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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 연례의 꽃인 궁중 여악의 존폐와 명분 그리고 해악

[사진 = www-busan-go-kr] 


조선왕실의 여악(女樂)은 성군(星君) 세종도, 개혁가 조광조(趙光祖)도 풀지 못했던 500년의 숙제이다. “선정적(煽情的)이며 퇴폐적이고 천박(淺薄)한 망국적인 음란물(淫亂物)”을 조선시대 내내 유지(維持)해야 했던 ‘불편한 진실’의 실체(實體)를 파헤쳐본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대중음악계(大衆音樂系)는 걸그룹의 열기로 자못 뜨겁다. 고난도의 현란한 그룹 댄스와 안정된 가창력(歌唱力을) 지닌 ‘소녀시대’나 ‘원더걸스’, ‘애프터스쿨’ 같은 걸그룹의 매력(魅力)은 청순함, 발랄함, 상큼함, 귀여움, 섹시함 등으로 빛을 발한다. 그들의 주요 고객(主要顧客)은 단순히 10~20대에 그치지 않고 거의 모든 연령층(年齡層)을 아우른다. 특히 40대 삼촌팬들의 열광(熱狂)도 무시하기 어렵다. 그들에게 걸그룹은 젊은 날의 장밋빛 로망이다. 

무한재생(無限再生)이 가능한 화면에 출몰(出沒)하는 그들의 춤과 노래는 억압되고 은폐된 육체적 욕망(慾望)을 신선하고 대담하며 도발적(挑發的)으로 분출한다. 끊임없이 새롭게 펼쳐 보이는 역동적(力動的)이고 화려한 몸동작은 마치 육체의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渴症)을 보여주는 듯하다. 다양한 정감을 독특한 색조(色調)로 물들이는 노래가사와 창법도 시공간을 초월하여 내밀(內密)한 욕망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호소(呼訴)한다. 

조선왕실 연례(宴禮)의 꽃 '여악'
이러한 걸그룹이 한국사회(韓國社會)에서는 다소 생소한 존재로 여겨진다. 물론 해방 후에 걸그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 이후 펄시스터스, 저고리시스터스, 김시스터스, 정시스터스, 바니걸스 등이 활약(活躍)했는데 이들은 주로 자매형 그룹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90년대 이후 등장(登場)한 SES, 핑클, 베이비북스, 쥬얼리, 천상지희 등은 요즘 말하는 걸그룹의 이미지에 가깝다. 하지만 이처럼 젊은 여성들로 구성(構成)된 노래하는 댄스그룹을 걸그룹이라고 한다면 걸그룹의 역사(歷史)는 무려 1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문헌 기록(文獻記錄)에 의하면 고려 8대 국왕인 현종(顯宗, 재위 1009~31) 즉위년에 요즘의 걸그룹을 뜻하는 ‘여악(女樂)’이 등장한다. 하지만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정사(正史)인 ‘고려사’에는 여악에 관한 기록이 네 차례 등장할 뿐이어서 당시 그들의 위상이 어떠했을지 가늠해보기가 쉽지 않다. 여악의 존재(存在)와 기능에 대한 정보가 보다 풍부하고 선명(鮮明)해지는 것은 조선왕조(朝鮮王朝)에 들어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태조부터 순종까지 여악에 관한 자료가 모두 423건이나 등장한다. ‘고려사(高麗史)’와 비교하면 무려 100배의 분량이다. 또한 여악(女樂)과 동의어(同義語)로 사용되는 기악(妓樂, 109건)을 포함한다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여악이 고려시대에 비해 조선시대에 더 활발하게 활약(活躍)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조선 전 지역의 관청(官廳)에 속한 춤과 노래와 악기연주(樂器演奏) 실력이 출중한 젊은 여인들로 구성(構成)됐다. 특히 왕실 소속의 여악(女樂)은 노래와 춤, 악기연주 실력이 가장 탁월한 미모(美貌)의 여성들로 충원(充員)됐다. 현대의 걸그룹과 비교해볼 때 활동의 범주(範疇)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나지만 춤과 노래 실력이 뛰어나고 빼어난 외모를 자랑하는 여성으로 구성됐다는 데에는 공통점(共通點)이 있다. 왕실 소속의 여악(女樂)은 시대에 따라 약간씩 변동이 있지만 대략 100~150명이 정원이었다. 그들은 중국에서 들여오거나 조선에서 자체 제작한 20~30여 개의 공연 레퍼토리를 가지고 왕실의 크고 작은 연회는 물론 공식적인 예연(禮宴)에도 등장했다. 각각의 레퍼토리에 따라 적게는 10명 안팎, 많게는 20~30명이 화려(華麗)하고 우아한 자태로 공연(公演)을 펼친다. 

