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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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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성인이자 안회의 스승인 공자의 지혜

[사진 = 공자가 안회에게 '극기복례'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중]


“논어(論語)”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사서(史書)의 하나이다. 저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공자의 제자들과 그 문인들이 공동 편찬(編纂)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 사람의 저자가 일관적인 구성을 바탕으로 서술(敍述)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생애 전체에 걸친 언행(言行)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여타의 경전(經典)들과는 달리 격언이나 금언을 모아 놓은 성격을 띤다. 공자가 제자 및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토론한 것이 '논(論)'이고 제자들에게 전해준 가르침을 '어(語)'라고 부른다. 

공자의 삶과 행동과 사상을 이해(理解)하기 위해 가장 널리 읽어온 책이 “논어”다. 정확히 누가 언제 이 책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하지만 “논어(論語)”를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책이 공자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과 행적(行蹟)을 더듬고 자신들의 얘기를 첨가(添加)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자 사후 그의 제자들 여기저기 흩어져 대부분 교육에 종사(從事)했는데, 여러 곳에서 스승의 말을 죽간(竹簡) 등에 기록해 학생들을 가르칠 때 쓰고 이것들을 나중에 모아서 편찬(編纂)했을 것이다. 최종 정리는 공자의 가장 나이 어린 제자였던 증삼(曾參)의 제자들이 했을 것이라는 견해(見解)가 유력하다. “논어”의 성립에 의혹(疑惑)을 제기하는 사람은 대부분 “좌전(左傳)”에서 근거를 찾는데,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논어”가 “좌전”보다 앞서 성립(成立)된 것으로 보인다. 

“논어”는 전한시대(前漢時代)에 처음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논어”라는 명칭 대신 전(傳), 기(記), 논(論), 어(語) 등의 이름으로 불렸고,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판본(板本)이 전해지고 있었다. "논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전한의 6대 경제(BC 188 - BC 157 - BC 141) ~ 7대 무제(BC 156 - BC 141 - BC 87) 기간이라고 하며 후한(後漢)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리(整理)되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3~4세기 경 한성백제시대(百濟時代) 목간에 5편인 공야장(公冶長) 편의 주요 내용이 기록되어 남아있다. 

“논어”는 어느 한 시기에 편찬(編纂)되었다기보다 몇 차례에 걸쳐 지어졌다고 보인다. 첫 번째 공자 사후에 중궁, 자유, 자하 등의 제자가 일익(一翼)을 주도했고 두 번째 증자(曾子) 사후에 유자, 민자 등이 일익을 주도했으며, 전국시대 맹자 시기 또는 맹자 사후에 누군가 내용을 첨가하고 보충(補充)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것은 당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관중에 대한 평가가 상론(上論)의 팔일과 하론의 헌문(憲問)에서 다른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측(推測)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관중(管仲)에 대한 노나라와 제나라의 평가가 서로 나뉘었던 것이 통합(統合)되었다는 점에서 노론과 제론을 모두 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공자 시대 이후로 “논어”는 중국의 철학자들과 가치관(價値觀)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후 동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논어”는 유교경전(遺敎經典)의 다른 세책과 함께 사서(四書)라고 불리며 유교의 기본 가치관인 "예, 의, 충, 인(禮、義、忠、仁)" 이라는 유교적 인본주의(人本主義)를 가르쳐왔다. 

따라서 “논어”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언행록산문집(言行錄散文集이)다. 주로 공자와 공자의 제자들이 나눈 대화(對話)를 기록하였고 공자의 제자들이나 제자의 제자들에 의해 편집(編輯)되였으며 보다 집중적으로 공자의 사상을 반영하였다. “논어”는 총 20편 492장으로 구성(構成)되였으며 최초의 언록(語錄)이다. 남송 때 주희(朱熹)가 “논어”를 “중용(中庸)”과 “맹자(孟子) 그리고 ”대학(大學)“과 함께 묶어 사서(四書)라 불러왔다.  유교문화에 관심 있는 분들께서 재밌게 일독(一讀)하시면 감사하겠다. 

공자는 제자 중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는 77명이라고 하였으며 사마천은 논어(論語) 및 공자세가(孔子世家),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을 인용하여 제자들을 낱낱이 설명하여 장문의 형식을 취하였다. 

사마천(司馬遷)은 “나는 공자의 제자들의 이름과 언행을 모두 ‘논어’에 나오는 사제 사이의 문답에서 취한 뒤 이를 차례로 정리하여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을 만들었다. 의심나는 것은 싣지 않았다.”라고 기술하였다.  

