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만군(程萬軍)
청나라말기, 부패하고 썩은 청나라조정은 이미 백족지사(百足之蛇)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각종 신구 "애국지사"가 연이어 등장하여, 각자의 파벌의 정견으로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구하고자 하였다.
신구파로 나뉜 "변사(辯士)"의 무리중에서, 두 명의 대표적인 인물이 나타난다.
하나는 철저한 수구의 "소변남인(小辮男人)" 고홍명이고, 또 다른 사람은 '소년중국'을 주장한 "영원년소(永遠年少)" 양계초이다.
고홍명은 청나라말기 민국초기의 완고한 수구파로 이름을 날린 문화괴걸이다. 그는 '노고동(老古董, 골동품)'으로 이름난 '소변남인'이었고, 평생동안 활력이 결핍된 수구적인 억지주장을 아주 잘 펼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 외국인이 그에게 물었다: "중국인은 왜 이렇게 잔인한가? 여자들에게 전족을 시키고, 전족한 발을 왜 그렇게 많은 문인 선비들이 좋아하는가?" 이에 대하여 고홍명은 이렇게 대답했다: "서방의 최고예술은 발레이다. 발레는 바로 사람의 생리적인 구조를 바뀌게 하는 것이다. 강제로 발끝으로 정상적인 발바닥을 대신해서 걷게 하는 것이며, 관중들이 발레를 볼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로써 볼 때, 이 '소변남인'의 억지주장은 보통이 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홍명은 남양에서 태어나고, 서양에서 공부하고, 동양에서 결혼하고, 북양에서 벼슬을 지냈다. 그는 남자의 변발과 여자의 전족을 아주 좋아했다. 신해혁명으로 '변발'을 자르게 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완고하게 소변(小辮)을 길렀고, 장포마괘를 입었으며, 중국여인의 전족을 찬영했다. 그의 부인인 숙고(淑姑)는 전족을 했는데, 첫눈에 반했고, 평생을 함께 했다. 민국이 건립된 후, 그는 북경대학에서 영국문학을 강의한다. 그는 과격한 행동으로 전체 사회가 중화전통을 버리고 기형적으로 나아가는데 항거했다. 변발을 기르고, 옛날옷을 입고, 첩을 들이고, 전족을 좋아하는 등등. 그의 태도는 날로 완고해지고 보수적이 되어갔다. 심지어 그는 변발을 자신의 여권 겸 표지로 삼기도 했으며, 그는 변발과 전족을 극력 옹호하여 다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고홍명은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 말레이시아어등 9개언어에 정통했고, 13개의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영문신문을 거꾸로 읽어 영국인들을 조소하기도 했고, 미국인들은 문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청일전쟁후, 중화민족의 위기가 사상유례없이 커졌을 때, 지식인들은 속속 서학을 도입하고, 변법을 통하여 생존을 도모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유신사조에 대하여, 고홍명은 이로 인하여 중국문화가 버려질까 두려워 하였다. 그리하여, 서양학문과 서양정치에 능통했던 그는 그 당시에 적극적으로 사상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아니라, 유교의 도리를 크게 주장했다.
"소변남인"은 '구미의 학설로 중국의 정치제도를 변경하려는 것은 중국을 어지럽히고도 남음이 있고, 중국을 구제하는데에는 부족하다"고 하였다.
고홍명은 당연히 다사다난한 중국을 위하여 청사진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방법으로는 중국문명의 도덕역량으로 서방의 총포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심지어, 사회와 정치의 죄악을 저지하고, 세계의 유교를 개혁하는 방법은 일종의 자존과 정식, 성실한 생활로 일종의 도덕적 역량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중화민족이 유일하게 믿을 수있는 힘이며, 오래된 문명으로 현재유럽민족의 물질실리주의의 파괴력에서 구원해내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런 고대의 문명에 있다는 것이었다.
