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규 경제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경제학(經濟學)이란 인간이 행하는 경제생활의 여러 측면을 연구하여 그에 따른 경제문제(經濟問題)의 해결 방법을 찾아내려는 학문입니다.
서구에서 경제학이 하나의 체계적인 독립과학으로 성립된 것은 1776년 스미스가 “국부론(國富論)”을 출간한 데에서 비롯됩다. 이러한 서구의 경제학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개항기(開港期)에 이르러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비록 독립된 분과학문(分科學問) 형태를 갖춘 적은 없었지만 경제학적 사고와 사상이 꾸준히 발달되어 왔습니다. 특히 실학파의 경제사상은 상당히 체계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개항기(開港期)에 들어온 서구의 경제학은 이와 같은 우리 고유의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수용될 수 있었습니다. 한편 경제학이라는 용어는 일본의 것을 도입한 것이지만 우리에게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1876년 개항과 더불어 근대 문물(文物)이 급속히 들어오자 그와 더불어 서구의 경제학도 도입되었습니다. 그때 경제학의 수용과정은 점진적이기보다는 급진적(急進的)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서구 경제학과 관련 문헌들이 다량 소개된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집중적으로 경제학 저술이 소개된 까닭은 1883년에 설립된 동문관(同文館)과 그 후신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비롯한 각종 외국어학교에서 외국어교육뿐만 아니라 국제법과 정치경제학을 전공과목으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1907년 전후에는 근대식 교육기관의 설립 및 외국유학생들의 귀국과 더불어 서구 경제학에 관한 교재 출판과 논설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국가존망의 위기를 당하여 경국제민(經國濟民)의 학문에 신지식의 갈망이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강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개항기(開港期)의 경제학 지식의 이해 수준은 일본에 이미 수용되어 있던 고전파 경제학과 역사학파 경제학의 큰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나타나는 경제사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유경쟁원리를 소망하는 제도로서 그 이점을 상론(相論)하면서도 개인의 이익추구와 사회의 공익달성(公益達成) 사이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의미를 추구한 스미스의 자연법사상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경쟁의 의미는 기껏해야 하층민이 입신출세(立身出世)하는 도구이고 미개국(未開國)이 선진국을 따라잡는 방법으로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불충분한 이해는 서구 경제학을 경세제민의 학문으로 수용하였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정부의 간섭(干涉)을 반대하고 개인의 경제활동의 최대 보장을 강조하는 영국 고전파경제학이 통치의 기술 또는 국가학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서구 경제학의 배후에서 그것을 낳은 사상은 무시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한말의 험난한 국제환경에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표방하며 급속히 서구식 근대화를 추구해야 했던 개화운동(開化運動)은 경제문제를 국가와 밀착시켰는데 그렇다고 구미나 일본에서도 그와 같은 경험이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한말(韓末) 서구 경제학을 도입하면서 단순한 정책기술 이상의 의미를 제거해버렸기 때문에 개화기의 경제사상은 학문으로서의 경제이론을 잘못 이해한 채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로 돌입했고 또 이러한 사정은 광복 뒤에도 상당기간 계속되었습니다.
일제의 강점과 더불어 민족자주적인 개화사상(開化思想)의 물결이 차단되었으며 이는 곧 한국 경제학사의 단절을 초래하였습니다. 즉 일제는 한국을 강점하자마자 한국인이 지은 각 급 학교의 교과서를 몰수(沒收)하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한말에 활발히 출간되던 경제학 관계 교과서류(敎科書類)의 대부분이 그 책명만 남기고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각종 간행물의 몰수와 판매금지(販賣禁止)가 내려졌기 때문에 민족 항일시기 초는 사실상 정신적 공백기(空白期)가 되고 말았습니다. 민족항일시기 36년간을 총괄하여 볼 때 경제학 분야에서 54권의 저서와 49건의 역서 1,648편의 논문과 6편의 학위논문(學位論文)이 나와 있지만 대부분이 1920년대 이후에 발표된 것들입니다.
