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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대기서 중 하나인 고전소설 '삼국지연의' 역사배경 분석 (1)

[사진 = 구글검색]


14세기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이 저술한 역사 소설이다. 중국의 서적 중에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적 중 하나이며 이른바 중국사대기서(中國四大奇書)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동아시아권(東亞細亞圈)에서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읽는 고전소설(古典小說)이다. 

황건적의 난, 도원결의(1회~2회) 
후한 말 십상시(十常侍)의 부정부패(不正腐敗)가 극에 달하며 기강이 문란해지자 백성들은 점점 불만을 품기 시작하며 전국은 극도로 혼란(混亂)해졌다. 이런 가운데 태평도의 교주 장각(張角)이 이끄는 황건적(黃巾賊)의 난이라는 대규모 농민 반란(農民反亂)이 발생한다. 황실의 먼 후손인 유비(劉備)는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형제가 되기로 맹세하고 황건적 토벌(黃巾賊討伐)을 돕기로 한다. 유비, 관우, 장비 3형제를 포함한 영웅호걸(英雄豪傑)들의 활약 덕분에 황건적의 난은 진압(鎭壓)되었지만 이미 조정의 지방 통제력은 붕괴(崩壞) 직전에 도달했다. 

십상시의 난(3회) 
서기 189년, 수도 낙양(洛陽)에서는 영제가 죽고 외척과 환관(宦官) 사이의 정권 다툼 끝에 십상시(十常侍)의 난이 발생하였다. 군벌 동탁(董卓)은 외척과 환관이라는 양대 세력이 없어지는 바람에 공백이 생긴 권력을 장악한 후 스스로를 상국(相國)이라고 칭하며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악행을 저지르니 황실의 정통성과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동탁은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꼭두각시 황제(皇帝)로 세웠다. 

반동탁 연합과 군웅할거(4회~19회) 
이런 동탁의 행위에 각지의 제후들이 원소(袁紹)를 중심으로 서로 연합하니 이를 반동탁연합(反董卓聯合)이라 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제후들은 서로의 이권 문제 때문에 대립(對立)하기 시작하여 결국 동탁과 싸우기는커녕 자신들끼리 서로 싸우게 되어 연합은 해산(解散)된다. 동탁은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하며 폭정(暴政)을 계속하다가 초선(貂蟬)을 이용한 왕윤의 이간계(離間計)에 당해 여포(呂布)에게 처단된다. 그 후 여포는 이각·곽사에게 밀려 장안에서 쫓겨나며 왕윤(王允)은 이각(李傕)·곽사(郭汜)에게 살해당했다. 연합에 참여했던 제후 중 한 명인 손견의 아들인 손책(孫策)은 양주(江東)에서 독립하며 원술(袁術)은 황제를 칭했다가 몰락(沒落)했다. 

동승의 조조 암살 미수사건, 관우의 천리행, 관도대전과 조조의 하북 장악(20회~24회, 25회~29회, 30회~33회) 
그러던 중에 반동탁연합(反董卓聯合)에 참여했던 제후 중 하나인 조조(曹操)가 헌제를 옹립(擁立)하며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되고 그 힘을 이용해서 여포(呂布), 원술(袁術), 도겸 등 여러 군벌을 정벌해나가며 권력의 입지를 다진다. 동승은 헌제의 밀명을 받들어 유비(劉備)를 끌어들여 조조를 암살하려 했으나 들켜 일족이 모두 처형(處刑)당하며 유비도 조조에게 패하며 원소(袁紹)에게 의탁했다. 관우(關羽)는 유비 가족의 안위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장료의 설득을 받아들여 조조에게 항복(降伏)했지만 원소의 장수 안량과 문추의 목을 벤 뒤 다시 유비에게 돌아간다. 장비는 여남에서 머물다가 유비·관우와 합류하며 공손찬(公孫瓚)이 멸망한 뒤 떠돌던 조운(趙雲)도 유비의 부하가 된다. 조조가 관도대전(官渡大戰)에서 원소와의 일전일퇴(一進一退)의 사투 끝에 승리를 거둔다. 얼마 후 원소가 죽고 원담, 원희, 원상이 내분을 벌이자 조조는 원씨(袁氏) 형제를 모두 멸망시키고 하북(河北)을 제패하면서 최강 세력으로 자리 잡는다. 

