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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사전 - 진무(陳武)

[삼국지 인물사전 - 진무(陳武)] 


진무(陳武, ? ~ 215년)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자열(子烈)이며 양주 여강군(廬江郡) 송자현(松滋縣) 사람이다. 진수(陳脩)와 진표(陳表)의 아버지이다.

생애
손책(孫策)이 수춘에 있을 시절에 손책은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는 양주 여강군 서현에 살다가 아버지를 장사(葬事)하고 흥평 원년(194년)에 비로소 원술(袁術)을 섬겼으며 또 흥평 원년에 원술의 명령을 받고 양쯔강(揚子江)을 동쪽으로 건너 양주자사 유요 등 원술을 따르지 않는 세력(勢力)들을 쳤고 이후 다시 수춘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이때는 194년으로 추측(推測)된다. 손책을 찾아가 스스로 그 가신(家臣)이 되었는데 당시 18세였으며 신장(身長)이 7척 7촌에 달했다. 이후 손책을 따라 양쯔강을 건너 정벌에 공을 세워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었다.

건안 4년(199년), 손책이 여강태수 유훈(劉勳)을 격파(擊破)하고 여강 사람 중 정예한 자들을 묶어 진무(陳武)에게 거느리게 했다. 손권이 정사를 거느리고서는 독오교(督五校)로 관직이 옮겼다. 손권(孫權)의 친애를 받고 공적이 있어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했다. 건안 20년(215년), 손권(孫權)을 따라 합비 전투(合肥戰鬪)에 참전하였으나 난전 중에 전사하였다. 

정사
손책이 수춘에 있을 시절 손책(孫策)을 찾아가 스스로 그 가신이 되었는데 당시 18세였으며 신장이 7척 7촌에 달했다. 이후 손책을 따라 장강(長江)을 건너 정벌에 공을 세워 별부사마가 되었다. 199년 손책이 여강태수 유훈을 격파하고 여강사람 중 정예한 자들을 묶어 진무(陳武)에게 거느리게 했다.

손권의 친애(親愛)를 받고 공적이 있어 편장군으로 승진했다. 215년, 손권을 따라 2차 합비 공방전에 참전하였으나 난전(亂戰) 중에 전사한다. 손권은 이를 애통히 여기며 직접 장례(葬禮)에 참가하고 빈객 2백여 명의 부역(負役)을 면제한 다음 진무(陳武)의 애첩을 순장(殉葬)한다. 이를 두고 잔인하다는 등 말이 많은데 이에 대해서 능통전(淩統傳)에 달린 손성(孫盛)의 평이 있다.

손권은 훌륭한 인물을 기르는 일에 온 마음을 다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위해 사력(死力)을 다하기를 기대하고 있음을 보였다. 가령 주태(周泰)가 부상을 당했을 때는 눈물을 흘렸고 진무(陳武)가 죽자 첩을 순장시켰으며 여몽(呂蒙)이 위독해지자 신들에게 빌었고 능통(淩統)의 고아들을 기르는 등, 직접 고통스런 마음을 다함에 있어서 이와 같이 열심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아름다운 덕이 알려지지 않았고 은혜와 덕택(德澤)은 안에서만 드러났으나 굽히며 형(荊), 오(吳)를 단단하게 하고 분수에 넘치게 연호(年號)를 본뜰 수 있었던 것 또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패왕(霸王)의 도는 크고 심오(深奧)한 것을 기약하니 이 때문에 선왕(先王)은 덕의의 토대를 세우고 진심으로 복종(服從)하는 천하를 갖추었으며 경략(經略)의 근본을 만들고 귀천(貴賤)의 차례를 밝혀 평이(平易)하고 간단하면서도 일가가 오래 갈 수 있었고 몸이 온전하면서도 공이 커질 수 있었는데 어찌 사소한 것에 치중(置重)하여 가까이하며 힘써 그 해에 이로움을 구한 것인가? 어(語)에서 이르길 “비록 작은 도라도 반드시 볼만한 것이 있으나 원대(遠大)함에 이르는데 지체될까 두렵다” 이가 이것을 이른 것이로다! 즉 부하를 위하는 행위지만 왕이 하기에는 너무 작은 행위(行爲)라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하작이라는 사람은 평을 달아 말한다.