고홍명의 가장 고질적인 수구는 그가 황제제도를 옹호하고, 수렴청정하고 음험하고 잔혹한 서태후를 옹호하면서, 서방세계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찬양했다는 것이다. 무창의거가 일어나자, 그는 천하의 대세를 거슬려, 혁명에 반대하고 열강으로 하여금 군대를 출동시켜 혁명군을 진압하라고 하였다.
말기에 고홍명은 장훈의 복벽에 참가하고, 이미 활기를 잃은 수구적인 남자들의 마지막 짓거리는 일생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고홍명의 정치적 견해는 양계초의 조소를 받았다. 양계초를 대표로 하는 신파는 중국을 군사적으로 강대하게 하려고 할 뿐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강대하게 하려고 하였다. 중국의 전제정치체제를 군주입헌정체로 바꾸고자 하였으며, 만일 중국이 일본과 같은 정치체제, 총포와 과학을 갖추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고홍명의 수구와 반대로, 양계초는 "선변(善變, 변화를 잘 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초기 문장인 <<선변과 호걸>>에서 보면 그중 몇몇 구절은 어떻게 선변하여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군자의 잘못은 일식월식처럼 사람들이 다 본다. 그리고 그 바뀜은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본다. 대장부의 일처리는 광명정대해야 하고, 나의 마음이 뜻하는 바를 행하여야 한다.
반드시 끝까지 추구하여야 할 뿐이다. 만약 그 방법이 수시로 상황에 따라 변한다면, 그리고 나의 두뇌의 발달에 따라 변한다면, 백번을 변해도 그 종(宗)은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양계초는 선변의 요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하나는 때와 경우에 따라 변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옛날의 불합리한 것은 파괴할 수 있어야 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있어야 하고, 심지어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가 선전포고를 하는 것도 아쉬워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는 계속되는 변화는 반드시 하나의 중심을 둘러싸고 있어야 하고, 자기가 견지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정치무대에서 활약했고, 먼저 유신에 열중하다가, 갑자기 보황으로 간다. 나중에는 청왕조의 복벽을 반대한다. 자기의 스승인 강유위와 공개적인 논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스승을 사랑하지만, 나는 진리를 더욱 사랑한다'는 용기이다. 보황에서 복벽반대까지는 바로 하나의 대립면이다.
그가 변화중에 지킨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애국이다. 바로 애국때문에 중국의 쌓인 가난과 쌓인 약함을 바꿀 수 있다면, 그는 분연히 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애국때문에 그는 '나는 내 창으로 나를 찌른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고, 계속하여 자신을 부정할 수 있었고, 자신의 스승을 부정하 수 있었다. 그에게는 사심이 없었다. 양계초는 선변하는 중에 애국심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감히 구질서를 파괴하려는 용기, 계속하여 변화하고 나아가려는 진취성, 그리고 자기의 애국사상을 견지하려는 것 이것은 바로 소년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정신이다.
우환에서 마음을 기르고, 선변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데서 애국을 하는 것이 양계초가 도달한 학문의 경지이다. 대다수이 사람들에게는 너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애국심을 지니고 있다면 사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소변남인' 고홍명과, 선변구신(善變求新)의 양계초, 도대체 누가 더 애국을 했고, 누가 더 나라에 이롭게 했는가? 역사는 이미 분명한 답안을 내놓았다.
