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岳岩漢字屋

甲辰年 새해 하시는 일들이 日就月將하시고 乘勝長驅.하시고 萬事亨通 하세요!!!

반응형

양심(良心) 없는 웃음에 대하여

악마의 표정
매년 여름이 되면 극장가를 장식하는 공포영화. 많은 사람들이 뜨거우면서도 눅눅한 여름 더위를 잠시라도 잊기 위해 공포영화를 찾는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때로는 괴로워하면서도 공포영화를 즐기는 아이러니한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공포라는 장르는 그 근원을 추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된 역사를 가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로부터 민담으로 구전되어, 오늘날까지도 짜릿한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 바로 귀신이야기이며 괴담이다.
그런데 그 무서운 귀신이나 악마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묘한 특성을 찾을 수 있다. 많은 작품 속에서, 악마는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협박을 하기보다,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것으로 표현된다. 처녀 귀신의 깔깔 웃는 목소리는 온 산을 울리기도 하고, 귀신들린 자는 가톨릭 신부를 비웃으며, 흡혈귀들은 어둠 속에서 순진한 먹잇감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다.

왜 웃음인가
왜 이야기꾼들은 그들의 웃음을 표현했을까. 이 질문 자체가 답이 포함된 어리석은 물음이다. 그 들이 웃고 있는 게 실제로 더 소름 끼치기 때문이다. 많은 이야기의 순진한 주인공들은 복잡한 체스 판 앞에서 영문도 모른 채 몰락하는 하수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가장 믿었던 이웃이 천천히 주인공을 몰락하게 만들거나, 싫더라도 피할 수 없는 적이 주인공의 삶을 장악하고 있다. 주인공이 엉겁결에 체스 판에 말을 놓았을 때, 마주 앉은 악마는 슬그머니 웃음 짓는 것이다.
서구문화권의 대표적인 공포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흡혈귀는 특히 이러한 특성이 도드라진다. 브람 스토커(Bram Stoker)나 존 폴리도리(John Polidori)와 같은 작가의 고전적인 작품에서, 흡혈귀는 어김없이 겉으로는 교양있고, 유능하며, 심지어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들이 본색을 드러낼 때면(아마도 그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다음 날), 처참한 시신이 발견되거나 갓난아기가 유괴된다.
우리는 여기서 어렴풋한 의문점을 가질 수 있다. 이야기 속의 악마들은 희한하게도, 인간과 비슷하다. 더 정확히는 '어떤 인간들'과 비슷하다. 매스컴에 보도된 사건들 중에도 이러한 사례들은 분명히 있다. 몇 개월씩 계획해서 누군가를 속이고, 마침내 그의 소중한 것(생명, 장기 등)을 빼앗는 일들 말이다. 공포소설의 작가들은 어쩌면, 그런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악마, 흡혈귀'와 같은 단어를 내세워서 그들이 인간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오늘날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와 같은 단어는 널리 알려져 있다. 둘은 '반 사회적 인격장애'라는 더 큰 범주에 속하는데, 사이코패스의 개념은 유명한 살인사건을 통해서 알려졌고, 그에 덩달아 소시오패스의 개념도 알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두 유형은 차이점도 많지만, 공통점도 있다. 국내에 발간된 몇몇 심리학 저서의 일관된 내용을 요약하면, 타인과의 감정 공유 능력이 결여되어 있거나, 우리가 '양심'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것이 그들에게는 없으리라는 것이다. 좀 더 차갑게 말하자면, 그들의 뇌에는 양심을 느끼거나 작동시키는 뭔가가 없거나 손상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양심'이라는 개념은 의학용어도 아니며, 명확히 정의되는 단어라고도 보기 어렵다. 그러나 심리학자 마사 스타우트는 바로 양심 개념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곧 윤리에 관한 이야기라는 말이다.
여기서 악마, 흡혈귀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인간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 악마는 언제나 인간이 세워놓은 '윤리적 규율'을 심각하게 어기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들이 정녕 신적인 존재(또는 초월적 존재)라면, 왜 하필 '인간의 룰'을 어기는 것으로 묘사되는가? 오히려 고전적인 공포소설들은 그런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떤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심의 역할 그리고 인간의 약점
'양심'의 정의가 어떻게 되든 간에, 우리는 그것이 최후의 경찰관과 같은 역할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사람이 없거나,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는 범죄라 하더라도, 스스로 선을 넘지 않으려는 것, 혹은 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그러한 마음 말이다. 정말 감쪽같은 거짓말을 해서 누군가를 속이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못내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거나,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드는 거추장스러운 마음. 그것이 우리를 비효율적으로 만들 수는 있지만,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가치를 향해 있으리라는 것은 막연하게나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상인의 양심이 약해지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몇 가지 있는데, 가장 상식적인 것은 개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다. 더 설명할 것도 없이 위기에 처했을 때 사람은 거짓말도 하고, 타인에게 비겁한 수를 쓰기도 한다. 또 다른 경우는 강한 명령을 받았을 때다. 거역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 부조리한 명령을 내릴 때, 어쩔 수 없이 비양심적인 일을 수행하거나, '내 탓이 아니다'라고 느낄 수 있다. 언급한 두 가지는 모두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해도 될까.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양심을 포기할 수 있는 상황, 그것은 익명 속에 파묻혀서 개인이 소멸되었을 때다.