삼고초려, 적벽대전(34회~40회, 41회~42회 43회~50회, 51회~57회) 
그 동안 유비는 새 근거지였던 여남이 조조에게 함락되자 유표의 객장이 되었으며 그 와중에 사마휘(司馬徽)와 서서의 추천으로 재야에 숨은 인재 제갈량에 대해 알게 된 유비는 세 번이나 제갈량(諸葛亮)의 거처를 찾아가는 수고를 들여 제갈량을 영입(迎入)한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받아들인 유비는 유표 사후에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군과 싸워 적벽대전(赤壁大戰)의 승자가 되어 형주 남부의 4개 군을 차지한다. 유비는 손책(孫策)의 동생 손권과도 동맹을 맺으며 손권의 여동생을 새 아내로 맞으나 유비와 제갈량의 야심을 경계한 주유(周瑜)는 제갈량과 지략 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밀리던 중에 조조가 차지했던 남군을 공략(攻略)하다가 입은 부상+제갈량과의 지략 싸움에서 밀린 화병이 도져 요절(夭折)한다. 주유 사후에 노숙(魯肅)은 유비와의 동맹을 계속 유지했다. 

마초와 조조의 싸움(55회~56회) 
조조는 허도에 있던 마등(馬鄧)과 그 아들들인 마휴(馬休), 마철(馬鐵)을 주살(誅殺)하지만 량주에 있던 마초(馬超)는 복수전을 시도한다. 하지만 가후의 반간계(反間計)에 밀려 패하고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리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한중의 장로에게 의탁(依託)한다. 

유비 입촉, 합비 공방전, 한중 공방전(60회~65회, 66회~69회, 70회~73회) 
유비(劉備)는 익주로 들어가 유장을 몰아내고 익주를 새 근거지로 삼았다. 입촉 때 종군한 참모 방통(龐統)이 전사하는 불운을 겪었지만 장로를 몰아내고 한중을 차지한 조조(曹操)와 한중 공방전(攻防戰)에서 승리하며 한중왕으로 즉위한다. 한편 손권(孫權)은 합비를 공략하지만 장료가 이끈 위군에게 패한다. 

형주 공방전, 조조의 죽음, 후한 멸망(74회~77회, 78회~80회) 
그러나 유비(劉備)는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형주 문제로 손권(孫權)과 크게 대립하게 되고 형주(荊州) 공방전(攻防戰)에서 관우는 위와 오의 협공을 받으며 여몽과 육손(陸遜)의 계략에 당해 전사한다. 얼마 후 여몽(呂蒙)과 조조(曹操)는 차례로 세상을 뜨고 조비(曹丕)는 헌제(獻帝)에게 선양받아 위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된다. 이를 찬탈(簒奪)로 여긴 유비는 익주에서 한나라의 부활을 선포하며 촉한(蜀漢)을 세운다. 

이릉대전, 도원종언(81회~86회) 
유비는 복수전(復讐戰)을 준비하지만 장비(張飛)가 부하의 배신으로 암살당하는 불상사(不祥事)를 겪고 결국 이릉대전에서 육손(陸遜)이 지휘하는 오나라 군대에게 대패(大敗)하면서 막대한 전력손실을 입는다. 이로 인해 제갈량(諸葛亮)이 세운 천하삼분지계는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유비는 성도(成都)로 돌아오지 않고 백제성에서 머물다가 병사하고 제갈량(諸葛亮)과 조운(趙雲)에게 유선(劉禪)을 보필(輔弼)해 줄 것과 한을 부흥(復興)시켜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오로침공, 칠종칠금(86회~90회) 
유비가 죽자 조비는 이릉대전(夷陵大戰) 때 칭신한 손권(孫權)을 끌어들인 뒤 맹획(孟獲), 가비능(軻比能)과 연계하여 촉을 공격하지만 제갈량(諸葛亮)은 등지를 보내어 오와 화친하고 가비능은 마초(馬超)를 보내서 막았다. 조비는 오나라를 공격하지만 정봉(丁奉), 서성(徐盛)에게 패하며 제갈량은 칠종칠금(七縱七擒)으로 맹획의 항복(降伏)을 받아 배후 위협을 없앴다. 

