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헨더슨 평전을 쓰려는 데에는 한 인물의 전기를 객관적으로, 또는 연대기적으로 기술하기보다 더 높은 동기가 자리하고 있다. 그 인물이 추구한 이상, 사상, 철학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어떤 여백의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공간 안에 내가 그의 영혼과 함께 실존한다고 표현하고 싶다(p. 9). … 나는 이제 40년간 그의 한국 여정을 함께하는 동반자의 마음으로 그의 평전을 쓰고자 한다. 영어로 펠로 트래블러 (fellow traveler)는 단순한 길동무를 넘어 그가 품은 이상, 사상, 철학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다. 나는 이런 마음의 여행 동반자로서 그의 영혼과 함께 한국여행을 떠나고자 한다(p. 10). … 필자는 그레고리 헨더슨이 미국의 한국 전문가로서 그의 학문, 사상, 철학, 인물과 인품, 그가 이룬 업적으로서 한국 정치에 대한 통찰, 특히 미국 국무부의 젊은 외교관으로서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판기록 전체를 남긴 업적, 이어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 용기 있는 그의 실천 등에 주목하여 책을 펴내 그의 영전에 헌정하고자 한다(p. 12)."
한국외국어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부 명예교수 김정기가 그레고리 헨더슨과 지적 동반 여행을 떠난 까닭을 밝힌 것이다. 김정기는 지난 10여 년 동안 다음과 같은 그레고리 헨더슨 관련 연구서를 꾸준히 펴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발견>I · II (2008), <미의 나라 조선: 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기 이야기>(2010), <국회 프락치 사건의 증언>(2021). 10년 이상 오직 헨더슨 연구에 헌신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그레고리 헨더슨 평전>을 펴냈다.
김정기가 그레고리 헨더슨과 지적 동반 여행을 떠나면서 펴낸 <그레고리 헨더슨 평전>(한울 펴냄)은 한국학의 신기원을 열어낸 연구성과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Cf. pp. 255-257). 이렇게 평가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헨더슨은 그의 <한국의 회오리 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서문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한국의 정치적 패턴(the political pattern of Korea)에 관한 연구는 한국 안에서는 물론 한국 밖에서도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바로 그래서 한국 정치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넘쳐나는데, 앞으로도 그런 상태는 계속될 것이다. 단 한 권의 연구서로 그런 난제를 말끔히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헨더슨의 주장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로 평가되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루틴은 모든 사회 시스템의 신과 같은 것이다(Routine is the god of every social system). … 사회생활이 루틴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서 곧 지혜가 시작된다.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루틴이 스며있지 않으면 문명은 소멸하고 만다. 예리한 지성의 소산인 수많은 사회학적 학설들이 이렇게 근본적인 사회학적 진리를 망각함으로써 와해의 길을 걷고 있다."
헨더슨이 한국의 정치적 패턴을 연구하겠다고 밝힌 것은 한국 정치 시스템의 신에 해당하는 루틴을 연구하겠다는 뜻이었다. 헨더슨은 한국 정치의 루틴을 선구적으로 연구했으며, 지금까지 유일한 연구자로 남아 있다. 기존 한국학 연구 중에서 루틴을 밝힌 연구는 없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용어로 표현하면 기존 한국학 연구는 모두 와해의 길을 걸은 것이다.
루틴이란 강력한 관성을 지닌 사회의 관습을 의미한다. 헨더슨은 한국의 정치적 관습의 강력한 관성도 정확하게 통찰했다.
"(헨더슨은) 한국전쟁이 조선조 500년간 뿌리 깊이 형성된 한국 정치의 패턴을 바꾸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 정치적 투쟁과 그 목적은 변하지 않았으며, 그 진행 과정조차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국토의 4분의 3을 초토화시킨 엄청난 파괴력을 보인 전쟁도 한국 정치 패턴을 그다지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가를 보여준다(p. 151)."