作者:南方周末记者 石岩
梁启超本质上是个新闻人物,他做学术其实是从现实出发。梁启超涉及到的面太多,事事他都插了一脚,但很多东西都是开了一个头,没有做下去。
2014年4月,解玺璋新著《君主立宪之殇——梁启超和他的“自改革”》出版。书中,梁启超的政治求索被追溯到19世纪初由洪亮吉、龚自珍开始的“自改革”。
解玺璋认为,龚自珍在1814年前后提出的“自改革”,是对王安石“改易更革”的化用,也是“三千年未有之大变局”开始前,中国精英知识分子问题意识的体现。按照孔飞力在《中国现代国家的起源》中的概括,当时清帝国面临的问题是:怎样使因恐惧而变得小心的统治阶层重新获得活力,以对抗权力滥用;怎样控制大批受过教育却不能被吸收到政府中来的知识精英;怎样通过一套相对狭小的官僚机构来统治庞大而复杂的社会。
“自改革”推动了清代学术变革及洋务运动,后两者却最终被1894年的甲午战争证明失败。梁启超时代随即开始。1897年,湖南时务学堂24岁的总教习梁启超是中国政坛上毁誉参半的明星。1898年到1912年,他作为“戊戌变法”失败后清廷通缉的要犯流亡在外。1912年到1917年,他是北洋政府司法总长、财政总长、币制局局长,而后退出政坛。1918年以中国赴巴黎和会代表团非正式顾问的身份赴欧。在巴黎期间,梁启超把章宗祥与日本签订秘密借款合同、陆徵祥将在和会上签字的消息电传给林长民、汪大燮。
1927年,国民政府成立,在与亲友往来的书信中,梁启超例数了政权更迭带来的乱象:
“党人纷纷抢机关、抢饭碗。北京一万多灾官,连着家眷不下十万人,饭碗一起打破,神号鬼哭,惨不忍闻。”
写这些信的时候,启超正因“历史关系”,“邮电往来常被检查”。
梁启超一生随中国转型浪潮沉浮。政敌自不必说,即便朋友,对他的评价也常毁誉参半。对解玺璋而言,梁启超就像一座山,他一直在那里,但有时看得见,有时看不见;有时从这个角度看见,有时从那个角度看见。
1979年,在大学的中国新闻史课堂上,因为选作“梁启超和《时务报》”的论文,解玺璋用一个学期的时间,把梁启超主持下的69册《时务报》通读一遍。从第二期连载至第二十几期的《变法通议》,让1970年代末的学术青年极为震动——历史螺旋状向上,中国又处于新一轮“自改革”的起点。
1980年代,解玺璋一度想研究梁启超的文学主张,但他发现,梁启超的文学主张是他不能接受的。当时都反对“文艺为政治服务”,而“梁启超是这个东西的祖师爷”。
1995年,北京开世界妇女大会。借“世妇会”东风,解玺璋受邀写一本《中国妇女向后转》。当时各地报刊热烈讨论中国还没有淑女,再之前《渴望》热播,“刘慧芳”红遍大江南北。“向后转”从这些时代症候出发,讨论晚清自1949年之后中国妇女观念的变化。解玺璋与梁启超“那伙人”不期而遇——梁启超认为中华民族的自新有一半责任在妇女身上,有新女性,才会有新母亲,有新母亲,才会有新民。
2008年,有人从美国国会图书馆拍回一两万张晚清老照片,想做一套以“绝版”命名的“图说”丛书——绝版袁世凯、绝版李鸿章、绝版恭亲王……解玺璋接下了《绝版梁启超》。他的头一个功课是通读1983年版的《梁启超年谱长编》,边看边做两件事:排梁启超的大事年表和人际关系。
两三年时间里,与梁启超有关的资料慢慢武装起解家两个顶天立地的书柜,绝大部分资料是公开出版物(广东顺德县编纂的《麦孟华文集》是例外)。解玺璋很快发现,梁启超不是“图说”格局可以装下的。从1895年到1929年,社会共识极匮乏的中国社会转型期,梁启超几乎无役不予。近现代史上的名人几乎都与他有或远或近、或敌或友的关系。如果梁启超是大树的主干,与他有关的人就是伸出的枝杈。2012年,解玺璋出了上下两部《梁启超传》,两年后又写出《君主立宪之殇——梁启超与他的“自改革”》