제갈량의 북벌(91회~104회) 
제갈량(諸葛亮)은 여러 차례 북벌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군사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전쟁 수행 도중에 병사(病死)하고 만다. 위에서는 사마의(司馬懿)가 제갈량의 맞수로 떠오르며 명성을 쌓으며 오의 손권(孫權)은 스스로 황제가 되며 이때로부터 위(魏)·촉(蜀)·오(吳)의 삼국정립(三國鼎立) 구도가 자리 잡는다. 북벌 때 제갈량은 위나라 장수 출신인 강유(姜維)를 등용하며 병법이십사편(兵法二十四篇)을 전수했다. 

사마씨의 위나라 장악, 강유의 북벌(105회~115회) 
제갈량 사후 제갈량(諸葛亮)의 북벌을 방어해냄으로써 입지가 강력해진 사마의(司馬懿)가 고평릉 사변을 통해 위의 권력을 장악한다. 강유(姜維)는 제갈량의 유지를 받들어 북벌을 다시 시작하지만 등애(鄧艾)와 같은 위나라 장수들이 분전한 탓에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에서는 손권(孫權)이 세상을 뜬 뒤 손량(孫亮), 손휴(孫休)로 황제가 바뀌며 손준(孫峻), 손침(孫綝)이 전횡을 펼치다가 손휴에게 처단된다. 위에서는 관구검(毌丘儉), 문흠(文欽), 제갈탄(諸葛誕)이 사마씨(司馬氏)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나 실패하며 황제 조방(曹芳), 조모(曹髦)도 사마사(司馬師), 사마소(司馬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다가 폐위당하고 살해당한다. 

촉한 멸망(116회~118회) 
사마씨(司馬氏) 일족은 263년에 촉한을 침공하고, 강유(姜維)는 검각에서 종회의 병력을 막지만 등애(鄧艾)가 음평을 통해 기습하는 도박을 벌여 성공한다. 마막(馬邈)이 항복하여 길잡이를 맡는 가운데 제갈량(諸葛亮)의 늦둥이 아들 제갈첨(諸葛瞻)은 등애를 막다가 전사하며 유선(劉禪)은 결사항전(決死抗戰)을 주장하는 아들 유심(劉諶)의 간언을 듣지 않고 초주의 말에 따라 등애의 위군에게 항복(降伏)하며 촉한은 멸망했다. 유심은 부황의 항복이 확정되자 처자식을 죽이고 자살(自殺)하며 강유는 야심을 품은 종회를 이용해 촉한 부흥을 노리지만 종회(鍾會)를 따르지 않은 호열(胡烈), 위관(衛瓘)의 선제공격을 받고 종회와 함께 살해당했다. 등애도 종회의 모함을 받고 낙양으로 끌려다가가 그에게 불만이 있던 부관 전속에게 살해당한다. 

진나라의 삼국 통일(119회~120회) 
사마소(司馬昭)의 아들 사마염(司馬炎)은 265년 위나라 황제 조환(曹奐)를 압박해 선양(禪讓)받고 진나라를 건국한다. 오나라는 손휴(孫休)가 죽고 즉위한 황제 손호(孫皓)의 폭정으로 약해졌고 육항(陸抗)이 양호(羊祜)를 상대로 분전하지만 육항은 반간계에 넘어간 손휴에게 면직(免職)된다. 몇 년 후 육항이 죽고 진이 280년 오나라를 멸망(滅亡)시킴으로서 삼국시대는 끝났다. 

"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 
"천하는 오랫동안 나뉘어져 있으면 반드시 합쳐지게 되고 오랫동안 합쳐져 있으면 반드시 나뉘어지게 된다." 