헨더슨이 여타 연구자와 달리 한국 정치 특유의 루틴을 정확하게 간파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화이트헤드의 용어로 표현하면 헨더슨은 대단히 뛰어난 ‘사변이성(the speculative Reason)’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화이트헤드가 ‘플라톤의 이성(the Reason of Plato)’으로 별칭한 사변이성은 예리한 통찰력, 예술적 상상력, 발상의 모험 등을 동원해서 사태의 완전한 이해를 추구한다. 김정기도 "헨더슨의 경우 상상과 사색을 겸비한 에세이스트이자 철학자이다(p. 340)"라고 평가했다. 화이트헤드는 사변이성을 이렇게 예시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오직 뉴턴만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역학관계의 수학적 도식을 떠올렸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사원과 교회의 천장에 매달린 램프가 왕복운동 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오직 갈릴레오만이 램프의 왕복운동을 목격하면서 역학관계의 수학적 도식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헨더슨이 사변이성을 발휘해서 한국 정치의 루틴에 주목한 계기를 눈여겨보자.
"어떤 주제는 최근이든 이전이든 한국 사회와 정치연구에서 나타난다. … 하지만 그 배후에 좀 더 깊고 영속적인 한국 정치 행동의 토착적 특성이 놓여 있는 것 같다. 이조 왕정의 당파, 일진회, 자유당과 민주당 등 최근 20년간 부침을 거듭한 수많은 정당들이 하나의 일정한 형태로 외적인 현상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들은 플라톤이 말하는 '페라스(peras)'와 같은 것이다. 좀 더 영속적이고 토착적인 주제는 플라톤의 ‘아페이론(apeiron)’과 같이 지속적인 사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 분석컨대 우리들이 통찰해야 할 것은 아페이론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한국의 정치 현상을 지나가는 사건으로 이해하면 우리는 진정한 이해를 저버리게 될 것이며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기회도 잃어버릴 것이다(p. 256)."
헨더슨은 아페이론에 비유한 루틴을 통찰할 때 진정한 이해가 가능하며, 그런 이해에 도달해야만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적절한 처방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 등을 강조했다. 실제로 헨더슨은 한국 정치의 병리를 진단하고 처방하는 내용을 방대한 분량으로 남겼다. 김정기는 그 내용을 그레고리 헨더슨 평전의 제2부, "한국 정치의 병리를 진단하고 처방하다"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제2부는 무려 170여 쪽에 달하는데, 그레고리 헨더슨 평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루틴에 관한 연구가 부재한 기존 한국학 연구에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헨더슨 특유의 지적 성취가 아닐 수 없다.
헨더슨은 자신의 사변이성으로 통찰한 한국 정치의 가장 대표적 루틴을 ‘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로 명명하면서 자신의 책의 제목으로 설정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Vortex’는 ‘소용돌이’로 번역해서 유통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번역은 헨더슨에 대한 이해의 빈곤을 단적으로 예증하는 것이었다. ‘소용돌이’로 번역할 경우 헨더슨의 책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헨더슨 자신이 이 문제를 대단히 심각하게 지적했다.
"헨더슨의 책 제목의 원제 ‘the politics of the vortex’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한국어 번역판은 ‘소용돌이’로 번역하여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한울엠플러스, 2000, 2013)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하지만 ‘회오리 정치’로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헨더슨은) 1988년 수정판 서론에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내가 끌어들인 vortex 상(像)은 토네이도 (tornado: 미국 중서부에서 흔히 발생하는 큰 회오리 폭풍)에서처럼 거대한 원뿔이 전진하면서 위협적으로 방향을 틀 때 평지의 개체들을 먼지로 빨아들여 공중 높이 진공 주위로 맴도는 현상이다. 나는 물이 회전하면서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용돌이(down-sucking water vortex of the whirlpool)를 떠올린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하면서 물의 소용돌이가 아니라 회오리 폭풍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1973년 번역 출간된 일본어판이 朝鮮の政治社會라는 제목 밑에 <渦卷型の分析>라는 부제를 달아 ‘소용돌이 형’이라고 번역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시사한 것이다. 곧 그는 ‘渦卷型’이 밑으로 빨아들이는 물 소용돌이를 연상케 했기 때문에 한국어판에서는 이를 시정하려 했을 것이다(p. 220. 인용 내용 일부 수정)."
헨더슨에 대한 이해의 빈곤은 ‘Vortex’란 용어의 번역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헨더슨 관련 학술적 연구는 거의 불모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김정기는 그런 상태를 이렇게 지적했다. "지은이는 헨더슨이 내놓은 정치이론의 경우, 비교적 간단한 서평 수준을 제외하면 비교정치의 관점에서 다룬 논문이나 연구는 거의 본 일이 없다. 비교정치의 관점에서 다룬 논문은 아니지만 헨더슨의 회오리의 한국정치를 비평한 논문으로 「그레고리 헨더슨의 현대사 이해」(백운선, 1998)가 나온 것은 헨더슨 책이 발표된 이후 30년 만의 일이다. 헨더슨의 책도 32년 만에 한국어 번역판(소용돌이의 한국정치, 2000)이 나왔는데, 이는 일본어판이 1973년 나온 지 27년 만의 일이다(p. 249. 인용 내용 일부 수정)."
