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전소설 "수호전(水滸傳)"의 등장인물로 천영성(天英星)의 화신이다. 소이광(小李廣)이란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작중 최고의 활쏘기 명수다. 이와 비견할 만한 명사수로는 같은 편인 낭자(浪子) 연청(燕靑)과 방납(方臘) 토벌전에 등장한 소양유기 방만춘 정도 밖에 없을 정도이다. 소온후(小溫候) 여방(呂方)과 새인귀(賽仁貴) 곽성(郭盛)이 영역 다툼으로 서로 일기토(一騎討)를 벌이고 있을 때 두 창이 맞부딪쳐 창에 달린 술이 서로 꼬여버린 것을 화살로 끊은 적도 있으며 양산박(梁山泊)에 입당할 때 조개(晁蓋)가 화영의 활솜씨를 확인하려고 화영(花榮)한테 시켜 멀리 하늘에 날아가는 기러기 떼 중 한 마리를 지목(指目)한 뒤 새의 눈을 정확히 뚫어버린 적도 있었다. 하여 활 한 번에 화살 2발 이상을 발사하는 무력 최강자를 벌벌 떨게 만들 정도의 명사수(名射手)이다.
장군 가문의 후예(後裔)로 천하제일의 활솜씨를 지녔다. 평소 교분(交分)이 있던 송강(宋江)이 염파석(閻婆惜)을 죽이고 도망치자 돕기 위해 불러 들였다. 하지만 문관지채(文官知寨) 유고(劉高)로부터 송강을 구하느라 관직을 버리고 함께 탈출해 청풍산(淸風山)의 산적들과 한 패가 된다. 누이동생을 진명(秦明)에게 시집보내고 송강을 따라 양산박에 입단한다.
뛰어난 활솜씨로 여러 적들을 쓰러뜨리며 큰 활약을 보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은창을 다루는 솜씨도 뛰어나다. 요의 경요납연을 비롯한 전호의 장수인 동징, 방경, 장상, 양단, 풍익 등을 살해하고, 방납(方臘)의 난을 토벌하러 나서서는 왕인, 왕적, 조중, 보광국사(普覺國師) 등원각 등을 살해했다.
화영(花榮)은 미남에 대단한 무예실력을 지닌 장수이며 신중하고 깊은 충성심(忠誠心)에 실수조차 하지 않는 완벽한 인물이지만 끝에 가서 처자식을 내버려두고 자살한 것은 좀 무책임(無責任)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송강(宋江)이 유배를 갈 때 그를 몰래 도망쳐주게 하는 주동(朱仝)과 뇌횡(雷橫)이 이후의 행선지(行先地)를 묻자 송강은 소선풍(小旋風) 시진(柴進)과 오늘 소개할 화영(花榮) 중에 한 명에게 의탁할 것을 고민 중이라고 대답한다. 일단 소선풍 시진에게 향하는 송강은 여기서 추후 소개하게 될 무송과 만남을 갖게 되는데 이후로 한동안 시진의 집에서 머물던 송강은 화영에게로 향하게 된다.
청주(靑州)의 지채(知寨)로 있던 화영(花榮)은 또 다른 지채인 유고(劉高)의 아내가 '송강(宋江)이 바로 청풍산(淸風山) 산적의 두목이다'라고 말하는 바람에 송강을 보호하게 되는데 이 때 처음으로 화영의 활솜씨가 빛을 발한다. 송강을 체포하기 위해 온 병사들을 화살 두 개만으로 쫓아내는 것인데 첫 번째 화살로 대문 왼쪽에 있는 문신(門神)이 들고 있는 지팡이를 정확히 맞추고 두 번째 화살로 병사의 투구 수술을 정확히 맞춰냈다. 그 후에 화영이 말하길 “세 번째 화살은 저 대장의 명치끝에 명중 할 것이다!” 라고 하니 결국 병사들은 기겁해서 도망을 치게 된다.
하지만 그 날 송강(宋江)을 도망치도록 하는 화영(花榮)의 생각을 읽은 유고(劉高)는 병사를 숨겨두었다가 송강을 체포(逮捕)하는 한편 화영을 체포하기 위해 진삼산(鎭三山) 황신(黃信)을 움직였이니 화영은 보기 좋게 술자리에서 포박(捕縛)되고 만다. 하지만 송강이 누구인가! 수호지의 주인공이자 양산박의 두령이 될 인물이 아니던가. 언제나 책은 주인공 편이다.