2014年4月,《君主立宪之殇》的出版沙龙上,梁启超是“配角”,8位发言者中有5位,把注意力投放在与梁启超有关的“周边概念”上:光绪帝、康有为、戊戌变法、君主立宪、革命的合理性。
北京大学哲学系教授何怀宏援引李泽厚的观点:“中国式自由主义以康有为为代表。”学者王焱认为:“康有为符号化了,成了君主立宪的化身。其实康有为是传统法家式的人物。对比清宫的档案,康有为在幕后策划的百日维新变法,其实并没有立宪的内容。”
南京晓庄学院文学院教授邵建提出:“辛亥革命本身造成的危害不大,但给这个世纪开了一个革命的头。历史是有惯性的,以后的惯性是动不动就往革命路上去了。”左派知识分子黄纪苏针锋相对,认为没有必要为中国历史错过改良,走向革命而惋惜:“革命有复杂的内外因,其中一个重要原因是社会资源的分配太不平均了。1927年南方农民运动轰轰烈烈,梁启超跟他的孩子通信,说这是游民闹事。梁启超正确地指出革命的社会基础是游民,可惜他没接着指出流民的主要成因在于两极分化的社会结构。在这样的社会结构而不爆发革命,那只可能是蜜蜂的社会结构,不会是人类的社会结构。”
秦晖重申其一贯观点:“不要把暴力和无序与‘立宪还是革命’扯在一块……改良不见得比革命流血少,改良也不见得比革命更有序。日本明治维新就要比辛亥革命血腥得多……防止流血和无序,一个非常简单的条件就是朝野双方可以对话、讨价还价。”
争议或许正说明,中国尚未走出梁启超当年设置的种种议题,对他的阅读需重新开始。《梁启超传》和《君主立宪之殇》侧重“纸上梁启超”。2014年5月4日,解玺璋接受南方周末记者采访,谈“梁启超的事功”。
解玺璋:这书原本还有一章:从1979年“实践是检验真理的标准”写起,一直到当今我们的困境。1980年代改革开放,为什么取得一些成绩,跟1970年代末的思想解放是有关系的。我们现在需要的是第二次思想解放,这和清末的“自改革”是一个道理。
南方周末:书里提到梁启超关于立宪的一些篇什,似乎主要围绕立宪的周边概念:宪政与革命、宪政与国民素质。梁启超关于宪政的核心观点是什么?
解玺璋:这些文章实际上是梁启超对宪政的初步想法,他真正对宪政有贡献,是在1908年后。1906年慈禧宣布预备立宪,梁启超停掉《新民丛报》,并请人去跟《民报》说:我们不要再吵了,政治革命已经完成,现在进入准备立宪,需要研究具体问题。1908年,国内开始国会请愿,几次都是梁启超在背后给予思想支持。他派出学生、同仁,回国参与国会请愿。涉及很具体的问题:议会操作程序、财政问题、借款问题……1911年,武昌起义爆发,梁启超写了《新中国建设问题》、《中国立国大方针》,那是非常系统的政纲。
南方周末:看上去梁启超是一个特别“顺势而为”的知识分子,可以跟各个时期的当政者合作。按理说这样的人应该成功。
解玺璋:他是传统的中国知识分子:希望我辅佐你。他跟杨度的表现方式不一样,但骨子里都差不多。梁启超君主立宪梦不能成真,原因很复杂。一个不可忽视的原因是:当时中国受异族统治。虽然从大中华角度看,我们是一个民族。但那时中国人除了少数先进分子,大量人是意识不到这点的。清代近三百年统治,对汉族人的感情伤害很大。像章太炎这样的大知识分子,都不能摆脱这种仇恨。狭隘的民族主义情绪,章太炎比孙中山都激烈。
后来梁启超也意识到,这个坎基本上迈不过去,中国人不能接受虚君是个异族人。他希望清政府能做出一点姿态,毕竟中国老百姓还承认你的皇统;你如果不特别过分,他不会跟你“byebye”的。张之洞、袁世凯、张謇……社会中上层其实跟清廷是合作的。他们不反水,清亡不了。但慈禧死了,光绪也死了,新上来的这些满族贵族忙着抢权、抢肥差。一下子人心尽失。