한국학에서 헨더슨 관련 학술적 연구가 끝없이 방기된 까닭은 헨더슨의 천재적, 독창적, 파격적 사변이성의 궤적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헨더슨의 각종 책과 논문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그레고리 헨더슨 평전의 출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제 우리도 <그레고리 헨더슨 평전>의 안내를 받으면서 한국학의 신기원의 지평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헨더슨이 볼 때 ‘회오리 정치’라는 한국 정치 특유의 루틴은 조선 시대 유교와 평의회 지배(council rule) 등을 배경으로 형성되었다. "(헨더슨은) 한국 사회의 중앙집중화는 조선왕조가 국가통치 이념으로 채택한 유교주의가 그 연원(淵源)이라고 믿는다. … 조선의 여러 유교 세력들은 중앙 관료기구를 향해 가차 없이 모든 야망을 불태웠다. 과거제도는 지방의 인재들을 고갈시킬 만큼 나라의 가장 총명한 모든 인재들을 중앙으로 끌어들였다. … 프랑스에서 파리가 그랬듯이 한양은 조선 최대의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그 자체였다(p. 249)."
헨더슨이 말하는 "평의회 지배란 왕권의 단독 지배의 대칭 개념을 의미한다. 그는 평의회 지배도 역시 한국 전래의 정치 문화에서 찾고 있는데, 멀리 7세기 신라의 화백(和白) 제도에 기원하지만 그 원형이 조선조 시대의 '대간(臺諫)제(the censorate)'에 유래한다고 믿고 있다. 조선조의 군왕은 최고의 통수권자이지만 대관(臺官)과 간관(諫官) 등 대간이 간쟁을 통해 왕을 비판하는 기능을 수행하여 실제 군왕통치가 평의회 지배 형태를 지녔다는 것이다(pp. 252-253)."
왕권의 단독 지배란 군주가 권력을 전적으로 독점한 전제군주제를 말한다. 전제군주는 자신의 강력한 권력으로 신하를 통제한다. 따라서 전제군주제하에서는 신하들 간의 당쟁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조선의 정치체제에서는 군주의 권력이 과도하게 신하에게 이양되었다. 따라서 군주는 자신의 취약한 권력으로 신하들 간의 당쟁을 정치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다. 조선의 정치체제에서는 당쟁이 구조적으로 허용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대간제의 취지가 변질되어 조선조 시대 유교 원리에 관한 교조적 공리공론을 일삼아 사색당파 싸움의 온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 이 변질된 평의회 지배의 유산이 파벌주의로 남아 해방 뒤 한국 정치에 고스란히 전승되었다는 것이 헨더슨의 견해이다(pp. 253-254)."
헨더슨이 한국 정치의 루틴으로 파악한 회오리 정치를 통해서 한국 정치의 병리적 현상을 진단한 사례 몇 가지를 간략하게 검토해 보자.
헨더슨은 영호남 지역감정이 연산군 시대 회오리 정치에서 시작되었다고 진단한다. "헨더슨은 이른바 경상도-전라도 적대(rivalry)가 파벌주의 싸움이 반복되는 가운데 패턴(pattern)으로 굳어졌다고 보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 사림학파는 성종의 너그러운 치세 기간 조정에 들어갔지만 그러나 연산군 폭정 기간 (1495-1506) 다시 물러났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또 다른 '학자' 그룹이 이 중대한 시기에 왕에 동조해 사림학파를 억압한다. 유자광과 그 일파가 그들인데 주로 전라도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전라도와 경상도 간의 적대를 우리에게 알려주게 된다. 이것이 다른 지역 적대 현상과 함께 한국 파벌주의의 한 면(one facet)으로 생각된다(p. 352)."
김정기는 헨더슨의 진단을 이렇게 평가한다. "나는 경상도 · 전라도 적대가 박정희 시절 ‘호남 차별’(강준만, 1995)에서 불거져 나온 현상으로 알았지 그 뿌리가 조선왕조 시절 사림학파 · 관학파에 거슬러 올라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p. 353)."