중국사(中國史)에서 후한 말~서진 초까지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한국에서는 그냥 삼국지(三國志)라고만 하면 역사책(歷史冊)보다는 본 문서의 연의를 가리킬 때가 더 많다. 심지어 삼국지 관련 문서에도 역사책에 관한 서술과 연의에 관한 서술(敍述)이 함께 있다.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남긴 역사 전기를 후학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했다. (晉平陽侯陳壽史傳, 後學羅貫中編次.)”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첫머리의 글이다. 삼국지연의는 역사책이 아니라 역사책인 정사 삼국지(正史三國志)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책이라는 사실을 극명(克明)히 알 수 있다. 연의(演義)라는 말 자체가 "사실에 내용(內容)을 보태서 재미나게 설명한 책이나 창극(唱劇)"이라는 뜻이다. 즉, 제목을 의역(意譯)하자면 '역사 기반 소설 삼국지(歷史基盤小說三國志)'쯤 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실제 역사는 절대로 이와 똑같지 않다. 따라서 정사 삼국지(正史三國志)나 자치통감(資治通鑑), 후한서(後漢書), 진서(晉書) 등 정사서(正史書)를 읽지 않은 상태에서 연의(演義)를 역사서로 받아들이면 역사를 굉장히 잘못 알 수 있다. 소설은 소설(小說)일 뿐이다. 하지만 역사의 굵은 흐름을 이해(理解)하는 데는 어느 정도 참고 가치(參考價値)가 있으며 "연의는 무조건 거짓이고 정사는 그 반대다"라는 마인드로 추측(推測)하는 태도도 옳지 않다. 국내 역사드라마나 역사영화(歷史映畫)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사극(史劇)도 허구의 인물이 등장하거나 재미를 위해 창작한 장면도 많으나, 그렇다고 완전한 허구(虛構)는 아니고 어느 정도 큰 줄기와 틀은 역사에서 따온 것이기에 적어도 그 시대의 분위기(雰圍氣) 정도는 느낄 수 있으며 무엇보다 역사에 대한 흥미유발(興味誘發)이란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역사에 관심(關心)이 없던 사람이 사극을 보고 등장인물(登場人物)들에 흥미가 생겨 직접 조사(調査)해보고 그러면서 역사를 배우듯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도 마찬가지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바탕이 된 역사서 정사 삼국지는 재미로 읽으라고 만든 책이 아니라 실제 역사를 되도록 체계적(體系的)이고 정확하게 남기기 위해 만든 책이다. 일반인(一般人)에게는 상당히 어렵고 극적인 부분이 적어 지루할 수도 있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역사학자(歷史學者)도 아닌 많은 사람들이 그 어려운 정사 삼국지(正史三國志)를 탐독하는 열의를 보이는 이유는 십중팔구(十中八九) 삼국지연의 덕분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아니었으면 정사 삼국지에 관심도 없었을 사람들이 많은데 삼국지연의를 통해서 그 시대의 분위기도 느끼고 좋아하는 인물이 생겼다. 등장인물(登場人物)들의 실제 모습이 어땠을지 호기심(好奇心)이 생겨 정사 삼국지에도 도전하는 등, 자칫하면 딱딱하고 지루하여 전문가(專門家)들이 학문적 차원에서 다룰 법한 내용들을 재미있게 각색(脚色)하여 타국에게까지 널리 퍼뜨린 공로(功勞)가 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만 읽으면 그 시대에 유독 수많은 인재들이 있었던 것처럼 착각(錯覺)하기 쉬우나 연의의 내용만 주목(注目)받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이다. 중국이 난세가 되면 그 정도 숫자의 인재(人才)들은 항상 나타났다. 물론 청나라의 고증학자(考證學者)인 조익의 의견처럼 50년 남짓 되는 시간에 많은 숫자의 인재가 몰려서 '인재밀도(人才密度)'는 다른 시대에 비하면 높은 편이다. 

단, 인재가 많았다는 사실과 그 시대의 인재들이 후대에 끼친 영향력(影響力)에 대해서는 별개의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학문적(學問的)으로는 훈고학(訓詁學), 경학(經學)의 시조로 꼽히는 정현(鄭玄), 논어(論語)의 주석을 남긴 하안(何晏), 노자(老子)의 주석을 남긴 왕필(王弼), 정사 삼국지(正史三國志)를 편찬한 진수(陳壽), 춘추좌전집해(春秋左傳集解)를 남긴 두예(杜預), 해서(楷書)의 개조(開祖)로 꼽히는 종요(鍾繇), 문학에서 유명했던 조조(曹操), 조비(曹丕), 조식(曹植), 중경신부(中經新簿)를 만든 순욱(荀勖), 정치적으로는 위나라와 서진을 건국한 조비(曹丕)와 사마염(司馬炎), 둔전제(屯田制)를 건의한 한호(韓浩)나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제정한 진군(陳群), 사회적으로는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일으킨 장각(張角), 오두미도(五斗米道)를 전파한 장로(張魯), 베트남과 관련해서 영향을 끼친 사섭(士燮) 등이 사후 후대에도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라 손꼽힌다. 