그 가운데 특히 1930년대는 한국인에 의한 경제학서 간행의 절정기(絶頂期)를 이루었습니다. 민족항일시기에 경제학과 경제학 교육이 국내에 확립되기 시작한 시기도 1920년 전후부터였으며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와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의 두 사립학교와 경성고등상업학교(京城高等商業學校)와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의 두 관립학교에서 경제학 교육과 연구가 파행적으로나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경제학 교육인구는 국내 학교에서만 배출된 것이 아니라 일본의 각 학교에 유학한 인구까지 가산(加算)됩니다. 위의 두 관립학교에는 한국인 교수를 두지 않았으므로 대부분의 경상계(經商系) 학자는 보성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양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즉 홍성하(洪性夏)·백상규(白象圭)·이관구(李寬求)·김광진(金洸鎭)·이상훈(李常薰)·박극채(朴克采)·윤행중(尹行重)·이순탁(李順鐸)·백남운(白南雲)·노동규(盧東奎)·육지수(陸芝修)·신태환(申泰煥) 등이 이에 속했습니다. 또 국내외 연구기관에 재직하던 한인학자로는 경성제국대학의 박문규(朴文圭),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의 강정택(姜鋌澤), 구주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의 최호진(崔虎鎭), 일본 동양경제연구소(東洋經濟硏究所)의 고승제(高承濟)를 들 수 있습니다.
민족항일시기(民族抗日時期) 한국 경제학자들의 업적에 관한 특색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관심영역이 농업경제와 경제사 분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둘째, 후자에서 당시 전문대학의 학자일수록 마르크스주의사관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학계의 지배적 유형이 되었습니다. 셋째, 학계가 아닌 재야 또는 언론계 출신들에 의해 당시 한국경제의 생생한 실태가 기술된 경우가 오히려 많습니다. 가령 이각종(李覺鍾)·배성룡(裵成龍)·임병철(林炳哲)·양갑석(梁甲錫)·지중세(池中世) 같은 이들의 논문이 교조주의에 사로잡힌 저작들보다 당시의 경제현실을 이해하는 데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평가됩니다. 넷째, 이론경제학에서는 마르크스경제이론에 관한 단편적인 논문 이외에는 단 하나의 연구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윤행중의 “현대경제학의 제문제”는 민족항일기 말에 한글로 쓰였고 또 케인스(Keynes,J.M.)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롭지만 케인스의 “일반이론”을 마치 통제경제이론가인 슈판(Spann,O.)이나 고틀(Gottle)류와 같은 계통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경제학이 근대경제학적인 이론연구는 완전히 결여된 채 극소수의 예외는 있지만 오로지 마르크스주의적 경제사 연구에 주력한 이유로는 첫째 당시의 마르크스주의가 민족주의사상을 이용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둘째 당시의 마르크스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던 일본 경제학계의 영향을 들 수 있습니다. 위에서 예시된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일본 아니면 국내 대학에서 일본인 교수의 지도를 받았으며 대체로 1920년 전후부터가 그들의 피교육기간(被敎育期間)이었다고 보면 그 때의 일본 경제학계의 상황이 한국인 경제학도에게 미친 영향은 막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광복(光復) 직후의 한국 경제학계는 민족항일기의 학계가 그대로 이행된 상태였고 더구나 학문으로서의 경제학과 정치이념(政治理念)이나 정치활동을 완전히 혼동하는 수준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혼란에도 불구하고 광복의 기쁨과 학문에 대한 정열로 시도된 야심적인 저작활동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한국 경제학은 주로 저서는 입문 수준의 경제원론에 번역서는 사회주의체제와 사상류(思想類)에 그리고 논문은 한국경제의 각종 발전책과 특히 일제강점기부터 전통적으로 이어진 한국농업 문제에 관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당시의 대표적인 경제학자로는 국립 서울대학교로 통합되기 전의 경성대학에 백남운·박극채·강정택·황도연(黃道淵)·윤행중·최호진과 상과대학에서는 김세련(金世鍊)·김한주(金寒周)·이기수(李基洙)·전석담(全錫淡)·최영철(崔英澈)·김창주(金昌周)·허동(許東)·이순기(李順基) 등, 그리고 고려대학교·연희대학교의 김광진·최문환(崔文煥)·이순탁·신태환·고승제·조기준(趙璣濬)·육지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 중 최호진·최문환·신태환·고승제·조기준·육지수 등을 제외한 압도의 다수가 사회주의경제학에 주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주의 정치운동에도 직접·간접으로 관여하면서 1945년 8월 17일에 발족한 조선학술원(朝鮮學術院)을 비롯하여 학계 일반을 지배하다시피 하였기 때문에 경제학의 과학적 연구나 정통적 경제이론이 연구, 육성될 풍토가 조성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6·25전쟁은 한국 경제학계의 그 같은 구조에 일대 변혁(變革)을 가져왔습니다. 