왕실의 공식적인 예연은 크게 외연(外宴)과 내연(內宴)으로 구분된다. 대략 중궁(中宮, 王后) 또는 대비(大妃, 先王의 后妃)가 참여하는 진연(進宴)·진풍정(進豊呈) 등은 내연이고 왕이 주관하는 회례연(會禮宴)·양로연(養老宴)·사객연(使客宴) 등은 외연이다. 이러한 내연과 외연의 구분은 다름 아닌 남녀의 성별(性別)에 따른 것이다. 즉 남성(임금, 신하, 외국사신 등)을 접대하는 연회는 외연이고 여성(대비, 중궁 등)을 접대하는 연회는 내연이다. 이러한 구분법(區分法)이 요즘 시각으로는 좀 촌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유교적 덕목이 당연시되던 조선왕실에서는 남녀유별이 엄격히 존중돼야 할 도덕적(道德的) 가치이자 질서였다. 

궁중의 공식적인 연회(公式的宴會)에서도 이런 덕목이 지켜져야 한다는 원론에 따른다면 남성 중심의 외연(外宴)에서 젊은 여성들로만 구성된 여악(女樂)이 존재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내내 왕과 신하 간 갈등의 핵심은 바로 이 공식적인 외연에 젊은 미모의 여인으로 구성된 여악을 출연(出演)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다. 원칙(原則)을 고집하면 물론 외연에 여악이 등장해선 안 된다. 하지만 역대 왕 가운데 외연에 여악을 베풀지 않은 왕은 거의 없었다. 신하들 중에는 외연에 여악(女樂)이 등장하는 걸 긍정(肯定)하는 무리도 있었지만, 대체로 언론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 속한 원칙에 충실한 강직한 언관(言官)들은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공자가 여악을 배척하고 조선 지식층 반발 
그렇다면 이들 언관(言官)이 여악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유나 명분(名分)은 무엇일까? 그건 다름 아니라 유학(儒學)의 시조인 공자(孔子)가 여악을 배척했기 때문이다. ‘논어’ ‘미자(微子)’ 편에는, “제나라 사람이 여악(女樂)을 보내왔는데 계환자(季桓子)라는 당시의 권력자가 이를 받고서 사흘 동안이나 조회를 열지 않자 공자가 노나라를 떠났다(齊人歸女樂 季桓子受之, 三日不朝 孔子行)”는 기록이 있다. 당시 54세의 공자는 노나라에서 사구(司寇)라는 지금의 법무장관(法務長官)에 해당하는 벼슬을 지냈다. 그가 그 직책을 맡은 이후 노나라의 치안(治安)이 바로잡혀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지 않고 밤에도 문단속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됐다. 

