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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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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이 유비에게 추천한 군사후계자에 대한 엉터리계책

[사진 =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간 유비]


서서(徐庶)는 언제 제갈량(諸葛亮)을 유비(劉備)에게 추천하였는가? 
제갈량(諸葛亮)이 출도하기 전에 유비에 관한 멋진 장면은 당연히 서서가 조조군을 격파(擊破)한 것이다. 명사 서서는 선복(單福)이라는 가명으로 스스로 유비(劉備)를 찾아온다. 그리고 유비의 군사참모(軍事參謀)가 되어 조조군에 두 번이나 승리를 거둔다. 그리하여 조조(曹操)가 그를 주목하게 되고 서서의 진실한 신분을 알아내고 나서 서서의 모친을 인질(人質)로 잡아 서서를 조조군영으로 오도록 만든다. 

유비(劉備)는 겨우 쓸 만한 모사(謀士)를 한명 구했는데 부득이 조조군영으로 보내야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안타까운 심경(心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계속 보내는 것을 아쉬워했다. 서서(徐庶)가 말을 타고 떠나갈 때도 유비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심지어 말채찍으로 서서의 등을 가리는 나무를 가리키며 "나는 여기 나무를 모조리 베어버리고 싶다."고 소리친다. 바로 이때 서서가 홀연 되돌아와서 유비에게 와룡 제갈량(諸葛亮)을 추천한다.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서서는 유비를 떠날 때 비로소 제갈량을 추천했다. 그렇다면 역사상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삼국지의 제갈량전(諸葛亮傳)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서서(徐庶)가 유비의 수하로 있을 때 이미 제갈량을 추천한다. "당시 선주(유비)가 신야에 주둔(駐屯)하고 있을 때 서서가 선주를 찾아뵙고 선주는 그를 기용(起用)한다." 그리고 만났을 때 서서는 유비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와룡(臥龍)이다. 장군께서는 보길 원치 않으십니까?" 그리하여 유비는 삼고초려(三顧草廬)하고 제갈량을 만난다. 

이를 보면 서서(徐庶)는 유비를 떠날 때 비로소 제갈량을 유비(劉備)에게 추천(推薦)해준 것이 아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서서와 제갈량(諸葛亮)은 한동안 같이 일을 했다. 그러면 서서는 언제 유비를 떠났을까? ‘삼국지(三國志)’의 기록에 따르면 조조대군이 형주(荊州)로 남하하며 유비는 장판파(長坂坡)에서 패주한다. 이때 서서의 모친이 살고 있던 곳은 이미 조조의 군대가 점령(占領)하였다. 서서는 어쩔 수 없이 유비에게 보고하고 떠나게 된다. 그때 이렇게 말한다. "원래 당신과 함께 패업(霸業)을 이루려고 했는데 내가 가진 것은 바로 이런 진실한 마음이다. 그런데 지금 늙은 모친이 적군의 손에 있으니 마음이 어지럽다. 할 수 없이 중도에 떠나서 북방으로 가야겠다." 당시 서서와 함께 조조(曹操)에게로 간 사람은 석도(石韜)도 있다. 

서서(徐庶)와 제갈량(諸葛亮)이 한동안 같이 일을 하다가 서서는 조조(曹操)에게로 간다. 당연히 주동적(主動的)으로 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조조가 고의로 그의 모친을 인질로 잡고 서서를 협박(脅迫)한 일도 없다. 

소설과 역사에는 하나의 공통점(共通點)이 있다. 서서는 모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비(劉備)를 떠난다. 고대인들을 효(孝)를 중시했다. 그래서 유비는 서서가 떠나는 것을 용인(容認)했고 조조도 서서(徐庶)가 오는 것을 모두 이해했다. 나중에 강유(姜維)가 제갈량에게 간 것도 모친이 촉군이 점령한 지역에 있기 때문이었다. 