즉 6·25전쟁 전에 활약하던 대부분의 좌경교수가 납북 또는 월북했기 때문에 각 대학의 경제학 교수진(敎授陣)은 새로이 구성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한국경제학은 개화기 이래 실질적으로 세 번째의 단절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1910년의 일제강점과 8·15광복·6·25전쟁이라는 정치적 요소에 따라 학문의 흐름이 타율적으로 단절되는 상황에서 경제학의 누적적인 지식축적이 행해질 수 없었습니다. 학설이나 학파의 교체가 아닌 사회 격동(社會激動)의 연속 속에서 한국경제학은 1950년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현대경제학의 세계적 흐름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서울대학교에서는 신태환·고승제·최문환·이상구(李相球)·유진순(劉鎭舜)·김준보(金俊輔) 등이, 고려대학교에서는 조기준·조동필(趙東弼)·성창환(成昌煥) 등이, 연세대학교에서는 김상겸(金相鎌) 등이, 중앙대학에서는 최호진 등이 중심이 되어 경제학의 재건에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6·25전쟁 전에 지배적(支配的)이던 마르크스주의경제학 일변도의 풍조나 학문과 정치운동을 혼돈(混沌)하는 태도에 휩쓸리지 않고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을 착실히 연구하려는 소수파 입장의 견지자(堅持者)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중심이 되어 재개한 경제학 교육과 연구는 6·25전쟁 전의 잔재를 털어내고 새로운 경제학 역사를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초기 활동 가운데 특기할 만한 사실은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신태환·고승제·최호진 등 세 사람이 발기하여 한국경제학회를 발족한 사실이며 다음해 8월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학술지 “경제학연구(經濟學硏究)” 창간호를 내놓았다. 이와 같이 정비되어 간 1950년대 한국경제학계의 연구 성과(硏究成果) 중에 특히 번역서의 수는 1960년대나 1970년대보다 절대적·상대적으로 많은 양일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도 입문서보다 이론서와 경제사상사류가 많았다는 사실은 케인스경제학을 비롯한 새로운 지식과 마르크스주의에 대신하는 경제사상 내지 방법론에 관한 수요가 컸던 경제학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활발한 번역활동(飜譯活動)이 세계 경제학계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데 여러모로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며 이는 한국 경제학계의 신경제이론에 대한 지식 요구가 컸음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론들이 도입, 소개된 것이 반드시 이론들의 정착·이해의 단계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케인스의 “일반이론”과 힉스(Hicks,J.R.)의 “가치와 자본”이 번역, 출판되었어도 양자 간의 관계와 해석 또는 그 역사적 의미가 정확히 파악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슘페터(Schumpeter,J.)의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등이 번역되었어도 슘페터의 순수이론체계는 소개되거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이엑도 이론경제학자로서보다는 “노예화의 길” 등의 번역을 통하여 사상 면이 소개되었을 뿐입니다. 로빈슨(Robinson,J.V.)과 칼도(Kaldor)·돕(Dobb)·랑게(Lange,O.)가 번역, 소개되면서도 학파의 계보나 케인스경제학과의 관계가 명시되지는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케인스적 거시이론(巨視理論)과 미시경제학(微視經濟學)에 대한 소화는 원론 수준의 저변 확대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물론 당시까지 출판되었던 국내 학자들의 경제원론서(經濟原論書)들이 상당수에 이른 것은 인정하지만 대체로 구체제의 일본서 번안물(飜案物)이 많아서 신경제학 정착에는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경제학은 1950년대 후반부터 다져온 기반 위에 새로운 성장기(成長期)를 맞이하였습니다. 경제학이 종래 우리에게 인식되어 왔던 것처럼 사상이나 이념의 학문이 아니라 경제현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학문이라는 인식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 1960년 전후부터이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습니다.