이에 이웃 제나라는 공자(孔子)로 인해 노나라가 강성해지는 것을 미리 막으려고 공자를 제거할 계책(計策)을 꾸민다. 그래서 80명의 미녀로 이루어진 여악(女樂)과 말 120필을 권력자인 계환자(季桓子)에게 선사한다. 이를 받은 그는 이들 여악의 춤과 노래에 흠뻑 빠져 3일간이나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고 이에 크게 낙망한 공자는 벼슬을 버리고 노나라를 떠나 열국(列國)을 유랑(流浪)하게 된다. 제나라의 계책이 적중(的中)한 것이다. 여악의 존재에 부정적이었던 공자로 인해 그의 후학들 역시 여악(女樂)은 올바르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 치명적인 해악(害惡)을 주는 존재라는 통념(通念)이 일반화됐다. 유교 성리학을 국시로 떠받든 조선왕조의 주축세력인 사대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엄숙하고 정중(鄭重)해야 할 공식적인 예연(禮宴)에 여악(女樂)의 출연은 비례(非禮)이며 그들이 이상시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와 공존할 수 없는 관계라는 명분론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그런 명분론 못지않게 보다 현실적인 문제는 궁중의 양반계층(兩班階層)인 남성(종친, 고위관료 등)들과 여악(女樂)에 속한 여인들과의 빈번한 섹스스캔들에 있었다. 그런 추문(醜聞)이 자주 발생한 데에는 이들의 불평등(不平等)한 신분질서가 원인이 됐다. 궁중에 있는 양반신분 남성의 성적 요구를 노비 신분인 여악의 멤버들이 쉽게 거부(拒否)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신분질서가 절대적인 힘을 발휘(發揮)하는 사회에서 이들 여성이 고위층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거부하기에는 너무나도 미약(微弱)한 존재였다. 그 결과 무절제한 통정(通情)에 따른 유교적 성모럴의 파괴가 심각한 폐해(弊害)로 지적되곤 했다. 그 해결책 가운데 하나로 관리(공무원)가 창기와 자는 것을 금하는 한국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이른바 ‘숙창지법(宿娼之法)’이라는 일종의 ‘공무원 성규제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창기(倡妓)가 모두 여악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그중에는 여악(女樂)의 멤버도 포함되어 있었다. 

남녀유별(男女有別)을 그 어느 때보다 근엄하게 강조(强調)하던 조선조의 도덕지상주의(道德至上主義) 사회에서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이는 물론 당시 창기의 신분이 소나 말과 다름없이 취급받던 천민층(賤民層)이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떻든 이런 법이 만들어졌지만 솔선수범(率先垂範)해야 할 고위층에서 오히려 이를 공공연히 무시했다. 또한 근본적으로 그런 고위층의 불륜(不倫)이 신분적(권력적) 불평등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쉽사리 지켜지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유가의 이상적인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고자 하는 성리학적 훈도(薰陶)를 받은 강직한 지식계층인 언관들은 그 폐해의 근본 원인으로 꼽히는 여악(女樂)의 혁파(革罷)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년 조선왕조(朝鮮王朝)에서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도 여악(女樂)이 폐지된 적은 거의 없었다. 여악은 조선시대 내내 절대적으로 그 존재가 요구(要求)되었다. 

그렇게까지 여악(女樂)을 존속시켜야 했던 특별한 사유가 있었을까? 여기에는 조선시대 사대외교(事大外交)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여악의 멤버들이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도 중국사신(中國使臣)이 오가는 길목의 관청에서 그들을 접대하는 역할을 담당(擔當)했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 이후 중국(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정치적·문화적·이념적 사대관계(事大關係)에 처한 조선 왕들에게 중국황제의 사신은 최고의 예를 다해 극진히 대접(待接)해야 할 존재였다. 그리고 이런 접대의례는 곧 조선의 왕권 및 왕실의 안정과 직결(直結)되는 사안이었다. 즉 조선시대 여악의 존재와 기능은 중국사신(中國使臣)을 접대하기 위한 ‘정치외교적 윤활유(潤滑油)’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 속을 뜯어보면 중국사신에 대한 ‘성상납(性上納)’ 용도나 다름없었다. 이는 조선시대 여악의 신분이 노류장화(路柳墻花)로 취급되는 노비였다는 점과, 왕실에서 여악에 속한 여기(女妓)와의 섹스스캔들이 빈번한 상황임을 감안(勘案)하면 더욱 명료해진다. 이런 정황은 조선 건국 초인 태종시대(太宗時代)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조선의 여색에 빠진 중국 사신들 
태종이 명을 받고 나서 곤룡포(衮龍袍)와 면류관(冕旒冠)을 갖추고 사은례(謝恩禮)를 행하였다. 중국사신을 따라 태평관(太平館)에 이르러 (사신이 가져온) 절(節)을 대청(大廳)에 봉안하고, 절에 배례(拜禮)하기를 망궐례(望闕禮)를 행하는 것같이 하였다. 그리고 면복(冕服)을 벗고 사례(私禮)를 행하였다. 종친·대신·백관과 아래로 생도(生徒)에 이르기까지 모두 차례로 예를 행하고 나서 위로연(慰勞宴)을 베풀었는데, 여악(女樂)이 들어오니 사신이 말하기를 “여악은 제거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풍속이 그러하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그러면 잠깐 행하시지요” 하였다. 여악을 베푸니 중국사신인 장근(章謹) 등이 또한 즐거워하지 않았다. 

