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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홍명(辜鴻銘)과 양계초(梁啓超)의 비교

从 1895 年到 1929 年,社会共识极其匮乏的中国社会转型期,梁启超几乎无役不予。   (谢玺璋供图 / 图)

: 정만군(程萬軍)

청나라말기, 부패하고 썩은 청나라조정은 이미 백족지사(百足之蛇)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각종 신구 "애국지사"가 연이어 등장하여, 각자의 파벌의 정견으로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구하고자 하였다.

 

신구파로 나뉜 "변사(辯士)"의 무리중에서, 두 명의 대표적인 인물이 나타난다.

 

하나는 철저한 수구의 "소변남인(小辮男人)" 고홍명이고, 또 다른 사람은 '소년중국'을 주장한 "영원년소(永遠年少)" 양계초이다.

 

고홍명은 청나라말기 민국초기의 완고한 수구파로 이름을 날린 문화괴걸이다. 그는 '노고동(老古董, 골동품)'으로 이름난 '소변남인'이었고, 평생동안 활력이 결핍된 수구적인 억지주장을 아주 잘 펼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 외국인이 그에게 물었다: "중국인은 왜 이렇게 잔인한가? 여자들에게 전족을 시키고, 전족한 발을 왜 그렇게 많은 문인 선비들이 좋아하는가?" 이에 대하여 고홍명은 이렇게 대답했다: "서방의 최고예술은 발레이다. 발레는 바로 사람의 생리적인 구조를 바뀌게 하는 것이다. 강제로 발끝으로 정상적인 발바닥을 대신해서 걷게 하는 것이며, 관중들이 발레를 볼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로써 볼 때, '소변남인'의 억지주장은 보통이 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홍명은 남양에서 태어나고, 서양에서 공부하고, 동양에서 결혼하고, 북양에서 벼슬을 지냈다. 그는 남자의 변발과 여자의 전족을 아주 좋아했다. 신해혁명으로 '변발'을 자르게 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완고하게 소변(小辮)을 길렀고, 장포마괘를 입었으며, 중국여인의 전족을 찬영했다. 그의 부인인 숙고(淑姑)는 전족을 했는데, 첫눈에 반했고, 평생을 함께 했다. 민국이 건립된 후, 그는 북경대학에서 영국문학을 강의한다. 그는 과격한 행동으로 전체 사회가 중화전통을 버리고 기형적으로 나아가는데 항거했다. 변발을 기르고, 옛날옷을 입고, 첩을 들이고, 전족을 좋아하는 등등. 그의 태도는 날로 완고해지고 보수적이 되어갔다. 심지어 그는 변발을 자신의 여권 겸 표지로 삼기도 했으며, 그는 변발과 전족을 극력 옹호하여 다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고홍명은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 말레이시아어등 9개언어에 정통했고, 13개의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문신문을 거꾸로 읽어 영국인들을 조소하기도 했고, 미국인들은 문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청일전쟁후, 중화민족의 위기가 사상유례없이 커졌을 때, 지식인들은 속속 서학을 도입하고, 변법을 통하여 생존을 도모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유신사조에 대하여, 고홍명은 이로 인하여 중국문화가 버려질까 두려워 하였다. 그리하여, 서양학문과 서양정치에 능통했던 그는 그 당시에 적극적으로 사상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아니라, 유교의 도리를 크게 주장했다.

 

"소변남인"'구미의 학설로 중국의 정치제도를 변경하려는 것은 중국을 어지럽히고도 남음이 있고, 중국을 구제하는데에는 부족하다"고 하였다.

 

고홍명은 당연히 다사다난한 중국을 위하여 청사진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방법으로는 중국문명의 도덕역량으로 서방의 총포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심지어, 사회와 정치의 죄악을 저지하고, 세계의 유교를 개혁하는 방법은 일종의 자존과 정식, 성실한 생활로 일종의 도덕적 역량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중화민족이 유일하게 믿을 수있는 힘이며, 오래된 문명으로 현재유럽민족의 물질실리주의의 파괴력에서 구원해내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런 고대의 문명에 있다는 것이었다.