첫째, 정평 있는 해외의 경제학 교재가 원론 수준에서 강의, 소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둘째, 각 대학의 교과목이 크게 개선되어 특히 경제수학과 계량경제학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셋째, 경제학의 실용적 가치에 관한 인식의 변화입니다. 6·25전쟁 뒤부터 전란복구라는 경제현실의 과제에 자극되어 일찍이 후진국경제론에 관심이 고조되어 갔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넉시(Nurkse,R.)·루이스(Lewis,A.)·틴베르헨(Tinbergen,J.)·뮈르달(Myrdal,K.G.)·허쉬만(Hirschman)·로스토(Rostow,W.) 등이 소개됨으로써 경제학이 사상이나 원론의 선을 넘어 후진국경제의 성장·발전과 그를 위한 계획 및 정책수립에 활용될 수 있는 학문이라는 인식을 높였습니다. 넷째, 경제학자의 현실문제와 경제정책에 대한 참여가 시작되었습니다. 제2공화국 당시의 ‘산업개발계획시안(産業開發計劃試案)’의 작성을 비롯하여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화폐개혁(貨幣改革)·농지정책자문(農地政策諮問) 등이 행해졌고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면서는 평가교수단 등과 같이 폭넓게 참여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섯째, 1961년 대학 최초의 경제연구소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설치되어 이듬해부터 우리나라 대학 최초의 경제학 전문학술지 “경제논집(經濟論集)”이 계간으로 발간되기 시작한 점입니다. 이것은 교수의 임무 가운데 하나인 학술연구 성과 발표의 기회가 제도적으로 마련된 시초의 계기라는 점에서 의의가 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외유학자들의 귀국에 의한 영향입니다. 1960년대부터 중견교수들 상당수가 선진제국의 유학 경험을 가질 기회가 확대되었고 1960년대 후반부터는 구미대학(歐美大學)에서 학위를 마친 경제학자들이 국내대학 또는 연구기관에 들어오기 시작함으로써 국내 경제학계와 선진국학계의 거리는 그만큼 단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의 모든 요인이 상승작용(相乘作用)을 하여 계기가 마련된 데다가 한국경제의 성장경험 속에서 1970년대는 경제학 자체도 양적으로는 고도성장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한국 경제학계에서는 우선 논문이 증가하는 반면에 번역서는 감소하고 있는데 이러한 학술논문(學術論文)의 증가 현상은 경제학 연구의 정상화를 나타냅니다. 또한 한국 경제학자들의 관심 영역이 다양화되었고 현실경제의 동태와 연구 관심영역 사이에 상당한 연관성이 엿보인다. 1970년대에 두드러지기 시작한 국제경제학(國際經濟學) 분야는 주로 무역거래관계와 외자 분야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것은 외자 및 무역 의존도가 높아진 한국경제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1970년부터 10년간 350여 편의 한국인 논문이 외국 전문학술지(外國專門學術誌)에 발표되었는데 이는 1970년대의 한국 경제학자들의 국제화 경향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외국학술지에 발표되는 한국 경제학자들의 논문은 순수이론과 수리·계량모형·화폐이론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고 응용 분야 안에서도 성장이론·무역이론·기업금융에 관심이 높은 반면에 자원문제·기술변화문제·경제체제문제·노사문제 등에는 관심이 적다고 하겠습니다.