공자와 안회 사이의 일화(逸話)이다. 안회는 배움을 좋아하고 항상 진실했으므로 공자가 가장 아끼는 제자 중의 한 명이었다. 안회(顔回: 기원전 521년 ~ 기원전 491년)는 춘추시대(春秋時代)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이다. 자는 자연(子淵)이다. 자를 따서 안연(顏淵)이라고도 부른다. 학덕이 높고 재질이 뛰어나 공자의 가장 촉망(屬望)받는 제자였다. 그러나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빈곤하고 불우(不遇)하였으나 개의치 않고 성내거나 잘못한 일이 없으므로 공자 다음가는 성인(聖人)으로 받들어졌다. 그래서 안자(顔子)라고 높여 부르기도 한다. 

어느 날 안회(顏回)는 공자의 심부름으로 시장에 들렀는데 한 포목점(布木店)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언쟁(言爭)이 붙었다. 호기심(好奇心)이 일어서 가보니 가게주인과 손님이 시비(是非)가 붙은 것이다. 

포목을 사러 온 손님이 큰 소리로 주인에게  따졌다. "3 x 8은 분명히 22인데 왜 나한테 24전을 요구(要求)하느냐 말이야?" 안회는 이 말을 듣고서는 그 사람에게 먼저 정중히 인사(人事)를 한 후 "3 x 8은 분명히 24인데 어째서 22입니까? 당신이 잘못 계산을 한 것입니다." 하고 말을 했다. 

포목을 사러온 사람은 안회(顏回)의 코를 가리키면서 "네가 누군데 나와서 참견(參見)하고 따지러 드는 거냐? "도리(道理)를 평가하려거든 만인이 현자(賢者)로 인정하는 공자님을 불러와라! " 옮고 그름은 그 양반만이 정확한 판단(判斷)을 내릴 수가 있다!" 

안회(顏回)는 그 손님의 말을 듣자 회심(會心)의 미소를 짓고 "좋습니다! 그럼 만약 공자께서 당신이 졌다고 하시면 어떻게 할 건 가요?" 

그 손님은 당당하게 "네가 감히 그분을 모셔올 수나 있겠냐? 그러면 내 목을 내놓을 것이다. 그런데 너는 무얼 걸겠느냐?" 안회(顏回)도 지지 않고 "제가 틀리면 관을 내놓겠습니다." 두 사람이 내기를 걸고는 공자(孔子)를 찾아갔다. 

공자는 사유 전말을 다 듣더니 안회(顏回)에게 웃으면서 하는 말이 "네가 졌으니 이 사람에게 관을 벗어 내 주거라." 안회는 그 순간 충격(衝擊)을 받았지만 순순히 관을 벗어 포목(布木)을 사러 온 사람에게 내주고 말았다. 그 사람은 의기양양(意氣揚揚)하게 쾌재를 부르며 관을 받고 돌아갔다. 

안회(顏回)는 스승이신 공자의 판정(判定)에 대해 겉으로는 내색을 할 수 없었지만 속으로는 스승의 처신(處身)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 스승이 이제 너무 늙었고 우매(愚昧)해졌으므로 이분에게는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밤잠을 설치고 고민하던 안회(顏回)는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천천히 다른 훌륭한 스승을 찾아보리라고 다짐한다. 

다음 날 안회(顏回)는 오랜만에 고향의 부모님을 찾아뵙겠다며 공자에게 고향에 잠시 다녀올 것을 요청(要請)하였다. 공자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허락(許諾)하였다. 다신 돌아올 생각이 없었으므로 모든 개인물품을 챙긴 후에 스승에게 작별인사(作別人事)를 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가능한 바로 돌아와 줄 것을 당부하면서 안회(顏回)에게 글을 쓴 죽간(竹簡)을 건네주었다. 거기엣 "두 마디" 충고(忠告)가 새겨져 있었다. '천년고수막존신(千年古樹莫存身), 살인부명물동수(殺人不明勿動手)'. 

안회(顏回)는 작별인사를 한 후 착잡(錯雜)한 맘으로 고향집으로 향해 가다가 길에서 갑자기 천둥소리와 번개를 동반(同伴)한 큰 소나기를 만나 잠시 비를 피하려고 급한 김에 길옆에 오래된 고목나무 밑으로 뛰어 들어갔다. 

순간 스승의 첫마디인 '천년고수막존신(千年古樹莫存身)' 즉, 천년 묵은 나무에 몸을 숨기지 말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그동안 사제(師弟)의 정을 생각해서 스승이 당부(當付)해주시는 충고 한 번쯤은 들어줘야지 하며 그곳을 다시 뛰쳐나왔다. 

바로 그 순간에 번쩍하면서 그 고목(古木)이 번개에 맞아 불이 붙으며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안회(顏回)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스승님의 첫마디가 적중(的中)이 되었으니 그렀다면 두 번째의 충고는 살인(殺人)을 조심하라는 건데 과연 내가 살인을 할 것인가?' 