解玺璋:梁启超年轻时,左右摇摆特别厉害。1898年到1900年,他特别激进,一度想跟孙中山合作。唐才常搞“自立军”,武装勤王,梁启超曾潜回国准备投军。黄遵宪特别不赞成。黄是坚定的君主立宪派。梁启超把《清议报》寄给黄,黄看后回信:你不能从一个极端走到另一个极端。以前你跟康有为搞孔教,我就说过你,儒学是不必做宗教的。你现在又反过来,不光不尊孔教,连孔子的思想都要骂了。
1903年,梁启超在美国考察了10个月后,放弃了激进思想。黄遵宪说他“公之归自美利坚而做俄罗斯之梦也”。所谓俄罗斯之梦就是宪政之梦。当时俄罗斯也在搞宪政。秦晖夫人金雁写的《倒转红轮》在我看来就是写“俄罗斯的梁启超”别尔嘉耶夫。他的命运跟梁启超差不多,走中间路线,左右都不招人待见,要做的事没做成,最后俄罗斯立宪也没完成。
从1898年到1912年,梁启超一直是被清政府通缉的流亡人员。他再说清政府好话,人家都拿他当通缉犯。1910年杨度帮他说话,想给他免除通缉令都做不到。武昌起义爆发后没几天,清廷赦免一切政治犯,后来又有“宪法十九条”,但已经晚了。梁启超说这些东西哪怕提前一两年,拿出一两条,都不会造成后来的局面。
辛亥革命后,他接受了现实:既然君主立宪搞不了,那就搞民主立宪;但对民主也应该加以限制,不能让革命变成民主暴力。
他为什么支持袁世凯,因为民主立宪需要一个强大的中央政府,袁世凯是组织中央政府最合适的人选。后来袁世凯要搞君主制,梁启超写了《异哉所谓国体问题者》。他在文中说:国体不能轻易改变,政体可以改变。我以前主张君主制,是因为君主制是一客观存在,把它取消了,会引发社会动荡。现在既然进入民国,有了宪法,这也是一个客观存在,这时候再回头,没必要。
解玺璋:他办报、写文章,看上去很风光。办《新民丛报》,主要是他一个人写;《民报》那边章太炎、汪精卫、宋教仁……都是写文章的高手。这对梁启超倒不是什么大事。但保皇党的内斗给他带来了非常大的压力。一方面他跟康有为的分歧,不能表现得太过分,经济上也捉襟见肘。
1908年、1909年是最困难的,他那时候都要吃不上饭了。保皇党内部经营不顺,在美洲的企业纷纷倒闭。其中广智书局经营不善,让他负责。但经营不善其实是有很多原因的。广智书局最主要的经营项目是“教辅”。1905年清政府取消八股考试,他们以前做的大量书都压在库里,卖不出去了。他们赶紧掉转方向,当时新的知识国内根本没有,他们在日本编,编好拿到国内来卖。但他们印的书再畅销,也只能发第一版,以后就是盗版了。这是梁启超根本控制不了的,经营不善的责任却要由他来承担。
来自康有为的压力更让他难以承受。康很不民主,跟他提建议,有时候不听;出了事又骂你,弄得梁启超非常狼狈。他在写给家人、同学的信里,经常诉说自己的痛苦。
再一个痛苦时期就是北洋政府时期。他给梁思顺(梁启超长女)写信,有时哭得写不下去。进步党内党人之争不断,他不知道怎么办。他多次跟梁思顺发牢骚:再也不想干这些事了。可别人一求他,他又不好意思。
解玺璋:1905年,日本人受清政府压力,发了《关于准许清国学生入学之公私立学校之规程》,日本媒体报道时,简化为《清国留学生取缔规则》,“取缔规则”在日语里是“管理规定”的意思。留日学生激进派听到这个消息,鼓动留日学生罢课,全部回国。作为留日联合会秘书长,陈天华认为这只会使留学生丢掉读书机会,不解决任何问题。但这样一来,他就变成保守派了。他很纠结,写了个长篇遗言:我不得不死,只能用死表达我的态度。
在遗书开头,陈天华说:我们要有开明专制时期。但他对开明专制的理解跟梁启超不一样。他主张在革命夺权后,有个开明专制时期,其实就是后来孙中山所谓的军政、训政和宪政。可梁启超认为,开明专制应该由清政府来实行,以避免革命,然后慢慢进入立宪准备,最后完成君主立宪。梁启超写过《开明专制论》,是跟汪精卫论战。所以他开始就讲陈天华,因为陈天华是革命党,这是一种辩论策略。
南方周末:政争带给革命党和保皇党的痛苦其实一样。梁启超怎么应对政争?
