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블화 폭락' 러시아 경제위기로 번질라 노심초사
저유가·코로나 19사태까지 겹쳐…'달러 챙기자' 환전소 장사진도
전문가들 "주요 상품 인상 가능성" 분석…러 정부 "충격에 잘 대비"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김형우 특파원 = 루블화 폭락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지난 9일 오후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대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외환교환소 앞이 시민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현지 언론인 렌타루 통신은 이들이 모두 루블화를 달러로 환전하려는 사람들이었다고 보도했다.
루블화 폭락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심리적 공포를 생생히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러시아 경제에는 연초부터 달갑지 않은 소식이 잇따라 전해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유가까지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러시아 현지 언론들은 충격파가 경제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앞다퉈 분석을 내놓고 있다.
루블화 가치가 폭락을 거듭하고 증시까지 큰 폭으로 떨어지자 경제계 곳곳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러 관영 타스와 RBC 통신에 따르면 국제외환시장(Forex)에서 지난달 28일 당시 66루블(1천78원·달러당) 선에 머물렀던 환율은 지난 5일부터 오름세를 타기 시작했다.
당시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주요 산유국 연합체인 OPEC+(OPEC플러스)가 석유생산량의 추가 감축안을 논의하고 있었지만, 합의 결렬에 대한 기류가 이미 감지되고 있었던 때였다.
결국 지난 7일 러시아의 반대로 추가 감축안 합의가 무산되자 환율은 가파르게 상승을 이어갔고 최근(12일 기준)에는 75루블의 선마저 넘어섰다고 현지 언론들이 전했다.
달러 대비 루블화 환율이 75루블을 넘어선 건 2016년 2월 이후 처음이다.
게다가 일주일 만에 루블화의 가치가 10루블가량 가파르게 떨어진 것이다.
주식시장에서도 루블화 폭락의 여파가 이어지면서 지난 12일 러시아 주요 주가지수인 RTS 지수는 전장보다 12% 이상 하락한 953.64를 기록했다.
러시아 금융시장에서의 충격파는 고스란히 실물경기로 옮겨가고 있다.
◇ 주요 상품 가격 잇따라 오른다…서민들만 고생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자 수입에 의존하는 주요 공산품 가격의 인상 소식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리아노보스티는 지난 10일 러시아 국민경제국가행정아카데미(RANEPA) 유리 유덴코프 교수의 말을 인용, 루블화의 가치 폭락이 여행업계를 비롯해 자동차와 의류, 전자제품 등 주요 상품의 가격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도했다.
현지 일간지인 이즈베스티야는 각계 전문가의 분석을 인용해 시장에서 의약품 가격이 30%, 자동차 가격이 5∼10%, 전자제품 가격이 10∼20%, 부동산 가격이 10∼15% 정도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자제품 유통회사인 DNS가 자체 홈페이지에 공개한 스마트폰 가격대는 6천∼12만루블까지 다양하다.
품목별 차이와 변동 가능성 때문에 이를 그대로 대입해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전문가들의 전망이 맞는다면 12만 루블짜리 스마트폰을 지금보다 적어도 1만2천루블(20만원)을 더 주고 사야 한다.
지갑 형편이 넉넉지 않은 러시아 소비자들로서는 엄청난 부담인 셈이다.
러시아의 핵심 경제계 인사도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러시아 회계감사원 원장 알렉세이 쿠드린은 타스 통신에 유가가 배럴당 35달러 수준에 머물고 달러 대비 루블화(러시아 통화) 환율이 72루블 선에 있으면 경제성장률이 0%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쿠드린은 그러면서 "국민의 생활고가 올해 줄어들지 않고 되레 커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와 일부 전문가들은 현재 러시아 경제가 2008년이나 2014년 경제 위기 때보다 외부 충격에 훨씬 잘 준비돼 있다고 지적하며 위기는 아니라고 단언했다.
전문가들은 국제유가가 배럴당 30달러면 러시아 통화 환율은 달러 대비 77루블, 배럴당 35달러일 경우 달러 대비 75루블 수준이 적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 '유가' 하락하면 자금줄 끊긴다…러시아 전체 경제 휘청
러시아는 자원의 보고다.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유럽과 미국의 제재에도 러시아가 굳건히 상태를 유지했던 힘이 풍부한 에너지 자원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영인 로스네프티(석유)·가스프롬(가스)과 민영인 루코일(석유), 노바텍(가스) 등이 러시아의 대표 에너지 기업이다.
세계 에너지 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 기업은 러시아에 막대한 돈을 가져다주는 자금줄이다.
실제 러시아 재정수입의 절반 가까이가 가스와 석유와 관련된 세금으로 충당된다는 현지 언론의 보도도 있다.
러시아 RBC 통신은 2018년 러시아 재정수입의 46.3%인 9조루블(147조 3천300억원)이 석유·가스와 관련된 세금에서 나왔다고 지난해 재정부 자료를 인용해 보도한 바 있다.
이는 석유·가스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세금(수출·자원채굴)을 포함한 결과이며 석유·가스와 연관된 간접적인 것까지 더하면 비율은 더 높아질 수 있다고 RBC는 강조했다.
러시아의 유가 문제를 다룬 미하일 하노프 알고 카피탈 이사의 최근 타스 통신 기고문에도 이런 내용이 언급됐다.
하노프 이사는 지난해 하반기 러시아의 수출구조에서 석유와 석유제품, 천연가스가 차지하는 부분이 가치상으로 57.2%에 이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너지 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유가가 흔들릴 때마다 러시아에서는 어김없이 위기론이 고개를 든다.
러시아 경제의 견고한 지지대 역할을 해오던 석유가 오히려 경제 위기를 촉발하는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사례는 과거에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2016년 1월 초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27달러까지 떨어지자 달러화와 유로화 대비 루블화 환율은 곤두박질쳤다.
그해 다음 달인 2월에 OPEC 비상 회의가 열리고 산유량 감산 소식이 전해지면서 루블화는 하락치를 만회했다.
앞서 2014년에도 국제유가가 하락하자 곧바로 루블화 가치와 주가가 급락하며 러시아 경제에 치명타를 안겼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러시아 에너지 기업들은 유가가 일정 정도의 수준을 유지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파벨 소로킨 에너지부 차관은 12일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에너지부는 배럴당 40~45달러로의 복귀는 올해 하반기에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비상상황이나 조치가 없으면 45~50달러 수준 회복은 내년에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