당시 35세인 태종 1년(1401) 6월(음력) 어느 날의 풍경이다. 중국사신(中國使臣)을 태평관에서 영접(迎接)하며 여악의 공연을 베풀려고 했더니 사신이 이를 거절(拒絶)했다. 하지만 태종이 우리 풍습(風習)이라며 행하였으나 사신들은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신이 여악(女樂)을 원하지 않는데도 굳이 행한 까닭은 무엇일까? 기록에 따르면 그 다음날도 중국사신을 위로(慰勞)하는 잔치에서 여악의 공연을 베풀려고 하지만 중국사신은 완강(頑强)하게 물리치고 자신들에게 익숙한 당악(中國樂)을 들었다.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중국사신이 조선의 여악(女樂)을 고집스럽게 뿌리친 이유는 무얼까? 다음 기록에 그 힌트가 보인다. 

태종이 의원을 보내어 중로(中路)에서 중국사신 육옹(陸顒)의 병을 물었다. 처음에 육옹이 사명을 받들고 우리나라에 왔었을 때 은밀히 기생 위생(委生)에게 사명을 받들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約束)했었다. 그가 귀국하니 중국황제가 묻기를 “예전에 들으니, 조선이 원(元)나라를 섬길 때에 여악(女樂)으로 사신을 혹(惑)하게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있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없습니다. 지금 조선의 예악은 중국과 다름없습니다.”라고 하곤 이어 아뢰기를 “조선은 말(馬)이 산출되는 나라이니 만일 비단으로 좋은 말을 사면 전쟁에 대비(對備)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태복시좌소경(太僕寺左少卿) 축맹헌(祝孟獻)과 육옹을 보내어 비단을 싸가지고 발해에 이르렀다. 장근(章謹)과 단목예(端木禮)를 만나니 장근이 육옹을 힐난(詰難)하기를 “조선에 여악이 있는데, 그대가 없다고 대답한 것은 무슨 까닭이오? 내가 장차 상주(上奏)하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축맹헌이 장근에게 눈짓하며 말하기를 “사신의 현부(賢否)는 외국에서 논할 것이오. 그대나 청절(淸節)을 지키지 옹을 무얼 책망(責望)하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육옹이 두려워서 마침내 마음의 병을 얻었다. 

같은 해 8월의 장면이다. 중국사신이 조선의 여악(女樂)을 거부한 이유를 짐작(斟酌)해볼 수 있다. 그건 바로 중국 황제의 질책(叱責)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사신을 보내면 조선에서는 여악의 공연을 베풀어 사신을 혹하게 해서 제대로 임무를 수행(遂行)하지 못하게 하는 전례가 있었음을 황제는 익히 알았던 것이다. 중국사신 육옹(陸顒)이 황제에게 조선에는 여악이 없다는 거짓을 고한 것이 들통 날까 봐 병이 난 것이다. 그는 이미 여악에 속한 기생 위생(委生)에게 혹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여기서 주목(注目)할 것은 여악의 존재는 예악(禮樂)의 실현 여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즉 여악의 존재는 예악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중국사신의 견해(見解)이지만 당시 중국 조정의 일반적인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며 중국의 예악을 모델로 하는 조선 관료들의 관점(觀點)과도 일치한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왕조는 주자(朱子) 성리학(性理學)을 국시로 태동했다.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의 핵심은 예(禮)와 악(樂)에 의한 통치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악의 개념(槪念)은 노래와 악기연주, 춤을 아우르는 것으로 오늘날의 뮤직(music)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음악을 대통령이라고 한다면 악은 천자(天資)라고 해야 할까. 그만큼 그 내용과 형식, 그리고 뉘앙스에 차이가 크다. 또한 이때의 악이란 국가의 주요 공식의례(公式儀禮)에서 사용하는 엄숙한 의례악(儀禮樂)으로 이를 아악(雅樂)이라고도 하며 아악과 여악은 서로 공존(共存)할 수 없는 모순관계로 규정되었다. 