그러나 일본의 전국시대나 한반도(韓半島)의 후삼국시대, 삼국시대 앞 시대 중 하나인 초한전쟁(楚漢戰爭) 시기를 살아간 사람들 중에서도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지만 그중에 후대에까지 영향을 줬다고 볼 만한 인물은 많지 않다. 문학에 영향력(影響力)을 끼치지 못했다고 그 시대를 만든 삼국의 군주(君主)들인 유비(劉備), 손권(孫權)이 조조(曹操)보다 영향력이 못하다고 할 수도 없다. 제갈량(諸葛亮) 같은 인물은 저 중에 들어가지 못하는데도 지금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인(有名人이)다. 물론 역사학이라는 관점에서 삼국시대(三國時代)가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시대는 아니었다. 삼국시대만 특별히 더 대단한 인물들이 활동했던 건 아니므로 과도한 찬양(讚揚)은 분명 경계해야 하지만 무조건 별 볼일 없는 시대, 별 볼일 없는 인물들이란 시각도 지양(止揚)해야 한다는 시각인 것이다. 

또한 나관중(羅貫中)은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1천 년 후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점을 간과(看過)하면 안 된다. 나관중이 당시 고고학(考古學)이나 문화인류학의 전문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전반적 분위기는 후한 말 당시의 느낌보다는 원나라 말기의 느낌이 더 강할 수밖에 없다. '조조(曹操)의 백만 대군'이나 관우(關羽)가 송대 이후에나 등장하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들고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원나라 말기쯤 되면 중국에서는 민중 봉기(民衆蜂起)가 크게 일어나면 보통 규모가 수십만 명 정도였다. 그야말로 대륙의 스케일이다. 

"삼국지(三國志)를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이와는 상대를 하지 말라"는 말을 만들어냈을 정도로 동양 최고의 고전이자 필독도서(必讀圖書)로 인정받는 소설이며 그 때문에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이 많음에도 정사 삼국지(正史三國志)와 연의를 헷갈리는 이가 많을 정도다. 

나관중(羅貫中) 이전에도 삼국지 이야기는 인기가 많았고 그걸로 벌어먹고 살았던 인물도 많았다. 그 사람들의 대본(臺本)을 묶은 것이 바로 삼국지평화 정사(三國志平話正史)를 뼈대로 하되 이전부터 존재했던 민담(民譚)이나 설화(說話) 등을 채용하여 재미의 추구에도 초점(焦點)을 맞추었다. 대략 7할의 사실과 3할의 허구라는 청나라 학자 장학성(章學誠)의 평이다. 관우(關羽) 신앙의 기폭제가 되었고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을 전면에 내세우는 등 현대 삼국지의 이미지를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소설이다. 다만 이 모든 것을 나관중 개인이 정립(定立)시킨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당시에 널리 통용되던 이미지를 채용했을 뿐이다. 삼국지연의의 기반으로 평가받는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에서도 이미 이와 같은 방향성은 확립되어 있었다. 

한때 촉을 옹호하고 위를 비방한 움직임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찬찬히 음미(吟味)하면서 읽어보면 오히려 나관중(羅貫中)의 시각이 현대의 어설픈 이들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리어 나관중은 촉을 은근히 비판(批判)한 것이 아니냔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다. 