헨더슨의 진단은 회오리 정치라는 한국 정치 특유의 루틴을 통찰하면서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치의 루틴에 몽매한 기존 한국학은 단순히 박정희의 호남 차별에 주목하기 쉬웠다. 그러나 그런 진단은 한국 정치의 루틴에 몽매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와해의 길을 걸은 것’이었을 뿐이며, 따라서 적절한 처방의 기초가 결코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영호남 지역감정 문제가 지금껏 해소되지 않는 결정적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헨더슨이 대단히 독창적 시각에서 정약용을 연구한 내용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헨더슨은 정약용의 실학 그 자체에 대한 맹목적 애착 때문에, 정약용과 일본 유학자를 비교하고 싶은 지적 호기심 때문에 연구에 착수한 것이 아니다. 조선 최고의 학자 정약용의 사상이 쇠락하는 조선을 구원할 수 있는 지적 역량을 가진 것이었는지, 조선의 정치 문화는 정약용에게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여건을 최대한 허용했는지 등등의 관심 때문에 연구에 착수했다.
헨더슨은 정약용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정약용의 사상은 조선의 국난을 극복할 가능성을 지녔지만,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부분 또한 지녔다. 쇠락하는 조선은 정약용과 같은 최고의 학자들을 최대한 등용해서 최대한 활용해도 국난 극복이 불투명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조선 특유의 회오리 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야만 했다. 따라서 조선이 자체 역량을 발휘해서 국난을 극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헨더슨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정다산과 그의 일파의 패배는 19세기 말엽의 대세에 적응하려는 조선의 비극적인 실패와 중요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확실히 이조 말엽에 일어난 이 사건은 조선이 서양의 현대적 세력의 조류와 부딪치던 그 당시의 정치적 사정과 지적 태도를 암시해 준다(p. 328). … 다산은 통렬히 비판하고 저술을 발간하고, 사회적 병을 처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조 체제를 개혁할 수는 없었다. 체제의 방식에 매몰되고, 내재적 사회 계급에 의해 독점이 증가되어 더욱 넓게 깊게 부패되어 앙시앵 레짐(ancient régime = 구체제)은 지속되고 유교적 패턴 속에서 개혁할 수도, 서양의 새물결의 요점을 읽어낼 수도 없었다. 다산은 또한 서양 사조의 전체상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만일 다산의 보다 넓고 실제적인 견해가 이조 왕조에 군림했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하여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분명히 다산 같은 이가 여러 명 있었더라도 이조 정권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유의 인물이 더 많이 있었더라면 서양에의 조선의 적응 기록에 좀 더 건설적인 몇 장의 이야기를 더 했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pp. 334-335)."
일제 강점기에 잠복 되었던 한국의 회오리 정치는 해방이 되자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4·3사건, 여순사건 등과 같은 민간인 대량학살의 반복, 여운영, 김구, 송진우 등과 같은 요인 암살의 반복, 극단적 좌우분열, 만성적 시위 등등을 고려할 때 ‘토네이도 정치’로 지칭해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헨더슨은 한국 정치의 루틴에 기대어 해방 정국을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헨더슨이 국회 프락치 사건을 평의회 지배의 렌즈로 조명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그는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된 소장파 의원들을 조선 중기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림 세력으로 비유했다. 제헌국회에서 소장파가 이승만-한민당 세력에 맞서 펼친 토지개혁, 지방자치, 부일 세력 척결 등 개혁 입법 활동을 ‘조광조와 그의 젊은 유교 세력의 정신으로’ 벌였다고 비유했다. 이어 이승만과 경찰은 이들을 체포하고 공산당이라는 증거를 조작한 수법을 동원했는데, 이는 1519년 훈척(勳戚) 세력이 조광조 개혁파에 사용한 전술과 같은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전반적으로 국회를 평의회 기관의 부활로 보면서도 당시 이승만을 연산군(燕山君)으로 비유하면서 1949-1950년 국회 프락치 사건을 제1라운드,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을 제2라운드 공격으로 묘사했다. 헨더슨은 평의회와 대통령 간의 투쟁은 두 차례 있었으나 대통령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는데 여기에는 미국의 지원이 결정적인 몫을 했다고 봤다. 그 이후 국회는 평의회 기관으로서 결정적으로 쇠락하고 이승만 독주의 행진은 계속된다. 그 뒤 평의회 유산은 정당으로 넘어가게 된다. 변질된 평의회는 한국 정치의 파벌주의로 온존하게 되었다고 헨더슨은 믿는다(pp. 254-255)."