한국 경제학의 성장은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도입기(導入期)에서 6·25전쟁에 이르기까지를 경제사상의 시대라고 한다면 그 이후는 경제학의 이론화 내지 과학성이 강조되어 온 시대로 대별(大別)됩니다. 경제학이 이론이나 실용성을 무시하고 사상성, 그것도 마르크스주의 일변도(一邊倒)가 되었던 것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경제학의 도구성만을 강조하는 것도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의 경제학의 위기의식(危機意識)은 비단 우리나라 경제학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1970년대 이후 세계적인 문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주류 경제학의 지나친 전문화로 인하여 발생한 결함을 시정하기 위해서 경제학이 종합사회과학(綜合社會科學)의 체계 안에 통합되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한국 경제학의 역사적 배경과 짧은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현 단계의 우리 수준으로서는 종합적 사회과학을 구축(構築)하기에는 역부족이고 설령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과학 이전의 정체불명의 원리로 도피하는 허학(虛學)으로 그칠 공산이 큽니다. 따라서 개별 전문과학(專門科學)의 발전 없이는 학문의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본 슘페터의 견해는 시사(時事)하는 바가 큽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 경제학은 주류든 비주류든 현대경제학의 이론과 분석기법을 가급적 다양하게 받아들여 소화하는 축적과정(蓄積過程)이 필요합니다. 다만 이 경우에 유의해야 될 점은, 첫째 전공 분야별의 지나친 세분화보다는 각 분야 간의 상호의존성(相互依存性)이 더 강조되어야 하며, 둘째 주류 경제학의 소화과정에 그 이론을 배출(輩出)한 사상적 근원도 함께 흡수되어야 하고, 셋째 경제학의 정착이 계통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는 경제학자들이 어떤 학파의 귀속(歸屬)을 스스로 명시(明示)할 수 있을 만큼 계보적인 연구가 집중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당 학파(學派)나 학자의 사상체계 전반에 관한 지식을 체득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경제학의 토착화(土着化)를 위해서도 그 같은 학파의 형성은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경제학이란 재화(財貨)와 용역(用役)의 생산과 분배, 소비에 관한 전반적인 경제 현상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학문이다. '경제학'은 영어의 'economics' 혹은 그리스어의 'οἰκονομία'를 번역한 말이다. 한자어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줄임말인데 이는 '세상일을 잘 다스려 도탄(塗炭)에 빠진 백성을 구함'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면 희랍어 어원은 '집, 가정'을 뜻하는 'oikos'와 '규칙 혹은 법'을 뜻하는 'nomos'의 합성으로서 'management of a household', 즉 가정을 잘 꾸리는 방법을 뜻했으나 시간의 흐름과 번역을 거쳐 경세제민으로 그 의미가 확장(擴張)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제학은 다양한 모형들을 만들어 현실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모형들이 합쳐져서 하나의 개념(槪念)을 형성한 것이 경제이론(經濟理論)입니다.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기 위해서 모형을 사용할 때에는 다른 여타의 조건들은 일정하다는 가정(假定)이 필요합니다. 즉, 한 가지 요인이 변할 때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는 동안에 다른 원인들은 사실상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게 되는데 이를 세테라스 파리부스라고 합니다. 이 용어는 라틴어로 '다른 조건들이 일정할 때'를 의미하며 경제학의 경제모형(經濟模型)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원칙입니다.
크게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 외의 분야로는 국제경제학(國際經濟學), 계량경제학(計量經濟學), 수량경제사(數量經濟史) 특유의 수리/통계학적 방법을 앞세워 사회과학 전반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과거에는 주류였지만 지금은 비주류로 분류되거나 혹은 아예 인정받지 못하는 비주류 경제학(非主流經濟學)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