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월, 78년 전 핵폭탄이 떨어졌던 바로 그 날에 맞춰 히로시마(8월6일)에 들렀다가 나가사키(8월9일)에 갔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폭심지역은 '평화공원'이란 이름으로 잘 가꿔져 있다. 여러 종류의 추모비와 기념관, 자료전시실 등이 방문객들에게 그날의 참상을 보여준다. 해마다 피폭 당일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곳 모두 옥외에서 대규모 기념행사를 갖는다. 하지만 올해 나가사키는 태풍의 탓에 실내에서 조촐하게 치렀다.
나가사키 폭심지에서 북동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는 우라카미(浦上) 성당이 있다.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성당이었지만, 원폭으로 무너졌고 신자 1만 2,000명 가운데 8,50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 아픈 역사를 지닌 성당 입구에서 흥미로운 팸플릿 자료 하나를 얻었다. 읽어보니 '원폭은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는 논리를 펴는 내용이었다. 원폭이 평화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니? 엄청난 재앙이 아니고?
실제로 일본인들 가운데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것을 두고 '나가사키의 기적'이라고까지 승화시킨다. 성당에서 만난 70대 중반 나이의 신자로부터, "신앙을 지닌 이들이 지난날 겪었던 끔찍한 불행을 사려 깊게 재해석한 것"이라는 설명을 듣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랜 전쟁으로 지칠대로 지친 일본인들이 그만큼 간절하게 평화를 바랐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원폭 투하가 오히려 다행"
일본인들 사이에 '원폭이 전쟁을 끝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은 (무차별 살상을 낳는 원폭투하로 반인도적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미국을 미워하기보다 오히려) 미국을 고맙다고 여기는 쪽으로 이어진다. 이런 분위기는 일본인들 사이에 뜻밖에도 널리 퍼져있다.
콘래드 크레인(미 육군전쟁대학, 군사전략)은 일본에서 도쿄 대공습(1945년 3월10일)에 쓰였던 네이팜탄을 주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강연 끝 무렵에 나이든 일본인 역사학자가 일어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결국 우리는 소이탄(네이팜탄)과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준 당신들 미국인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항복했겠죠. 하지만 1945년 8월에 우리를 항복하게 만든 것은 엄청난 소이탄 폭격과 원자폭탄의 충격이었습니다."(말콤 글래드웰, <어떤 선책의 재검토> 김영사, 2022, 223쪽).
일본인 역사학자가 했던 말을 풀어 쓰자면, 미국이 도쿄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 퍼부었던 네이팜탄과 원자폭탄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면, 히로히토와 일본 군부의 강경파들이 결코 항복하지 않았을 테고, 일본 본토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직접 휘말려 더 많은 사상자를 냈을 것이란 생각이 담겨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1억 옥쇄'를 외치며 버틸 경우 내다보이는 전쟁 시나리오를 정리하면 아래처럼 진행되었을 것이다.
△소련은 만주에서 내려와 한반도와 일본을 침공하려 들고, △미국도 소련의 진공속도에 뒤지지 않으려고 일본 본토로 상륙작전을 펼치고 △일본은 군인 전사자는 물론 숱한 민간인 희생자를 내면서 버티지만, 끝내 항복하고 △결국에는 일본이 독일처럼 전승국의 분할 통치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현실에서는 시나리오와 딴판이다. 가해자 일본은 분단 안 되고 피해자인 한반도가 분단됐다).
위의 콘래드 크레인도 미국의 원폭 투하를 정당화하는 입장에 서 있다. 8월의 원폭 투하 뒤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많은 일본인의 생명을 구해줬다'고 여긴다. 그는 식량 문제를 보기로 꼽는다. 연합국의 일본 봉쇄로 말미암아 전쟁 말기에 일본은 엄청난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지난주에 살펴봤듯이, 전쟁 말기엔 식량 배급제로 1인당 하루 1200칼로리의 식량만이 시민들 손에 쥐여졌다. 크레인은 일본이 여름철인 8월에 항복한 것이 일본인들에겐 참으로 다행이었다고 말한다.