개인이 사라진 순간
홀로 한적한 거리를 걷고 있는데, 눈앞에서 갑자기 응급환자가 발생한다고 가정해보자. 구체적으로 어떤 노인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고 생각해보자. 인근 병원으로 그 사람을 들쳐 업고 뛰어간다거나,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더 정확히는 한적한 거리에 갑자기 쓰러진 노인을 그대로 두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상황을 조금 바꿔서 그 거리에 행인이 200명쯤 있다고 가정해보자. 목격자도 많고 도울 사람도 많으니, 그 노인이 도움을 받을 확률이 더 높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목격자가 많을 때 오히려 누군가가 그 노인을 들쳐 업거나, 119에 신고를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는 속도가 느려진다고 한다. 이럴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면, '119에 신고해주세요'라고 허공에 외칠 것이 아니라 군중 속의 특정인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면서 '당신이 119에 신고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빠르다고 한다.
우리는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확실한 것은,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누군가가 쓰러졌을 때, 그가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해도, '오직 나만의 잘못'이 아닌 것은 맞다. 또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환자를 돕기가 부끄러워서 망설여질 수도 있다. 이런 여러 가지 변수가 나의 행동을 방해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냉혹히 말해, 군중 속의 개인은 아무것도 아닌 이유에 의해 비양심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곳 - 인터넷
또 하나의 끔찍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어떤 사람이 도로를 건너다 과속 질주하던 차량에 치였다고 생각해 보라. 사방으로 피를 튀기면서 그 사람이 허공에 떠올랐다고 상상해보자. 그 사람이 몇 미터를 날아가서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서 신음하는 장면을 눈앞에 그려보라. 이를 지켜본 많은 행인들은 대부분 충격을 경험하면서, 쓰러진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군중 속에서 어느 젊은이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방금 날아간 그 사람 양학선 같았어. 완전 멋있잖아. 그거 기술 '양' 아니야?"
그렇게 두어 명의 젊은이들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되겠지만, 억지로라도 상상해 보자. 아마 이런 상황에서 낄낄 웃을 수 있다면, 앞서 언급한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이거나, 공포소설의 악마 같은 존재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상황을 조금 바꿔서, 어느 인터넷 뉴스기사에 사망사고 소식이 올라왔고, 그 아래에 비슷한 댓글이 달리는 것은 어떤가. 그것은 훨씬 있음직한 일이 된다. 타인의 비극과 위험을 웃음거리로 여기는 것이 인터넷에서는 훨씬 쉽다는 것, 우리는 이미 알고 있고, 인정해야 한다. 그런 댓글 놀이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은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가장 큰 군중이 모이는 곳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 군중은 양적으로 수천에서 수백만 명이 운집한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거기서 우리는 영어 몇 자로 된 닉네임으로 활동한다. 군중 속의 개인이 비양심적으로 변할 수 있다면, 인터넷 상의 인간은 어떠한가.
만일 인터넷상의 어느 게시물이나 농담 섞인 댓글이 경악할 정도로 끔찍하다면, 그것은 아마도 거기서 작성자의 '웃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 웃음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1800년대 공포소설에서 웃고 있는 악마나 흡혈귀가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면, 양심이 희석된 네티즌의 웃음은 어떤 의미인가. | 아트앤스터디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