송강(宋江)과 화영(花榮)을 구출하기 위해 청풍산(淸風山)의 산적 금모호(錦毛虎) 연순(燕順), 왜각호(矮脚虎) 왕영(王英), 백면낭군(白面郎君) 정천수(鄭天壽)가 움직이니 놀랍게도 송강과 화영을 구출해낸다. 왕영이 호삼랑(扈三娘)과 결혼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송강이 마누라 삼으려고 데려온 여자를 자기 고집으로 풀어주게 해서가 아니라 그냥 이때 목숨을 구해준 게 고마워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틀림없이 이 전투는 왜각호(矮脚虎) 왕영(王英)이 유일하게 승리한 전투다.
청풍산(淸風山) 산적들이 황신(黃信)을 꺾어낸 이 사건은 엄청난 나비효과를 가지고 오게 된다. 바로 지난 번 소개했던 벽력화(霹靂火) 진명(秦明)을 움직이게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낭아봉(狼牙棒)을 들면 천하무적(天下無敵)이라고 소개했던 진명은 그 소개가 무색할 만큼 처참하게 깨지고 만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이미 진명 편에서 할 만큼 했으니 생략(省略)하도록 하자. 덤으로 이미 화영(花榮)의 여동생과 진명에 대해서도 얘기했으니 본편에선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그럼 이광(李廣)이 누구인가. 활 하나로 일생동안 흉노(匈奴)와 대적한 한나라의 명장(名將)이다. 그런데 화영(花榮)이 소이광(小李廣)이란다. 왠지 소(小)라는 말은 화영이 이광만 못하다는 말로도 해석(解釋)이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활솜씨는 이광에게 크게 밀리지 않을게 분명하다. 곽성(郭盛)과 여방(呂方)이 서로 싸우다 창술이 얽혔을 때 그 것을 화살로 쏘아 맞춰 풀어낼 정도라면 지금 올림픽 양궁(洋弓)에서 퍼펙트골드를 쏘는 것 이상의 신기가 아닐까. 그래서인지 화영의 별명은 온통 활의 명수라는 수식어로 가득하다. 신비장군(神臂將軍), 신전장군(神箭將軍)은 다 그런 의미다.
특히 전호(田虎) 토벌전에 있어서는 단숨에 두 적장을 활로 쏘아 쓰러뜨리고 자신을 노리고 쏜 화살을 받아내 다시 맞받아 쏘아 또 한 명의 적장을 쏘아 죽이니 화영(花榮)이 떴다 하면 무서워하여 도망치기 바빴다고 한다. 또한 방랍 토벌전에서 왕적과 조중을 죽이고 절강사룡(浙江四龍)에게 홀로 맞서는 것은 화영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명의 장거리 무기인 몰우전(沒羽箭)을 사용하는 장청(張淸)이 이 정도의 포스를 뽐냈던가? 단연코 아니다. 역시 돌맹이보단 화살이 더 아픈 게 틀림없다.
활을 잘 쏜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대단한 것임이 틀림없어서 수호후전(水滸後傳)에서는 화영(花榮)의 아들 화봉춘(花逢春)이 아버지를 쏙 빼닮은 활솜씨를 뽐내며 활약 한다는데 몇 번 언급했다시피 유감스럽게도 수호후전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부족(不足)하여 자세한 설명을 할 수가 없어 유감(遺憾)이다.
은창수라는 별명은 기병팔표기로써의 화영이 있었기에 탄생한 것이다. 백발백중의 활솜씨를 자랑하는 화영(花榮)이 기병이라는 건 어딘가 좀 이상하지만 구궁팔괘진에서 그의 위치가 중군을 호위하는 위치였다는 점에서는 나름의 납득이 된다. 어쨌든 이때 은창을 들고 있는 병사들을 거느렸기 때문에 은창수(銀槍手)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화영 역시 활을 쓰지 않고 근접전을 벌이게 되면 은창을 꼬나들고 싸웠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화영에게 어울리는 건 활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럼 은창수가 있으면 금창수(金槍手)는 없을까? 물론 있다. 금창수는 호연작(呼延灼) 편에서 아주 잠깐 이름을 올린 서령(徐寧)이다. 그럼 서령이 화영(花榮)보다 한 수 재간이 뛰어났단 걸까?
