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일본제국주의가 중국 동북지역에 만주국을 건립한 지 꼭 90년이 되는 해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메이지 유신 이후 해외 침략과 팽창에 국력을 쏟았다. 일제는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일전쟁의 선물(?)로 요동반도를 점령하려고 했지만 삼국개입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동북아시아에서 강자로 등장한 결정적인 사건은 러일전쟁이었다. 일제는 러일전쟁의 승리로 관동주를 조차(租借)하였으며, 세계최대의 노천탄광인 푸순탄광을 얻었다.
어림잡아 하루 3만 톤씩 100년을 채굴할 수 있다고 진단했던 일본은 1945년 8월 무조건 항복을 통해 금쪽같은 푸순탄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으로서는 애통한 일이었다. 지금도 그 생산량이 많아서 인지 필자가 2007년 푸순시 항일투쟁 학술회의 참석했을 때 기념품으로 석탄 원석을 가공한 필통을 받았을 정도였다.
탄광의 도시 푸순은 선양(沈陽)에서 약 50km 서쪽에 위치한다. 지금도 조선족들이 2만여 명 거주하고 있다. 중국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운영했던 전범관리소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에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 황제였던 푸이도 10여 년 '사상개조'를 받았다.
1936년 만주국 시기 새롭게 명명한 푸순감옥은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아이러니 하게도 1950년 6월 마오쩌둥의 지시로 푸순전범관리소로 개조되었고, 만주국 관리들은 자신들이 통제하던 곳에서 통제받게 되었다.
1956년 6월부터 7월까지 중국최고인민법원특별 법정에서는 죄질이 무거운 일본 전범 45명에 대한 재판을 열었으며, 별도로 제국주의 침략의 참회와 개전의 정을 보인 자들 1017명을 기소 중지했다.
2006년 전국문물중점단위로 지정된 푸순전범관리소의 전시실은 전범관리 때의 모습을 정리한 상태였다. 특별하게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당시 상황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그들이 공연했던 공연장은 야외 오페라무대처럼 잘 단장되어 있다.
푸이가 생활했던 공간에는 간단하게 그의 옷가지가 전시되어 있다. 이발소를 지나 건물 밖으로 나오면 6.3m의 거대한 탑이 나온다. <푸순순난열사사죄비>인데, 1988년 중국 귀환자 연락회에서 건립했다. 1987년 전범관리소를 전범관리소진열관으로, 한 차원 격상시켰다.
일본이 15년간 중국 대륙을 침략하면서 희생당한 무순항일열사에게 사죄하고 중국과 일본 간의 우의를 돈독히 다지고자 비를 건립한다는 취지였다. 그 옆에 70~80대 일본 관광객들이 유심히 비를 살피고 있다.
마침 푸순전범관리소 전임 관리원 류지아창(劉家常)은 푸이가 이곳에서 생활했던 흔적들을 하나씩 보여주었다. 그는 푸순전범관리소의 살아 있는 역사였다. 푸이가 생활했던 전범관리소 생활을 정리해서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가 일반인도 아닌 전범으로 생활하면서 의술까지 배웠다는 그의 말에는 중국의 무서운 힘이 숨어 있음을 느꼈다. 그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서 내가 만난 한국인은 당신이 처음이야. 여기 관리소 제2대 소장이 조선족이었는데도 말이야."
"누군데요?"
"진위엔(金源) 소장이지. 지금 80이 넘었어. 자식들은 선양에 살고 있지."
"그래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나요?"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본인이야 당연히 오지, 저기 보이는 기념비 있죠?"
눈을 돌리니 좀 전에 보았던 사죄비와 제단이 보였다. 그것은 푸순전범관리소에서 송환된 일본인들이 참회의 뜻으로 세웠다는 기념비라고 류지아창은 힘주어 말했다.
"우리 중국은 항일전쟁시기 수천만 명이 희생되었지만 결코 폭력으로 일본을 대하지 않았어. 시간이 많이 흘러도 평화로 해결하지. 그게 중국과 일본이 다른 점이지."
그러면서 자신이 쓴 책 두 권을 친필 서명으로 주었다. 그와 나눈 짧은 대화는 어쩌면 우리의 자화상인지 모른다. 이곳 제2대 관리소장이 김원이라는 조선족이었는데도 그에 대한 어떠한 인터뷰도 남기지 않고 있다. 물론 조선족 사회에서는 인물록에 수록되어 있지만 파시즘의 종말을 알리는 이곳의 책임자에 대한 무관심이 가슴 아프게 전해 왔다.
