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효천(章曉泉) 친일매국노 겸 소련 KGB의 간첩이라는 이중매국신분을 가진 사람이 중국에서 한때 가장 권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상상을 초월하여 죽은 사람을 부친으로 삼고, 매번 청명절이 되면 그는 썰물의 털게처럼 사람들의 시야 속에 드러난다. 그는 바로 중공 전총서기 장쩌민이다. 매년 청명절은 장쩌민에게 가장 괴로운 날이다. 통상적인 집안이라면 자신의 조상의 묘로 가서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겠지만, 장쩌민은 다르다. 그는 감히 자신의 친부친 장스쥔(江世俊)(일명 장관첸(江冠千))에게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굳이 숙부 장상칭(江上靑)의 위퍠를 가져와서 절을 한다. 중공의 당매체에서는 이에 대하여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네티즌들은 관련뉴스의 아래에 댓글을 달아서 놀린다: 장쩌민 부자는 매국노출신이라는 것을 전인류가 다 알고 있다. 그가 자살해도 소용이 없다. 중국의 역사학자 뤼쟈핑(呂加平)은 장쩌민의 "이간이가(二奸二假)" 신분을 폭로했다가 보복을 받아 지금은 감옥에 갇혀 있다. 뤼쟈핑의 부인 및 자녀는 여러번 중국국가안전부의 위협,협박을 받았다. 당국은 장쩌민의 매국노(漢奸)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온갖 짓을 다 하고 있다. 1940년 한간 왕정위의 친일정부가 성립된다. 장쩌민이 생부인 장스쥔은 장관첸으로 개명한 후, 왕정위에게 투신한다. 나중에 남경친일정부의 선전부 부부장 겸 사론위원회 주임위원이 된다. 장스쥔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팔아서 매국노가 되었다. 1943년 장쩌민의 부친의 안배하에 '남경중앙대학'에 입학하는데 당시 나이 17살이다. 그후 친일정부의 스파이교육을 받는다. 장쩌민이 1943년 남경중앙대학 공과대학 기전과에서 공부할 대, 남경은 이미 일본군에 점령되어 있었다. 당시의 '남경중앙대학'은 매국노 왕정위친일정부가 만든 대학이었고, 원래의 남경중앙대학은 중화민국정부를 따라 중경으로 옮겨가 있었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간첩총두목인 육군대장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가 신임하는 부하인 딩모촌(丁默村)(일명 丁默根)은 상해의 Jessfield Road(極司菲爾路) 76호에 친일특무본부를 둔다. 정묵촌은 남경중앙대학에 '청년간부훈련반'을 만들어 전문적으로 스파이교육을 시킨다. '청년간부훈련반'은 모두 4기가 있었는데, 장스쥔은 아들이 나중에 승승장구할 수 있도록 장쩌민을 제4기 특무훈련반에 들어가게 한다. <장쩌민 그 사람>이라는 책에 따르면, 장쩌민은 장씨가족의 장방장손(長房長孫, 큰집의 큰아들)이다. 그의 부친 장스쥔에게는 형제자매 7명이 있었다. 두 사람은 요절했으며, 장스쥔이 첫째였다. 장상칭(江上靑)은 일명 장스허우(江世侯)인데 여섯째이다. 1928년 17살의 나이로 장상칭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39년 28살때, 쏟아지는 총탄에 맞아 죽는다. 장쩌민이 득세한 후, 수중의 권력을 이용하여 급히 각양각색의 회고록, 전기등을 내놓아 자신을 표백한다. 많은 면을 할애하여 반복적으로 자신은 13살때 이미 '열사' 장상칭의 양자로 들어갔다고 한다. 장쩌민이 외국인 한 명에게 쓰게 한 <장쩌민전>에서 장쩌민보다 15살이 많은 숙부 장상칭에 대하여 많이 적어놓았다. 그리고 "장쩌민은 혁명열사 장상칭이 길렀다"고 거짓말까지 한다. 그러면서 장쩌민의 생부인 장스쥔에 대하여는 그냥 지나간다. 장상칭은 1911년생이고, 장쩌민은 1926년생이다. 장쩌민보다 15살이 많다. 1939년 7월, 장상칭은 쏟아지는 총탄에 사망하는데, 그때 장쩌민의 나이 13살이다. 이 해는 바로 장쩌민이 스스로 장상칭의 양자가 된 해라고 한다. 