송강(宋江)이 그를 찾아온 그 때부터 화영(花榮)의 운명은 송강과 함께 했다. 세 번의 방납(方臘) 토벌전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송강을 호위(護衛)하는 한편 많은 공을 세웠던 화영은 응천부의 병마도통제(兵馬都節制)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보병두령으로 송강을 수호했던 이가 이규(李逵)와 그리고 기병두령에서 송강을 수호했던 이가 화영이다. 이 둘이 차례로 송강과 함께 죽을 결심을 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덤으로 똑같이 화영(花榮)과 함께 송강(宋江)을 따랐던 오용(吳用)의 죽음은 화영만큼 가슴이 아리진 않는데 그 이유는 오용이 처음 따랐던 인물은 송강이 아니라 조개(晁蓋)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전호 토벌전에서 보여준 귀신같은 궁술(弓術)에서 화영(花榮)에게 붙인 '신전장군(神箭將君)'이런 별호도 있다. 전호(田虎)의 부장 두 명을 화살로 쏴 죽이고 유문충이 편장 한 명에게 화영을 쏘라고 명령을 내리고 편장이 화살을 쏘자 화영은 바로 눈치 채서 뒤로 피하고 날아 온 화살을 잡아 역으로 편장 하나를 죽이면서 그 부하들에게 "이제야 신전장군의 실력을 알겠느냐"라고 호통을 치자 전호의 부하들이 그를 신전장군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화영을 상대한 인물들은 사망 변수(死亡變數)가 있는데 몇 번 붙고 바로 화영이 도망가고 화영과 싸운 상대는 쫒다가 화살에 맞아 죽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명궁(名弓)들과 싸우는 장면은 없다.
본래 청풍채(淸風寨)를 지키는 무관으로서 도망치는 송강(宋江)이 그에게 의지를 하러 가다가 청풍산(淸風山) 산적들과 친해지고 청풍채의 사령관의 아내를 청풍채로 돌려보내는데 송강(宋江)이 화영(花榮)에게 가 보니 사실 청풍채의 사령관은 문관인 유고(劉高)이다. 화영이 송강을 보호하다가 유고가 모함을 해 뜻하지 않게 도적으로 오인(誤認) 받아 죄인으로 잡히는 처지가 된다. 다행히 청풍산의 연순(燕順) 등이 이 둘을 구해주었고 이들과 합류한 뒤 유고를 죽이고 황신(黃信)을 패퇴시킨 뒤 이들을 토벌하러 온 진명(秦明)을 유인책으로 사로잡아 세력에 포섭하고 진명이 황신을 투항시켜 청풍채를 박살내었다. 이 와중에 진명의 가족이 청주(靑州)의 모용언달(慕容彦達)에 의해 몰살당하자 송강은 화영의 여동생과 진명을 결혼하게 하여 진명을 달래준다. 따라서 진명은 화영의 매제(妹弟)가 된다.
양산박에 합류한 후엔 기병두령으로서 활 뿐 만 아니라 한 자루 은창도 잘 써서 금창수(金槍手) 서령(徐寧)과 함께 짝을 지어 은창수(銀槍手)로서 활약하기도 한다. 장청(張淸)과 달리 이쪽은 근거리 공격력도 좋다. 이러니까 장청은 돌팔매로 먹고 사는 게 더 좋다 게다가 눈치도 빠른 편으로 송휘종(宋徽宗)의 두 번째 칙서의 내용이 이상한 걸 바로 눈치 채서 칙사(勅使)를 죽인다.
화영(花榮)은 중국의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인 “수호전(水滸傳)”의 등장하는 인물로, 108성 중 9위이자 천강성(天罡星)의 천영성(天英星)에 해당한다. 늘씬한 몸을 가진 미남자로 한나라의 명궁(名弓) 이광(李廣)과 비견될 정도의 궁술(弓術) 솜씨를 지녔다 하여 소이광(小二廣)이라는 별호로 불린다. 날아가는 기러기의 머리를 맞출 정도의 명궁이며, 신전장군(神箭將軍)이라고 불릴 정도로 궁술에서는 양산박(梁山泊) 제일의 실력을 자랑해 전투시에는 주로 엄호 및 지원을 맡는다. 이외에도 은창수(銀槍手)라고 불릴 정도의 창술(槍術) 실력과 “사서오경(四書五經)”에 통달하여 양산박 인물들 중 유일하게 무패의 전적을 자랑하며, 여동생은 진명(秦明)의 부인이다.
