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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사전 - 동습(董襲)

[삼국지 인물사전 - 동습(董襲)] 


동습(董襲,? ~ 215년)은 중국 후한 말기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원대(元代)이며 회계군(會稽郡) 여요현(餘姚縣) 사람이다.

생애
손책(孫策)이 원술의 허락을 받고 강동(江東)으로 진격하여 회계에 이르렀을 때 고천정(高遷亭)에서 손책을 맞이했고 손책의 눈에 들어 문하적조(門下賊曹)가 되었다. 손책이 산음(山陰)의 오래된 도둑 황룡라(黃龍羅)와 주발(周勃)을 쳤고 동습(董襲)은 손수 황룡라와 주발을 베어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어 병사 수천 명을 받았다. 

동습은 오나라의 장수로 손책과 손권(孫權)을 섬겼으며 황조를 토벌하는 선봉(先鋒)에 섰다. 동습은 회계군 여요현 사람이다. 키는 8척이며 완력(腕力)이 다른 사람들을 능가했다. 동습(董襲)은 지조와 절개가 강개하고 굳세고 강건하며 영열하다(志節慷慨,武毅猛烈).

손책(孫策)이 회계군에 들어오자 동습(董襲)이 고천정(高遷亭)에서 영접했다. 손책이 그를 보고 훌륭하게 여겨 관서에 도착해서 그를 문하적조(門下賊曹)로 삼았다. 이때 음산(陰山)의 오래 묵은 도적인 황룡라, 주발이 무리 수천 명을 모으고 있으니 손책(孫策)이 직접 출정하여 토벌하였다. 동습은 혼자 황룡라와 주발의 목을 베고, 승진하여 별부사마(別部司馬)에 배수되었다. 손책은 동습에게 수천 명의 병사를 주고, 양무(揚武) 도위로 승진시켰다. 동습은 손책을 따라 환현을 정벌(征伐)하고 또한 심양에서 유훈을 토벌(討伐)하였으며 강하군에서는 황조를 정벌하였다.

손책이 죽고 손권이 어린 나이에 처음을 일을 통솔(統率)하게 되자 태비(吳夫人)가 이를 걱정하여 장소와 동습(董襲) 등을 인견(引見)하고 강동의 안부를 보전하는 방법에 대해 묻자 동습이 대답하였다. "강동(江東)은 지세가 산천의 견고하고(江東地勢有山川之固), 토역장군의 은덕이 백성에게 있습니다(而討逆明府恩德在民). 토로장군(孫權)이 기업을 이어 크고 작은 관원들을 임용(任用)하며 장소는 뭇 일을 관장(管掌)하고 습과 같은 이들은 발톱 같고 이빨 같은 장수가 되었습니다(襲等為爪牙) 이는 지리가 유리하고 인화가 있는 때이니 만에 하나라도 걱정하실 바가 없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장하게 여겼다. 

파양의 도적 팽호 등의 무리가 수만 명이니 동습(董襲)과 능통, 보즐, 장흠 등이 각자 나누어 토벌(討伐)하였다. 동습이 향하는 곳마다 번번이 격파(擊破)되니 팽호 등은 멀리서도 그의 깃발을 보면 바로 흩어져 달아났다. 10일 만에 모두 평정(平定)하여서 동습은 위월(威越)교위에 배수되었고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했다.

건안 4년(199년), 손책(孫策)이 원술의 잔당을 흡수하여 세력을 키운 여강태수( 廬江太守) 유훈을 치자 동습(董襲)도 이를 따라가 유훈의 거점 환성을 공격했고 또 심양에서 유훈(劉勳)을 격파했으며 또 황조 토벌에도 종군했다.

건안 5년(200년), 손책이 죽고 손권이 아직 어린 나이로 손책(孫策)의 뒤를 잇자 불안하게 여긴 태비에게 장소 등과 함께 불려나가서 강동을 지킬 방안을 상담 받았다. 동습(董襲)은 강동의 험한 지세와, 손견, 손책 2대에 걸친 사업이 있고 장소가 온갖 사무(事務)를 책임지고 자신과 같은 무부(武夫)들이 조아(爪牙)가 되어 지리(地理)와 인화(人和)를 갖추면 걱정할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모두 장하게 여겼다. 

파양(鄱陽)에서 팽호(彭虎) 등이 손씨에 반항하는 자 수만 명을 모으자, 능통, 보즐, 장흠과 함께 각각 토벌(討伐)하러 나갔다. 가는 곳마다 적을 깨뜨렸고 팽호 등은 동습(董襲)의 정기만 보고도 흩어져 달아났으며 열흘 만에 평정(平定)되었다. 월기교위(越騎校尉)가 되었고 편장군(偏將軍)으로 옮겼다.

건안 13년(208년), 손권(孫權)이 황조를 공격했다. 황조는 면구(沔口)에 몽충 두 대를 가로로 놓고, 큰 새끼줄로 엮고 돌로 닻을 삼아 매고 그 위에 1천 명을 두어 쇠뇌를 교대(交代)로 쏘게 하니 화살이 마치 비 오듯 쏟아져 손권 군은 진격(進擊)할 수가 없었다. 