解玺璋:他很少伤人。最激烈的是他跟《民报》论战,那他也讲道理,再看《民报》,火药味比“文革”都浓。有的文章是主张杀康有为、梁启超的,列举杀的方式,特别残忍。《民报》还造了很多谣。也可以理解,汪精卫、胡汉民、张继……当时都二十来岁,特别容易激动。
解玺璋:从欧洲回来以后。那十年虽然也有些小矛盾,但是他身边那几个人,蒋百里、丁文江、张君劢……对他都特别好,护着他、管着他,不让他再从政。甚至有人想请他作中国公学的校长,蒋百里都反对。
回归学术和思想启蒙,他舒畅自信多了。南开大学请他去讲课,他就要承包南开大学的文学系:我们几个(丁文江、蒋百里、梁漱溟等)把你系里的课都包下来。《中国历史研究法》最早他就是在南开讲的。他还想开一门关于中国文化史的课,后来也没进行下去,他们想做的事特别多。在南京讲学期间,查出他有心脏病,让他休息他都不休息,张君劢就天天盯着他,他想去讲课,张君劢就提前跑过去让学生散了。
南方周末:从1919到1929这“黄金十年”里,梁启超触及过立宪问题吗?
解玺璋:比如联省自治。中国的联省自治思潮分好几个时期。戊戌变法前,德国人占了青岛,知识分子有一种危机:中国要被瓜分了,最后可能只剩两湖地区。梁启超给陈宝箴写信:希望湖南搞自治,给中国留下一个翻身的基础。湖南自治搞得非常好,组织了最早的警察局。戊戌变法后,改革派所有的东西都被慈禧取消,警察局没有——对管理城市太有帮助了,这个东西是黄遵宪从英国引进的。
变法失败,康梁流亡到海外,想搞君主立宪,就不提所谓省权力的问题了。辛亥革命是一省一省搞起来的,1911年之后,各个省的权力怎么设计,当时是有争论的。梁启超想搞中央集权。那是他国家主义观念最浓的时候。他认为中国不能采取美国的方式,美国的国家权力机构是从基层一层一层靠自治性的管理慢慢积累起来的。而中国从秦朝开始就已经是大一统了,没有必要再回到起点上重新走一遍
后来袁世凯死了,孙中山在广东成立了军政府。梁启超到欧洲,看到欧洲一战后的情况,回国开始接受联省自治。他还鼓动吴佩孚也支持联省自治。当时湖南、浙江比较积极,梁启超就派学生去帮湖南制定省宪法。
南方周末:胡适也曾是联省自治的支持者。
解玺璋:但胡适、蔡元培,都不太愿意跟梁启超合作,因为他跟北洋政府的关系太深。林长民、丁文江穿针走线,想把这两拨人合在一起。但双方尤其是年轻的那拨,认为彼此分歧很大,最终没能走到一起。梁启超他们这边做了一些比较实际的事。梁启超当时没有任何头衔,“府院之争”之后,他就彻底地退出了政界,开始筹划去欧洲,1918年底成行,1920年3月回国,这段时间他就摆脱了跟政界直接的关系。但是他跟政界很多人的私人关系非常好,并且利用门生故旧的力量。
像蒋百里在长沙主持湖南宪法制定,一直到省宪法通过。当时湖南腹背受敌,那边是孙中山,这边是吴佩孚。梁启超不断给吴佩孚写信,派人跟吴面谈:你不要在这时跟他们在军事上产生冲突,这样会让社会觉得你反立宪,政治上失分。吴佩孚打到岳州就不打了。湖南省宪法实施了三四年。
南方周末:1912年到1917年,梁启超身居高位,进步党领袖、司法总长……这阶段能说是他人生的一个小高潮吗?