본래는 청주(靑州) 청풍채(淸風寨)의 장관(長官)이며 주변의 산적들로부터 요새를 보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고(劉高)가 조정의 고관에게 뇌물을 바치고 청풍채의 장관이 된 뒤 화영은 부장관(副長官)으로 내려갔으며, 이후 유고가 백성들로부터 가혹(苛酷)한 세금 징수를 해 돈을 착취(搾取)하자 서로 언쟁을 하며 사이가 나빠졌다.
이후 친한 친구인 송강(宋江)이 아내 염파석(閻婆惜)을 살해한 뒤 화영(花榮)을 찾아오자 화영은 송강을 환대하고 함께 원소절(元宵節)을 구경하였다. 하지만 그 때 청풍산(淸風山)의 산적인 왕영(王英)에게 붙잡혀 있다가 송강에 의해 풀려난 유고(劉高)의 아내가 유고에게 송강이 산적이라고 해 송강이 유고에게 붙잡혔으며 이에 분노한 화영은 송강을 풀어달라고 유고에게 요청했다. 하지만 유고는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화영은 무력으로 송강(宋江)을 되찾아 도주한 뒤 추격해오는 유고를 자신의 활 솜씨로 위협해 도망가게 했다. 그 뒤 화영에게 해가 될 것 같아 떠나려는 송강을 유고가 붙잡았으며 화영 또한 병마도감(兵馬都監)인 황신(黃信)을 시켜 붙잡아 두 사람을 청주(靑州)로 연행하려 하였다. 이후 황신(黃信)이 이끄는 호송대가 청풍산을 지나가게 되자 청풍산의 산적인 연순(燕順), 왕영(王英), 정천수(鄭天壽)가 호송대를 공격해 황신을 물리치고 송강과 화영을 구출했으며 화영은 호송대와 같이 있던 유고를 살해하고 송강과 함께 산적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군정장관(軍政長官)인 진명(秦明)이 관군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지형을 이용해 이를 물리쳤으며 송강 일행은 진명을 붙잡아 자신들의 동료로 삼으려고 하였지만 진명이 군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갖고 이를 거부하자 풀어주었다. 하지만 청주의 태수(太守)인 모용언달(慕容彦達)이 진명의 가족들을 살해하고 진명을 죽이려 하자, 진명은 다시 청풍산으로 돌아와 산적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진명의 설득으로 황신 또한 청풍산 산적의 일원이 되었고, 송강 일행은 화영의 가족들을 구출하고자 청풍채(淸風寨)를 습격하였다. 그 뒤 동경(東京)에서 토벌대가 올 것을 우려해 송강은 청풍산(淸風山)의 산적들을 이끌고 양산박(梁山泊)으로 향했으며 도중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송강이 제외된 채 나머지 일행들은 양산박(梁山泊)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송강이 관에 자수해 강주(江州)로 유배된 뒤 처형(處刑)될 위기에 처하자 화영(花榮)은 다른 양산박 산적들과 함께 유배지로 가 송강(宋江)을 구출했다. 그 뒤 축가장(祝家莊)과의 전투에서 적의 복병이 하늘로 쏘아올린 신호를 쏘아 격추하거나 고전하는 아군들을 엄호 및 지원하며 활약했으며 이후 송강의 부장으로서 활약(活躍)하였다.
108성 집결 이후에는 기병군(騎兵軍) 팔호장(八虎將) 겸 선봉사(先鋒使)의 필두를 맡았으며 조정에서 황제(皇帝)의 초안(招安)을 갖고 온 사자(使者)가 무례한 태도를 보이자 이에 분노해 사자를 사살(射殺)하였다. 이후 전호(田虎)와의 전투에서 적장 3명을 연달아 사살했으며 방납(方臘)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등원각(鄧元覺)을 죽였다.
방납(方臘)의 난을 평정한 뒤 양산박 군이 해산한 이후에는 무절장군(武節將軍)에 천거되었으며 응천부(應天府)의 사령관(司令官)으로 발령받아 가던 도중 송강이 독살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오용(吳用)과 함께 송강의 무덤이 있는 요아와(蓼兒洼)에 가서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