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무엇보다 망언을 함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챙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망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자들은 선거 때 낙선은커녕 당선돼 으스대곤 한다. 망언이 오히려 유권자들의 표심을 사로잡는 것이 일본의 정치현실이다. 일찍이 동양통신 주일특파원을 지냈던 언론인 김용범의 글을 보자.
[(망언이 그치지 않는) 요인은 먼저 일본의 과거사를 정당화하려는 세력이 엄존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망언을 내뱉는 사람은 그런 세력의 대변자이자 조장자이다. 그들은 망언으로 정치적 득을 보았으면 보았지 손해를 보지 않았다. 이는 망언 발설자들이 선거 때마다 고스란히 당선되어 나카타초(永田町)의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는 데서 잘 알 수 있다](김용범, <일본주의자의 꿈> 푸른역사, 1999, 225쪽).
망언으로 정치적 입지 다진다
'망언 발설자'들이 소속 정당에서 공천을 못 받는 등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을까. 이원덕(국민대, 일본학연구소장) 교수는 오히려 그 망언을 발판 삼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선거철이 오면 극우집단의 지원을 받아 무난히 당선된다고 풀이한다.
[망언에도 불구하고 소속정당에서의 이들의 입지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보수우파 원로들의 묵시적인 지원과 격려를 받게 됨으로써, 정치적인 지위를 보장받게 되는 효과를 가져온다. 정치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거에서의 득표력이다. 망언의 주인공들이 차기선거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유권자 조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이원덕,「일본 정치지도자들의 '망언'과 일본정계」<한국사 시민강좌> 제19집, 1996년 8월).
그런 유권자 조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야스쿠니 신사를 성지로 여기는 일본유족회다. 또한 극우 성향이 강한 일부 언론사와 사회단체들이 조직적으로 옹호·지지한다. 언론사로는 <산케이신문>과 자매월간지인 <세이론>(正論), 보수 월간지 <분게이슌주>(文藝春秋)와 자매 월간지 <쇼군>(諸君), 그리고 <하나다>(HANADA), <윌>(WILL), <사피오>(SAPIO), <보이스>(VOICE) 같은 보수우익 언론사들을 꼽을 수 있다.
이들에게 한국의 '신친일파' 필진들은 대환영이다. 이를테면, 2019년 강의실에서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 궁금하면 해볼래요?'라는 망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류석춘(전 연세대교수, 사회학)는 <하나다>(HANADA) 2020년 8월호에 자신의 '위안부' 망언 파문이 일어나게 된 전후사정을 소개했다. '완전독점수기'란 부제 아래 '한국교수의 목숨을 건 호소, 날조된 위안부사건'이란 제목을 단 기고문은 자신의 '위안부' 망언을 변명하면서, 지난날 강제징용이나 공출 등에 대한 한국 쪽 비판이 잘못됐다고 그 특유의 궤변을 되풀이했다. 그런 글을 읽는 일본인들 사이에, 특히 '넷우익'이라 일컬어지는 극우 유튜버들에게 혐한(嫌韓) 감정을 불러일으킬 먹거리를 차려준 모양새다.
'21세기 망언제조기' 아소 다로
2008년 9월부터 1년 동안 총리를 지낸 아소 다로(麻生太郎, 1940~)는 일본 정치인 가운데 '21세기 망언제조기'라 일컬어질 만하다. 아소의 부친 아소 타카키치는 일제 강점기 시절 후쿠오카에서 '아소 탄광'을 운영했던 전범기업가다. 강제동원된 1만 명 넘는 조선인들을 '노예노동'으로 착취해 엄청난 부를 쌓았다. 아소 다로는 '아소 탄광'의 후신인 '아소 시멘트'의 실소유주다.
아소의 주요 경력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총무대신과 외무대신을 지냈고, 극우 성향의 아베 신조와도 사이가 좋아서 아베 내각에서 2012년부터 2020년까지 재무상 겸 부총리 등을 지냈다.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총리의 외손자이고,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전 총리가 그의 장인이다. '정계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기에, 능력에 비해 관운이 좋은 편이란 소릴 들었다.
아소의 외조부 요시다 시게루는 한일회담을 앞두고 재일 한국인을 가리켜 '뱃속의 벌레'라는 망언을 했다(본 연재 26 참조).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쿠데타 뒤인 1962년 2월 한일회담이 다시 열리게 되자, 그 무렵 정계은퇴를 앞두고 있던 요시다는 이런 망언을 내뱉었다. "우리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길을 따라 다시 한 번 조선땅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윤대원, <21세기 한중일 역사전쟁> 서해문집, 2009, 53쪽).