서서(徐庶)가 유비의 수하로 있으면서 조조의 군대에 승전(勝戰)을 거둔 것은 순전히 소설적 허구(虛構)이다. 그런 일은 없었다. 당연히 소설의 예술적 각도에서 보자면 이는 고명한 수법(手法)이다. 서서가 등장한 것은 제갈량(諸葛亮)의 등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조조(曹操)의 군대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하게 만드는 그런 군사조차도 숭배(崇拜)하는 제갈공명이라면 그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 것인가? 제갈량의 멋진 등장(登場)을 위하여 충분히 공을 들인 것이다. 앞으로 글을 쓸 때는 이런 수법을 참고(參考)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갈량이 염두에 둔 군사후계자는 누구였을까 
제갈량(諸葛亮)의 임종 전에 개인의 후사에 대한 내용은 얼마 되지 않고 많은 것은 촉한의 인사 안배(按排)였다. 정치 방면의 후계자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제갈량이 지정한 사람은 장완(蔣琓), 비위(費褘)이고 사실상 동윤(董允)도 있다. 이들 3명은 제갈량과 더불어 "촉한사상(蜀漢四相)'으로 불린다. 그런데 군사 분야의 후계자(後繼者)는 제갈량이 지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인 견해로는 제갈량이 가장 마음에 둔 사람은 강유(姜維)와 양의(楊儀)이고 위연(魏延)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갈량은 위연이 반란(反亂)을 일으킬까봐 걱정했기 때문에 제갈량은 죽을 때 계책(計策)을 세워서 위연을 죽이고 촉한의 후환(後患)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반란을 일으키려고 생각한 자는 양의였던 것이다. 당연히 제갈량이 군사대권을 위연에게 넘기려고 했는지 아닌지에 대하여는 계속 논쟁(論爭)이 있다. 

기실 ‘제갈량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위연(魏延)도 좋고 양의(楊儀)도 좋고 아니면 나중에 진정 촉한의 군사대권을 장악한 강유(姜維)도 좋고 그들은 모두 제갈량이 염두에 둔 군사후계자(軍事後繼者)가 아니었다. 제갈량이 군사대권(軍事大權)을 진정으로 넘겨주려고 생각한 인물은 다른 사람이다. 그는 아마 모두 생각지 못한 인물일 것이다. 왜냐하면 ‘삼국지’이건 ‘삼국연의(三國演義)’이건 별로 많이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는 ‘출사표(出師表)’에 이름이 나온다. 그가 누구인가? 그는 바로 장군 향총(向寵)이다. 

모두 알고 있다. 제갈량은 중원북벌(中原北伐) 전에 후주 유선(劉禪)에게 ‘출사표’를 올린다. 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출사표(出師表)’를 읽어보면 누구든지 제갈량의 촉한에 대한 충성심(忠誠心)에 감동받을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제갈량이 후세인들에게 계속하여 칭송(稱頌)되는 근본원인일 것이다. 제갈량의 ‘출사표’는 주로 5가지 뜻을 품고 있다, 첫째는 제갈량이 자신의 촉한에 대한 충성심(忠誠心)을 나타낸다. 그것은 하늘이 알고 해와 달이 안다는 것이다. 둘째는 국가의 미래에 대한 우려(憂慮)를 나타낸다. 그리고 국가의 통일 사업에 대한 강렬한 바램을 나타낸다. 셋째는 후주(後主) 유선이 힘을 내서 국가의 앞날을 생각해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넷째는 이번 중원북벌은 두려울 것이 없고 기꺼이 나아가서 죽을 결심(決心)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섯째, 후주에게 미리에 중용(重用)할 수 있는 인재를 추천한다. 자신에게 만일 불행한 일이 생기면 후주 유선은 그들을 중용하여 국가의 안전(安全)을 지키라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제갈량이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한 후사처리이다. 그래서 ‘출사표’의 중점(重點)은 기실 제갈량 북벌후의 국가의 인사안배에 있다. 

‘출사표(出師表)’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제갈량(諸葛亮)이 몇 사람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곽유지(郭攸之), 비위(費褘), 동윤(董允), 향총(向寵)의 4사람이다. 그중 곽유지, 비위, 동윤은 문관이다. 곽유지가 나중에 행방이 묘연(渺然)한 것을 제외하고 비위, 동윤은 모두 미래의 치국지재(治國之才)이다. 사실상 촉한 미래의 동량이다. 그런데 향총은 제갈량이 언급한 유일한 군사장수(軍事將帥)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이러하다. 장군 향총은 성격과 행동인 숙균(淑均)하고 군사를 잘 알며 예전에 써봤을 때 선제(劉備)가 "잘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논의하여 항총(向寵)을 독(督)으로 추천했다. 신이 생각하기에 군사에 관한 일은 모두 그에게 물어보면 된다. 그러면 반드시 군대가 화목(和睦)하고 잘하는 자와 못하는 자를 적절하게 쓸 것이다. 제갈량의 향총에 대한 평가(評價)를 보면 주로 5가지이다: 첫째는 향총이 군사방면에서 뛰어나다는 것이다. 둘째는 향총은 이미 여러 번 검증(檢證)을 거쳤다는 것이다. 셋째는 향총은 유비가 인정한 장수라는 것이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인정(認定)하였다는 것이다. 넷째는 향총은 단합(團合)을 잘하고 군대를 잘 다스리며 어느 것이 좋은 것이고 어느 것이 나쁜 것인지를 잘 안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국가에 대하여 절대적인 충성심(忠誠心)이 있다는 것이다.  제갈량의 눈에, 촉한정권(蜀漢政權) 내에서 그보다 뛰어난 자는 없다는 것이다. 그 글자의 행간에서 우리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제갈량(諸葛亮)은 자신의 이후 촉한의 군사 지도자를 이미 안배해 둔 것이다. 바로 향총(向寵)인 것이다. 

