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의미하는 말로서 거짓이나 허망(虛妄)함이 없는 상태입니다. 참다운 이치인 ‘진리(眞理)’ 또는 참다움의 실상(實狀)이 그대로 드러나는 ‘진여(眞如)’의 세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참 진(眞)자는 원래 숟가락(匕)과 솥(鼎→貝)이 합쳐진 모습(模襲)이었는데, 이후 모습이 변해 지금의 글자가 되었습니다. 숟가락(匕)으로 솥(鼎→貝)의 음식을 떠먹는 모습에서 '참, 진실, 사실' 등의 뜻이 생긴 이유는 명확(明確)하지 않습니다. 진선미(眞善美 )는 '참됨(眞)과 착함(善)과 아름다움(美)'입니다.
그리고 진(眞)자는 '삼갈 신(愼)'자의 본의를 담고 있습니다. 진(眞)자는 目部 글자로 본디 화로에 수저 꼴의 비수(匕)를 꽂아서 달군 후에 거북껍질에 점을 쳐서 눈(目)으로 확인함으로써 가려진(乚) 것을 가르는(八) '진실(眞)'이라는 뜻이 스며있습니다. 진실(眞實)이란 거짓이 없이 바르고 참된 것이요 변치 않는 것입니다. 진(眞)자를 풀어보면 변화(化→匕)를 눈(目)으로 샅샅이 관찰하고자 감춰진(乚) 것을 탁자(卓子)에 올려놓고 진짜인지 판별하는 개념입니다. 탁자가 없더라도 물체의 변화(化→匕)를 눈(目)으로 관찰하여 감춰진(乚) 것을 팔방(八)에서 찾아 진위(眞僞)를 판단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진(眞)자는 비수(匕)를 꽂아서 달군 후에 거북껍질에 점을 쳐서 눈(目)이 확인함으로써 가려진(乚) 것을 가르니(八) '참·생긴 그대로·변하지 않다(眞)'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참 진(眞)의 구성은 비수 비(匕)와 솥 정(鼎)의 생략형으로 짜여 있습니다. 비(匕)는 비수나 화살촉을 뜻하기도 하지만 보통 밥을 먹는데 사용하는 도구인 숟가락(柶사, 匙시)이나 국자 등의 뜻으로 쓰입니다. 또한 化(화)에서처럼 정상적인 사람(人)이 늙어 웅크리고 있는 변화된 모습(匕)을 뜻하기도 합니다. 鼎(정)에 대해 한나라의 문자학자 허신(許愼)은 “세 개의 발과 두 귀가 달린 것으로 다섯 가지 맛을 조화(調和)롭게 하는 보배로운 그릇을 말합니다. 나무를 쪼개서 불을 때는 모양을 본떴다.”고 하였습니다. 갑골문(甲骨文)이나 금문(金文)에도 세 개의 발과 두 귀가 달린 솥(鼎)의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그 용도는 주로 조상신(祖上神)이나 천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기(祭器)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眞)의 전체적인 의미(意味)는 하늘이나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먼저 제관이 솥(鼎)안에 담긴 음식의 맛이 신에게 바쳐도 괜찮을지 수저나 국자(匕)를 이용해 맛을 보는데, 이때는 삿된 생각이 없는 참된 마음으로 신중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참’이나 ‘진실’의 뜻이 생겨났고, 그러한 마음상태를 일러 삼가 진실(眞實) 된 마음, 신중할 신(愼)이라 하였습니다.
논리 혹은 형식에 의해 참인 것. 분석적 진(眞)·필연적 진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진은 관념과 관념(觀念)의 내적인 일관성에 의거하기 때문에 진위(眞僞)를 가리기 위해 외부의 경험적 세계에 의존(依存)할 필요는 없습니다. 논리적 진과 대응되는 개념(槪念)은 과학적 지식과 같이 사실과 관련된 존재론적 진리(眞理)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진’이라는 말은 존재론적 진리에 한정(限定)하여 사용하고 논리적 진은 ‘타당성(妥當性)’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원래 참 진은 시체(屍體)가 본래의 뜻인데 어떻게 되어 참되다는 뜻으로 바뀌게 됐을까요? 한자를 알아야 우리 문화 전승(傳承)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삶이 더욱 풍요롭게 됩니다.
한자란 수천 년 인류의 지혜(智慧)를 담아 전하는 대용량 저장소(貯藏所)입니다. 그럼 간단히 참 진(眞)자를 알아보기로 합시다. 참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먼 선조(先祖)들은 무엇을 보고 이 글자를 참이라는 뜻을 갖도록 했을까요?