 

고홍명의 가장 고질적인 수구는 그가 황제제도를 옹호하고, 수렴청정하고 음험하고 잔혹한 서태후를 옹호하면서, 서방세계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찬양했다는 것이다. 무창의거가 일어나자, 그는 천하의 대세를 거슬려, 혁명에 반대하고 열강으로 하여금 군대를 출동시켜 혁명군을 진압하라고 하였다.

 

말기에 고홍명은 장훈의 복벽에 참가하고, 이미 활기를 잃은 수구적인 남자들의 마지막 짓거리는 일생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고홍명의 정치적 견해는 양계초의 조소를 받았다. 양계초를 대표로 하는 신파는 중국을 군사적으로 강대하게 하려고 할 뿐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강대하게 하려고 하였다. 중국의 전제정치체제를 군주입헌정체로 바꾸고자 하였으며, 만일 중국이 일본과 같은 정치체제, 총포와 과학을 갖추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고홍명의 수구와 반대로, 양계초는 "선변(善變, 변화를 잘 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초기 문장인 <<선변과 호걸>>에서 보면 그중 몇몇 구절은 어떻게 선변하여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군자의 잘못은 일식월식처럼 사람들이 다 본다. 그리고 그 바뀜은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본다. 대장부의 일처리는 광명정대해야 하고, 나의 마음이 뜻하는 바를 행하여야 한다.

 

반드시 끝까지 추구하여야 할 뿐이다. 만약 그 방법이 수시로 상황에 따라 변한다면, 그리고 나의 두뇌의 발달에 따라 변한다면, 백번을 변해도 그 종()은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양계초는 선변의 요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하나는 때와 경우에 따라 변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옛날의 불합리한 것은 파괴할 수 있어야 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있어야 하고, 심지어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가 선전포고를 하는 것도 아쉬워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는 계속되는 변화는 반드시 하나의 중심을 둘러싸고 있어야 하고, 자기가 견지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정치무대에서 활약했고, 먼저 유신에 열중하다가, 갑자기 보황으로 간다. 나중에는 청왕조의 복벽을 반대한다. 자기의 스승인 강유위와 공개적인 논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스승을 사랑하지만, 나는 진리를 더욱 사랑한다'는 용기이다. 보황에서 복벽반대까지는 바로 하나의 대립면이다.

 

그가 변화중에 지킨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애국이다. 바로 애국때문에 중국의 쌓인 가난과 쌓인 약함을 바꿀 수 있다면, 그는 분연히 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애국때문에 그는 '나는 내 창으로 나를 찌른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고, 계속하여 자신을 부정할 수 있었고, 자신의 스승을 부정하 수 있었다. 그에게는 사심이 없었다. 양계초는 선변하는 중에 애국심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감히 구질서를 파괴하려는 용기, 계속하여 변화하고 나아가려는 진취성, 그리고 자기의 애국사상을 견지하려는 것 이것은 바로 소년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정신이다.

 

우환에서 마음을 기르고, 선변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데서 애국을 하는 것이 양계초가 도달한 학문의 경지이다. 대다수이 사람들에게는 너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애국심을 지니고 있다면 사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소변남인' 고홍명과, 선변구신(善變求新)의 양계초, 도대체 누가 더 애국을 했고, 누가 더 나라에 이롭게 했는가? 역사는 이미 분명한 답안을 내놓았다.

 

“自改革”和“解放思想” 梁启超及其周边话题

 

作者南方周末记者 石岩

梁启超本质上是个新闻人物他做学术其实是从现实出发梁启超涉及到的面太多事事他都插了一脚但很多东西都是开了一个头没有做下去

 

20144解玺璋新著君主立宪之殇——梁启超和他的自改革出版书中梁启超的政治求索被追溯到19世纪初由洪亮吉龚自珍开始的自改革

 

解玺璋认为龚自珍在1814年前后提出的自改革是对王安石改易更革的化用也是三千年未有之大变局开始前中国精英知识分子问题意识的体现按照孔飞力在中国现代国家的起源中的概括当时清帝国面临的问题是怎样使因恐惧而变得小心的统治阶层重新获得活力以对抗权力滥用怎样控制大批受过教育却不能被吸收到政府中来的知识精英怎样通过一套相对狭小的官僚机构来统治庞大而复杂的社会

 