자주적 성군(聖君) 세종도 ‘여악(女樂)’ 인정 
여기서 잠깐 예와 악의 관계에 대해 좀 더 부연(敷衍)한다.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예와 악은 마치 음과 양처럼 하나의 ‘짝개념’으로 파악(把握)된다. 예가 사회를 지배하는 냉철(冷徹)한 신분적 질서체계(秩序體系)라면 악은 사회를 융합하는 온화한 심미적 정감세계(情感世界)다. 예가 견고한 남성의 세계라면 악은 유연한 여성의 세계이며 예가 아폴론적 명석(明晳)의 장이라면 악은 디오니소스적 도취(陶醉)의 장이다. 하지만 이 둘은 모순과 갈등의 관계가 아니라 상대적(相待的)이고 상보적(相補的)인 즉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즉 예에는 반드시 악이 동반(同伴)됐으며 악은 예 없이는 존재(存在)할 수 없었다. 바로 이점이 고대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사회구성원을 각각 신분(身分)에 따라 엄격한 질서를 유지하면서 갈등과 대립(對立) 없이 화해·소통시킬 수 있었던 이유다. 

어떻든 태종 이후 조선의 모든 왕은 중국사신을 접대(接待)하는 데 반드시 여악의 공연을 제공(提供)하는 것을 관례로 삼았다. 심지어 중국에 대해 정치적·문화적인 측면에서 자주적인 태도(態度)를 견지한 세종 대에도 사정(事情)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나머지 왕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다음 사료(史料)를 보자. 

좌부대언(左副代言) 김종서(金宗瑞)가 아뢰기를 “…소신이 아첨(阿諂)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오늘날의 정치(政治)는 지난 옛날이나 앞으로 오는 세상에 없으리라 봅니다. 예악(禮樂)의 성함이 이와 같은데도 오로지 여악(女樂)만은 고치지 않고 잘못된 풍습을 그대로 따른다면 아마도 뒷날에도 능히 이를 혁파(革罷)하지 못하고 장차 말하기를 ‘옛날 성대(盛代)에도 오히려 혁파하지 못한 것을 어찌 오늘에 이르러 갑자기 혁파하랴’라고 할 것입니다. 이같이 된다면 다만 오늘날의 누(累)가 될 뿐 아니라 또 후세에도 보일만한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고 하였다. 

세종 12년(1430, 34세 나이였다) 7월(음력) 어느 날, 당시 정3품 관직(官職)인 좌부대언 김종서(金宗瑞, 48세)의 충언이다. 불행하게도 이 예언(豫言)은 그대로 적중하였다. 세종 이후 역대 왕은 김종서의 “옛날 성대(盛代)에도 오히려 혁파하지 못한 것을 어찌 오늘에 이르러 갑자기 혁파하랴’는 취지의 말을 반복하며 신하들의 여악 혁파 주장(主張)을 거부하곤 했다. 

신하들도 쉽사리 포기(抛棄)하지는 않았다. 건국 초에는 특히 김종서가 예악론의 관점에서 강하게 반대(反對)했다. 그는 중국사신을 접대할 때 여악의 공연을 하지 말자고 주청(奏請)했다. 이 공연은 예(禮)의 올바름이 아니며 인심을 방탕(放蕩)하게 만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후로도 여러 신하(주로 언관)가 여악(의 공연)을 “난을 일으키는 근본(倡亂之本)”이라고 반대했다.  