동습(董襲)은 능통과 함께 선봉을 맡아 결사대 1백을 모으고 겹으로 갑옷을 입히고 큰 배를 타고 황조의 몽충으로 돌입(突入)했다. 동습이 친히 나아가 몽충을 엮은 새끼줄을 끊으니 몽충(艨衝)은 이내 물에 휩쓸려갔고 손권 군은 마침내 진격할 수 있었다. 황조는 문을 열고 달아났으나 결국 추격을 받아 베였다. 다음날 손권은 작은 술잔(觴)을 들고 동습(董襲)의 공로를 치하했다.

건안 20년(215년), 조조가 유수구(濡須口)로 쳐들어오자 손권은 동습(董襲)에게 다섯 겹 누각이 있는 배(五樓船]를 맡아 유수구에 두었는데 밤에 갑자기 폭풍이 불어 배가 거의 전복(顚覆)되려 했다. 부하들은 거룻배로 흩어져 달아나기를 원했으나 동습은 완고하게 거절(拒絶)하였고 마침내 그날 밤 배가 망가지고 동습은 죽었다. 손권은 옷을 고쳐 입고 친히 장례식(葬禮式)에 왔으며 유족들에게 후하게 이바지했다.

정사
손책이 회계에 왔을 때 그를 보고 한 눈에 반해 문하적조(門下賊曹)로 삼았으며 음산의 오랜 도적들을 토벌할 때 데리고 가서 동습(董襲)은 자신이 직접 가서 적의 수괴 황룡라와 주발의 목을 베어서 돌아오니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고 곧 군사를 이끌게 되어 양무도위(陽武都尉)가 된다.

199년에 유훈을 치러갈 때 따라가 환현을 정벌하고 심양에서 유훈을 격파(擊破)하고 강하의 황조 토벌에도 따라갔다.

200년에 손권이 손책의 뒤를 잇고 무열황후(武烈皇后) 오씨가 앞일에 대해 묻자 "강동은 산천의 험함과 손견, 손책의 은덕(恩德)이 있으니 장소와 같은 문관에게 안을 맡기고 저 같은 무관(武官)들이 바깥을 지키면 문제가 없을 입니다." 라는 말을 해 무관치고는 식견(識見)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파양의 팽호를 토벌할 때 능통, 보즐, 장흠과 함께 적을 토벌하는데 동습(董襲)의 공이 가장 커 10일 만에 적을 다 토벌하자 위월교위 편장군이 된다.

208년에 손권이 황조를 공격(攻擊)하자 황조가 몽충선 두 개를 가로로 묶어 강을 막고 화살을 날리니 진군이 불가능하고 피해만 커져갔다. 거기서 동습(董襲)은 능통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해 몽충선 내부로 침입(侵入)한 다음 몽충 두 개를 잇는 밧줄을 끊어 버리니 몽충이 표류(漂流)하고 적은 카오스에 빠져 황조는 성문을 열고 달아나다 주살(誅殺)되어 강하 점령에 성공한다. 손권은 이번 황조 토벌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동습(董襲)이라며 칭찬을 했다.

조조가 유수구를 공격하자 손권은 동습(董襲)에게 다섯겹 누각이 있는 배를 맡겨 유수구를 지키게 했는데 그날 태풍이 몰아쳐 배가 전복(顚覆)될 위기에 처하자 다른 병사들은 다 작은 배로 도망치는데 동습만이 장군의 임무를 맡아 이곳에 있으면서 적을 방비(防備)하는데 어찌 버리고 가겠는가! 감히 다시 이처럼 말하는 자는 참수(斬首)하겠다! 라고 말하지만 배는 태풍(颱風)에 전복되어서 동습은 사망한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엄백호가 도망쳐서 손책(孫策)이 안타까워 하고 있을 때 엄백호의 목을 들고와 장수에 임명되며 주태가 손권(孫權)을 지키다가 부상당했을 때 화타(華佗)를 추천해주었다.

손권이 황조를 공격할 때는 감녕 밑에서 능통과 함께 부장이 되었으며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는 한천의 조조군 진지를 습격(襲擊)했다. 합비에도 참가했으며 유수구에서는 서성과 함께 수군을 지휘했지만 폭풍우로 익사(溺死)한다.

손책(孫策)이 강동에 진출했을 때 엄백호(嚴白虎)를 토벌해 손책(孫策)에게 등용되었다. 이후 산적에게 습격당해 손권(孫權)을 지키던 주태(周泰)가 부상하자 화타(華佗)를 추천해 간병(看病)시켰다.

208년, 손권(孫權)이 황조(黄祖)를 공격했을 때는 감녕(甘寧)의 부장으로서 능통(凌統)과 함께 선진에서 결사대(決死隊)를 이끌었다.