헨더슨이 이승만을 연산군의 맥락에서 해석하고, 국회 소장파를 조광조의 맥락에서 해석한 것은 역사를 자의적으로 유비한 것이 아니다. 한국 정치사를 관철하는 루틴의 강력한 관성을 정확하게 통찰한 상태에서 진행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헨더슨의 해석은 정치적 개혁이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정치적 개혁을 시도할 경우 루틴의 강력한 관성이 강력하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헨더슨의 연구가 루틴에 몽매한 대부분의 한국 정치의 연구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여기에 있었다.
나는 헨더슨이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을 접하면서 탄복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접한 한국전쟁 연구자들은 모두 한국전쟁의 기원을 추구했다. 그들은 특정 인물에게서 기원을 찾은 다음 그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전가했다. 그런데 학자마다 기원이 달라서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들의 논쟁은 견해가 다른 학자에 대한 동물적 적대감을 수반하기 마련이어서 가히 당쟁 수준으로 치달았다. 하지만 헨더슨은 그들과 달리 한국전쟁이 한국의 정치 발전이나 남북관계에 끼친 영향력에 주목했다.
"헨더슨은 … 한국전쟁의 원인이나 배경보다는 그 결과가 (한국) 정치에 끼친 영향에 관심을 표한다. 이런 관점에서 전쟁이 한국 정치나 남북관계에 끼친 악영향은 정치의 ‘중간 지대’ 상실이라고 말한다. …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된 ‘소장파’ 국회의원들뿐만 아니라 김규식, 안재홍, 조소앙 등 중도파 명망가들이 대거 납북되었거나 전쟁의 분진 속으로 사라진 것에 대한 그의 개탄이 서려 있다(p. 161). … 헨더슨은 무엇보다도 무고한 한국인들이 죽어갔고 특히 중도파들이 사라진 것을 ‘서울 비극의 가장 주목을 끄는 부분(the most absorbing part of the tragedy of Seoul)’이라고 말(했다). … 그는 사라진 ‘명사들(prominent men)’의 숫자에 놀라면서 몇 명의 정치인과 국회의원들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다. 곧 김규식, 안재홍, 조소앙, 윤기섭, 원세훈, 조훈영, 엄상섭, 김용무, 백상규와 그의 아들(p. 164). … 정치의 ‘중간 지대’ 상실은 한국 정치의 절체절명의 숙명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이 그의 견문이다. 즉 정치의 중간 지대 상실은 신생 대한민국의 실패이자 민주주의의 실패이며, 여기에는 미국 대한정책의 실패가 가로놓여 있다고 그는 본 것이다(pp. 161-162).” 요컨대 헨더슨은 정치의 중간 지대를 궤멸시킨 “한국전쟁을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회오리 정치의 절정으로 진단한다(p. 160)."
그러면 한국의 회오리 정치는 한민족의 ‘천형’인가? 헨더슨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한국의 회오리 정치는 민족성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 문화의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극복할 수 있고, 또 극복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나름의 처방전까지 제시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회오리 정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있다. 헨더슨은 ‘회오리 정치의 패턴이 유전병일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회의 유전병이지 혈통의 유전병은 아니며, 따라서 투병을 할 수 있고, 더욱이 고칠 수도 있다(The vortex pattern may be a hereditary disease, but it is one of the society, not the blood: it can be combated, even healed)’고 진단한다. 그가 내놓은 처방전은 무엇인가? 지은이는 그것을 한마디로 중간 지대의 정치 합작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남한 국내 정치의 역학 속에, 또는 지역 정치의 대립각 속에, 그리고 남북한 간에, 한국 정치가 풀어야 할 영원한 숙제이다. 헨더슨은 먼저 애초 한국은 이승만의 극우파가 지배해서도 안 되고, 김일성의 극좌 전체주의가 휩쓸어서도 안 되는데도 현실은 극우 또는 극좌의 극한지대로 뜀박질해 가버린 것이 한국 정치의 비극이라고 진단한다. 따라서 그의 생각은 어쩌면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다. 곧 한국은 극한지대의 대결 정치로부터 중간 지대의 관용 정치로 옮겨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헨더슨이 본 한국 정치발전의 비전이다. 이 비전은 그가 진지한 학구적인 결실로 처음 발표한 1968년 회오리의 한국정치(이어 그가 1987-1988년간 쓴 전정 수정판)라는 노작에 반어법(反語法)으로 담겨 있다(p. 221, 인용문 일부 수정)."
