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바르니에(오른쪽) 신임 프랑스 총리가 5일 프랑스 파리 총리 관저(마티뇽궁)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가브리엘 아탈 전 총리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다. /EPA 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5일 새 총리에 우파 공화당 출신의 미셸 바르니에(73) 전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수석협상대표를 임명했다. 지난 7월 조기 총선 결선투표에서 마크롱이 이끄는 중도 성향 앙상블과 공화당 및 좌파 정당들이 일시적으로 손을 맞잡은 연대(공화국 전선)로 극우 성향 국민연합(RN)의 의회 장악을 가까스로 저지한 지 두 달 만이다.
프랑스 대통령실(엘리제궁)은 이날 “마크롱 대통령이 오늘 바르니에 전 장관에게 프랑스 국민과 국가를 위해 ‘통합 정부’를 구성할 임무를 맡겼다”고 발표했다. 바르니에는 50년간 상·하원 의원과 장관직을 거친 베테랑 정치인이다. 엘리제궁은 “전례 없는 협의 과정을 통해 차기 총리와 정부가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췄는지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날 바로 취임한 바르니에는 “지금 프랑스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있다”며 주요 정책으로 공공 서비스 강화, 치안 대폭 개선, 이민 통제, 민생난 해결 등을 제시했다. 또 재정 문제와 기후 변화 등 문제에도 적극 대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의회 내 여러 정치 세력과 열린 대화를 해 나가겠다는 의지도 표명했다.
이로써 1958년 제5공화국 체제 수립 이후 네 번째 ‘동거 정부’가 탄생하게 됐다. 동거 정부란 프랑스와 같이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의 요소가 결합된 이원집정부제 국가에서 대통령과 총리가 서로 다른 당 소속일 때를 뜻한다. 앞서 세 차례 동거 정부가 이념 지형이 확연히 다른 좌파·우파 정당 간에 꾸려진 데 비해 중도 정당 대통령과 우파 정당 총리로 구성된 이번 동거 정부는 양측의 이념 차이가 그나마 작다는 평가다.
그러나 조기 총선에서 180여석을 얻으며 1위를 하고도 총리 배출에 실패한 좌파연합 ‘신인민전선(NFP)’ 일각에서 “새 총리를 즉각 불신임하겠다”며 강력 반발했다. NFP는 “선거로 드러난 국민의 뜻”이라며 총리직을 요구해왔다. 특히 NFP를 이끄는 극좌 정당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의 반발이 거세다. 장뤼크 멜랑숑 LFI 대표는 “(이민 문제 등에서) 극우 RN의 정치적 입장과 가까운 사람이 임명됐다”며 “선거를 도둑맞았다”고 주장했다. 같은 당 마누엘 봉파르 의원도 “LFI 소속 의원 전원이 바르니에 내각을 불신임할 것”이라며 선전포고를 했다.
조기 총선 결과 집권 여당 앙상블과 공화당은 NFP에 밀려 각각 2위(161석)와 4위(48석)였다. 앞서 열린 1차 투표에서 1위를 하며 돌풍을 일으켰던 RN은 NFP와 르네상스의 여권 연합(앙상블)이 결선투표에서 사실상 후보 단일화로 연대하며 최종 3위(142석)으로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원내 주요 정당으로 입지를 굳힌 RN은 “극좌파에서 총리가 나오면 프랑스가 망한다”며 LFI의 총리 배출을 강력히 반대해왔다. 조르당 바르델라 RN 대표는 이날 총리 인선 직후 낸 성명에서 “총리에게 민생난과 안보, 이민 문제 해결을 요구하겠다”며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모든 정치적 수단으로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조기 총선에서 극우의 의회 석권 저지란 목표를 달성한 각 정당들 간에 정국 주도권을 쥐려는 신경전이 이어지면서, 선거 뒤 의회가 출범하고도 내각을 지휘할 총리 임명이 지연돼 프랑스 정국은 표류해왔다. 이 와중에 마크롱은 “극좌·극우 어느 쪽에도 정부를 넘길 수 없다”며 특정 정당이 주도하지 않는, 온건 좌·우파와 중도 세력이 뭉친 ‘공화국 세력의 연정’을 주장해 왔다. 결국 마크롱 대통령은 바르니에를 낙점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바르니에는 조만간 극좌·극우를 배제한 거국 연립 정부 구성 절차에 들어갈 전망이다. 그러나 그의 총리직은 시작부터 험난할 것이라는 전망도 적지 않다. 프랑스에선 대통령이 임명한 총리를 의회(하원)가 불신임 투표를 통해 언제든 끌어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소야대 상황에 정국 불안을 막기 위해 마크롱은 여야를 아우르는 여러 정당 지도자와 연쇄 회동해 적합한 총리 후보를 물색해 왔다. 여러 온건 좌·우파 인물이 후보로 거론됐으나, 불신임 가능성이 높은 인물은 모두 탈락하고 결국 바르니에 전 장관이 선택됐다고 프랑스 언론들은 분석했다. 그러나 총리 인선 과정에서 원내 최대 정당을 사실상 외면한 마크롱의 선택에 대한 좌파 진영의 반발이 정국의 불안 요인이다.
바르니에가 강경 좌파의 강한 견제를 받으며 운신 폭이 좁아지고, 동거 정부의 주도권이 마크롱에게 넘어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과거 동거 정부에서는 총리와 대통령이 주요 정책을 놓고 종종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1986~1988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사회당)과 자크 시라크 총리(공화당), 1997~2002년 시라크 대통령과 리오넬 조스팽 총리(사회당)가 복지·경제 정책을 놓고 벌인 대립이 대표적이다.
☞미셸 바르니에
프랑수아 미테랑, 자크 시라크,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시절 여러 장관직을 거친 베테랑 정치인이다. 1973년 22세의 나이에 사부아 지역 의회 의원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 1978년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중앙 정계에 등장했다. 미테랑 집권기이던 1993년 환경부 장관으로 입각한 뒤 유럽 문제 담당 장관(1995년), 외무장관(2004년), 농수산부 장관(2007년) 등을 지냈다. 1999년 유럽연합(EU) 집행위원이 되면서 유럽 정치 무대에 데뷔했고, 2016년 브렉시트 EU 측 협상 대표로 나서 ‘미스터 브렉시트’란 별명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