아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망언이다. 2017년 9월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져 일본으로 난민이 몰려온다면, 대응방책의 하나로 '사살'을 꼽아 듣는 일본인들조차 놀랐다. 2018년 5월 전 재무성 사무차관의 성희롱 사건이 터지자 "성희롱은 죄가 아니다"라는 망언으로 여성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망언제조기'라는 별명답게 망언 목록은 길지만, 되도록 짧게 간추려본다.
△ (2003년 5월 도쿄대학 강연) "창씨개명(創氏改名)은 조선인들이 (일본)성씨를 달라고 한 것이 시작이었다. 한글은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가르친 것이며 의무교육 제도도 일본이 시작했다. 옳은 것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 좋다."
△(2005년 5월 영국 옥스포드대학 강연) "운 좋게도, 정말 운이 좋게도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 일본 경제 재건을 급속도로 진전시켰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옳고 앞으로도 계속하겠다. 야스쿠니 신사의 군인들을 A급 전범이라고 결정한 것은 일본이 아니다. 미군 점령군이 결정한 것이다."
△(2006년 1월 28일) "야스쿠니 신사의 영령은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지 '총리 만세'를 외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신사 참배는 총리보다 천황이 하는 것이 최고다"
△(2006년 2월 일본 식민지였던 타이완을 언급하면서) "타이완은 일본이 실시한 강제교육 때문에 교육수준과 읽고 쓰는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 덕분에 타이완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게 됐다. 일본은 좋은 일을 했다."
△(2007년 5월 독일 포츠담 G8 외무장관회담 무렵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에게) "전쟁이 조금만 더 길어졌다면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전승국이 되었을 것이다."
아소의 망언을 모아보면, 그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반성하는 역사인식과는 거리가 멀다. 일본 국왕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바라는 극우적 사고의 틀 속에 갇혀 있고, '한국과 타이완이 일본의 식민지 통치 덕을 봤다'고 여긴다. 한마디로 아소의 망언들은 이즈음 한국의 신친일파들이 입만 열었다 하면 내거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맥락을 같이한다.
아베, 사과-망언 사이를 줄타기
1년 전인 2022년 7월8일 유세장에서 사제총에 맞아 죽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1954-2022) 전 총리도 위의 아소 다로처럼 '정치적 금수저' 출신이다. 1950년대 후반부에 일본 총리였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외할아버지다. 기시는 일제 말기의 도조 히데키 전시내각에서 군수성 차관과 상공대신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이바지했다. 1945년 패전 뒤 '주요전범자'로 감옥에 갇혀 2차 도쿄전범재판을 기다리다가 1948년 12월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풀려난 뒤 외무대신과 총리를 지냈다(본 연재 7 참조). 그런 외할아버지를 존경한다면서 정치판에 뛰어든 아베는 강제동원, '위안부' 성노예, 역사교과서 왜곡, 독도 영유권 등에서 한국에 맞서 날을 세웠다.
아베는 극우 성향을 지닌 데다 총리 재임기간이 긴만큼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문제성 발언을 남겼다. 두 차례에 걸쳐 9년 동안 일본 총리(1기는 2006년 9월-2007년 9월, 2기는 2012년 1월-2020년 9월)를 지낸 아베는 사과와 망언을 되풀이했다.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 문제에 대해 사과성 발언을 했다가, 얼마 뒤 "위안부 강제연행과 강압의 증거가 없다"며 뒤집는 망언을 하곤 했다.
한국 외무부가 작성한 <2018 일본개황>에 실린 아베의 발언록을 보면 도대체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한 것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다. (본 연재 27에서 살펴본)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부인했다가 '계승'한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아베가 사과와 망언 사이를 어떻게 줄타기했는지를 주제별로 들여다보자(외무부 홈페이지 검색란에서 <2018 일본 개황> 치면, 과거사 반성은 247-257쪽, 역사왜곡 망언은 258-283쪽).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 관련]
△2007년 3월1일 기자단 질의의 답변: "군(軍)이나 관헌이 집에 들어가 강제로 끌고 간 '위안부 사냥'과 같은 협의의 강제성을 뒷받침할 자료가 없다. 당시의 경제사정 등을 감안한 광의의 강제성은 있을 수 있으며, '고노 담화'의 계승은 이러한 강제성의 정의가 바뀐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한국에서 비판이 쏟아지자, 아래처럼 달라진다).