解玺璋:这五六年是他在政治上比较活跃的时期,但没有任何建树。他进行过各种研究:金融、银行、币制、中国的司法——甚至包括县级司法审讯,但各种方案都没有落实。惟一的成功就是把袁世凯逼死了。
南方周末:中国近代史上有很多“伟大的失败者”,梁启超是其中之一。有人做过一个“中国人文社会科学图书学术影响力报告”,《饮冰室合集》在哲学科排名第八;历史科排名第一,文化科排名第三。但在他的时代,梁启超很早就被看成落伍者。最早是不是《民报》跟《新民丛报》论战时?
解玺璋:对。他们认为他是清政府走狗。但谁也无法否认,梁启超是个启蒙者。中国近现代史上,个人回忆录写到晚清,很少有人不说受过梁启超的影响。我最近看《洪业传》,洪业说他母亲年轻时就是梁启超的粉丝,甚至说:如果是男人,我就跑到日本找梁启超去,给他作佣人都成。要知道洪业的妈妈当时在福建,她是个茶叶商的女儿,没受过正式教育,识字有限,平时无非看看《本草纲目》,可以想见《新民丛报》和梁启超的影响力。
南方周末:胡适评价梁启超:“才高而不得有系统的训练,好学而不得良师益友,入世太早,成名太速,自任太多,故他的影响甚大而自身的成就甚微……”
解玺璋:这是说他在学术上的作为。胡适年轻的时候,从梁启超的《中国学术思想变迁之大势》获得了很多营养,胡适后来做的事,其实是沿着梁启超指的路子走的。
梁启超确实涉及的面太多,事事他都插一脚,但很多东西都是开了一个头,没有做下去,他的很多书都写半截。比如说中国学术史,他在东南大学开了一门课,但只讲完了先秦部分,后来就成为《先秦政治思想史》。他想做中国文化史,最后只做了一个序言,就是后来出的《中国历史研究法》。
梁启超本质上是个新闻人物,他做学术其实是从现实出发。王国维是从书斋里边做学术,所以很系统很深入。梁启超不行,大环境一变,他原本关心的东西就不再关心了,他就跑去干别的去了。唯一的例外是佛学,他对佛学、佛教史、墨子的研究还是比较深入的。胡适最早跟他打交道就是因为墨子。
南方周末:梁启超的命运和日本明治维新知识分子的路径、命运有可比吗?
解玺璋:日本的情况跟中国不一样。首先,日本是单一民族。而且它的皇权是万世一统,民众对皇权特别崇拜的。日本当时的矛盾是地方势力和皇权之间的矛盾;文人政府和武士之间的矛盾,当然也打,也死了很多人。但它面临的问题远没有中国复杂。再加上明治天皇不像慈禧眼光短浅,一受到西方压迫,马上就开始变革。你看他派出去学习的那种方式都跟我们不一样,他先去学习政治、军事……我们先是买东西、买船、买炮。反正天朝有钱。
증국번(曾国藩)은 사위 5명을 왜 하나같이 못난이들로 골랐을까? (2) | 2022.05.10 |
---|---|
중국의 역사인물-귀곡자(鬼谷子)는 어떻게 4대 전략가를 가르쳤는가? (2) | 2022.05.03 |
송휘종(宋徽宗)과 이사사(李師師) (4) | 2022.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