독일의 정치지형과 한국의 정치지형을 함께 보노라면 낙타가 떠오른다. 중간 지대가 다수를 점하는 독일의 정치지형은 단봉낙타를 떠올리고, 중간 지대가 아예 부재한 한국의 정치지형은 양봉낙타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단봉낙타는 중간 지대의 관용정치를, 양봉낙타는 좌우 극한 지대의 대결정치를 각각 상징한다. 동방정책이 서독에선 성공한 반면, 동방정책을 벤치마킹해서 출범한 햇볕정책이 한국에선 난파하고 말았던 결정적 이유도 여기에 찾아볼 수 있다. 헨더슨이 제시한 한국 정치의 처방전은 양봉낙타형 정치지형을 단봉낙타형 정치지형으로 바꿔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루틴에 몽매한 한국학에선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처방전이 아닐 수 없다.
"헨더슨이 관찰한 한국 정치는 해방정국에 이어진 이승만의 원시 독재 정치, 이어진 군사정권 아래서 실종된 정치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정치발전론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으로 사라진, 또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반신불수가 된 중도파의 복원, 또는 중간정치기구(온건파 정당)의 ‘응집력’ 구축이 한국 정치발전의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간명하게 중간 지대의 정치 합작으로 표현할 수 있(다.) … 헨더슨은 (국회 프락치 사건 당시) 국회 소장파가 걸었던 중간 길이야말로 회오리 정치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 중간 지대 정치 합작이란 무엇인가? 먼저 정치의 중간 지대란 정치이념 스펙트럼에서 극우와 극좌를 배제한 온건 우파와 온건 좌파를 아우르는 중간 영역이다. … 정치 합작이란 정치 성향을 달리하는 정치 세력들이 중간 지대로 모여 룰에 따라 경쟁하는 정치 게임이다. 이 정치 게임은 '중심이탈형 경쟁(centrifugal contest)’으로부터 ‘중심지향형 경쟁(centripetal contest)’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큰 방향은 전자로부터 후자로 이행하는 경쟁이 정치 안정과 발전을 가져온다. … 예컨대 전후 서독의 정당정치에서 기독교민주당(CDU/CSU)과 사회민주당(SPD)은 초창기 독일 재통일 문제를 둘러싸고 정반대의 이념 투쟁을 보이는 중심이탈형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 뒤 양당은 타협의 길을 모색하여 ‘동방정책(Ostpolitik)’에서 서로 만났다. 구체적으로 SPD는 1949-1969년 사이에 좌익 축에서 우회선으로 옮겨온 반면 CDU/CSU는 1969년부터 1980년대를 통해 우익 축에서 좌선회해 온 과정을 밟아 두 경쟁 정당이 동방정책에서 만난 것이다. 이러한 중간 지대에서 (이루어진) 정치 합작은 남북 간에, 남남 간에, 지역 간에 (고착된) 대결과 경직된 정치구조를 완화하고 타협과 관용의 정치를 지향케 한다. 따라서 이는 남한 국내 정치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남북한 간의 대결과 긴장에서 화해와 협력으로 나아가게 한다(pp. 262-266)."
<그레고리 헨더슨 평전>에는 헨더슨이 미국의 5·18 개입 문제를 선구적으로, 그리고 치열하게 지적했던 경위, 프레이저 한국 인권청문회에서 박정희의 인권탄압 문제를 탁월하게 고발했던 경위, 1973년 8월 일본에서 납치된 김대중을 헨더슨의 신속한 조치로 구출할 수 있었던 경위, 고려 및 조선의 도자기 미학, 고려청자와 고려불교의 관계 문제 등등도 수록되었다. 이 모든 내용을 천천히 읽으면 구름에 색칠해서 달을 드러내듯(烘雲托月) 헨더슨의 다양한 면모가 서서히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레고리 헨더슨 평전>이 드러낸 헨더슨의 종합적 면모를 창조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한국 정치가 직면한 시대적 과제를 치열하게 해결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