△2007년 3월26일 참의원 예산위 발언: "위안부 피해자들이 쓰라린 경험을 한 데 대해 동정의 마음과 더불어, 그러한 처지에 놓인 것에 대해 사죄의 마음을 전한다. 지금 제가 총리로서 사죄의 마음을 전하며, '고노 담화'에서 말하고 있는 그대로다."
[무라야마 담화 거부와 계승]
△2013년 4월22-23일 참의원 예산위 발언: "아베 내각으로서 소위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계승한다는 것은 아니다. '침략'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정의가 제대로 내려져 있지 않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무라야마 담화'에 문제가 있다."
△2013년 10월22일 중의원 예산위 발언: "아베 내각으로서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부정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무라야마 담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베 내각도 동일한 인식을 갖고 있으며,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 관련]
△2014년 12월15일 <이코노미스트> 인터뷰: "위안부 강제연행과 강압의 증거가 없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그릇된 이유로 일본의 명예가 훼손되면 이를 시정해야 한다"
△2015년 1월28일 참의원 본회의 발언: "지금까지 말씀드렸다시피 아베 정권으로서는 '무라야마 담화'로 시작해 역사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해 나간다는 입장이다."
'위안부' 성노예를 둘러싼 아베의 역사인식은 '일본 정부의 자료 안에는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연행을 나타내는 기술은 없었다'는 것이다. 밤에 자고 있는데 일본 군경이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끌고 가는 따위의 (아베의 용어로는 '좁은 의미의') 강제연행이 없었으니 일본정부엔 책임이 없다는 얘기다. 이런 주장은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위안부 동원에서 일본군이나 관헌의 강제성 개입'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던 '고노 담화'(1993년 8월4일)나 '무라야마 담화'(1995년 8월15일)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망언 제조기' 아소 다로와 마찬가지로, 아베는 이런 담화들이 이른바 '자학사관'(自虐史觀)에 빠져 있다고 여긴 극우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민중사학자'로 널리 알려진 야스마루 요시오(전 교토대 교수, 일본사상, 2016년 타계)는 일본 극우세력이 '좁은 의미의 강제'를 들먹이며 과거사를 지우려 하는 교활한 행태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속아서든 강제로든 그 지옥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 '위안부' 여성들이 끝내 체념하고 상황에 적응해간 것도 강제나 폭력과 무관하지 않다"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감언, 인신매매, 유괴와 현지에서의 일상적 관리 등은 '강제'가 아니냐"고 되물었다(일본의 전쟁책임 자료센터, <일본의 군 '위안부' 연구>, 2011, 83쪽. 본 연재 13 참조).
"자, 기다리면 한국 쪽에서 접근해 온다고"
아베의 교활함은 한일 위안부 최종 합의(2015년 12월28일)로 이어지는 협상 과정에서도 엿보인다. 아베는 총리 관저를 드나드는 기자들 가운데 선임기자들이 모이는 '오프더레코드(off-the-record) 친목회'(이른바 '오프콘')에서 술기운 탓일까, 가볍게 입을 놀리며 속내를 드러냈다.
"자, 기다리면 한국 쪽에서 접근해 온다고 (두고 봐라). 종군위안부 문제는 3억 엔이면 해결된다. 그래도 돈의 문제가 아니니까"(2015년 6월29일자 일본 주간지 <슈칸겐다이>週刊現代).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합의는 일본이 10억 엔을 한국에 건넴으로써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했다. 하지만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해온 피해 당사자들의 동의를 받지 못했기에 파행으로 끝났다. '위안부' 성노예 졸속합의(2015년 12월)로 한일 사이에 갈등의 골은 깊이 패였고, 8년 뒤 강제동원 노예노동의 제3자 변제안(2023년 3월)으로 불신의 벽이 더 높아졌다. 이 두 개의 사안은 '외교 참사'라는 비판 속에 지금도 한일 사이에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다.
기시다, 녹음기처럼 '계승' 말하는 이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는 아베와 다를까. 2023년 5월7일 한일정상회담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과거사 문제를 묻자, 그는 "당시 혹독한 환경 아래 다수의 분들께서 대단히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 굉장히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얼핏 들으면 사과나 반성의 뜻을 담은 듯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문제점이 드러난다.