적벽 대전에서는 한천에서 조조(曹操)의 진을 습격했고 합비 전투에서 위군과 대치(對峙)했다.

215년, 유수구에서 서성(徐盛)과 함께 수군을 지휘했지만 폭풍우로 선단(船團)이 괴멸(壞滅) 되어 익사했다.

삼국지 동습전
동습(董襲)의 자는 원대(元代)이며 회계(會稽)군 여요(餘姚)현 사람이다. 키는 8척(尺)이고, 무력(武力)은 남들을 능가했다. #주 : 사승(謝承)의 “후한서(後漢書)”에는 동습(董襲)이 지조와 절개가 강개(慷慨)하고 굳세고 강건하며 영열(英烈)하다고 칭했다.

손책이 군에 들어오자 동습이 고천정(高遷亭)에서 영접했는데 손책(孫策)이 그를 보고 훌륭하게 여겨 관서에 도착해서는 문하적조(門下賊曹)로 삼았다. 이때 음산(陰山)의 숙적(宿賊)인 황룡라(黃龍羅), 주발(周勃)이 무리 수 천명을 모으고 있으니 손책이 직접 출정하여 토벌하자 동습(董襲) 자신은 황룡라와 주발의 목을 베고, 승진하여 별부사마(別部司馬)에 배수되었다. 수천 명의 병사를 주고, 양무(揚武) 도위로 승진(昇進)시켰다. 손책을 따라 환(晥)현을 정벌하고 또한 심양(尋陽)에서 유훈(劉勳)을 토벌하였으며 강하(江夏)에서는 황조(黃祖)를 정벌하였다.

손책이 훙어(薨御)하자 손권이 나이가 어려서 처음을 일을 통령(統領)하게 되자 태비(太妃)가 이를 걱정하여 장소(張昭)와 동습(董襲) 등을 인견(引見)하고 강동의 안부를 보전하는 방법에 대해 묻자 동습이 대답하길 “강동은 지세가 산천의 견고함이 있고, 돌아가신 토역(討逆)장군의 은덕이 백성에게 있습니다. 토로(討虜)장군이 기업을 이어 크고 작은 관원들을 임용하며 장소는 뭇 일을 관장하고, 저 동습 등은 조아(爪牙)같은 장수가 되니 이는 지리(地利)와 인화(人和)의 시기이니 걱정하실 바가 만에 하나도 없습니다.”라 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장하게 여겼다.

파양(鄱陽)의 적 팽호(彭虎) 등의 무리가 수 만 명이니 동습(董襲)과 능통(凌統), 보즐(步騭), 장흠(蔣欽)등이 각자 따로 나누어 토벌(討伐)하였다. 동습이 향하는 곳은 번번이 격파되니 팽호 등은 그 깃발을 멀리서 보아도 바로 흩어져 도망(逃亡)치는지라 10일만에 모두 평정하여서 위월(威越)교위에 배수되었다고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했다.

건안(建安) 13년(208), 손권이 황조를 토벌했다. 황조가 두 척의 몽충선(蒙衝船, 혹은 몽충艨衝)을 가로로 해서 면구(沔口)을 끼고 수비(守備)하는데 종려나무로 된 큰 고삐를 돌에 매어 고정(固定)시키고 위로는 천여 명이 있어 쇠뇌를 교차(交叉)하여 쏘니 날라드는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서 군대가 전진할 수 없었다. 동습이 능통과 함께 선봉이 되어 각자가 결사대 1백 명을 거느렸는데 사람마다 갑옷을 두벌 걸치고 큰 전함(舸船)을 타고, 몽충선의 내부로 돌격하였다. 동습이 몸소 칼로 양쪽의 고삐를 끊어버리자 몽충선은 이에 표류(漂流)하니 대병이 마침내 진격(進擊)하였다. 황조가 바로 성문을 열고 달아나자 병사들이 추격하여 참수(斬首)하였다. 다음날 큰 연회를 열고 손권이 잔을 들어 동습을 재촉하면서 “금일의 모임은 (董襲이) 고삐를 끊은 공이다”고 했다.

조공(曹公)이 유수(濡須)로 출정하자 동습(董襲)이 손권을 따라 갔는데 동습을 시켜 5척의 누선(樓船)을 감독하여 유수구에 진주(進走)하도록 했다. 밤에 창졸간에 폭풍이 불어 5척의 누선이 전복(顚覆)되자 좌우의 병사들이 흩어져 큰 배로 달아나면서 동습도 나오도록 청하였다. 동습이 노하여 말하길 “장군(將軍)의 임무를 맡아 이곳에 있으면서 적을 방비하는데 어찌 버리고 가겠는가! 감히 다시 이처럼 말하는 자는 참수(斬首)하겠다.”고 했다. 이에 감히 간여(干與)하는 자가 없었다. 그날 밤 배가 부서져서 동습(董襲)이 죽었다. 손권이 상복으로 갈아입고 염하는데 임하였고 부의(賻儀)를 후하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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