촉한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 경우가 많았던 걸 생각하면 진짜 역사서만 보고 연의는 안 봤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보면 어떤 신하가 연의의 오로침공전(五路侵攻戰) 에피소드와 제갈량 거문고 공성계(空城計)를 얘기했는데 그냥 넘어갔다. 이런 걸 보면 진짜로 안 봐서 지적(指摘)을 못 한 걸 수도 있다. 

근데 재밌는 부분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정작 정조가 칭찬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이 애독했던 책이기도 하다. 실제 난중일기(亂中日記)에도 가정본(嘉靖本) 삼국연의(三國演義)를 인용한 구절이 존재한다고 한다. 청성잡기(靑城雜記)에 따르면 충무공에게는 세상을 등지고 은거한 절친한 벗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충무공만은 그를 인정하여 중요한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상의(相議)하곤 하였다. 왜적이 침입(侵入)하자 충무공은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 국사(國事)를 함께 도모하자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늙은 부모가 있어 갈 수 없었기에 다만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충무공에게 보내면서 "이 책을 잘 읽으면 국사(國事)를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충무공(忠武公)이 이 책에서 도움 받은 것이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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