"또 하나 벌어질 수 있는 (끔찍한) 일이 있었죠. 겨울에 수백만 명의 일본인이 굶어죽는 것입니다. 8월에 항복함으로써 맥아더가 점령군을 상륙시키고 실제로 일본인을 먹여 살릴 시간을 얻었으니까요. (맥아더는) 1945년 겨울에 엄청난 양의 식량을 가져다 기아를 막았습니다"(말콤 글래드웰, 223쪽).
요나이 해군대신, "원폭과 소련 참전은 하늘이 도운 것"
신문기자 출신의 논픽션 작가 다나카 노부나카는 히로히토 일왕을 중심으로 개전부터 패전까지 일본이 벌인 침략전쟁의 전개과정을 다룬 7권의 연작물을 냈다. 이 가운데 패전을 다룬 책에는 일본 해군의 온건파였던 요나이 미쓰마사(米内光政, 일제 패전기의 마지막 해군대신)가 원폭과 소련참전을 가리켜 '하늘이 도왔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요나이는 1940년 총리를 지냈으나 '독일 때문에 일본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을 수 없다'며 독일·이탈리아와의 삼국동맹을 맺는 데 반대해 총리에서 물러났다). 요나이는 같은 해군 온건파 성향을 지닌 다카기 소키치 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선 원자폭탄과 소련의 참전은 하늘이 도운 것이다. 국내정세의 불안으로 말미암아 전쟁을 그만두는 사태로 이어지지 않고 끝났다. 내가 전부터 시국수습을 주장한 이유는 국내정세가 우려할만한 사태라는 점이 주된 이유다"(田中伸尙, <ドキュメント昭和天皇 第5巻 敗戦 下> 緑風出版, 1988, 475쪽).
요나이가 말하는 '시국수습'이란 곧 강화든 항복이든 미국과의 협상을 통한 조기 종전을 말한다. 1945년 들어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의 전쟁지도부 가운데 온건파는 전쟁이 끝난 뒤 생길 수 있는 (급격한 체제변혁과 혁명 등의) 혼란을 막고 '천황제'를 뜻하는 이른바 국체(國體)를 온전히 지켜낼 수만 있다면, 미국에게 항복을 해서라도 전쟁을 끝내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그동안 옥쇄를 주장해오던 육군 강경파들조차도 원폭과 소련군 참전이란 이중의 충격 아래 어쩔 수 없이 항복에 따랐고, 또한 국내의 반전·반체제 움직임 등 흉흉한 민심으로 (제1차 세계대전 뒤 황제가 쫓겨났던 독일과 러시아처럼) '천황' 체제가 무너지는 사태를 겪지 않고 종전을 맞이한 것이 '하늘의 도움'이란 얘기다.
세 번째 원폭 신화, '원폭 때문에 일본이 항복'
1945년 8월15일 히로히토는 원폭과 소련참전이라는 이중의 충격을 받고,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였다(1945년 7월26일 포츠담선언 당시 소련은 대일 참전국이 아니었기에 8월8일 대일 선전포고와 더불어 이 선언에 참여). 일본의 항복은 원폭뿐만이 아니라 소련군 참전도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문제는 일본은 물론 한국과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 항복한 까닭은 오로지 원폭 때문이라 여긴다는 점이다.
일본의 항복은 이미 지나간 일인데 굳이 그 요인을 따질 필요가 있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항복을 이끈 결정적 요인이 원폭이 아니라 소련군 참전이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굳이 안 해도 될 원폭 투하로 조선인 4만 명을 포함해 20만 넘는 목숨들의 죽음은 허망해지기 마련이다. 여기서 생겨난 원폭 신화의 세 번째 이야기를 검증하는 것이 오늘의 주제다.
지난 주 글에서 원폭 신화(神話) 두 가지를 살펴봤다. 첫 번째 신화는 미국 젊은이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신화는 일본인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었다(연재 43 참조). 둘 다 미국이 핵폭탄으로 많은 비무장 민간인들을 무차별 살상하고 반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를 저질렀다는 비난을 누그러트리는 논리다. 승전국 미국의 전쟁범죄인 원폭 투하를 정당화했다는 뜻에서 '신화'다.
