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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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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의 4대 신군(新軍)이 장쩌민파가 점거하고 있던 정치국상위, 정치국위원의 권력국면을 타파한 후 중국 권력투쟁 속에서의 향후 전망은 어떻게 될까?

중국건국이후 최고의 권력투쟁(태자당and상해방vs공청당and무당파)

글: 김언(金言)
중공19대이후 시진핑의 "지강신군(之江新軍)", "민강신군(閩江新軍)", "포강신군(浦江新軍)" 및 "신서북군(新西北軍)"의 4대 신군(新軍)이 지방에서 중앙까지의 중요요지를 점령했다. 그리하여 장쩌민파가 점거하고 있던 정치국상위, 정치국위원의 권력국면을 타파했다.

외부에서 '지강신군'의 일원으로 불리던 저장성위상위, 항저우시위서기인 저우장용(周江勇)이 돌연 낙마했다. 이 소식은 마치 전당강의 밀물처럼 일석격기천층랑(一石激起千層浪)을 불러왔다고 할 수 있고, 범상치가 않다. 과거 '지강신군'은 계속하여 비황등달(飛黃騰達)하고, 쾌속승진하는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현재 '지강신군'의 한 별이 돌연 떨어졌다. 외부의 구경꾼들은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는 '대수충료용왕묘(大水沖了龍王廟)'인가 아니면 대의멸친, 닭을 잡아 원숭이에게 보여주려는 것인가?

1. '지강신군'이란?
소위 '지강'은 강물이 구비구비 흐르는 것이 '갈지자(之)'같다고 하여 이름붙여졌다. 즉 전당강(錢塘江)을 이르는 말이고, 저장성(浙江省)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현임 중공총서기 시진핑은 저장성위서기를 5년간이나 지냈다. 그는 당시 '저장일보'의 1면에 '지강신어(之江新語)'라는 제목의 시정평론을 썼다. 이 때 썼던 새로운 어프로치,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논술은 이미 시진핑의 '신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의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19대에서 정식으로 당장에 쓰여지고, 최근에는 다시 중국 각급학교의 학생들의 필수교재가 되었다.

저장은 시진핑이 힘을 기른 곳이고, 옛날의 동료, 부하, 심복은 지금 대부분 이미 관직이 올라서 당과 국가의 요직을 맡고 있다. 그들은 속속 중국 정계의 신흥 정치역량으로 성장했다. 그리하여 매체에서는 그들을 '지강신군'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광의의 '지강신군'에는 민강구부(閩江舊部, 푸젠방), 신서북군(샨시방), 포강신군(상하이방), 칭화계통(동창방), 후궁파벌(산둥방)등등을 포함한다. 통칭하여 '시가쥔(習家軍)'이라고 부른다. 이는 중공의 전 당수인 장쩌민의 장쩌민파와 후진타오를 위시한 공청단파와 구분된다.

당금 중국대륙의 관료사회에서는 사람들마다 모두 "사대철(四大鐵, 쇠처럼 단단한 관계를 가리킴)"을 알고 있다. 즉, "함께 공부했고(一起同過窓), 함께 시골로 쫓겨났고(一起下過鄕), 함께 계집질을 하고(一起嫖過娼), 함께 뇌물을 나눠먹은 경우(一起分過贓)"이다. 현임 국가부주석 왕치산은 연안 삽대(揷隊)시절 함께 량자허(梁家河)에 쫓겨내려온 지청(知靑, 지식청년) 시진핑과 깊은 우의를 쌓았다; 시진핑이 허베이 정딩현위서기로 있을 때, 이웃한 우지현위서기는 바로 현임 전인대상무위원장인 리잔슈이다; 시진핑의 옛 동창 친구로는 현임 국무원 부총리 류허와 중앙조직부장 천시가 있다.

2. 지강신군의 굴기
모두 알고 있다시피, 지강신군은 18대에 시진핑이 중공총서기를 맡은 이래로, 두드러지고 두각을 나타냈따. 19대이후에는 지강신군이 공성약지하면서 전면적으로 굴기하여 지방과 중앙의 절대다수의 중요부서를 장악한다. 아래에 그 사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1) 예비 '황태자' 천민얼(陳敏爾)
1960년 9월생, 저장 주지사람. 현임 중앙정치국위원, 충칭시위서기. 일찌기 저장일보사장, 저장성위상위, 부성장, 선전부장, 구이저우성위서기, 성장을 맡은 바 있다. <지강신어>을 주관했던 사람으로서 짧은 2년만에 파격적으로 지방의 '일인자'에 올랐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후진타오가 격대지정한 쑨정차이가 낙마한 후, 천민얼은 중국정계의 다크호스가 되었고, 시진핑에 의해 새로운 '황태자'에 올랐다고 한다.