自改革推动了清代学术变革及洋务运动后两者却最终被1894年的甲午战争证明失败梁启超时代随即开始1897湖南时务学堂24岁的总教习梁启超是中国政坛上毁誉参半的明星1898年到1912他作为戊戌变法失败后清廷通缉的要犯流亡在外1912年到1917他是北洋政府司法总长财政总长币制局局长而后退出政坛1918年以中国赴巴黎和会代表团非正式顾问的身份赴欧在巴黎期间梁启超把章宗祥与日本签订秘密借款合同陆徵祥将在和会上签字的消息电传给林长民汪大燮

 

1927国民政府成立在与亲友往来的书信中梁启超例数了政权更迭带来的乱象

 

党人纷纷抢机关抢饭碗北京一万多灾官连着家眷不下十万人饭碗一起打破神号鬼哭惨不忍闻

 

写这些信的时候启超正因历史关系邮电往来常被检查

梁启超一生随中国转型浪潮沉浮政敌自不必说即便朋友对他的评价也常毁誉参半对解玺璋而言梁启超就像一座山他一直在那里但有时看得见有时看不见有时从这个角度看见有时从那个角度看见

 

1979在大学的中国新闻史课堂上因为选作梁启超和时务报的论文解玺璋用一个学期的时间把梁启超主持下的69时务报通读一遍从第二期连载至第二十几期的变法通议》,1970年代末的学术青年极为震动——历史螺旋状向上中国又处于新一轮自改革的起点

 

1980年代解玺璋一度想研究梁启超的文学主张但他发现梁启超的文学主张是他不能接受的当时都反对文艺为政治服务梁启超是这个东西的祖师爷

 

1995北京开世界妇女大会世妇会东风解玺璋受邀写一本中国妇女向后转》。当时各地报刊热烈讨论中国还没有淑女再之前渴望热播刘慧芳红遍大江南北向后转从这些时代症候出发讨论晚清自1949年之后中国妇女观念的变化解玺璋与梁启超那伙人不期而遇——梁启超认为中华民族的自新有一半责任在妇女身上有新女性才会有新母亲有新母亲才会有新民

 

2008有人从美国国会图书馆拍回一两万张晚清老照片想做一套以绝版命名的图说丛书——绝版袁世凯绝版李鸿章绝版恭亲王……解玺璋接下了绝版梁启超》。他的头一个功课是通读1983年版的梁启超年谱长编》,边看边做两件事排梁启超的大事年表和人际关系

 

两三年时间里与梁启超有关的资料慢慢武装起解家两个顶天立地的书柜绝大部分资料是公开出版物广东顺德县编纂的麦孟华文集是例外)。解玺璋很快发现梁启超不是图说格局可以装下的1895年到1929社会共识极匮乏的中国社会转型期梁启超几乎无役不予近现代史上的名人几乎都与他有或远或近或敌或友的关系如果梁启超是大树的主干与他有关的人就是伸出的枝杈2012解玺璋出了上下两部梁启超传》,两年后又写出君主立宪之殇——梁启超与他的自改革

 

20144,《君主立宪之殇的出版沙龙上梁启超是配角8位发言者中有5把注意力投放在与梁启超有关的周边概念光绪帝康有为戊戌变法君主立宪革命的合理性

 

北京大学哲学系教授何怀宏援引李泽厚的观点中国式自由主义以康有为为代表学者王焱认为康有为符号化了成了君主立宪的化身其实康有为是传统法家式的人物对比清宫的档案康有为在幕后策划的百日维新变法其实并没有立宪的内容

 

南京晓庄学院文学院教授邵建提出辛亥革命本身造成的危害不大但给这个世纪开了一个革命的头历史是有惯性的以后的惯性是动不动就往革命路上去了左派知识分子黄纪苏针锋相对认为没有必要为中国历史错过改良走向革命而惋惜革命有复杂的内外因其中一个重要原因是社会资源的分配太不平均了1927年南方农民运动轰轰烈烈梁启超跟他的孩子通信说这是游民闹事梁启超正确地指出革命的社会基础是游民可惜他没接着指出流民的主要成因在于两极分化的社会结构在这样的社会结构而不爆发革命那只可能是蜜蜂的社会结构不会是人类的社会结构

 

秦晖重申其一贯观点不要把暴力和无序与立宪还是革命扯在一块……改良不见得比革命流血少改良也不见得比革命更有序日本明治维新就要比辛亥革命血腥得多……防止流血和无序一个非常简单的条件就是朝野双方可以对话讨价还价