사진1945년 4월 30일, 아돌프 히틀러, 아내와 함께 자살

아돌프 히틀러의 사망 소식이 게재된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 호외 (1945년 5월 2일 발행)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은 1945년 4월 30일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부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 후 40시간 후에 자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요제프 괴벨스가 국가수장직에 올랐으나 괴벨스는 다음 날 자살하고, 대통령인 카를 되니츠가 1945년 5월 8일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히틀러가 자살한 지하 벙커의 구조
1945년 4월 29일 이른 새벽에 히틀러는 자신에게 헌신적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유서와 유언장을 받아 적게 했다. 히틀러의 유언장은 두 장이다. 개인적인 유언장과 빌헬름 카이텔에게 전해질 유언장이었다.
나는 지난 전쟁 기간 동안 결혼하는 것이 책임감 없는 행동이라고 믿었기에 지금 지상의 이력을 끝내기에 앞서 오랜 세월 우정을 나눈 다음 자유의사로 거의 완전히 포위된 도시로 들어와서 나의 운명을 함께 나누려는 이 아가씨 (에바 브라운)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소원에 따라 내 아내로서 나와 함께 죽게 될 것이다. 죽음은 민족에 봉사해야 하는 나의 일이 우리 두 사람에게서 빼앗아간 것을 우리에게 보상해줄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은 당의 소유가 된다. 당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국가 소유이고, 국가마저 파괴된다면 내가 내린 결정은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사들인 그림들을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모았던 것이 아니고 언제나 내 고향 도시 도나우 강변의 린츠에 회랑을 건설하기 위해서 모았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가장 귀한 소망이다. 유언장 집행인으로는 가장 충실한 당 동지 마르틴 보어만을 임명한다. 그는 모든 결정을 최종적으로 내릴 권한을 가진다. 개인적인 추억의 가치를 가진 것이나 시민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나의 형제자매들과 내 아내의 어머니, 그리고 그도 잘 알고 있는 충실한 직원들에게, 특히 여러 해 동안이나 업무에서 나를 도와준 나이든 남녀 비서들과 빈터 부인에게 나누어줄 권한을 가진다. 나 자신과 내 아내는 파면이나 항복의 수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죽음을 택한다. 지난 12년 동안 민족에게 봉사하면서 내 일상의 업무 대부분을 처리한 이곳에서 즉시 불태워진다는 것이 우리의 의지다.
두 장의 유언장은 4월 29일 새벽 4시에 서명되었다. 세 장의 사본이 만들어지고 그날 하루 동안 여러 방법을 통해 벙커에서 밖으로 알려졌다. 심부름한 사람은 히틀러의 공군 부관인 폰 벨로브 대령이였다. 히틀러는 하인리히 힘러와 헤르만 괴링을 모든 공직에서 쫓아냈고 그들을 반역자로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또다른 유언장을 폰 벨로브에게 육군 원수에게 주어 빌헬름 카이텔에게 메시지를 전하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히틀러가 작성한 마지막 문서였다.
민족과 방위군은 이 길고도 힘든 싸움에서 모든 것을 마지막까지 바쳤다. 희생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나의 신뢰를 악용했다. 전쟁을 치르는 도처에서 불충과 배신이 저항의 힘을 갉아먹었다. 이제 나는 국민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 육군 참모본부는 제1차 세계 대전 때의 총참모본부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참모본부의 공적은 전선에서 싸우는 사람들의 공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도이치 민족의 노력과 희생은 너무나도 커서 나는 그러한 노력과 희생이 허사가 되었다고는 믿을 수가 없다. 앞으로도 도이치 민족을 위해 동쪽에서 공간을 얻는 것은 계속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 뒤 히틀러는 카를 되니츠 해군 원수를 대통령 겸 전쟁부 장관. 3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막 결혼한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 부부는 즉석에서 피로연을 베풀었다. 히틀러는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지나간 영광스러운 날들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했고, 작별 인사를 한 뒤 부부는 그 자리를 떠났고, 잠시 후에 권총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시체가 피를 흘리면서 소파를 피로 적시고 있었고, 에바 브라운은 독약을 마신 상태였다고 한다. 이들의 주검은 소련 포탄이 총리관저 정원에서 폭발하는 가운데 바깥으로 옮겨져 화장되었다.