그렇다면 향총(向寵)은 어떤 사람인가?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사실상 향총은 명문집안 출신이다. 그는 촉한의 중신인 향랑(向朗) 형제의 아들이다. 222년, 유비가 동오(東吳)를 정벌하는 이릉전투(夷陵戰鬪)를 일으켰을 때 향총은 유비 수하의 문아장(門牙將)으로 동정에 나선다. 비록 유비가 이릉전투에서 대패(大敗)를 당하고 각 군영이 참혹(慘酷)한 손실을 입지만 유독 향총이 이끄는 군영만은 아무런 손실을 입지 않았다. 그리하여 유비의 주목(注目)을 끈다. 제갈량이 ‘출사표(出師表)’에서 그가 선제의 칭찬을 받았다는 말은 기실 향총이 이릉전투에서 보여준 행동에 근거한 것이다. 유선이 즉위한 후, 제갈량의 추천으로 그는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지고 궁정숙위군(宮廷宿衛軍)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는다. 실제로 수도방위사령관(首都防衛司令官)인 셈이다. 227년 제갈량이 한중(漢中)으로 북상하고 나중에 북벌할 때 향총은 중령군(中領軍)에 임명된다. 이를 보면 제갈량은 시종 향총을 미리의 군사지도자로 배양(培養)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수수께끼는 제갈량(諸葛亮)이 중원북벌한 후에 다시 발생한다. 제갈량이 미래의 군사후계자로 배양되었던 향총(向寵)은 234년, 제갈량이 오장원(五丈原)에서 병사한 후 아무런 소식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저 위연(魏延), 양의(楊儀)가 군사지휘권을 놓고 다투는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투쟁의 결과는 위연이 피살(被殺)되고 양의는 좌천(左遷)되며 강유(姜維)가 최종적으로 군사지휘권을 차지하는 것이다. 장완(蔣琬), 비위(費褘), 동윤(董允)은 차례로 정치대권을 차지하는데 군사방면의 후계자인 향총(向寵)은 소식이 없다. 촉한은 사관을 두지 않아서 왜 향총이 최종적으로 제갈량의 군사지도자가 될 수 없었는지 여기에는 분명히 우리가 모르는 어떤 비밀(秘密)이 있을 것이다. 비밀이 무엇인지는 아마도 영원히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기실 위연 피살이 정말 제갈량이 생전에 계획(計劃)한 것인지도 역사의 수수께끼이다. 향총이 제갈량의 군사후계자가 되지 못한 것을 보면 우리는 누군가가 제갈량의 최종유언을 고쳐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지울 수가 없다. 삼국에서 왜 촉한의 역사에만 이렇게 수수께끼가 많을까? 표면적으로는 촉한이 사관(史官)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실제로는 촉한이라는 국가가 실제로 너무나 신기했고 뭐든지 국가비밀이 되고 비밀로 인하여 국가는 사관을 두지 않은 것이다. 

다만 향총(向寵)의 사적이 끝난 것은 아니다. 240년, 한가지구의 오랑캐가 반란을 일으킨다. 향총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평정(平定)하는 과정에서 혼전 중에 사망한다. 향총은 평상시에 인심을 얻고 있어서 향총의 부하는 향총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힘을 다해 싸워서 향총의 유해(遺骸)를 빼앗아 오고, 성도로 보내어 안장(安葬)한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알 수 있다. 향총의 군사적인 영향력(影響力)은 아주 컸었고 부하들이 모두 받들어 모시는 정도에 이르렀으며 향총은 직위가 무엇이고 승진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한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결국 전쟁터에서 전사(戰死)하였다. 이를 통하여 제갈량의 향총에 대한 평가가 정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향총이 이릉전투(夷陵戰鬪)에서도 죽지 않았고 북벌전투에서도 죽지 않았는데 내란(內亂)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죽었다. 아마 이것도 영원히 풀리지 않을 역사의 수수께끼일 것이다. 정말 신기(神奇)한 나라이다. 