총리로서가 아닌 개인적 의견을 말한 것이라는 전제 아래 나온 기시다 총리의 답변은 강제동원 피해자를 직접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주어 또는 목적어가 생략돼 누구에게 말을 하는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한국으로 귀화한 호사카 유지(세종대 독도연구소장)는 "기시다 총리의 발언은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는 일본인들도 고생했기 때문에, 일본인을 포함한 발언으로도 생각될 수가 있다"고 비판했다. '교묘한 말투로 (사과의 대상인) 목적어를 애매하게 한 표현'이란 지적이다.
기시다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역대 일본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는 기존 입장을 거듭 밝혔다.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는 것은 두 번에 걸쳐 9년 동안 총리를 지낸 극우 성향의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입장을 넘어서지 않겠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또한 여기서 '역대 내각의 입장'이란 '무라야마 담화'(1995)를 가리킨다.
지난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무라야마 담화'엔 숨은 노림수가 있다. 총리실이 아니라 외무성 종합외교정책국이 작성한 '담화'에는 식민지 지배와 피해에 대해 '포괄적인 사과'만 할 뿐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실제적인 배상을 일본 정부가 외면하겠다는 내부 방침이 감춰져 있다. 정상회담이나 8.15 등 특정한 날에 공식석상에서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는 식으로 대충 넘어간다는 것이 외무성의 장기 전략이다. 따라서 한국 시민들은 오는 8월15일 기시다 총리가 상투적인 '계승' 발언을 듣게 될 것이 뻔하다.
리영희의 비판, "일본의 망언만 탓할 게 아니다"
비판적인 지식인의 표상이라 할 리영희(1929-2010)는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본 연재 24에 살펴봤듯이, 1974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총리는 일본 국회 중의원에서 "일본이 김 양식법을 가르쳤고 의무교육제도를 실시했다"며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미화하는 망언을 했었다. 당시 한양대 신방과 교수로 있던 리영희는 월간지 <세대>에 쓴 글에서 다나카 망언을 비판하면서도, 그런 망언이 나오는 까닭이 무엇인지 짚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리 것을 열등한 것으로 부정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식민지 통치시대에 우리에게 실시한 교육을 자랑하고, 그것이 한국인에게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방된 순간부터 독립민족으로서 스스로를 되찾는 과정에서 꼭 해야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우리 민족의 존립 이유를 부정한 식민지 교육이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는 해가 될지언정, 결코 이로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의 행동으로 실증해 보이는 데 있었을 것이다"(리영희,「다나카 망언을 생각한다」<세대> 1974년 5월호).
이 글은 같은 해 9월 일본 시사월간지 <세카이>(世界)에 실려, 일본인들 사이에 널리 읽혔다. 리영희는 같은 글에서 한국의 교육이 '일본의 식민지 교육'의 입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서, 이렇게 묻는다. "8.15 뒤 한국의 교육이 일본의 식민지 교육에 젖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현실에서, 일본의 식민지 교육이 한국에 유익했다는 다나카의 말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는가?" 결론적으로, 리영희는 일본의 망언만 탓할 게 아니라 '같은 정도의 잘못이 한국인에게도 있다'고 지적했다. 글을 읽다보면, 8.15 뒤 한국이 친일파 숙정 등 일제 잔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불편한 진실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위의 글을 쓴지 꼭 20년 뒤 '나가노 망언'이 나오자, 리영희는 또 다른 비판 글을 썼다. 1994년 일본 법무장관 나가노 시게토(永野茂門)는 언론 인터뷰에서 지난날 일본의 전쟁이 침략전쟁이 아니었고, 난징학살(1937)을 '날조'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나가노 망언'은 그동안 일본 극우들이 늘 해오던 것이라 딱히 새로울 것은 없다. 다만 비자민 연립내각의 하타 쓰토무(신생당)가 일본 총리에 오른 지 열흘 밖에 안 된 시점에서 터져 나온 망언이었기에 파장이 컸다. 당시 유럽순방 중이었던 하타 총리는 도쿄로 돌아오자마자 나가노를 만났고, 그가 내민 사표를 수리했다.