안회는 고향집에 도착(到着)하니 이미 늦은 심야였다. 집안으로 들어간 그는 부모님을 깨우지 않으려고 건너편 건물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조용히 보검(寶劍)으로 빼어 들고 문틈으로 아내가 자고 있는 내실의 문고리를 풀었다. 컴컴한 침실 안에서 손으로 천천히 더듬어 만져보니 아니 웬일이란 말인가? 침대 위에 두 사람이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내가 불륜(不倫)을 저지르다니?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와 검을 뽑아 내리 치려는 순간 스승이신 공자(孔子)의 충고한 떠올랐다. 

'살인부명물동수(殺人不明勿動手)' 즉, 명확치 않고서는 함부로 살인하지 말라' 얼른 촛불을 켜보니 침대 위에 한쪽은 아내이고 또 한쪽은 자신의 누이동생이 자고 있었다. "허허 참, 스승님은 천문(天文)을 꿰뚫어 보고 계시는 건가? 아니면 점쟁이란 말인가?" 

다음 날 안회(顏回)는 날이 밝기 무섭게 공자에게 되돌아갔다. 스승을 만나자마자 무릎 꿇고 하는 말이. "스승님이 충고(忠告)한 두 마디 말씀 덕분에 제가 벼락을 피했고 제 아내와 누이동생을 살렸습니다. 어떻게 사전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공자(孔子)는 마당으로 내려와서 무릎을 꿇고 있는 안회(顏回)를 일으켜 세웠다. "안회야! 첫째는 어제 날씨가 건조(乾燥)하고 무더워서 다분히 천둥 번개가 내릴 수가 있을 것이므로 벼락을 끌어들이기 쉬운 고목나무를 피하라고 했던 것이며 둘째는 네가 분개(憤慨)한 마음 풀지 못하였고 또한 보검을 차고 떠났기에 너를 자극(刺戟)하는 조그만 일에도 분명 예민(銳敏)하게 반응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본다면 누구나 그런 상황을 미리 예측(豫測)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孔子)는 이어서 말하길 "사실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단다. 네가 집에 돌아간 것은 그저 핑계였고, 내가 그런 판정(判定)을 내린 것에 대해 내가 너무 늙어서 사리 판단이 분명(分明)치 못해 더 이상 배우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안회(顏回)야, 한번 잘 생각해보아라. 내가 3 x 8 = 22이 맞다고 하면 너는 지게 되어 그저 머리에 쓰는 관하나 내준 것뿐이지만 만약에 내가 3 x 8 = 24가 맞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목숨 하나를 내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안회(顏回)야 말해 보거라. 관(冠)이 더 중요하더냐? 사람 목숨이 더 중요(重要)하더냐?" 

안회(顏回)가 비로소 이치를 깨닫게 되어 "쿵"하고 공자(孔子) 앞에 다시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리면서 말을 했다,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스승님의 대의(義)를 중요시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시비(非)를 무시하는 그 도량과 지혜에 탄복(歎服)할 따름입니다." 그 이후부터 공자가 가는 곳에서 안회(顏回)가 그의 스승 곁을 떠난 적이 없었고 한다. 

지금 세계에서 학식이 제일 풍부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는 공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선행기언, 이후종지(先行其言 而后从之)의 이 말의 뜻은 말을 행동에 옮긴 다음에 말하라는 뜻이다. 너무나 훌륭한 말이다. 나도 한때는 책을 좀 보았노라고 친구들과 모인 장소(場所)에 가게 되면 말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이상하게 책을 보면 볼수록 부족감(不足感)이 들면서 말이 적어진다. 옛날을 생각하면 얼굴이 뜨거워 난다. 

인도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여온 간디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한 부녀(婦女)가 아이가 사탕을 너무나 많이 먹으니까 간디한테 찾아와서 우리 아이보고 사탕을 적게 먹게 해달라고 부탁(付託)했다. 그래서 간디는 그 부녀한테 3개월 후에 다시 와 보아라고 말했다. 3개월 후에 그 부녀는 아이를 데리고 간디한테 갔다.  

간디는 그 아이를 보고 사탕을 많이 먹으면  어떤 나쁜 점이 있다는 것에  대해 간단히 설명(說明)해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아이는 인차 알아듣고 다시는 안 먹겠다고 하였다. 그러니 부녀는 이상해서 간디보고 말하는 것이 왜서 그렇게 간단(簡單)한 말을 3개월 후에 오라고 말했는지 이해(理解)가 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간디가 말하기를 내가  당신 아이를 설복(說服)하자면 내가 먼저 사탕이 신체에 나쁜 점에 대해 실험(實驗)을 해보아야 하기 때문에 3개월 후에 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공자(孔子)도 그렇고 간디도 그렇고 모두 성인(聖人)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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