(2) 최대도시의 '장문인' 리창(李强)
1959년 7월생. 저장 뤼안사람. 현임 중앙정치국위원, 상하이시위서기. 노동자출신의 리창은 저장 토박이이다. 또한 시진핑이 저장의 성위서기로 있을 때 가까운 심복이었다. 원저우시위서기, 저장성위 비서장, 성위부서기 겸 정법위서기, 성장을 지냈다. 장쑤성위서기로 있을 때 정치국위원이 된 후, 시진핑에 의해 중국최대도시 상하이로 옮겨가서 장쩌민의 본거지를 넘겨받았다.

(3) 우한폐렴의 '구조대장' 잉용(應勇)
1957년 11월생, 저장 셴쥐사람. 현임 후베이성위서기. 전후로 저장성 공안청 부청장, 성 기율검사위 부서기, 성 감찰청 청장, 성 고급법원 원장, 상하이시 고급법원 원장, 조직부장, 상하이시위부서기, 시장등을 지냈다. 2020년초, 왕치산의 옛부하인 장차오량(蔣超良)이 우한폐렴에 대한 대응에 실패하면서 면직되자, 잉용이 상하이에서 후베이로 전보되어 우한폐렴의 구조대장을 맡는다.

4. 대내총관 딩쉐샹(丁薛祥)
1962년 9월생. 장쑤 난통 사람. 현임 중앙정치국위원, 중앙서기처서기, 중앙판공청주임 겸 국가주석판공청주임. 각각 상하이시위 부비서장, 판공청 주임, 상하이시위 상위, 비서장, 정법위서기를 지냈다. 후진타오의 '대관가(大管家)' 링지화가 물러난 후, 시진핑은 자신이 상하이에서 데리고 있던 비서실장 딩쉐샹을 급히 중남해로 부른다. 그리고 자신의 곁을 지키는 심복으로 삼는다.

5. 철중지철(鐵中之鐵) 천시(陳希)
1953년 9월생, 푸젠 푸텐 사람. 현임 중앙정치국위원, 중앙서기처서기, 중앙조직부 부장, 중앙당교 교장. 시진핑과는 같이 청화대학 농공병 학생이었고, 시진핑은 천시가 청화대학에 있을 때 입당소개인이다.

6. '시진핑사상'의 추진자 황쿤밍(黃坤明)
1956년 11월생, 푸젠 샹항사람. 현임 중앙정치국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선전부 부장, 시진핑은 푸젠에서 17년간 임직했다. 황쿤밍도 마찬가지로 푸젠에서 14년간 재직한다. 시진핑보다 먼저 저장으로 옮겨왔고, 역시 <지강신어>의 창시자중 하나이다. '삼조제사' 왕후닝의 기획하에, 황쿤밍도 '중국몽'과 '신시대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의 주제로 선전하는 구체적인 실무자이며 주요 추진자이다.

7. '소국무원' 주관 허리펑(何立峰)
1955년 2월생. 광둥 싱닝 사람. 현임 중국정협부주석. 국가발전과개혁위원회 주임. 허리펑은 샤먼대학 재정학과를 졸업했고, 재정학계의 태두인 덩쯔지(鄧子基)를 스승으로 모셨다. 2007년, 당시 상하이시위서기이던 시진핑은 덩쯔지의 교편60주년, 85세 생일을 맞아 덩쯔지에게 축하전문을 보내기도 했다. 19대이후, 허리펑은 '소국무원'이라고 불리는 국가발개위를 맡는다.

8. 군중 막료장 종샤오쥔(鍾紹軍)
1968년 10월 19일생. 저장 카이화사람. 현임 인민해방군 중장, 중앙군사위판공청주임 겸 군사위주석판공실주임. 시진핑의 군대내에서의 '막료장'이다. 위키백과의 소개에 따르면, 종샤오쥔은 저장, 상하이와 중앙에서 일할 때의 비서였다. 그리고 보도에 따르면, 종샤오쥔은 중앙군사위 판공청에 낙하산으로 내려온 후, 쉬차이허우의 범죄자료를 모아서 시진핑에게 보고했ㄷ고 한다. 그는 군대내의 거물 쉬차이허우를 끌어내리는데 큰 공을 세웠다.