오늘은 세 번째 신화를 살펴보려 한다. 다름 아닌, '일본이 원폭 두 방 때문에 항복했다'는 신화다. '원폭이 일본 항복을 가져온 주요인'이란 해석은 오랫동안 미국인들 사이에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전쟁 뒤 미국의 시민들은 원폭이 전쟁 승리를 가져왔다고 외치며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미국의 언론들도 너도나도 '태평양의 평화: 우리의 폭탄이 해냈다!'와 같은 제목을 큼직하게 내건 기사들을 1면에 크게 실었다.
미국뿐 아니다. 일본 지배층도 '원폭이 일본 항복을 가져온 주요인'이라는 해석을 기꺼이 받아들여 왔다. 일본 국민들이 전쟁에서 죽을 고생을 했는데도 패배한 것을 두고 (지도자들의 잘못된 대외정책 탓이라 여기기보다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신무기의 위협 때문이었다고 여긴다면, 비난의 화살에서 비껴날 수 있다. 신무기 때문에 졌다면 불가항력으로 여기고, 히로히토에게 돌아갈 비난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원폭 신화가 지닌 신통력이다.
중국과 소련을 뺀 '종전 조서'
해마다 8월15일이면 일본 언론매체들은 히로히토의 '종전 조서'를 소개한다. 이 조서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1945년 7월26일)을 받아들이겠다는 응답이다. 그렇다면 항복문서다. 조서를 읽어보면, '패전'이나 '항복'이란 용어는 눈에 안 띄고 그냥 '종전'이다. 분량이 800자쯤으로 이뤄진 조서는 항복문서라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대부분의 일본 TV나 라디오 매체들이 들려주는 히로히토의 이른바 '옥음'(玉音)도 '종전 조서'의 앞뒤를 잘라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기 힘든 것을 견뎌...'라는 구절만 되풀이해 들려준다. 알고 보면, 종전 조서를 끝까지 다 듣거나 읽어본 일본인들은 생각보다 적다. 지난날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대한 사과에 인색한 일본 언론의 보도 성향은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을 제대로 따지지 못하게 만든 원인의 하나로 꼽힌다. 문제는 '종전 조서'의 내용이다.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다.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백성을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慘害) 미치는 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이다] (고모리 요이치, <1945년 8월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뿌리와이파리, 2004, 55-56쪽).
여기엔 진실이 의도적으로 가려져 있다. 포츠담선언의 참여국 가운데 미·영 2개국만 언급하고 (1937년의 난징학살을 비롯해 숱한 피해를 입혔던) 중국은 빠져있다. 미·영 포로에 대해 일본군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대한 사과도 없다.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은 누가 들어도 정치적 궤변에 지나지 않는 헛소리다. 히로히토는 '종전 조서'에서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인 이유로 원폭을 꼽았다. 소련이 빠져있다.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 충격으로 항복을 결심했다는 말은 조서 어디에도 없다. 오로지 원폭 피해만을 항복 이유로 꼽았다. 과연 그럴까.
"일본 항복 이끈 요인은 소련군 참전"
지난 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히로히토는 1945년 6월 오키나와를 잃은 뒤에 소련의 주선 아래 미국과 강화조약을 맺고 싶어 했다. 스탈린은 그런 히로히토의 뒤통수를 치면서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기에, 일본의 전쟁지도부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원폭 투하와 소련군 참전이라는 이중의 충격을 받자, 8월9일 회의를 통해 항복 절차에 들어갔다.
원폭과 소련군 참전은 일본을 무조건 항복으로 몰아간 두 개의 복합적인 충격 요인이지만, 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결정적으로' 항복을 이끌어냈을까. 일반적으로 미국의 원폭 투하가 일본 항복의 결정적 요인으로 여겨져 왔지만, 적지 않은 연구자들은 소련군 참전이 더 큰 결정적 요인이라 지적한다. 이른바 '원폭 신화'를 허물어뜨리는 수정주의적 입장을 지닌 연구자들로는 가르 알페로비츠, 하세가와 쓰요시, 아라이 신이치 등을 꼽을 수 있다.