리영희는 '나가노 망언' 뒤 월간지 <말>에 기고한 글에서, 20년 전 '다나카 망언' 때 펼쳤던 주장처럼 한국인들의 반성을 촉구했다. "한국(인)의 항의의 목소리는 이틀을 가지 못하고 분노의 감정은 사흘을 넘지 못한다." 지난 40년간 일본의 망언이 나올 때마다 규탄 목소리를 내다가 금세 수그러들곤 했던 '남한 정부와 개인들의 반응의 역사'로 미뤄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친일 잔재 청산 못한 게 망언의 배경"
리영희는 보다 근본적으로 망언이 그치지 않는 배경을 '친일 잔재 미청산'에 연결시킨다. 그가 20년 전 <세대>에서 폈던 논리와 마찬가지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 통치가 한국(남한)에 유익했다'는 망언이 그치지 않는 까닭은 '과거 식민지 통치에 충성을 했던 부역자 집단'이 통치세력이 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친일 청산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면, 일본 망언자들이 그만큼 한국을 쉽고 만만한 상대로 보기 마련이다(21세기 '신친일파'들이 리영희의 이 지적을 다시 듣는다면 어떤 표정일지 궁금하다).
리영희에 따르면, 일본 망언자들은 공통점을 지녔다. "조선 시민통치를 미화하는 일본인은 예외 없이 반공주의자, 강경 보수주의자, 극우적 국수주의자들이다." 그러면서 '이런 망언들의 최종 노림수는 평화헌법 개정을 통한 일본의 재무장과 대외 팽창'이라 못 박았다.
"나가노의 망발은 단순히 우발적 망언이 아니다. 일본의 '신보수' 정권과 지배세력의 위험한 의도가 노출된 사건이다. 그는 '대일본제국군대'의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장교로 중국침략전쟁에 참여했었다. 그의 망언이 웅변으로 증명하듯이, 그는 왕년의 '대동아공영권' 복구와 일본군국 같은 군사대국화를 꿈꾸는 우익 주도세력의 하나이다. 이런 인물을 다른 직책도 아닌 '법무대신'에 앉힌 동기부터 앞날의 일본을 두렵게 만든다."(리영희,「일본인 망언 규탄 전에 국민 총반성이 필요하다」월간 <말>, 1994년 6월호).
일본은 UN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되고, 그런 국제적 위상에 걸맞는 군사대국이 되려는 염원을 지니고 있다. 리영희에 따르면, 군사대국이 되려면, 군대의 보유와 전쟁권을 부정하고 있는 일본헌법의 핵심인 제9조를 뜯어고쳐야 한다. 헌법 개정으로 일본이 전쟁권 행사와 함께 세계 제1의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을 길을 트는 것이 일본 우익의 목표라는 것이다. 걸핏하면 튀어나오는 망언은 그런 염원에서 비롯된다는 분석이다.
일본 극우의 염원은 '평화헌법 9조 폐기'
리영희가 이 글을 쓴지도 30년 가까이 지났다. 그가 걱정한대로, 일본 평화헌법이 개정되진 않았지만, 사실상 핵심인 헌법 9조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됐다. 이를 가리켜 '평화헌법의 개변(改變)'이라 일컫기도 한다. 그 과정을 짧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5년 패전 뒤 구 일본제국헌법을 바꿔 만든 평화헌법(1946년 11월 공포, 1947년 5월 시행) 제9조는 일본 극우들이 극도로 싫어하는 조항이다. 제9조 1항은 '전쟁과 무력에 의한 파괴 또는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하기로 돼있다. 제9조 2항은 '육·해·공군과 그 외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으며, 교전권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교전권 포기(1항)와 군대 미보유(2항)를 못 박은 제9조는 지난날의 '군국주의 침략국가 일본'에서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여선 안 되는 '평화국가 일본'으로 바뀌는 것을 뜻한다.
제9조를 바꾸길 바라는 일본 극우들에게 한국전쟁(1950)은 좋은 핑계거리가 됐다. 1954년 육상·해상·항공 자위대 결성은 일본 재무장의 출발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전쟁을 반대하는 일본 시민들 사이에서 '자위대가 헌법 위반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자, 보수우파는 '스스로를 지킬 최소의 무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이른바 '전수(專守) 방위론' 논리로 맞섰다.