다만 비록 제갈량이후 향총(向寵)이 제갈량의 군사방면의 후계자(後繼者)가 되지는 못했지만 제갈량이 가장 마음에 두었던 인물이 향총이고 향총을 배양(培養)하여 자신의 군사후계자로 삼으려 했다는 것은 부인(否認)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제갈량의 다섯 가지 엉터리계책 
제갈량의 일족이 동오(東吳)에서 한때 잘 나가다가 멸족(滅族)을 당하는 동안 유비는 동천(東川)을 완전히 장악하고 기세등등하게 잘 나가고 있었으며 업적은 그의 평생에서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제1차 북벌에서 대승(大勝)을 거두는데 손권의 2차에 걸친 북벌(北伐)과 비교하면 유비집단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손권(孫權)이 조조(曹操)와 싸우면서 항상 병사와 장수를 잃고 손해 보는 것은 손권이었다. 그러나 유비가 조조와 싸울 때는 큰 힘을 들이지 않았고 병사와 장수(將帥)를 잃는 것은 오히려 조조였다. 잃은 하후연(夏侯淵)은 바로 조조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다. 이렇게 보면 마치 유비가 최강자인 것처럼 느껴진다. 확실히 이때의 유비(劉備)는 문으로 제갈량(諸葛亮), 법정(法正), 마량(馬良)이 있고, 무로는 관우(關羽), 장비(張飛), 조운(趙雲), 마초(馬超), 황충(黃忠), 위연(魏延), 유봉(劉封), 맹달(孟達), 엄안(嚴顔), 곽준(霍峻)이 있다. 여기에 백성들의 지지도 있어 전체 서남지역 운남(雲南), 귀주(貴州), 사천(四川), 중경(重慶)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여기에 한중(漢中), 형주(荊州) 두 진퇴가 자유로운 식량생산기지도 확보하고 있었으며 감숙 남부, 호북 서부의 일부 지방도 차지하고 있었다. 실력은 확실히 컸다. 만일 그가 제대로 다스렸다면 큰 업적(業績)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제갈량이 엉터리계책을 내놓는다. 

제갈량이 말한다. 당신은 현재 하늘과 백성의 뜻에 따라 황제(皇帝)에 올라야 한다. 유비(劉備)는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자 제갈량이 다시 말한다. 세상에 재주 있고 덕 있는 자들이나 죽음을 무릅쓰고 윗사람을 모시는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람의 덕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즉위(卽位)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이 실망하게 될 것이고 당신에게 불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극력 추켜세운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추켜세운다. 그리하여 원래 속으로 혼자 기뻐하던 유비의 마음을 움직이고 결국 유비는 한중왕(漢中王)을 칭하게 된다. 

중국에서 나무가 크면 바람을 많이 맞는다(樹大招風). 튀어나온 새가 총을 맞는다. 튀어나온 서까래가 먼저 썩는다. 당시 원술(袁術)이 먼저 황제를 칭하다가 먼저 죽었다. 이때 유비(劉備)의 실력은 전혀 조조에 미치지 못했다. 조조(曹操)의 핵심은 서부에 있지 않았다. 유비의 승리는 그저 부분적인 승리이고 중요하지는 않았다. 원래 일처리는 요란(搖亂)하게 하더라도 처신은 조용하게 하고 은인자중(隱忍自重)해야 한다. 수백 년 후의 주원장(朱元璋)처럼 모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적량(廣積糧), 완칭왕(緩稱王), 고축장(高築墻)"하여 성공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를 정반대의 길로 걷게 했다. 실패하는 게 당연하다. 우연의 일치인지 주원장도 당시에는 삼강 중 하나였고 결국 그가 성공했다. 그러나 촉국은 가장 먼저 멸망(滅亡)한다. 