가르 알페로비츠(메릴랜드대, 정치학)는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하기로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을 분석한 860쪽이 넘는 두꺼운 그의 역작 <원폭 투하 결정>에서 '일본 항복의 가장 큰 요인이 소련 참전'이라고 못 박았다. 따라서 그는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알페로비츠는 워싱턴의 정책 입안자들이 △일본에 대한 무조건 항복요구 조건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소련이 대일 전쟁에 뛰어들면 일본이 곧 항복하리라 판단했으면서도, 전후 극동지역에서의 소련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서둘러 원폭 투하를 밀어붙였다고 지적한다. 그는 항복조건 완화와 소련참전을 가리켜 '두 단계 논리'(two-step logic)라 불렀다. 여기서 '항복조건 완화'란 히로히토의 '천황' 지위를 보장해주는 것을 가리킨다(Gar Alperovitz, <The Decision to Use the Atomic Bomb> Alfred Knopf, 1995, 114-115쪽).
"포츠담 선언 수락 안 하면 모두 죽는다"
일본계 미국학자 하세가와 쓰요시(캘리포니아대, 역사학)도 소련군 참전이 일본 항복을 이끌어낸 결정적 요인이라며 이른바 원폭 신화를 허물어뜨리는 수정주의 입장이다. 하세가와의 전공은 러시아 역사다. 일본인 핏줄을 지닌 미국 시민이 러시아를 전공한다는 것은 미·소·일 3국 관계를 연구하는 데엔 나름 강점을 지녔다. 트루먼과 스탈린이 일본의 패망을 놓고 여러 모로 신경전을 펴던 무렵의 생생한 1차 사료를 3개국 원문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세가와는 그의 역작(원 제목은 Racing the Enemy, 2005)에서 일본의 항복을 이끈 가장 큰 요인으로 (원폭이 아니라) 소련군 참전을 꼽았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다음날 (일본)정부도, 군부도, 화평파도 원폭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정책을 근본적으로 변경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각의에서 도고가 미국은 여러 개의 원폭을 갖고 있고,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원폭을 다른 도시에 투하할 것이라는 트루먼의 성명을 소개했음에도, 아나미(육군장관)의 반대에 눌렸다. 각의가 결정한 것은 이 무기 사용에 항의하자는 것뿐이었다] (하세가와 쓰요시, <종전의 설계자들> 메디치, 2011, 376쪽).
위 문장에 나오는 '도고'는 외무장관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 1882-1950)를 가리킨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도예공의 후손으로, 어릴 적 이름은 박무덕(朴茂徳)이었다. 도쿄전범재판에서 20년의 금고형을 받고 복역중 1950년 7월 감옥에서 병으로 죽었다.
도고 외무는 8월14일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항복이냐 저항이냐를 놓고 3 대 3으로 의견이 엇갈리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지 않으면 폐하의 신민 모두가 죽고 맙니다"라며 항복하자는 뜻을 분명히 했다 '모두 죽는다'는 도고의 발언은 (8월9일 소련 참전 당일에 열린 회의에서 항복 뜻을 밝혔지만 속으론 '천황' 자리보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던) 히로히토의 마음을 다잡게 만들었다.
히로히토, 소련군 참전 소식에 큰 충격 받아
지난 글에서 살펴봤듯이, 일본은 오키나와를 잃은 1945년 6월21일 뒤부터 소련을 중재자로 삼은 대미 강화에 헛된 기대를 걸었다. 1941년 4월 일·소중립조약을 맺은 이래로 소련은 일본에겐 그때까진 중립국이었다(본 연재 41 참조).
[히로시마 원폭 투하는 일본의 지도자들에게 정책 변경을 재촉할만한 효과가 없었다. 그렇게 되려면 원폭보다 더 큰 충격이 필요했다. 오히려 원폭 투하는 한층 더 소련의 (대미강화) 알선에 기대를 걸도록 박차를 가했다](하세가와 쓰요시, 385쪽).