사후

히틀러가 머무른 총통엄폐호
철거된 총통엄폐호 (1947년)
마지막 몇 주 동안 히틀러는 모스크바 동물원에 전시되거나 유대인이 연출한 연극에 주연으로 출연해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 망상을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걱정들은 4월 29일 베니토 무솔리니의 최후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더욱 심해졌는데, 무솔리니가 죽자 그는 로레토 광장에 있는 주유소에서 발이 묶여 거꾸로 매달렸고, 소리지르는 사람들이 시체를 치고 침뱉고 돌을 던졌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히틀러는 자신의 최후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 중에는 하인 하인츠 링게, 기사인 에리히 켐프카, 그의 비행사인 한스 바우르 등에게 자신의 유해가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히틀러는 준비된 독약이 신속하게 확실하게 죽음을 불러오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으며 약물의 효과를 자신의 사냥개 블론디에게 시험해보라고 명령했다. 한밤중에 블론디는 화장실로 끌려와서 히틀러의 개 조련사인 토르노브(Tornow) 상사가 억지로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의료진의 한 사람인 하제(Hasse) 교수가 끼어들어서 집게를 이용해 독약 앰플을 으깨서 털어넣었다. 곧 이어 히틀러가 블론디의 시체를 무표정하게 한참동안 바라보았고, 다른 벙커의 사람들을 회의실로 불러서 이별을 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에게 말을 건넸으나 히틀러는 대답하지 않거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입술을 움직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회의를 하고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했다.
그 직후 시신을 부하들이 무려 190리터나 되는 대량의 휘발유를 자동차에서 빼서 화장했지만, 저장된 기름의 상당량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화장시설에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태운 게 아니라 대충 태워서 시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화장한 직후에 소련군의 포화로 인해 시신의 상당부분이 부서졌지만, 소련군이 치아를 대조해서 히틀러의 시신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작센-안할트 주 마그데부르크 근교에 위치한 비더리츠에 소련군에 의해 히틀러의 유해가 화장된 뒤 하수구에 넣어 버려졌다.
이 시체는 1년이 지난 1946년에서야 겨우 전부 수습되어 비밀리에 탄약 상자에 넣어 매장되었는데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의 추종자들이 이 시체를 찾지 못하게 하려고 보안에 상당한 애를 썼다. 결국 이 탄약 상자는 독일과 소련 각지를 돌며 무려 8번이나 이장되다 결국 70년대 중반 동독 KGB 지부에 명령이 하달되어 두개골이나 이빨 등 신원 확인이 가능한 일부분만 소련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화장된 뒤 작센-안할트 주, 마그데부르크 근교 하수구에 넣어 버렸다. 이것이 냉전이 끝나고 밝혀진 공식적인 히틀러의 행방이다.
참고로 이오시프 스탈린은 아직 숨이 붙어있을지도 모르는 히틀러의 추종자들의 힘을 빼기 위해서 속임수를 발동하는데 히틀러 시신의 행방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고 마치 히틀러가 살아있는 듯이 꾸며서 그의 추종자들이 그 흔적만 쫓다 힘빠지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KGB에게 히틀러를 잡아오라고 거짓 지시해서 1950년까지 KGB는 아르헨티나 전 지역을 샅샅이 뒤졌다.
2010년 5월 7일 러시아에서 옛 소련 당시 의무병들이 히틀러가 1945년 4월 30일 청산가리 캡슐을 먹고 숨진 것으로 결론지었다고 밝혔다.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것은 베를린에 남아있던 나치 세력이 퍼트린 일종의 선전일 가능성이 있지만 정작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설이 퍼진 것은 나치 세력의 선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소련에서 히틀러의 유골이라며 보관하고 있던 것이 구멍이 난 두개골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는 점이 이상하다. 해당 내용에 대해 러시아의 크리스토포로프 중장은 ' 히틀러의 입안에서 으스러진 유리 캡슐이 남아있는 점과 시신에서 씁쓸한 아몬드 같은 악취가 나는 점, 후에 결과로 볼 때 청산가리 중독에 에 도달했다.' 면서 의무병들이 히틀러의 시신에서 치명적인 외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혹은 청산가리 캡슐을 입 안에 넣고 깨무는 것과 동시에 총을 쏴서 확실하게 죽으려고 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히틀러가 죽기 전 확실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크게 고민하고 집착한 것을 보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아돌프 히틀러, 아내와 함께 자살