과연 밖에서 위, 오가 연합(聯合)하기 시작한다. 이번 연합은 실질적인 내용이 있었다. 즉 공동으로 형주(荊州)를 해결하자는 합의이다. 왕을 칭한 후 궁전을 짓고 후궁(後宮)을 들이고 태감을 두어야 했다. 그리고 관리들에게 작위를 주고 관직(官職)을 주어야 했다. 이것은 모두 돈이 드는 일이다. 병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軍糧米)를 모으는데 불리했다. 과연 유비(劉備)가 왕을 칭한 후 궁전을 짓고 관사를 짓고 성도(成都)에서 백수(白水)까지 모두 4백 곳에 관사 우정(郵亭)을 짓는다. 유비는 인생을 즐기기 시작하고 대신들도 가만히 있지 않아서 백성들만 힘들어 졌다. 

유비가 왕을 친한 후 관우(關羽), 장비(張飛), 조운(趙雲), 마초(馬超), 황충(黃忠)을 오호대장(五虎大將)으로 삼고 제갈량(諸葛亮)을 군사로 삼고 법정(法正)을 상서령(尙書令)으로 위연(魏延)을 한중태수(漢中太守)로 삼는다. 이때의 제갈량은 비록 오호상장(五虎上將)처럼 말을 타고 군대를 이끌고 말에서 내리면 백성을 다스리지는 않았지만 일정한 군권(軍權)이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그는 군사장군(軍師將軍)에 봉해졌다고 한다. 더 이상 단순한 모사(謀士)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중앙에 있었고 왕에 가까이 있었다. 소식이 영통했다. 근수루대선득월(近水樓臺先得月, 물에 가까운 누각이 달을 먼저 얻는다)의 이점(利點)이 있었다. 

이때 제갈량(諸葛亮)의 마음은 제반 건설에 있었다. 근본적으로 형주(荊州), 익주(益州)가 천리나 떨어져 있고, 게다가 "촉도난(蜀道難), 난어상청천(難於上靑天)"(촉으로 가는 길을 험해라.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어렵다)인데도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어떻게 서로 지원할 것인가. 간첩(間諜)으로부터 위와 오가 연합하여 형주를 공격(攻擊)할 것이라는 정보를 받은 후 유비는 제갈량에게 계책(計策)을 묻는다. 급히 생각한 다음 제갈량은 더욱 엉터리계책을 하나 내놓는다. 

손권, 조조가 연합한다는 소식(消息)을 듣고 제갈량은 유비에게 이렇게 아이디어를 낸다. 먼저 관우로 하여금 병력(兵力)을 이끌고 양양을 치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적들이 겁을 먹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연합도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엉터리계책이다. 그는 손권, 조조를 너무 무시(無視)했다. 손권, 조조도 백전노장(百戰老將)이다. 수하에 장수들이 구름처럼 많다. 그들이 일단 연합하면 유비가 전체 병력을 이끌고 맞서도 그들은 겁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관우는 겨우 삼군(三郡)의 땅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즉 전체 백성을 병사로 삼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상대(相對)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관우(關羽)를 신이라고 여기지만 살아있을 때는 분명 보통사람이었다. 그와 싸워본 사람도 많고 그를 잘 이해(理解)하는 사람도 많았다. 당시 그들이 1:1로 싸우는 게임규칙을 따르지 않고 장비(張飛)와 함께 여포(呂布)와 싸워도 약간 불리해서 결국 유비까지 나서도 나서야 여포를 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여포는 바로 조조에게 피살(被殺)당한다. 

유비(劉備)가 왕을 칭한 후 곁에는 여자, 태감(太監)이 있고 한 무리의 아부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총기(聰氣)도 약간 흐려져서 제갈량(諸葛亮)이 이 건의를 받아들인다. 관우(關羽)는 원래 일개 무부이고 제갈량이 추켜세워 주니까 스스로 대단한 줄 알고 오만(傲慢)해 있었다. 그래서 고군(孤軍)으로 전투를 시작한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경영했던 형주(荊州)를 떠나 북으로 진격한다. 서천(成都)에서 더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도 형주를 기습당할 것은 우려하여 옛 사람의 본받아 가는 길에 봉화대(烽火臺)를 만들어 일단 무슨 조짐(兆朕)만 있으면 낮에는 연기를 올리고 밤에는 불을 올리도록 해놓았다. 그러면 바로 근거지(根據地)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확실히 믿을만한 것이 아니다. 첫째는 위와 오가 돌연 기습(奇襲)한다면 봉화를 올리지 못할 수 있다. 둘째 전쟁은 일단 발동(發動)되면 그렇게 쉽게 통제(統制)되고 장악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는 모두 알고 있는 것과 같다. 즉 유명한 '대의실형주(大意失荊州)' 조심하지 않아서 형주(荊州)를 잃었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여 형주를 잃은 것이다(自大失荊州). 관우(關羽)는 맥성(麥城)으로 가고 손권(孫權)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다. 