 

争议或许正说明中国尚未走出梁启超当年设置的种种议题对他的阅读需重新开始。《梁启超传君主立宪之殇侧重纸上梁启超201454解玺璋接受南方周末记者采访梁启超的事功

 

解玺璋这书原本还有一章1979实践是检验真理的标准写起一直到当今我们的困境1980年代改革开放为什么取得一些成绩1970年代末的思想解放是有关系的我们现在需要的是第二次思想解放这和清末的自改革是一个道理

 

南方周末书里提到梁启超关于立宪的一些篇什似乎主要围绕立宪的周边概念宪政与革命宪政与国民素质梁启超关于宪政的核心观点是什么

 

解玺璋这些文章实际上是梁启超对宪政的初步想法他真正对宪政有贡献是在1908年后1906年慈禧宣布预备立宪梁启超停掉新民丛报》,并请人去跟民报我们不要再吵了政治革命已经完成现在进入准备立宪需要研究具体问题1908国内开始国会请愿几次都是梁启超在背后给予思想支持他派出学生同仁回国参与国会请愿涉及很具体的问题议会操作程序财政问题借款问题……1911武昌起义爆发梁启超写了新中国建设问题》、《中国立国大方针》,那是非常系统的政纲

 

南方周末看上去梁启超是一个特别顺势而为的知识分子可以跟各个时期的当政者合作按理说这样的人应该成功

 

解玺璋他是传统的中国知识分子希望我辅佐你他跟杨度的表现方式不一样但骨子里都差不多梁启超君主立宪梦不能成真原因很复杂一个不可忽视的原因是当时中国受异族统治虽然从大中华角度看我们是一个民族但那时中国人除了少数先进分子大量人是意识不到这点的清代近三百年统治对汉族人的感情伤害很大像章太炎这样的大知识分子都不能摆脱这种仇恨狭隘的民族主义情绪章太炎比孙中山都激烈

 

后来梁启超也意识到这个坎基本上迈不过去中国人不能接受虚君是个异族人他希望清政府能做出一点姿态毕竟中国老百姓还承认你的皇统你如果不特别过分他不会跟你“byebye”张之洞袁世凯张謇……社会中上层其实跟清廷是合作的他们不反水清亡不了但慈禧死了光绪也死了新上来的这些满族贵族忙着抢权抢肥差一下子人心尽失

 

解玺璋梁启超年轻时左右摇摆特别厉害1898年到1900他特别激进一度想跟孙中山合作唐才常搞自立军武装勤王梁启超曾潜回国准备投军黄遵宪特别不赞成黄是坚定的君主立宪派梁启超把清议报寄给黄黄看后回信你不能从一个极端走到另一个极端以前你跟康有为搞孔教我就说过你儒学是不必做宗教的你现在又反过来不光不尊孔教连孔子的思想都要骂了

 

1903梁启超在美国考察了10个月后放弃了激进思想黄遵宪说他公之归自美利坚而做俄罗斯之梦也所谓俄罗斯之梦就是宪政之梦当时俄罗斯也在搞宪政秦晖夫人金雁写的倒转红轮在我看来就是写俄罗斯的梁启超别尔嘉耶夫他的命运跟梁启超差不多走中间路线左右都不招人待见要做的事没做成最后俄罗斯立宪也没完成

 

1898年到1912,梁启超一直是被清政府通缉的流亡人员他再说清政府好话人家都拿他当通缉犯1910年杨度帮他说话想给他免除通缉令都做不到武昌起义爆发后没几天清廷赦免一切政治犯后来又有宪法十九条但已经晚了梁启超说这些东西哪怕提前一两年拿出一两条都不会造成后来的局面

 

辛亥革命后他接受了现实既然君主立宪搞不了那就搞民主立宪但对民主也应该加以限制不能让革命变成民主暴力

 

他为什么支持袁世凯因为民主立宪需要一个强大的中央政府袁世凯是组织中央政府最合适的人选后来袁世凯要搞君主制梁启超写了异哉所谓国体问题者》。他在文中说国体不能轻易改变政体可以改变我以前主张君主制是因为君主制是一客观存在把它取消了会引发社会动荡现在既然进入民国有了宪法这也是一个客观存在这时候再回头没必要