여악을 두고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은 신하들의 표현을 살펴보면 ‘한때의 즐거움(一時之樂)’, ‘음란하고 사특한 것(淫邪之物)’, ‘간사한 소리와 음란한 여색(姦聲亂色)’, ‘천한 창기의 무리(娼妓賤類)’, ‘음란한 놀이(淫遊)’, ‘사대부들의 잔치 때에 노래하고 춤추는 도구(士大夫遊燕歌舞之資)’, ‘난의 근본(亂本)’, ‘음탕한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淫聲美色)’, ‘음란하고 사악한 풍습(淫邪之風)’, ‘화의 터전이 되는 근본(基禍之本)’, ‘음란하고 더러운(淫穢)’, ‘요사하고 더러운 부류(妖穢之類)’, ‘음란한 여인의 선정적인 가무(淫婦緩歌慢舞)’, ‘음란한 무리(淫流)’, ‘사악하고 더러운(邪穢)’, ‘음란하고 더러운(淫穢)’, ‘음란하고 더러운 것(淫穢之物)’, ‘간사하게 아양 떠는 천박한 것(邪媚之賤物)’, ‘음란한 소리와 사악한 빛깔(淫聲邪色)’, ‘이목의 완상(耳目之玩)’을 위한 것, ‘사특한 빛깔이며 음란한 소리(邪色淫聲)’, ‘바르지 않은 색(不正之色)과 예에 어그러지는 음(非禮之音)’, ‘음란한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淫聲美色)’, ‘이목을 기쁘게 하는 수단(悅耳媚目之資)’ 등이다.  

말하자면 여악(女樂)의 공연은 “지나치게 선정적이며 퇴폐적(頹廢的)이고 천박한 망국적인 음란물”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비판적 관점(觀點)이 조선말까지 계속됐다. 어떻든 여악(女樂)을 극도로 부정하는 것은 유가적 명분론(名分論)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하나는 앞서 보았듯이 왕실의 종친(宗親)이나 관리들이 거기에 속한 젊은 여기들의 미색에 미혹(迷惑)되어 유교적 성도덕을 문란케 했고 공공연히 중국사신의 접대를 위한 성상납용도(性上納用途)로 활용됐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여악(女樂)은 사대관계가 피운 ‘악의 꽃’ 
사대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런 음란한 폐습(弊習)은 성종 대를 거쳐 연산군 대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심지어 반정(反正)의 기치를 내걸고 등장한 중종(1506~44년 재위) 대에도 이런 유습은 척결(剔抉)되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왕과 신하들의 고민(苦悶)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퇴계 이황(李滉)과 황진이(黃眞伊) 그리고 조광조(趙光祖)가 살았던 중종 대에는 여악(女樂)에 관한 자료가 조선시대 전체(423건)의 3분의 1이 넘는 155건에 이른다. 이 자료들은 여악의 존폐 및 대안마련에 대한 논의(論議)가 주류를 이룬다. 

예컨대 중종 5년(1510) 10월에는 무려 30여 명에 가까운 원로급 신하(臣下)가 왕과 머리를 맞대고 여악(女樂)의 존폐 및 활용에 대해 진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말하자면 여악에 대한 대토론회(大討論會)였는데 그 기록은 조선 전시대를 통틀어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 그럼에도 논의가 쉽게 해결되지 못한 것은 왕의 입장에서 중국사신(中國使臣)을 접대할 여악을 모조리 없앨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광조 등 신하들이 고육책(苦肉策)으로 내놓은 대안이 여악(女樂)에 속한 젊고 아름다운 여인 대신 평범(平凡)한 여자 노비나 여자 소경, 의녀, 궁녀, 늙은 여인, 어린 여아 등을 연습(演習)시켜 대체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여악(女樂)에 속한 매력적인 여인들과의 섹스 스캔들이나 성상납을 미연에 방지(防止)하자는 것이 대안마련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음을 드러내준다. 하지만 최종적(最終的)으로 그런 대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왜나면 조선왕실 차원에서 중국사신에 대한 최상의 접대는 거역(拒逆)할 수 없는 지상과제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중종(中宗) 대 이후에는 이런 고민도 없이 명나라가 멸망(滅亡)할 때까지 여악의 존재나 용도(用途)는 당연한 관례가 되어버린다. 

결국 조선시대 여악(女樂)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관계(事大關係)가 피어낸 ‘악의 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불편한 진실’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얼까? 그건 바로 ‘욕망의 비열성(卑劣性)’은 국가와 개인이 다르지 않다는 엄정한 사실의 재확인(再確認)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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