기실 이때는 성을 지키면서 지원군(支援軍)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면서 바깥에서 한 번씩 출동(出動)해서 기습할 수 있다. 장료(張遼)가 합비(合肥)를 지키면서 강남에서 그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린아이조차 잠에 울음소리를 내지 못했다고 할 정도이다. 형주성은 아주 견고(堅固)하고 그 당시에는 폭약(爆藥)도 없어서 형주성을 함락(陷落)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것은 그래도 하책(下策)이라고 할 수 있다. 중책(中策)이라면 관우가 위를 공격하고 유비가 아래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래서 파릉군(巴陵郡), 이릉성(夷陵城)을 차지하여 형주(荊州), 익주성(益州城)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역량을 집중시켜 이 두 개의 떨어진 성을 공격하면 된다. 이곳은 강동의 본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당시에 치지 않은 것은 손권유비 연합 때문이다. 이제 연합(聯合)이 깨졌으니 이 눈엣가시를 쳤으면 된다. 형주가 주유에게 눈엣가시인 것과 마찬가지이고 손권을 치는 것이 조조를 치는 것보다는 쉬웠다. 

상책(上策)은 당연히 외교수단(外交手段)을 통하여 손권조조연합을 와해(瓦解)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손권유비연합(孫權劉備聯合)을 지속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갈량의 장기이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 몰라도 그는 이 방법(方法)을 생각지 않는다. 아마도 유비가 왕을 칭한 후 업무(業務)가 많아져서일 수도 있고 아마도 반대파(反對派)가 있어서 그들을 상대하느라 바깥일에 신경을 쓰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모두 유비(劉備)가 왕을 칭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다. 이 아이디어가 나오면서 관우(關羽)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그저 유비의 북벌성공만 보았지 손권의 2차에 걸친 북벌이 실패한 것은 보지 못했다. 하물며 현재 상대는 손권,조조 연합이다. 자신은 겨우 수만의 인마(人馬)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당연히 그가 북벌한 초반에 그는 약간의 승리(勝利)를 거두었다. 양양성(襄陽城)을 함락시켰다. 단지 한강을 사이에 둔 번성(樊城)은 함락(陷落)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제방을 터뜨려 우금(于禁)의 부대를 철저히 무너뜨린다. 즉 소위 수엄칠군(水淹七軍)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인이 있다. 첫째, 위나라 장수는 그가 감히 고군을 이끌고 깊이 들어올 줄 몰랐고 처음에는 경계심(警戒心)이 느슨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큰물을 이용(利用)했는데 북방의 병사들은 수전(水戰)에 익숙치 않다. 셋째, 사령관인 우금과 선봉장인 방덕(龐德)의 사이에 갈등(葛藤)이 있었다. 넷째, 사령관인 우금은 여러 해 동안 주둔하면서 전투의 경험(經驗)이 없었다. 그러나 관우(關羽)는 승리에 취해서 중상을 입고도 전장을 벗어나지 않고 강퍅 자용한다. 서황이 분명 그의 적지 않은 소부대를 물리쳤는데 그는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본부대는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황(徐晃)이 그를 어찌하지는 못할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한번 붙어보고 나서야 그는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자신의 실력(實力)이 어느 정도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후회(後悔)해도 이미 늦었다. 불귀(不歸)의 길에 이미 들어선 것이다. 

여기서 제갈량은 다시 하하책(下下策)의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지금은 사람들도 그 문제를 알아차렸다. 즉, 아마도 고의로 제갈량(諸葛亮)은 관우를 죽였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관우는 다루기 힘들고 자기의 권력 장악에 방해(妨害)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관우는 주유만 못하다. 주유(周瑜)는 대도독이다. 그래봐야 얼마 역할(役割)을 하지 못한다. 관우는 사천(四川)에 세력이 없다. 그의 세력이래야 별 것이 없다. 하물며 촉은 관우 하나만 잃은 것이 아니라, 수만의 정예 병사들까지 잃지 않았는가. 또한 병가의 필쟁지지(必争之地)인 형주까지도 잃었다. 그곳은 중원(中原)으로 나가는 가장 좋은 발판임에도. 