나치스의 지도자이며 인류역사상 가장 끔직한 전쟁을 유발시킨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1945 4 30일 패전이 분명해지자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이틀 전에 결혼한 그의 애인 에바 브라운도 그 옆에서 음독자살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가 세운 독일 제3제국도 인류에 고통 만을 남겨둔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세관원인 알로이스 히틀러의 6남매 중 4째로 태어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 4월 20 ~ 1945 4월 30) 10대에 부모를 여의고 빈으로 나가 그림을 그렸지만 이내 자신이 그림에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예술가의 길을 포기했다.

히틀러가 활발한 반유대주의자가 된 것은 빈에 있을 때부터였다. 반유대주의는 히틀러가 자랐던 오스트리아의 기독교 문화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빈에는 기독교의 한 종파인 동방정교회 신도를 포함한 큰 유대인 사회가 있었다. 빈 사람들은 이 유대인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히틀러는 아리아 인종 우월주의에 빠졌고, 결국 유대인들이 아리아인의 적이며, 독일의 경제적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고 믿게 되었고, 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는 1913년 뮌헨으로 갔다. 이유는 오스트리아군 징집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당시 몸이 허약하다는 이유로 군 면제 판정을 받았지만, 사실은 슬라브족 유태인으로 혼탁한 오스트리아군에서 군복무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오스트리아는 그에게 조국이 아니었고, 그의 조국 독일인과 기타 민족들로 구성된 독일 제국이나 다름없었다. 1914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는 바이에른 16보병연대에 입대를 자원했고, 독일 군인의 최고 영예인 철십자상을 받았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1919 9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 Partei, DAP)에 입당, 당원증 제55번을 받았다. 히틀러는 곧 당내에서 가장 유능한 연설가가 되었고 지도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920 ,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당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1 7월에는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나치스당 당수로 선출됐다.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스트당 로마 에 자극받은 히틀러는 1923 11 뮌헨에서 봉기를 시도했지만, 바이에른 주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으며, 그 사건으로 베르세르크 감옥에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출판한 《나의 투쟁》을 통해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고, 이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합법적인 운동으로 민주 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전복할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비록 수감 생활은 9개월로 끝났으나 당은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다. 히틀러는 흩어진 당원들을 다시 모으고 재건에 나섰다.

1929 검은 목요일로 시작된 경제 대공황으로 기업들이 도산하고, 살아나던 독일 경제는 실직자 수가 6백만 명으로 늘어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민주주의 정당들이 속수무책인 가운데 나치당은 18.3%의 득표율로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연립내각에 입각하기를 거절하고 나치스의 단독 집권을 요구했다. 히틀러는 1932 4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로 출마하여 1,340만 표(36.8%)까지 득표하였으나 파울  힌덴부르크(원래는 장군) 후보에게 패하였다.

