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岳岩漢字屋

甲辰年 새해 하시는 일들이 日就月將하시고 乘勝長驅.하시고 萬事亨通 하세요!!!

반응형

젊은이들이 읽으면 쉽게 타락할 수 있다고 보는 ‘홍루몽’은 정말 청춘문학인가

图片信息 红楼梦反映了什么样的社会背景?


대만작가 장훈(蔣勛)은 '홍루몽'이 청춘문학이라고 했다. 신판 '홍루몽(紅樓夢)' 드라마의 제작자(製作者)들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판 '홍루몽(紅樓夢)' 드라마에서 주요연기자는 대부분 미성년자로 청춘우상극(靑春偶像劇)의 노선을 가고 있다. 그들의 부모(父母)는 완전히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다. 아마도 이들 조연(助演)을 통하여 주요배역의 '청춘(靑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친구(親舊)들 중에서도 이러한 견해(見解)를 여러 번 얘기한 사람이 있다. 

'홍루몽(紅樓夢)'은 청춘문학(靑春文學)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과거의 '홍루몽(紅樓夢)'에 대한 평가와 약간은 다른 것 같다. 

과거에는 일반적으로 젊은이들이 '홍루몽(紅樓夢)'을 읽는 것을 권장(勸獎)하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홍루몽(紅樓夢)'을 읽으면 쉽게 타락(墮落)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다시 청춘문학(靑春文學)이라고 선전(宣傳)하다니 이는 청소년시청자(靑少年視聽者)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目的)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홍루몽(紅樓夢)'이 청춘문학(靑春文學)인가 아닌가? 이 문제는 정확(正確)하게 대답하기는 어렵다. 핵심(核心)은 사람들이 "청춘문학(靑春文學)"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렸다. 만일 청춘을 묘사대상(描寫對象)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면 '홍루몽(紅樓夢)'은 청춘문학(靑春文學)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청춘문학(靑春文學)"을 청소년작가의 문학작품 예를 들어 한한, 곽경명, 합불여생과 같은 류라면 '홍루몽(紅樓夢)'은 청춘문학(靑春文學)이 확실히 아니다. 만일 "청춘문학(靑春文學)"을 청소년이 읽는 것이라고 한다면 '홍루몽'은 청춘문학(靑春文學)이라고 하기 힘들다. '홍루몽(紅樓夢)'은 본질적으로 중노년인(中老年人)이 쓴 청춘에 관한 소설이다. 그 성격을 세익스피어(莎士比亚)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괴테(歌德)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다. 당연히 중노년인(中老年人)도 젊은이들이 읽는 책을 쓸 수 있다. 심지어 아동(兒童)을 위한 작품, 동화이야기도 쓸 수 있다. 

동화이야기는 아동들이 쓴 이야기가 아니라 성년인(成年人)이 쓴 아동들이 읽을거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홍루몽(紅樓夢)'은 중노년인(中老年人)이 쓴 청춘이야기이다. 여기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만일 '홍루몽(紅樓夢)'을 청소년(靑少年)이 읽을 것이라고 한다면 적합(適合)하지는 않다. 이러한 의미(意味)에 있어서 필자는 '홍루몽(紅樓夢)'이 청춘에 관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청춘문학(靑春文學)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필자는 '홍루몽(紅樓夢)'을 아주 어려서 읽었다. 개략 가보옥(贾宝玉)과 비슷한 나이일 때 '홍루몽(紅樓夢)'을 읽어보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그때 그저 어른들에게서 그 책이 유명(有名)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읽은 것이지 읽고 난 후에도 흥미(興味)를 느낄 수가 없었고 왜 그런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한번 훑어본 정도(程度)였다. 

본인이 소년시기(少年時期)에 '홍루몽(紅樓夢)'을 읽은 것이 얼마나 인상에 남아있는지는 지금은 찾아볼 수도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홍루몽(紅樓夢)'을 읽는다면 아마도 같은 결과(結果)일 것이다. 그러므로 '홍루몽(紅樓夢)'에 묘사(描寫)한 것이 청춘이야기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청소년이 읽을 책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홍루몽(紅樓夢)'의 매력(魅力)에 빠져든다. 이것은 '홍루몽(紅樓夢)'의 독자가 청소년(靑少年)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증명(證明)해준다. 

'홍루몽(紅樓夢)'은 중노년인(中老年人)의 청춘에 대한 회고(回顧)와 이해(理解)이다. 그중 많은 것들은 청소년당시의 진실 된 이해가 아니라 중노년작가(中老年作家)가 여러 해 이후에 소설 속의 청소년(靑少年)에게 억지로 가져다 부친 것이다. 내 스스로 청소년시대(靑少年時代)를 되돌아보면 가물가물한 일들이 많다. 나는 심지어 상상(想像)에 의존하여 스스로의 청소년시대(靑少年時代)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사실상 그 가물가물한 이야기 속의 인물(人物)은 필자가 소년시대(少年時代)에는 얘기해 본 적도 없는 것이지만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며 대부분은 스스로의 상상(想像)일 뿐이다. 당시의 진실 된 상황은 이미 모호(模糊)해졌다.

예를 들어 '홍루몽(紅樓夢)'의 유불도(儒佛道)에 관한 경향을 보면 청소년에 있어서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것들이다. 하물며 그것을 자신의 생활에 관철(觀徹)하기는 더욱 어렵다. 사실 '홍루몽(紅樓夢)'에는 석양의 기운이 가득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청춘인물(靑春人物)이지만 실제로는 생명력(生命力)이 날로 허약(虛弱)해지고 있다. 