현대의 번역본(飜譯本)에서는 대부분 누락(漏落)되지만 원본에서는 각 화가 끝날 때마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처럼 결정적인 부분에서 끝내면서 "그 다음을 알고 싶다면 다음 편을 보시오!"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건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가 이전의 삼국지평화의 직접적인 영향력(影響力) 아래 있다는 증거로도 이해된다. 강사(講士)들이 다음번에 또 들으러 오라고 절단신공(切斷神功)을 구사한 흔적이기 때문이다. 이후의 연의 판본(演義板本)들은 모두 이 방식을 빌리고 있으며 심지어 쌀과 소금의 시대라는 대체역사소설(代替歷史小說)에서는 서양 작가가 이 문구를 빌려오기도 했다. 이문열(李文烈)의 '황제를 위하여'에서도 이런 문구를 빌려 썼다. 다만 황석영(黃晳暎) 삼국지에는 이 문구가 없고 독자의 편의를 위해 생략(省略)하였다고 서문에 간단히 언급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주인공은 일단 유비(劉備)다. 유비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쭉 유비로 주인공을 이어오다가 유비가 사망하는 시점에서 제갈량(諸葛亮)으로 주인공이 변경된다. 또한 그 상태에서 주인공인 제갈량은 사마의(司馬懿)와 겨루게 되고 제갈량이 사망하면 주인공 자리를 강유(姜維)에게로 넘기게 된다. 강유는 종회(鍾會)의 반란 직후까지 주인공으로 활약하다가 사망하며 삼국지연의는 이 시점(時點)을 기준으로 사실상 끝이 난다.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은 이렇게 변경(變更)된다. 사실 100년 가까이 되는 기간이 삼국시대의 흐름인지라 한 명이 주인공을 차지하기엔 너무나 긴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전까지의 초반부의 경우 군사적 업적(軍事的業績)에서는 활약이 적다보니 이 부분에서는 조조(曹操)가 주인공 수준으로 포커싱을 받는다. 이야기의 전개 흐름이 작품 전체의 주인공인 유비와 동등한 수준의 비중(比重)을 가질 정도다. 

그런데 대부분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정비석(鄭飛石) 삼국지라든가 고우영(高羽榮) 삼국지라든가 대부분 제갈량(諸葛亮)이 사망하면 완결(完結)된다. 연의의 시작이 184년 황건적(黃巾賊)의 난이고 제갈량이 죽은 건 234년으로 딱 50년이다. 제갈량 사후에 진이 삼국을 통일한 것이 280년이므로 실제로 제갈량의 죽음은 역사상에서 보면 중간 반환점(返還點) 정도인 셈이다. 고우영 삼국지의 경우 제갈량이 사망한 후 사마염(司馬炎)이 최대한 얌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유씨, 조씨, 손씨들을 비웃는 장면 하나가 끝이며 사마염이 중국 전토(中國全土)를 통일했다는 한마디만 나오고 완결된다. 본삼국지, 황석영(黃晳暎) 삼국지, 이충호 삼국지는 그나마 제갈량 사후부터 서진 통일까지의 묘사가 건재(健在)한 편이다. 

누가 촉을 옹호했는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촉빠라는 설은 아무튼 송대 이후 지식인 사회에서는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이 대세였다. 제갈량(諸葛亮)이나 관우(關羽)는 유교적 충신(忠臣)의 모범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촉의 인물이 높게 평가되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이에 대해 일본의 동양사학자 가토 도루(加藤徹) 교수의 견해는 ‘남자’를 뜻하는 남(男), 한(漢), 사(士), 협(俠)의 예를 들며 男은 女의 상대로서 남자, 漢은 땀과 피를 흘리는 뜨거운 남자, 士는 높은 뜻을 품은 사대부의 남자, 俠은 신의를 위해 목숨도 태연히 버리는 남자라면서, 사서 “삼국지(三國志)”와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가 재미있는 것은 漢ㆍ士ㆍ俠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중 최고의 ‘협’으로 유비(劉備)를 이상적인 ‘사’로 제갈공명(諸葛孔明)을 꼽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중국인은 역사에서 미학(美學)을 찾는데 천하쟁탈전(天下爭奪戰)에서 이기더라도 왕조의 수명은 얼마가지 않으나 역사라는 캔버스에 그려진 의(義)의 미학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유비와 공명은 죽을 때까지 완고(頑固)하게 자신의 미학에 얽매인 인물이었다. 유비는 촉(蜀) 땅에 웅거한 뒤에도 협(俠)의 용병 정신을 유지했고 공명은 사대부로 사(士)의 미학을 관철시켰다. 유비와 공명은 최고의 협(俠)과 사(士)의 조합이었으며 이는 후세만이 아니라 동시대 상대국(相對國) 사람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지라는 대하드라마에서 이들이 주인공(主人公)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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