또한 7월 총선거에서는 37.3%를 득표하여 압도적인 당세를 과시하면서 여전히 연립내각에 참가할 것을 거절하였다. 이후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 1월 30에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1932 년 선거에서 이겨 1933년 총리로 지명되면서 권력을 잡은 히틀러가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영접하고 있다.

점차 권력을 강화해 나간 히틀러는 1934 8 대통령 파울  힌덴부르크가 죽자 국민투표를 실시해서 총리가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되었고 그 지위를 총통 및 총리(Führer und Reichskanzler) 약칭 총통(Führer)이라 칭하였다. 전권 위임법에 의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했고 제3제국이 시작되었다. 지방 의회가 해산되고 사민당은 불법화되었다.

그리고 각종 단체와 조합들이 나치당의 하부조직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나치 조직 내부의 권력 재편에 착수하면서 1934 6월 30에는 장검의  사건을 일으켜 나치 돌격대 지휘관 에른스트 을 제거한 데 이어서 바르톨로메오의  사건을 일으켜 권력 등 모든 비밀을 알고 있던 전임 총리 슐라이허 장군을 제거하면서 오래된 청구서를 모두 해결하였다.

히틀러는 1939 9월 1에 선전 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인류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그의 광적인 세계 제패의 꿈은 급기야 1941년 소련과의 전쟁을 통해 후퇴할 수 없는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

German Chancellor Adolf Hitler speaks to Nazi party officials in 1939, the year of the German blitzkrieg into Poland.

40시간 히틀러의 부인으로 산 여인, 에바 브라운은 누구인가?

에바 브라운(Eva Anna Paula Braun, 1912 2월 6 ~ 1945 4월 30) 바이에른의 주도 뮌헨 태생으로 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와 재봉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차녀로 태어났다. 학창 시절에는 대체로 평범한 학생으로 여겨졌지만 체육 과목에서만큼은 다른 학생들보다 좋은 점수를 받았다. 이후 1차대전의 패전과 뒤이은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집안 살림이 어려워지자 17살 때 어느 사진관에서 조수 겸 점원으로 고용되어 일하게 되었는데 그 사진관의 운영자가 바로 나치 공식 사진사였던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fmann)이었다.

이를 계기로 에바 브라운이 히틀러와 처음 만난 것은 23살 때인 1929년이었다고 하는데 이때부터 브라운은 일편단심 히틀러를 사모하게 되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당시 자신과 외종조카딸 관계였던 겔리 라우발(Angela Maria "Geli" Raubal, 1908 6 4 ~ 1931 9 8)과 동거하고 있었다.

겔리 라우발의 어머니 안젤라 라우발은 아돌프 히틀러의 배다른 누나이다. 과부로 살던 안젤라는 히틀러가 오버잘츠베르크(Obersalzberg)에 셋집을 얻은 후 자신의 집에 와 집안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자 1928년 딸과 함께 히틀러의 집으로 이주했다. 40살이 된 히틀러는 조카 겔리에게 매혹되었으며 그가 어린 조카와 연인관계라는 소문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히틀러는 겔리에게 극도의 집착을 보였고 역시 겔리에게 관심을 보인 운전사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해고되었다.

겔리 라우발과 히틀러

두 사람은 2년동안 동거를 했다. 겔리와의 관계는 위태로운 것이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상대에게 충실하지 못하다며 비난하고 다투었다. 겔리는 특히나 에바 브라운에게 신경을 썼는데 당시 17살이던 에바 브라운은 종종 히틀러와 함께 벤츠에 동승하곤 했다 

겔리는 또한 히틀러가 그녀의 삶을 통제하려 한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1931 9 8, 히틀러는 비엔나에 가고 싶어하는 겔리와 격심한 말다툼을 벌인 후 함부르크로 떠났다. 그는 차에 타기 전 겔리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안돼!” 히틀러가 떠난 후 겔리는 리볼버 권총으로 심장을 쏘아 자살했다.