일본의 기대는 곧 충격으로 바뀌었다. 8월9일 0시를 기해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만주 관동군을 공격하는 순간 히로히토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그동안 스탈린에게 대미 화평을 중재해주길 기대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았음을 깨달았다. 하세가와는 '포츠담 선언을 이용해 협상을 거쳐 전쟁을 종결로 이끌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 것은 8월9일로 소련 참전 뒤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스즈키 총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지기 30분전인) 10시 30분 최고전쟁지도자회의를 소집했다. 그날 일본 지도자들의 행동을 보면 소련 참전이 화평파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으며, 그것은 원폭의 영향보다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이 참전하고 나서 비로소 화평파 지도자들은 포츠담선언 수락을 기초로 해서 전쟁을 종결해야 한다는 결론이 이르렀다](하세가와 쓰요시, 408쪽).
"소련 참전으로 일본군 방어전략 무너졌다"
피터 쿠즈닉(어메리컨대, 미국사)은 1930년대 미국의 정치활동가로서의 과학자들을 주제로 삼은 책 <실험실을 넘어>(Beyond the Laboratory, 2019)로 이름이 알려진 연구자다. 쿠즈닉도 일본의 항복 결정을 이끈 결정적 요인은 소련군 참전이라 여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여러 현안들을 다루는 전자저널인 재팬 포커스(Japan Focus)에 '해리 트루먼, 원폭 그리고 종말론적 이야기(Apocalyptic Narrative)'라는 부제를 단 기고문의 결론은 이렇다.
[일본 지도자들은 미군 공습으로 일본 64개 주요 도시가 거의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렇지만 일본 지도자들은 자국민들의 고통에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의 참전은 일본이 본토방어 전략으로 연합군에게 큰 사상자를 내는 데 성공할 가능성을 무너뜨렸고, 결국 일본인들에겐 항복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됐다. 결국 원자폭탄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낸 요인(a far more powerful inducement to surrender than did the atom bombs)은 소련의 침공이었음이 드러났다](Peter Kuznick, The Decision to Risk the Future, Japan Focus, 2007년 7월23일. 출처:
워드 윌슨 영미안보정보협회(British American Security Information Council) 선임연구원도 수정주의 입장에 서있다. 그는 미국의 외교정책 전문지인 <외교정책>(Foreign Policy)에 실은 글에서 미국인들이 오랫동안 지녀온 원폭 신화를 부정하고 소련군 참전이 일본 항복을 이끌어낸 결정적 요인으로 꼽았다. <핵무기에 관한 다섯 가지 신화>(Five Myths About Nuclear Weapons, 2021)의 저자인 윌슨은 '원폭은 일본을 패배시키지 못했고 스탈린이 패배시켰다'고 못 박았다.
[한 방향에서 침략한 강대국에 대해 결정적인 전투를 벌일 수는 있어도, 두 방향에서 공격하는 두 강대국에 맞서 싸울 수는 없다. 이런 사실을 아는 것에 군사적 천재성이 필요하진 않다. 소련의 침공은 (소련의 중재를 통한 대미강화라는) 일본의 외교전략을 무효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군부의 결정적 전투전략을 무효화시켰다. 단번에 일본의 모든 선택권이 사라졌다. 소련의 선전포고로 작전수행에 필요한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에 대한 계산도 바뀌었다. 일본 정보기관은 미군이 몇 달 동안 (본토를) 침공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예측했다. 반면 소련군은 불과 10일 안에 일본을 위협하는 적절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소련의 침공은 매우 민감한 시기에 일본의 종전 결정을 이끌어냈다](Ward Wilson, The Bomb Didn't Beat Japan. Stalin Did, Foreign Policy, 2013년 5월. 출처: https://foreignpolicy.com/2013/05/30/the-bomb-didnt-beat-japan-stalin-did/)
"항복 결정 자리에선 원폭보다 소련참전 논의"
한국에도 이름이 많이 알려진 반전(反戰) 사학자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 1926-2017)도 수정주의 입장이다. 그는 <원폭투하로 가는 길>(原爆投下への道, 東京大学出版会, 1985)에서 흔히 미국인들이 원폭 투하를 합리화하면서 '원폭 투하로 1백만 미국 군인의 생명을 구했다'느니, '원폭이 일본의 항복을 앞당긴 결정적 요인'이라느니 하는 속설이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원폭이 일본 항복을 이끈 주요요인임을 인정하지만, 보다 큰 요인은 소련군 참전으로 본다.