9. 중공의 칼잡이 천이신(陳一新)
1959년 9월 1일생. 저장 타이슌 사람. 저장에 있는 기간동안, 천이신은 시진핑에 의해 저장성위 부비서장에 발탁된다. 그리고 성위정책연구실 주임을 겸임했고, 직접 시진핑의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정법계통에서는 일해본 적이 없는데, 시진핑은 그를 과거 저우용캉이 장악하고 있던 중앙정법위의 비서장으로 보냈다. 그리고 '타흑제악'과 '청리문호'를 맡긴다. 시진핑이 미래 '칼잡이'를 장악하는 예비군이다.

10. 경사의 구문제독 왕샤오홍(王小洪)
1957년 7월생. 푸젠 푸저우 사람. 현임 공안부의 일상업무담당 부부장. 공안부 특근국장. 시진핑이 푸저우시위서기로 있을 때, 왕샤오홍은 푸저우시 공안국장이었고 시진핑의 안전과 호위를 책임졌다. 시진핑이 출장가서 딸 시밍저를 아무도 돌봐줄 수 없을 때, 왕샤오홍의 집에 머물렀다. 왕샤오홍은 시진핑의 확실한 심복이다. 시진핑이 전 중앙610의 두목겸 공안부 부부장 리동셩, 부부장 멍홍웨이와 쑨리쥔을 끌어내린 후, 왕샤오홍은 4년동안 3번이나 승진을 거듭하였다. 허난에서 베이징으로 왔고, 경사 중지의 '구문제독'과 '어전시위'를 맡았다

그외에 시자쥔의 구성원으로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군사위부주석 장여우샤(張又俠)
사법부장 탕이쥔(唐一軍)
중앙연락부장 송타오(宋濤)
중앙기율검사위상무부서기 양샤오두(楊曉渡)
중앙기율검사위주중앙판공청기검조장 슈궈쩡(舒國增)
중앙광보전시총대대장 겸 총편집 션하이슝(愼海雄)
국신판주임 쉬린(徐麟)
허베이성위서기 왕동펑(王東峰)
지린성위서기 징쥔하이(景俊海)
하이난성위서기 션샤오밍(沈曉明)
전 상무부장 종샨(鍾山)
전 지린성위서기 바인차오루(巴音朝魯)
전 후난성위서기 두자하오(杜家毫)
전 하이난성위서기 류쓰구이(劉賜貴)
전 윈난성위서기 천하오(陳豪) 등등

3. 지강신군의 쇠퇴
모두 보는 바와 같이, 이들 '시자쥔'은 기본적으로 모두 문혁때 '조반유리(造反有理)', '투사비수(鬪私批修)', '문공무위(文攻武衛)'를 외치던 지청들이다. 이들은 일관되게 중공의 극좌사상의 세뇌를 받았고, 나라를 다스릴 능력은 없다.

18대이래, 방파가 난립하고, 서로를 속고 속이며, 명쟁암투하고, 도광검영하는 중국정계에서 자리잡기 위하여, 그리고 대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쩌민파로부터 당정군의 대권을 빼앗아 오기 위하여, 시진핑은 왕치산에 의지하여 반부패의 명의로 '호랑이와 파리를 모조리 때려잡았다' 내부정치의 대숙청을 통해서 보시라이, 저우용캉, 궈보슝, 쉬차이허우, 링지화와 쑨정차이등 정적과 당내의 반대파를 제거한 후, 자신의 심복과 옛부하들로 그 빈자리를 채웠다. 이를 통해 '시핵심'의 절대권위를 확보한다. 다만 전면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의 '시자쥔'은 정치에서 제대로 일을 해내지 못하여 사람들을 크게 실망시킨다.

