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한 역설(逆說)
나는 “남이 가슴 아픈 일, 남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말자”는 신조(信條)를 좌우명(座右銘)으로 삼고 자기를 채찍질하는 유치(幼齒)한 사람이다. 자기 절로 칭찬(稱讚)하는 것인지 핀잔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리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간혹 가다 본의 아니게 폄훼(貶毁), 혹평(酷評), 중상(重傷)을 받게 된다. 물론 덕이나 지적 수준이 미달(未達)되어 오해나 조롱(嘲弄)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아무런 이유(理由) 없이 당하는 건 어디까지나 아닌 밤중에 홍두깨에 맞는 격이 된다.
어떤 일이든 이해(理解)할 수 없는 원인이 많지만 그래도 용인(容忍)하는 아량쯤은 지녀야 할 것 같다. 물론 “사노라면 잊을 날”도 있겠지만 “그러노라면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A형인 나는 내성적 인지라 푸접이 없고 사교성(社交性)이 무디다. 교제(交際)에 흥미가 없으니 별로 “적(敵)”이나 “라이벌(競爭對手)”로 인한 위구심(危懼心)은 없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위대한 인물도 그렇다고 바보 같은 사람도 아니다. 다만 자기의 사명에 충실(忠實)하는 평범한 인간이다.
엄격(嚴格)과 관용(寬容)은 딴딴함과 유연(柔軟)함의 차이다. 어떤 초점 문제(焦點問題)를 담론하려면 대담하게 가설(假設)을 제출(提出)하고 그에 상응(相應)한 주장에 공감이 따르는 설득력이 실증되어야 한다. 물론 근본적 문제는 견해가 아니라 소질(素質)이 안받침 되어야 한다. 즉 문화 관념(文化觀念)의 문제이다.
나는 꾸준히 글은 쓰지만 도무지 출세욕(出世欲)은 없다. 더군다나 명예에는 일체 관심이 없다. 나는 “나라는 구하려는” 야심도 없고 “세상을 뒤흔들려는” 재주도 없다. 다만 한때 나도 인간인 것만큼 실리(實利)를 추구하고 공리성(功利性)을 추구해온 적은 있었다. 그러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세상은 나의 생각대로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제 넘는 말이지만 “편안한 삶”은 그 기준에 걸 맞는 문화소질이 구비되어야 한다. “경직된 삶”을 “유연한 삶”으로 전환(轉換)시키는 데는 튼튼한 기반(基盤)이 구축(構築)되어야 한다. 사실 “먹고사는데 걱정해야 할 눈앞의 이익”에서 탈피하지 못한다면 어디까지나 고차(高次)의 정신추구는 방치(放置)하고 안일(安逸)과 향수(享受), 향락(享樂)으로 편향(偏向)하는 성향으로 변질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실망(失望)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시대적 변화에 따라 환경도 변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 역시 환경의 지배(環境支配)를 받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변화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아예 기다릴 수 없을 수도 있다. 그저 속수무책(束手無策)이나 수수방관(袖手傍觀)만 하지 않으면 별로 개의치는 않다. 그래서 도전적(挑戰的) 의식에는 아직도 “계몽(啓蒙)”같은 원초적 함양(涵養)이 필요하며 또한 아주 유효(有效)하다. 악암(岳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