미국의 강력한 개헌 요구
자위대 결성 배후엔 미국이 있다. 한국전쟁을 겪은 뒤 일본의 재무장을 통해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군사비용 지출을 덜려는 계산에서였다. 평화헌법을 사실상 무효화시키는 과정에서 미국은 줄곧 일본의 극우들과 이해를 같이 했다. 이를테면, 리처드 아미티지(21세기 초 미국 부시행정부에서 국무부 부장관)를 비롯한 미국의 네오콘(neocon, 신보수주의자)들은 '일본 평화헌법 9조는 미일동맹을 가로막는 요소'라며 '개헌론'을 부추겼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벌어졌던 1차 걸프전쟁(1990)을 계기로 1993년 국제분쟁지역에서의 평화유지활동(PKO) 명분으로 자위대의 해외파병이 가능해졌다. 이른바 'PKO협력법'으로 평화헌법 9조는 사실상 사(死)문서가 됐다. '전수방위론'에다 이름도 그럴듯한 '국제공헌론'이란 명분이 더해졌다.
1990년대 후반 일본군의 해외파병 길이 더욱 탄탄하게 닦여졌다. △1996년 미일 양국의 군사동맹을 강화하는 '미일 신안보공동성명'(1996)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군사적 긴장이 일어나는 사태(이른바 '주변사태')에 자위대가 미군 후방을 지원하는 '신미일방위협력지침'(신가이드라인, 1997) △이를 법적으로 받쳐주는 '주변사태법'(1999)이 만들어졌다. '유사시'라는 꼬리표가 달리긴 했지만, 해외 군사개입 길이 열렸다.
위의 모든 과정이 평화헌법 9조에서 못 박은 '군대 미보유, 교전권 불허' 규정을 어기는 것이다. 일본 극우는 아예 제9조 폐기를 바란다. 아베 총리의 주도 아래 2007년 국민투표법 개정안이 통과된 것도 그런 움직임의 하나다. 우경화 흐름 속에 극우파들이 득실대는 일본 정치권은 언제라도 헌법개정안을 놓고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여러 여론조사로는 아직까진 일본 국민의 절반 이상이 평화헌법 개정에 부정적이다).
아베, "개헌할 필요가 없어졌다"
끝으로, 중요 사항을 하나. 일본 극우파들은 굳이 시끄럽게 평화헌법을 개정하지 않아도 좋다고 여긴다. 사실상 제9조가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2014년 7월 국회가 폐회중일 때 아베 내각은 각의(閣議)결정으로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했고, 이를 바탕으로 2015년 9월 안보관련법(안보법제)이 제정됐다. 그전까지 내각법제국(한국의 법제처)는 '현행 헌법상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헌법위반'이라 봤다. 아베는 내각법제국 장관을 바꾸고 법안을 밀어붙였다. 2016년 8월 아베는 한 언론인과 얘기를 나누다 그만 속내를 드러냈다.
"큰 소리로 얘기할 순 없지만, 개헌할 필요가 없어졌다.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미일동맹이 잘 굴러가지 않는다고 미국이 불만을 나타내왔는데, 2015년 9월19일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하는 안보관련법이 제정됨으로써 미국은 말이 없어졌다. 만족한 것이다"(우치다 마사토시,「아베 개헌을 독려한 아미티지 리포트」<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메디치, 2022, 534쪽).
자위대의 해외 군사개입 길을 튼 '집단적 자위권'이 확보된 만큼, 개헌이 아니라 개변(改變)으로도 만족한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전수방위'에 머물던 일본 자위대는 '집단적 자위권'을 내세워 유사시 해외 파병이 법적으로 가능해졌다. 그래서 이즈음 일본 극우들은 말한다. "일본은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됐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일본의 망언 발설자들이 서슴없이 목청을 높였던 것도 (글 위에서 아소 다로의 외할아버지 요시다 시게루가 했던 말처럼) '이토 히로부미의 길을 따라 다시 한 번 조선 땅에 뿌리를 박는' 날이 온다는 자신감에서였을까. 어느 날 아침, 요란한 군홧발 소리에 잠이 깨 밖을 내다보면, 지난날 군국주의 침략과 전쟁범죄의 기억을 떠올리는 욱일기를 높이 쳐들고 거리를 떼 지어 지나가는 일본군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다음 주엔 용서와 화해를 주제로, 독일의 사례를 참고하면서, 과거사 문제로 비롯된 한·일 간의 불편한 관계가 풀리려면 어떤 방식이 바람직한지 독자들과 함께 살펴볼 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