The unresolved and hastily covered-up death in 1931 of Geli Raubal, Hitler ’ s half-niece and romantic obsession, has long been relegated to the murky footnotes of the   F ü hrer ’ s early career in the demimonde of Munich.

히틀러는 오페라에 초대하고 싶다. 나는 남자들 사이에 둘러쌓여 있는데 당신같은 여성을 만난 행운을 감사하고 싶다고 에바 브라운을 유혹했다. 영화와 패션에 관심이 많던 순진한 에바는 대량 학살자의 이런 모습에 넘어가고 만다. 히틀러는 그녀를 만난 후 조상 중 유태인이 없는지 조사했다고 한다.

 

에바와 히틀러

그들의 이런 연애행각이 언제 심각한 관계로 발전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1932년 브라운은 그녀 아버지의 총으로 자살을 시도했고 히틀러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는 겔리 라우발에 이어 히틀러와 관련된 여성의 두번째 자살 사건이었다. 물론 에바 브라운은 죽지 않았다.

에바는 공식적인 배우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자리에는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히틀러의 권력이 커져가면서 점점 에바에게 소원해졌다. 1935년에는 오랜기간 동안 에바를 방치했다. 몇 달 동안 에바는 히틀러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썼지만 답장은 없었다.

이에 1935년 브라운은 수면제를 먹고 두번째 자살을 시도했는데 이 역시 히틀러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얼마 후 히틀러는 그녀를 부모의 집에서 나오게 해 베르그호트에 있는 바바리안 휴양지에 보내고 거기서 에바는 히틀러의 '풀타임' 정부가 된다.

그러나, 히틀러는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데 스스럼이 없었다. 그중에서 독일의 유명한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Berta Helene Amalie "Leni" Riefenstahl, 1902-2003)도 있었다.

레니 리펜슈탈과 히틀러

하지만 두번째 자살 소동 이후 브라운은 최고위층 모임에도 서슴없이 들어와 히틀러에게 저녘을 먹으라고 할 정도로 스스럼이 없었다. 그녀의 앨범에 남아 있는 그녀가 찍은 사진과 정황으로 볼때 에바 브라운은 정치적인 모임에도 참석이 허락되었으며 히틀러의 세계관과 정치관을 비판없이 공유했을 것이다.

죽기 40시간 전 베를린 벙커에서 히틀러는 에바에게 자신과의 결혼을 선물한다. 그리고 에바 브라운은 자신의 이름을 에바 히틀러라고 서명한다.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40시간 후 이 두 사람은 자살로 생을 마친다.

 

그의 자살과 관련하여서는 아직도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가 많다.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 그는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승승장구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에서 구소련에 패하면서 어두운 나락의 길로 떨어진다. 그리고 1945 4 30일 베를린의 총통관저 지하벙커에서 아내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히틀러는 권총으로 자신을 쏘았고, 에바는 청산가리 캡슐을 삼켰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히틀러의 나이 57세였다.

히틀러와 에바의 시신은 소련군이 화장시켜 벙커 위의 마당에 묻었다고 한다. 이후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옛 동독 마그데부르크의 소련군 부대 내에 하고 턱뼈와 두개골 조각 등 유해 일부만을 현 러시아 문서보관국에서 보관하게 됐다고. 여기까지가 히틀러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공식적인 기록이다.

 

1) 여성의 두개골? 히틀러가 여성??