아라이 교수는 그의 또 다른 책(원제목은 空爆の歴史: 終わらない大量虐殺, 岩波新書, 2008)에서 일본 항복의 결정적인 요인이 소련의 참전임을 뒷받침하는 사례를 하나 보여준다. 1945년 8월9일 새벽에 소련군이 만주에서 군사행동에 나서고, 같은 날 11시에 나가사키에 두 번 째 원폭이 떨어진 그날 밤 어전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 끝에 히로히토 일왕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라이는 일본 항복의 보다 큰 결정적 요인을 원폭이 아니라 소련군 참전으로 보는 이유를 이렇게 꼽았다.
[포츠담 수락 결정은 8월9일 밤부터 궁중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 결정되었는데, 의사록에 따르면 3시간에 걸친 회의에서 원폭과 공습에 대한 언급은 겨우 1곳에 불과하다(추밀원 의장과 참모총장 사이에 오고간 아주 짧은 문답). 이보다 더 많은 시간은 소련(대일 참전)과 국내치안 문제에 할애되었다](아라이 신이치, <폭격의 역사: 끝나지 않는 대량학살>, 어문학사, 2015, 177-178쪽).
원폭 투하 없어도 일본은 항복했다
이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지금껏 우리는 원폭이 일본의 항복을 불렀다는 원폭 신화를 비판하면서 소련군 참전 요인을 강조하는 수정주의 연구자들의 논리를 살펴봤다. 이들에 따르면, 일본의 전시 지도부가 소련의 참전을 엄청난 위기로 여기고 항복을 결심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만주 관동군의 붕괴와 더불어, 일본 본토가 미·소 양쪽으로부터의 협공을 받게 되었다. 둘째, 소련이 중국공산당과 손을 잡고 중국을 공산화할 경우 국내적으론 좌파 세력의 힘이 커져 '천황제'가 폐지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일본 우익들이 말하는 '국체(國體)의 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 가운데 당장의 현실적 위기감으로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은 첫 번째인 일본 본토를 겨눈 미·소 협공이었다.
히로히토의 항복을 이끈 두 개의 주요인(원폭과 소련 참전이라는 이중의 충격) 가운데 보다 결정적 요인이 원폭보다는 소련군 참전이라는 분석은 무엇을 뜻하는가. 원폭 투하 없이도 미국이 일본에 대한 해상 봉쇄와 압박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소련의 참전 충격이 더해졌다면, 일본은 항복했을 것이란 얘기가 된다. 원폭 두 방으로 민간인들을 희생시키지 않았어도 일본의 항복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원폭으로 죽은 21만의 목숨은 더욱 허망한 죽음이 된다.
돌이켜 보면, 일본의 항복이 원폭 때문이냐 소련군 참전 때문이냐 따지는 것도 부질없는 일처럼 여겨진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일본은 항복하게 돼 있었다. 1945년 초여름 일본은 이미 기력이 다해 항복이든 강화든 전쟁을 끝내야 하는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지난 글에서 살펴봤듯이, 1945년 9월30일에 작성된 미전략폭격조사단(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USSBS) 보고서는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지 않았더라도, 러시아가 참전하지 않았더라도, 1945년 12월 31일 이전에는 확실히, 그리고 1945년 11월 1일 이전에는 아마도 항복했을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본 연재 42).
1945년의 상황이 그랬다면, 일본 패망은 시간문제였고 따라서 원폭 투하만큼은 피했어야 할 일이었다. "전쟁이란 다 그런 것이다. 누군가는, 어디선가는 피를 흘려야 하고 무고한 희생이 따르기 마련인 것이 전쟁이다"라고 넘어가기엔, 하루아침에 원폭으로 날벼락을 맞은 조선인 4만을 포함한 수십만 민간인들의 죽음이 지닌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