(1) 신단에서 굴러떨어진 저우장용
8월 21일 오후, <항저우일보>의 1면에는 저우장용이 전날 회의를 주재하였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날 저녁, <항저우일보>는 돌연 시위에서 급히 전해져온 저우장용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다는 결정을 보도한다. 그리고 시진핑의 저장, 항저우에 대한 중요지시에 대한 소식도 전한다.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저우장용의 낙마는 마윈의 알리바바 산하의 앤트파이낸셜과 관련이 있다. 다만 8월 22일 심야, 앤트파이낸셜은 성명을 발표하여, 인터넷에 떠도는 관련인원이 '앤트파이낸셜에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공시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저장의 관료사회에서는 한때 그가 남방의 어느 성으로 가서 성장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그후에도 옮겨가지 못했다. 이렇다는 것은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후 저우장용이 부하들에게 당부했다는 말이 인터넷에 널리 퍼진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시대가 너를 버릴 때는 '안녕'이라는 말도 할 수 없다. 지금 되돌아보면 이 말은 그 스스로에 대한 조소인 것으로 보인다.

2. 정저우의 수재로 문책받을 러우양셩(樓陽生)과 쉬리이(徐立毅)
8월 2일, 국무원은 조사팀을 구성했다고 발표한다. 허난의 7.20특대수재의 책임추궁을 위한 조사팀이다. 이는 응급관리부가 성립한 이래 최초의 문책활동이다. 총리 리커창은 허난의 수재지구를 시찰할 때, 독직행위에 대하여 끝까지 추궁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수재에 대하여 사람들은 '천재라기보다 인재이다'라고 본다. 그러나, 중국당국이 조사팀을 구성한다고 발표한 그날, 허난성정부는 기자회견을 열었고, 허난성과 정저우시의 두 '일인자'인 러우양셩과 쉬리이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러우양셩, 쉬리이는 모두 시진핑의 옛 부하들이다. 인민논단망의 소개에 따르면, 금년 5월에 산시성위서기에서 허난성위서기로 옮겨온 러우양셩은 저장성에서 20여년간 근무했다. 시진핑이 저장을 떠날 때, 러우양성은 리쉐이시위서기를 맡고 있었다. 쉬리이도 저장에서 30여년간 관료로 일했고 마찬가지로 시진핑의 옛부하이다. 그는 2019년 6월 항저우시장에서 정저우시위서기로 옮겨왔다. '체면공사'를 벌이기 좋아해서 정저우사람들은 그를 '화단서기(花壇書記)'라고 불렀다.

3. 미국의 제재를 받은 홍콩마카오판공실의 우두머리 샤바오룽(夏寶龍)
샤바오룽은 저장성위부서기 겸 정법위서기를 역임했고, 당시 저장성위서기였던 시진핑의 바로 아래에서 일했다. 샤바오룽은 저장성장으로 1년도 되지 않아 저장성위서기로 발탁된다. 보도에 따르면, 그가 저장에서 재직하는 기간동안 2,000여개의 교회에 있는 십자가를 철거했다고 한다.

2020년 2월, 홍콩마카오업무는 해본 적이 없고 이미 전국정협 부주석의 직을 맡고 있던 샤바오룽은 시진핑에 의해 다시 기용되어 국무원홍콩마카오판공실주임직을 맡는다. 동시에 중앙홍콩마카오공작영도소조 상무부조장도 맡는다. 부임한지 1년여만에 샤바오룽은 홍콩에서 극력 홍콩판국가안보법을 추진하고, 홍콩의 선거제도를 개혁했다. 홍콩의 '일국양제'를 파괴하고, '홍콩자치'를 훼손하여, 샤바오룽은 미국정부의 제재명단인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최근 외자가 중국과 홍콩을 대거 빠져나가자, 중국의 전인대는 부득이 홍콩의 <반외국제재법>의 표결을 중지시킨다.

4. 차이치(蔡奇)의 베이징 '삼파화(三把火)'
이런 말이 있다. 신관상임삼파화(新官上任三把火). 새로 관리가 부임하면 3가지 일을 벌인다. 중공19대이후 시진핑의 '지강신군' '민강구부'는 앞다투어 자리를 차지한다. 다만 베이징의 시위서기에 낙하산으로 내려간 차이치는 주군을 보호하려는 심리가 너무 강하고, 하루빨리 공을 세우고 싶어서 자신의 정치적 실적을 세우는데 주력한다. 그러나 일은 마음먹은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오히려 욕속부달로 스스로 다치고 만다.

차이치는 베이징의 푸른 하늘을 회복하고, 베이징의 스모그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시진핑이 자신에게 맡기고 시급한 임무라고 여겼다. 그러나, 다싱의 큰 화재는 차이치를 낭패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백성의 사활은 돌보지 않고, 긴급명령을 하달하여, 전체 도시의 '저급인구'를 쫓아낸다. 한겨울에 10만의 농민공과 자녀들은 임차한 방에서 길거리로 쫓겨났고, 국내외를 깜짝 놀라게 만든다.