 

解玺璋他办报写文章看上去很风光新民丛报》,主要是他一个人写;《民报那边章太炎汪精卫宋教仁……都是写文章的高手这对梁启超倒不是什么大事但保皇党的内斗给他带来了非常大的压力一方面他跟康有为的分歧不能表现得太过分经济上也捉襟见肘

 

19081909年是最困难的他那时候都要吃不上饭了保皇党内部经营不顺在美洲的企业纷纷倒闭其中广智书局经营不善让他负责但经营不善其实是有很多原因的广智书局最主要的经营项目是教辅1905年清政府取消八股考试他们以前做的大量书都压在库里卖不出去了他们赶紧掉转方向当时新的知识国内根本没有他们在日本编编好拿到国内来卖但他们印的书再畅销也只能发第一版以后就是盗版了这是梁启超根本控制不了的经营不善的责任却要由他来承担

 

来自康有为的压力更让他难以承受康很不民主跟他提建议有时候不听出了事又骂你弄得梁启超非常狼狈他在写给家人同学的信里经常诉说自己的痛苦

 

再一个痛苦时期就是北洋政府时期他给梁思顺梁启超长女写信有时哭得写不下去进步党内党人之争不断他不知道怎么办他多次跟梁思顺发牢骚再也不想干这些事了可别人一求他他又不好意思

 

解玺璋1905日本人受清政府压力发了关于准许清国学生入学之公私立学校之规程》,日本媒体报道时简化为清国留学生取缔规则》,取缔规则在日语里是管理规定的意思留日学生激进派听到这个消息鼓动留日学生罢课全部回国作为留日联合会秘书长陈天华认为这只会使留学生丢掉读书机会不解决任何问题但这样一来他就变成保守派了他很纠结写了个长篇遗言我不得不死只能用死表达我的态度

 

在遗书开头陈天华说我们要有开明专制时期但他对开明专制的理解跟梁启超不一样他主张在革命夺权后有个开明专制时期其实就是后来孙中山所谓的军政训政和宪政可梁启超认为开明专制应该由清政府来实行以避免革命然后慢慢进入立宪准备最后完成君主立宪梁启超写过开明专制论》,是跟汪精卫论战所以他开始就讲陈天华因为陈天华是革命党这是一种辩论策略

 

南方周末政争带给革命党和保皇党的痛苦其实一样梁启超怎么应对政争

解玺璋他很少伤人最激烈的是他跟民报论战那他也讲道理再看民报》,火药味比文革都浓有的文章是主张杀康有为梁启超的列举杀的方式特别残忍。《民报还造了很多谣也可以理解汪精卫胡汉民张继……当时都二十来岁特别容易激动

 

解玺璋从欧洲回来以后那十年虽然也有些小矛盾但是他身边那几个人蒋百里丁文江张君劢……对他都特别好护着他管着他不让他再从政甚至有人想请他作中国公学的校长蒋百里都反对

 

回归学术和思想启蒙他舒畅自信多了南开大学请他去讲课他就要承包南开大学的文学系我们几个丁文江蒋百里梁漱溟等把你系里的课都包下来。《中国历史研究法最早他就是在南开讲的他还想开一门关于中国文化史的课后来也没进行下去他们想做的事特别多在南京讲学期间查出他有心脏病让他休息他都不休息张君劢就天天盯着他他想去讲课张君劢就提前跑过去让学生散了

 

南方周末19191929黄金十年梁启超触及过立宪问题吗

解玺璋比如联省自治中国的联省自治思潮分好几个时期戊戌变法前德国人占了青岛知识分子有一种危机中国要被瓜分了最后可能只剩两湖地区梁启超给陈宝箴写信希望湖南搞自治给中国留下一个翻身的基础湖南自治搞得非常好组织了最早的警察局戊戌变法后改革派所有的东西都被慈禧取消警察局没有——对管理城市太有帮助了这个东西是黄遵宪从英国引进的

 

变法失败康梁流亡到海外想搞君主立宪就不提所谓省权力的问题了辛亥革命是一省一省搞起来的1911年之后各个省的权力怎么设计当时是有争论的梁启超想搞中央集权那是他国家主义观念最浓的时候他认为中国不能采取美国的方式美国的国家权力机构是从基层一层一层靠自治性的管理慢慢积累起来的而中国从秦朝开始就已经是大一统了没有必要再回到起点上重新走一遍