무순감옥은 현재도 감옥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행했던 전정혁 선생은 이곳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었고 그 재판기록이 있는데 당국에서 공개하지 않는다고 했다. 푸이보다 먼저 이곳에 있었던 유돈상("안사람 의병가"를 만든 윤희순의 아들)의 흔적은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고문 끝에 순국했던 그의 영혼이 이곳 어딘가에 아직까지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광야에 세워진 국도(國都) 창춘 '위황궁'
공간이 중요한 것은 기억의 가치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유럽의 석조 건물을 보면서 감동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 지린성(吉林省)의 성도(省都)인 창춘(長春)에는 만주국 황제 푸이가 집무했던 공간이 남아 있다.
푸이는 전통시대의 상징적인 인물이며 동북아 전환기에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1906년 북경에서 출생해 1967년 북경에서 숨을 거두었다. 수십년전 영화 <마지막 황제>의 주인공이었던 그는 서양인들에게도 무척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불과 3살의 나이에 황제가 되고 3년 재위 기간 중에 중국의 위대한 혁명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멸망하면서 폐위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꾸준히 세인들의 관심을 받았다. 동북아시아에서 왕조를 '심상'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은 아주 지난한 일이었던 것 같다.
1917년 12일간 복벽으로 다시 황제 자리에 오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1932년 3월 9일 만주국의 집정(執政)으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가 이민족인 일본이 만든 괴뢰국의 최고자리에 오른 결정적인 계기를 역사가들은 '동릉(東陵)사건'에서 찾았다. 이 사건은 군벌이었던 손전영이 하북성 준화현에 있는 청나라 건륭황제의 능묘인 '동릉'을 도굴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에 푸이는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푸이는 "이를 복수하지 않으면 애신각라(愛新覺羅)의 자손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은 공식 성립을 알렸다. 하지만 만주국의 집정 푸이는 아직 신경(新京, 오늘날 창춘)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가 창춘에 도착한 것은 3월 8일 늦은 밤이었다. 일본 스파이와 한간(漢奸, 친일분자)들에게 둘러쌓인 채로 말이다.
다음날인 3월 9일 만주국 집정(執政)에 취임하였으며, 바로 만주국 국기 게양식에 참석하였다. 그는 2년 뒤 1934년 3월 1일 황제에 등극하였으며, 즉위식은 오늘날 위황궁(僞皇宮)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만주국 황궁 근민루 정전에서 거행되었다.
특히 제정이 시작된 이후 제국 일본은 푸이를 위해서 새롭게 궁전을 만들었다. '일만일심일덕(日滿一心一德)'이라는 의미로 동덕전(同德殿)이라고 칭했다. 그런데 만주국 황궁의 정문인 내훈문(萊勳門)은 황제인 푸이와 일본 관동군사령관이 함께 사용하였다. 다시 말해 관동군사령관이 실질적인 만주국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푸이는 민을 위해 부지런히 정사해야 할 근민루에서 제국주의 일본을 대변하는 연회를 개최하거나 관동군 사령관 등 일본 관료들을 접견하는 데 활동을 집중했다. 1935년 4월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일왕 히로히토와 접견하고 일본 전통가무를 관람하면서 요요기 연병장에서 열병식에도 참석했다. 뿐만 아니라 야스쿠니 신사도 참배했다.
만주국으로 귀국한 후 '훈민조서'를 발포한 것도 근민루 승광문 앞이었다. 만주국 관료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다. 1940년 6월, 2차 일본을 다녀 온 후에는 황궁에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을 기리는 건국신사를 세웠다.
오늘날 중국 입장에서는 만주사변과 만주국의 역사는 치욕의 역사라고 여기고 있다. 그럼에도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여 만주사변일(9월 18일)을 국치일로 기억, 기념하고 있으며 만주국의 정통성이 없다는 이유로 푸이가 살았던 황궁을 가짜 황궁이라는 의미로 '위황궁'이라고 명명했다.
아무리 훌륭한 건축물도 그곳의 주인이 정통성을 상실하면, 그 명칭마저도 온전치 못한 것 같다. 제국주의 시대의 일그러진 단면이기도 하지만 시대의 리더는 과연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 지 푸이의 일생을 통해 보는 것도 역사의 한 교훈이라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