이와 동시에, 베이징의 하이덴구에서는 광고판을 철거한다. 소위 '수평선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발이 강력했고, 비난을 받았으며, 결국은 중단하여야 했다.

더더욱 차이치를 난감하게 만든 것은 베이징에서 거창하게 벌인 '석탄을 LNG로 교체하는' 작업이었다. 이는 대기환경을 개선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베이징의 스모그는 더 심해졌고, 결국은 아무런 효과도 없이 끝이 났다.

5. 류치(劉奇)의 장시(江西) '창관운동(搶棺運動)'
2018년 7월, 장시성위서기 겸 성장 류치는 간저우에서 회의를 소집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장례개혁은 천년간 내려온 구습을 개혁하는 것이고, 새로운 기풍을 만드는 사회개혁이다. 이는 국가와 백성들에게 이롭고 자손후대에 이로운 좋은 일이며 실질적인 일이다. 공은 당대의 것이지만, 이익은 천추만대의 것이다.

명령이 내려지자 바로 집행된다. 샤바오룽의 '십자가철거'와 마찬가지로, '지강신군' 류치의 명령하에, 각지의 관리들과 집법기관은 모조리 출동하여 옛날 일본군이 마을로 들어왔을 때처럼 무리를 지어 집을 쳐들어가서 관만 보이면 모조리 빼앗는다. 그후에 집중적으로 파괴한다. 많은 노인들은 두 눈 멀거니 뜨고 자신이 들어갈 관을 빼앗아가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저 가슴을 치고 하늘과 땅을 보며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같은 대성통곡만 남았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 중에는 죽어라 반항하기도 했고, 관 속에 들어가서 관과 함께 생사를 하겠다고 버텼다. 그 모습은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더욱 놀랍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은 점은 이미 사망한 노인이 아직 안장되기도 전에 제복을 입은 집법인원이 강제로 관을 열어서 시신을 땅바닥에 버리고, 관을 빼앗아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노인은 시신이 이미 안장되었는데, 현지정부관리가 발견한 후,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열어 시신을 끌어냈다. 인간성이라고는 보이지 않았고, 사망자의 친족들이 보는 앞에서 화염분사기로 시신을 불태우고나서 그대로 떠나버렸다.

장시에서 관을 빼앗고 조상묘를 파헤치고, 시신을 불태우는 야만적인 폭행이 드러난 후, 사회여론은 일방적으로 비난했다. 마치 장제스가 옛날 장시 여산에서 정확하게 예언한 것처럼, "만일 토비를 없애지 않으면, 우리모두 살아도 서 있을 곳이 없고, 죽어도 묻힐 곳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조상의 묘조차도 보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자손대대로 망국노가 되고, 다른 사람의 노비 소, 말이 될 것이다."

결론
최근에 어떤 매체에서 연막탄을 뿌렸다. 왕양이 시진핑을 대체할 것이라는 것이다. 예상이 어렵지 않다. 시진핑은 20대에서 당연히 연임할 뿐아니라, 20대 이전에 모든 정치적 적수와 권력에 대한 도전을 타격할 것이다. 20대에는 모조리 시자쥔이 장악할 것이다. 다만 이런 지강신군은 정치적 실적에서 상대방을 압도할 수 없다. 그리고 나무가 크면 바람을 많이 맞는다. 그리고 성극필쇠(盛極必衰)이다. 여러 반시진핑세력의 반발과 저항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시진핑은 부득이하게 어쩔 수 없디 대내외적으로 엄청난 압박과 너죽고 나살기식의 투쟁가운데 기존의 저장관료의 기록을 깨고, 항저우의 시위서기를 낙마시켜서, 중공20대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동시에 이는 미끼를 던져 호랑이를 끌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어떤 개인이든지 사영기업과 부정당한 정상관계를 맺어, 그의 눈앞에서 세력을 키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중에 집정의 불안정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고, 시한폭탄을 묻어두는 것이나 같기 때문이다. 자신의 적계라 하더라도 일단 불충하고 다른 마음을 품거나, 혹은 반대파에게 무기를 건네주어 자신의 진영을 어지럽히는 경우에는 마찬가지로 엄히 처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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