대옥장화(黛玉葬花)를 예로 들면 어린아이가 이런 놀이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대옥장화에서 탄식(歎息)하는 생명의 무상함은 어린아이의 진실(眞實)된 마음상태로 보기 어렵다. 더욱 합리적(合理的)인 해석이라면 그것은 그저 중노년작가(中老年作家)의 이 어린아이놀이에 대한 이해일 뿐이다. 비록 이 사건이 정말로 작자가 겪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나중에 소설 쓸 때처럼 느낀 것은 아닐 것이다. '홍루몽'에서 묘사(描寫)하고 있는 것은 부잣집자녀, 고관대작집자녀(高官大爵家子女)의 부패한 생활이다. 이는 작자가 어른이 된 후에 느낀 것이고 개인주의의 도피(逃避)일 뿐이다. 

청소년이 사회에 들어가기 전에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질(素質)과 심리에 대하여 '홍루몽(紅樓夢)'은 거의 언급(言及)하지 않고 있다. 그저 사회에 진입(進入)하는데 대한 두려움과 비웃음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홍루몽(紅樓夢)'은 그저 석양의 기운이 짙은 작가가 묘사한 상상중의 무료(無聊)한 청춘이다. 

'홍루몽(紅樓夢)'의 작자는 '비록 늙어서 마굿간에 누웠지만 뜻은 천리를 간다"는 기백이 없다. 그가 보기에 부패(腐敗)는 막 피기 시작한 꽃에서부터 이미 시작된다. 그리하여 '홍루몽(紅樓夢)'은 청소년독자에게 그다지 의미(意味)가 없다. 청소년이 '홍루몽(紅樓夢)'을 읽어서 그 사상의 영향(影響)을 받는다면 나중에 사회에 진출(進出)하는데 좋은 점이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홍루몽(紅樓夢)'은 중노년인(中老年人)의 읽을거리가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자신이 스스로 표현(表現)할 수 없는 인생(人生)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중노년인(中老年人)은 '홍루몽(紅樓夢)'을 통하여 스스로를 해소(解消)한다. 

'홍루몽(紅樓夢)'은 생활에서 청춘시대(靑春時代)가 바로 부패의 시작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늙어서 아무런 성공(成功)을 거두지 못한 것이 정상적(正常的)이라는 것이다. 중노년인(中老年人)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사람에 있어서 생명무상(生命無常)의 느낌은 청소년시기에 노력하고 분투(奮鬪)하던 때보다 강하기 마련이다. 사망(死亡)에 대하여 개인주의에서 출발(出發)하면 성공하고 말고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홍루몽(紅樓夢)'은 마치 이들 중노년인(中老年人)들의 공허한 정신을 의탁(依託)할 수 있는 곳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홍루몽(紅樓夢)'을 청춘문학(靑春文學)이라고 말하는 것은 필자가 보기에 그저 하나의 전제(前提)하에서만 성립된다. 그것은 바로 '홍루몽(紅樓夢)'이 묘사(描寫)한 것이 청춘이야기라는 것이다. 다른 여러 가지 의미(意味)에서는 '홍루몽(紅樓夢)'이 청춘문학(靑春文學)이 아니다. 그저 중노년인(中老年人)이 새로 끼워 맞춘 청춘의 조각들이다. 그리고 모든 조각에는 중노년인(中老年人)의 가치평가(價値評價)가 붙어 있다. 신판 '홍루몽(紅樓夢)'이 많은 비난(非難)을 받는 이유 중 일부분은 바로 '홍루몽(紅樓夢)'이 묘사한 청춘과 청춘문학(靑春文學)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 때문이다.

현재 사회에서는 '홍루몽(紅樓夢)'이 청춘문학(靑春文學)이라고 강조(强調)한다. 이는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 현대사회(現代社會)는 여러 측면에서 청춘을 강조(强調)하고 청춘이 모든 가치를 초월(超越)한다. 많은 사람들은 늙었다는 것을 통탄(痛嘆)하고 젊음만이 사회의 유일하게 가치(價値)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서방사회 정치가(政治家)들의 경선에서 젊음은 아주 중요한 장점중 하나이다. 젊음에 대한 태도는 실제로 비정상적(非正常的)일 정도로 경도되어 있다. 젊은이들의 욕망은 쉽게 확대될 수 있다. 중노년인(中老年人)은 비교적 자제(自制)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청춘을 가장 고귀(高貴)한 가치로 삼는다는 것은 실제로 상품사회(商品社會)가 대규모로 상품을 판매(販賣)하는데 문화적인 분위기(雰圍氣)를 조성하는 것이다. 

욕망(欲望)의 자극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아동과 청소년은 상품사회에서 가장 쉽게 파고들 수 있는 목표계층(目標階層)이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노인을 존경(尊敬)하는 원칙으로 모든 젊은이들을 압박(壓迫)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다만 지나치게 젊음을 강조하고 늙음을 폄하(貶下)하는 것도 비정상적이다. 

'홍루몽(紅樓夢)'을 청춘문학(靑春文學)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시류에 영합하는 것(媚俗)이다. 영합(迎合)하는 대상은 바로 당금 상품사회(商品社會)에서 좋지 않은 뜻을 품고 끝도 없이 끌어올리는 청춘의 가치(價値)이다.

반응형
반응형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