신세내력을 가리기 위하여 장쩌민은 죽은 사람을 부친으로 인정하는 기이한 일을 저질렀다. 중공이 공식적으로 공표한 자료에 따르면,극력 회피하며 얘기를 꺼리는 장쩌민의 신세내력에 대하여 간단하게 이렇게 말한다: "장쩌민은 1926년 8월 17일 장쑤성 양저우시에서 태어났다." "1947년 상해교통대학 기전계(즉, 왕정위의 친일 '남경중앙대학')을 졸업했다" 중공당매체 <신화망>은 2014년 1월 5일, "장쩌민은 몇 가지 외국어를 할 줄 아는가?"라는 글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1943년 장쩌민은 17살때, '남경중앙대학' 공과대학 기전과에서 공부했다(주석: 당시는 남경이 일본에 점령되어 있어서 이 대학은 친일대학이다). 1939년, 장상칭이 죽은 때 그의 집은 극도로 가난했다. 장상칭의 딸인 장쩌후이(江澤慧)는 일찌기 <장쩌민전>의 명의상 저자인 쿤(Kuhn)>에게 미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11살 이전에,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은 끝도 없는 빈곤과 기아이다. 집안에 먹을 거리가 거의 없었고, 어떤 때는 먹을 것이 아예 없었다." 이런 빈곤한 가정에서 당시에 장쩌민을 남경친일대학에 공부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장상칭이 죽을 때 중공은 아직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고, '공비(共匪)'라고 불리웠다. 당시 부유한 장스쥔은 스스로 공산당에 절대 가까이 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더더구나 자신의 장남을 매일 산골짜기를 숨어다니며 유격전을 벌이는 '공비'에게 양자로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1945년 9월 3일 패전으로 투항한다. 중국공산당은 1949년 정권을 건립한다. 1954년 11월 장쩌민은 창춘제1자동차제조공장으로 가서 일을 하게 된다. 나중에 1955년 3월 12명의 기술자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가서 기계전기지식을 공부한다. 장쩌민이 모스크바에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주 여기저기 다니면서 자랑을 하고, 악기를 켜고, 노래를 하기 좋아하며 눈에 띄는 행동을 한다. 그리하여 소련의 정보부서의 주목을 받고, 나중에 조사를 해보니 장쩌민이 매국노 장스쥔의 장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련 정보부서 KGB는 먼저 예쁜 젊은 여자 클라바를 보내어 장쩌민을 유혹한다. 그후에 시기가 성숙되자 돌연 장쩌민 부자의 친일행각을 꺼내어 장쩌민이 놀라서 어쩔 줄 모르게 만든다. 그래서 소련 KGB의 스파이로 포섭된 후 중공유학학생 및 중국대륙의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책임을 진다. 귀국후, 장쩌민은 계속 소련을 위해서 일한다. 그가 권력을 잡은 후 그 자신이 매국노,스파이신분으로 국가이익을 팔아먹은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영토를 대거 떼어 소련에 넘긴다. 청나라, 민국이래 승인되지 않았던 여러 매국조약을 승인한다. 1999년, 장쩌민읜 중국인민의 뜻에 배치되게 소련과 변경을 새로 획정하는 의정서를 체결한다. 이는 그가 KGB의 스파이로 국가이익을 팔아먹던 것의 연장이다. 그해 12월 9일과 10일, 장쩌민은 베이징을 방문한 옐친과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연방정부의 중러국경선동서양쪽부분의 서술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하여, 타이완 면적의 100배에 달하는 국토를 소련에 넘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