요화(廖化)가 상용으로 갔을 때 맹달(孟達)은 각종 형세를 분석한 후 유봉(劉封)에게 병력을 움직이지 말 것을 권한다. 상용(上庸)에서 출병하지 않은 것이 관우(關羽)가 죽은 주요 원인이다. 기실 관우가 포위(包圍)당했을 때는 겨우 5,6백 명이었고 다수가 부상을 입었다. 맥성(麥城)은 작아도 너무 작았다. 그곳을 함락(陷落)시키는 데는 별 힘이 들지 않았다. 동오는 환성(皖城)도 함락시킨 바 있다. 당시 감녕(甘寧)은 성벽을 타고 올라가서 철련으로 태수 주광을 때려죽인다. 맥성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관우(關羽)에게 도망치라고 놔둔 것이다. 그 후에 길에서 해결(解決)하려 한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욱 힘이 덜 들기 때문이다. 여몽(呂蒙)은 손권에게 말한 바 있다. 현재 관우가 하늘을 나는 날개를 가졌다고 해도 우리의 천라지망(天羅之網)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만일 상용(上庸)에서 출병하면 역시 하나하나 해결(解決)하면 된다. 왜냐하면 상용의 병력을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형주(荊州)로 오려면 적지 않은 좁은 길을 지나 와야 했다. 도처에 매복(埋伏)이 있을 수 있다. 위,오는 충분히 준비했고 절대로 무능한 군대가 아니다. 서촉(西蜀)을 보면 상용은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다른 지방은 더더욱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구하러 가든 말든 관우(關羽)는 어쨌든 죽는다. 당연히 구하러 가기는 해야 했다. 구하지 못하는 것은 능력문제(能力問題)이지만 구하지 않는 것은 태도문제(態度問題)이다. 현재 상용에서 출병하지 않았으니 제갈량(諸葛亮)이 관우를 죽인 주요원인으로 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책임을 제갈량 자신이나 유비가 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법집행(法執行)이 엄한 제갈량은 정정당당한 속죄양(贖罪羊)을 찾아낸다. 그는 유비에게 이렇게 엉터리계책을 낸다. 먼저 유봉(劉封)과 맹달(孟達)을 찢어놓은 다음에 하나하나 죽어버리라고. 

세상에 빈틈이 없는 벽은 없다. 맹달(孟達)의 팽씨성(彭氏姓)을 가진 친구가 이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마초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 그는 동시에 마초(馬超)의 친구였다. 그러나 마초는 일생동안 여러 고난을 겪었고 이때 겨우 자리를 잡아 편안히 지내고 있었다. 그는 반란(反亂)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 그는 팽씨를 배신(背信)하고 팽씨는 피살당한다. 아주 총명한 맹달은 위기(危機)가 도래했다고 여기고 유봉을 면죽(綿竹)으로 전보시키는 명령이 내려오자마자 맹달은 좋지 않게 진행된다고 여겼다. 역시 그의 생각이 맞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예 오십 여기를 이끌고 위나라의 새로운 주인 조비에게 투항(投降)한다. 