 

后来袁世凯死了孙中山在广东成立了军政府梁启超到欧洲看到欧洲一战后的情况回国开始接受联省自治他还鼓动吴佩孚也支持联省自治当时湖南浙江比较积极梁启超就派学生去帮湖南制定省宪法

 

南方周末胡适也曾是联省自治的支持者

解玺璋但胡适蔡元培都不太愿意跟梁启超合作因为他跟北洋政府的关系太深林长民丁文江穿针走线想把这两拨人合在一起但双方尤其是年轻的那拨认为彼此分歧很大最终没能走到一起梁启超他们这边做了一些比较实际的事梁启超当时没有任何头衔府院之争之后他就彻底地退出了政界开始筹划去欧洲1918年底成行19203月回国这段时间他就摆脱了跟政界直接的关系但是他跟政界很多人的私人关系非常好并且利用门生故旧的力量

 

像蒋百里在长沙主持湖南宪法制定一直到省宪法通过当时湖南腹背受敌那边是孙中山这边是吴佩孚梁启超不断给吴佩孚写信派人跟吴面谈你不要在这时跟他们在军事上产生冲突这样会让社会觉得你反立宪政治上失分吴佩孚打到岳州就不打了湖南省宪法实施了三四年

 

南方周末1912年到1917梁启超身居高位进步党领袖司法总长……这阶段能说是他人生的一个小高潮吗

 

解玺璋这五六年是他在政治上比较活跃的时期但没有任何建树他进行过各种研究金融银行币制中国的司法——甚至包括县级司法审讯但各种方案都没有落实惟一的成功就是把袁世凯逼死了

 

南方周末中国近代史上有很多伟大的失败者梁启超是其中之一有人做过一个中国人文社会科学图书学术影响力报告,《饮冰室合集在哲学科排名第八历史科排名第一文化科排名第三但在他的时代梁启超很早就被看成落伍者最早是不是民报新民丛报论战时

 

解玺璋他们认为他是清政府走狗但谁也无法否认梁启超是个启蒙者中国近现代史上个人回忆录写到晚清很少有人不说受过梁启超的影响我最近看洪业传》,洪业说他母亲年轻时就是梁启超的粉丝甚至说如果是男人我就跑到日本找梁启超去给他作佣人都成要知道洪业的妈妈当时在福建她是个茶叶商的女儿没受过正式教育识字有限平时无非看看本草纲目》,可以想见新民丛报和梁启超的影响力

 

南方周末胡适评价梁启超才高而不得有系统的训练好学而不得良师益友入世太早成名太速自任太多故他的影响甚大而自身的成就甚微……

 

解玺璋这是说他在学术上的作为胡适年轻的时候从梁启超的中国学术思想变迁之大势获得了很多营养胡适后来做的事其实是沿着梁启超指的路子走的

 

梁启超确实涉及的面太多事事他都插一脚但很多东西都是开了一个头没有做下去他的很多书都写半截比如说中国学术史他在东南大学开了一门课但只讲完了先秦部分后来就成为先秦政治思想史》。他想做中国文化史最后只做了一个序言就是后来出的中国历史研究法》。

 

梁启超本质上是个新闻人物他做学术其实是从现实出发王国维是从书斋里边做学术所以很系统很深入梁启超不行大环境一变他原本关心的东西就不再关心了他就跑去干别的去了唯一的例外是佛学他对佛学佛教史墨子的研究还是比较深入的胡适最早跟他打交道就是因为墨子

 

南方周末梁启超的命运和日本明治维新知识分子的路径命运有可比吗

 

解玺璋日本的情况跟中国不一样首先日本是单一民族而且它的皇权是万世一统民众对皇权特别崇拜的日本当时的矛盾是地方势力和皇权之间的矛盾文人政府和武士之间的矛盾当然也打也死了很多人但它面临的问题远没有中国复杂再加上明治天皇不像慈禧眼光短浅一受到西方压迫马上就开始变革你看他派出去学习的那种方式都跟我们不一样他先去学习政治军事……我们先是买东西买船买炮反正天朝有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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