중모(仲謀)의 일은 오직 첩을 순장(殉葬)하며 예를 잃었을 뿐이고 기타는 또한 임금이 그만두지 못할 바이나 근본(根本)은 아니다. 일부 주례(周禮)는 지극히 자세하면서 다 갖춘 내용이나 손성(孫盛)의 견해는 뜻이 차이가 심하면서도 세밀하지 못하다.

손성은 진무전(陳武傳)에는 또 다시 이 일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목공과 두회의 예를 들어 손권(孫權)의 행동이 너무 잔인하다는 평을 내렸다.

옛날 삼량(三良)이 진 목공(穆公)을 따라 순장되자 진의 군대가 정벌하지 않았고 위씨의 첩을 출가시키자 두회(杜回)는 전장에서 고꾸라졌으니 화복의 응보(應報)의 효험는 이와 같다. 손권이 계교에 맡기고 술책(術策)에 의지하고 삶으로써 죽음을 따르게 했다가, 대대로 이어질 제위(帝位)를 재촉하게 되었으니 또한 의당(宜當)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 첩(妾)이 진수나 진표의 어머니도 아닌데 서자 진표(陳表)가 진수(陳脩)가 죽었을 때 진수의 어머니를 섬기겠다고 겨우겨우 허락(許諾)을 맡은 것을 보면 순장(殉葬)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살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삼국지연의"에서 진무
연의에서는 진무(陳武)의 얼굴은 황색, 눈은 적색으로 괴이(怪異)한 용모라고 서술된다. 손책이 강동(江東)에 진출했을 때 등용되어 유요 휘하의 장영을 죽였다. 그 후 적벽대전(赤壁大戰), 남군 공략전(南郡攻略戰)에 참가하였다. 유비와 손상향(孫尙香)이 형주로 귀환할 때 반장(潘璋) 등과 함께 데리고 돌아오려 하다가 손상향의 일갈에 물러났다.

정사와는 달리 합비 공방전이 아닌 215년 유수구 전투(濡須口戰鬪)에서 조조군과의 전투에서 방덕(龐德)과 격렬하게 싸우다 윗도리가 나무에 얽혀 움직일 수 없게 된 바람에 전사(戰死)한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내용을 따르면, 얼굴은 황색, 눈은 적색으로 용모가 괴이했다고한다. 195년 손책(孫策)이 강동(江東)으로 진출했을 때 유요(劉繇)의 진영에 불을 질러 손책군에 가담하였고, 장영(張英)을 토벌하였다.

또한 태사자(太史慈)가 주둔하였던 성을 기습하여 태사자(太史慈)를 붙잡기도 하였다. 그 후 주유(周瑜)의 지휘 하에서 적벽 대전(赤壁大戰), 남군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유비(劉備)와 손부인(孫夫人)이 형주(荊州)로 떠나려 하자 반장(潘璋)과 함께 손부인과 유비를 추격(追擊)하여 데리러 오려 하였으나 손부인의 거부로 물러났다.

215년, 손권(孫權)이 합비를 쳐들어 갔을 때 유수구(濡須口)에서 조조(曺操)의 무장 방덕(龐德)과 격렬하게 싸웠으나 패하여 퇴각(退却)하다가 다시 뒤돌아 방덕과 싸우려 하였으나 윗도리가 나무에 얽혀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전사하였다.

인물 · 평가
진무(陳武)눈 덕이 두텁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거리를 불문(不問)하고 많은 객들의 의탁(依託)을 받았다.

진수(陳遂)는 강동십이호신(江東十二虎臣) 또는 동오십이호신(東吳十二虎臣)인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程黃韓蔣周陳董甘凌徐潘丁傳) 끝에서 진무(陳武)를 다른 열한 명과 마찬가지로 “강동(江東)의 범 같은 신하로 손씨에게 후대(厚待) 받았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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