맹달(孟達)은 문무에 모두 능한 인재여서 조비(曹丕)는 그를 잘 대해준다. 자주 그와 함께 시를 읊고 그림을 그렸다. 나중에 맹달은 산기상시, 건무장군, 평양정후에 봉해지고 양양태수 겸 신성태수가 된다. 그의 지위는 적지 않은 위나라의 원로중신(元老重臣)들조차 시기할 정도였다. 이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맹달에게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맹달이 조비에게 투항(投降)했다는 소식이 유비에게 전해졌을 때 유비는 대노(大怒)한다. 제갈량은 이때 유비에게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유봉(劉封)으로 하여금 맹달을 공격(攻擊)하게 하는 것이다.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우면 반드시 하나는 다칠 것이다. 맹달을 죽이면 해를 하나 제거(除去)하는 것이고 죽이지 못하면 성도(成都)로 올 테니 그때 다시 유봉을 죽여도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엉터리계책일 뿐 아니라 나쁜 계책이다. 왜냐하면 최종결과는 5만의 촉국 병사를 잃고 상용(上庸)도 위나라에 빼앗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봉(劉封)은 유비의 명령을 집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면죽(綿竹), 상용(上庸)의 5만기병을 이끌고 적에게 깊이 들어간다. 양양(襄陽)에 도착하여 맹달(孟達)을 친다. 이때의 제갈량(諸葛亮)은 전투를 무슨 아이들 장난처럼 여겼다. 당초 관우를 구원(救援)하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당연히 유봉을 도와주지 않는다. 양군이 교전(交戰)하기 전에 맹달은 유봉에게 말한다. 너의 의부는 왕을 칭한 후 이전의 유비(劉備)가 아니다. 그는 어느 정도 멍청해졌다. 그리고 제갈량은 냉혹 무정하니 네가 돌아간 후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조위(曹魏)에 투항하는 것이 어떠냐. 유봉은 맹달을 크게 욕했을 뿐 아니라 사신(使臣)을 참한다. 그리고 분개하여 맹달을 공격한다. 맹달은 싸움에서 밀린다. 그러나 이곳은 어쨌든 남의 땅이다. 서황(徐晃), 하후상(夏侯尙)이 지원해주어 유봉은 결국 패배(敗北)하고 만다. 할 수 없이 상용(上庸)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상용의 수비 장수는 이미 위나라에 투항(投降)한 후였다. 이리하여 유봉(劉封)은 협공을 받게 된다. 결국 유봉은 남은 백여 기를 이끌고 성도(成都)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울면서 한중왕 유비(劉備)를 만난다. 이미 제갈량(諸葛亮)의 말을 들은 한중왕은 유봉의 해명을 듣지 않고 그를 죽여 버린다. 나중에 그는 유봉이 위에 투항하라는 서신을 찢고 사신을 죽였다는 말을 듣고 후회막급(後悔莫及)이 된다. 

칭 왕후의 유비는 연이어 두 번이나 패전(敗戰)을 했다. 먼저 형주(荊州)를 잃고 다시 상용(上庸)을 잃었다. 이제 양천의 땅만 남았고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이제 신단(神壇)에서 내려왔다. 사기를 고무(鼓舞)시키기 위하여 제갈량은 다시 유비에게 엉터리계책을 내놓는다. 

다섯 번째 엉터리계책은 유비에게 황제(皇帝)를 칭하도록 권한 것이다. 유비(劉備)가 말을 듣지 않자 제갈량은 병을 칭한다. 유비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아들 하나는 유봉(劉封), 다른 하나는 유선(劉禪)이라고 지었다. 합치면 봉선(封禪)이다. 그러니 내심으로 당연히 황제를 칭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의 뜻을 어쩌지 못하는 척하며 황제에 오른다. 제갈량(諸葛亮)은 승상에 봉해진다. 그래서 황제는 항상 내궁(內宮)에 거처한다. 이때의 제갈량은 일상적으로 황제를 대리하여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처리한다. 지위는 더욱 높아졌다. 이미 조운(趙雲) 등 보다 윗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것도 엉터리계책이다. 황제가 되면 모두 만세를 외치고 행사 등의 규모(規模)는 더욱 커진다. 가무승평(歌舞昇平)의 땅, 온유부귀(溫柔富貴)의 곳에서 공덕을 노래하고 아부(阿附)하고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다. 그래서 더더구나 진실어린 말은 들을 수 없게 되고 정확한 판단(判斷)을 할 수 없게 된다. 

당연히 촉나라에서 병력을 훈련(訓練)시키고 군량미(軍糧米)를 모으는 데는 약간의 효과가 있었다. 유비(劉備)가 되돌아보니 자신이 혼자서 조조(曹操)의 군과 싸워서 이기고 한중(漢中)을 집어삼켰던 위업이 있었다. 그래서 기분에 취해서 자신이 진짜 진명천자(真命天子)라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관우(關羽)의 복수를 핑계로 동오(東吳)를 집어삼키려 한다. 장비(張飛)가 극력 지원하여 조운(趙雲) 등이 극력 반대했지만 듣지 않는다. 유비가 황제(皇帝)의 위풍(威風)을 내세우니 대신들이 감히 반대하지 못한다. 제갈량은 극력 반대의견(反對意見)을 내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는 그저 탄식(歎息)했을 뿐이다. 만일 법정(法正)이 살아 있다면 좋았을 걸. 법정의 말이라면 황제가 들어주셨을 텐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갈량(諸葛亮)을 좋아하고 특히 국내 무협작가(武俠作家)들이 그를 '무후(武侯)'라고 칭송하고 있지만 여기에 나온 많은 글들은 중국에선 제갈량을 그리 대단한 인물로 치부(置簿)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많았다. 참고(參考)하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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