1945 5 3일 독일을 함락시킨 소련군은 히틀러의 유해를 찾아낸 뒤 신원확인을 위해 히틀러의 주치의를 찾았다. 시신의 치아로 진짜 히틀러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주치의의 조수만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조수를 통해 치아가 히틀러의 생전 치료기록과 일치한다는 확인을 받았다. 이렇게 소련군은 치아의 주인, 즉 총상이 있는 시신을 히틀러의 것으로 확신한 뒤 사인을 권총자살로 결론지었다. 이어 지난 2000년 히틀러의 두개골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공개되면서 그의 죽음에 대한 논란이 종지부를 찍는 듯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논란은 재점화됐다. 2009년 미국 코네티컷대학의 고고학자 닉 벨란토니 교수와 유전학자 린다 스트로스보 교수가 러시아 당국의 허가를 받아 총알구멍이 있는 히틀러의 두개골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면서였다. 이 과정은 최근 미국에서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 방영되기도 했는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두개골의 DNA분석 결과, 20~40세 여성으로 밝혀진 것. 그 두개골은 DNA 뿐만 아니라 두께 등에 있어서 육안상으로도 확연히 여성의 특징을 보였다고 연구진은 덧붙였다.

문제의 두개골

이에 대하여 첫째 두개골이 에바의 것이라는 것과 둘째 히틀러가 여성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에바는 권총 자살이 아닌 음독 자살에 무게가 실리고 있기 때문에 타당성이 없는 듯하다.

문제는 두번째 주장인데, 근거는 히틀러가 키가 165cm로 자고 좁은 어깨에 엉덩이는 크고 걸음걸이 또한 여성스러웠다는 것이다. 게다가 히틀러의 콧수염은 자신을 위장하기 위하여 붙인 장치였고 히틀러가 주치의를 통해 남성 호르몬 주사를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신체 특징인 키가 작고 어깨가 좁은 것 등으로 여성이었다고 단정짔기에는 무리가 있고, 남성호르론 주사를 맞은 것은 전쟁 중 한 쪽 고환을 잃어 남성호르몬을 보충하기 위했다는 주장이 있어 이 또한 100% 받아 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다.

 

2) 아르헨티나 망명설

히틀러의 죽음을 명확히 입증할 법의학적 근거는 현재로선 없다. 죽음에 대한 의문을 파헤칠수록 오히려 미궁이 더 깊어지는 이유다. 히틀러의 죽음을 증명하는 거의 유일한 증거품인 해골이 가짜라면 시작점부터 되짚어야 할 필요가 있다. 혹시 히틀러는 1945 4 30일에 죽지 않았던 건 아닐까? 

다수의 음모론자들은 권총자살의 형태로 숨진 이는 히틀러와 닮은 대역이었고, 진짜 히틀러는 다른 나라, 구체적으로 아르헨티나로 탈출했다고 믿는다. 패망에 대비해 일찍이 자신과 닮은 사람을 뽑아 대역을 맡겼고, 자신은 에바와 함께 특별한 루트를 이용해 해외 도피에 성공했다는 시나리오다.

아르헨티나 도피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1945년 소련군에게 생포된 히틀러가 스탈린과 모종의 비밀협정을 맺고 잠수함을 이용해 라틴아메리카로 탈출했다고 설명한다. 아르헨티나 외곽의 한 독일인 소유 호텔에서 히틀러를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어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

2차 세계대전에 관해 광범위한 저작을 남긴 영국의 역사학자 겸 저널리스트 제라드 윌리엄스와 사이먼 던스틴도 2011년 저서 ‘회색 늑대: 아돌프 히틀러의 탈출’을 통해 앞선 주장을 되풀이했다. 두 사람은 이 책에서 히틀러와 에바가 2차 대전 막바지에 독일을 탈출해 아르헨티나로 망명을 떠났고, 슬하에 두 딸을 두고 1962년까지 살다가 73세를 일기로 숨졌다고 적시했다. 아르헨티나에서 히틀러 부부를 봤다는 수많은 목격자들의 이야기도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2012 1 20, 옛 소련 KGB(국가보안위원회) 후신인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고위 관계자가 나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1945년 사망했으며 그가 라틴 아메리카로 도주했다는 가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밣혔다.

반응형

'동서고금 --- 鑑賞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로 창을 삼은 서재  (0) 2020.03.21
쇠고기 부위별 특징  (0) 2020.03.16
체력증진에 좋은 아침 밥상  (0) 2020.03.13
반응형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