갑골문(甲骨文)에서 참 진은 시체(屍體)를 의미합니다. 그럼 어떻게 시체가 참되다는 뜻이 됐을까요? 언제부터 참되다는 뜻이 됐을까요? 자연히 이런 의문(疑問)들이 듭니다. 그리고 그 의문들에 답을 하는 과정(過程)에서 우리는 ‘과연 참 됨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참 진을 제대로 알면 ‘무엇이 참됨’인지 절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수많은 학자들이 수십 수백편의 논문을 써도 정의(定義)가 쉽지 않은 ‘참됨’이라는 의미를 한자 한 자가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무엇이 한자에게 이런 기능(機能)을 갖도록 했을까? 한자는 인간 스스로의 인식 과정을 극도로 압축(壓縮)했기 때문입니다. 한자가 이 땅에 만들어 쓰인지는 대략 5000여 년 전입니다. 본래 한자는 고대 주변의 산과 강 등 주변의 사물(事物)과 각종 동물(動物)과 기구의 모양을 본 따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글자들이 모여 다시 새로운 한자를 만들어 갔습니다. 이 과정은 인류(人類)의 생활이, 의식이 복잡(複雜)해지는 과정과 같습니다. 생활이 복잡해지면서 사용하는 물건이 다양해졌고 자연히 한자도 늘어갔습니다. 의식구조(意識構造)가 복잡해지면 규정(糾正)해야 할 것들이 생기고 그로인해 명사, 한자도 늘어갔습니다.
바로 참 진(眞)자처럼 한자 한 자 한 자는 그렇게 수천 년 한자를 써온 우리의 생활과 의식이 투영(投影)됐습니다. 우리 모든 개념의 본래 뜻(本意)과 변해온 뜻(演意)을 담고 있습니다. 한자를 알면 본래 뜻이 어떻게 오늘날의 뜻으로 쓰이는지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참 진의 본래 의미가 시체(屍體)인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문자 학자들도 고증(考證)할 방법이 없어 속수무책(束手無策)입니다. 왜 참됨이 시체를 의미하는 한자에서 발전했는지도 당연히 모릅니다. 참됨이 무엇인지 모르니, 어찌 참될 수 있을까요?
참됨을 알고 싶은 이들이 외국 교수들의 정리(整理)한 도덕이나 정의에 대해 철학적으로 정리하는 책을 읽기도 하지만, 역시 참됨을 정확히 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도덕(道德)이나 정의와 참됨은 분명 다른 글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개념적(槪念的)으로 비슷할 수 있어도 완전히 일치하는 뜻이라 볼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글자로 표현(表現)되기 때문입니다.
참됨이 정의(正義)나 도덕이면 왜 굳이 참됨이라는 단어가 나왔을까요? 오늘날 많은 이들이 참 진이 본래 뜻을 모르는 이유(理由)는 간단합니다. 억지 같지만 요즘 한자를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자를 쓰지 않으니, 한자가 가지고 있는 본의(本意)를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 사회가 “참되기 어렵다”며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참됨이 무엇인지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참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분명(分明)한 것은 한자가 전하는 참됨을 안다는 것이 참되지는 첫 걸음이라는 점입니다.
한자는 이렇게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구하는 이정표(里程標) 역할을 합니다. 수천 년 한자를 사용한 사람들의 지혜를 만날 수 있도록 이끕니다. 한자를 공부(工夫)하면 분명 우리는 선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옛 사람의 생각을 접하게 되고 그들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比較)하게 됩니다. 그렇게 깨달은 몇 가지 한자는 가끔 누구엔가는 인생을 바꾸기도 합니다.
솔직히 몇 가지 한자는 복잡했던 우리 삶의 가치(價値)들을 정리해주고, 항상 새로운 변화를 직시하게 했습니다. 너무나 기분 좋은 고귀(高貴)한 경험이었기에 여기서 나누고자 합니다.
여기서 진리(眞理)는 어떤 명제가 사실에 정확하게 맞는 것, 또는 논리의 법칙(法則)에 모순되지 않는 바른 판단. 허위(虛僞)와 더불어 명제의 특징(特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진리는 참 혹은 거짓으로 분별(分別) 될 수 있는 명제(命題)로서의 문장이나 기호나 표현에 관한 것입니다. 신념·주장·이론 등에 진리의 개념(槪念)이 적용되는 것은 그것들이 명제이거나 명제의 체제(體制)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본질(本質)에 관한 전통적인 학설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대응설(對應說)로서, 한 명제가 진리라는 것은 그 명제가 표현(表現)하는 대상으로서의 사실이 있고 그 명제에 의해서 표현된 의미는 대상(對象)과 일치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비가 오고 있다.”는 명제는 실지로 지금 비가 오고 있다면 진리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정합설(整合說로서 진리는 체계적인 정합(整合)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전체적 구조 속에서 하나의 요소(要素)로서의 한 명제는, 다른 모든 명제와 논리적(論理的)으로 의미 있게, 일관성 있게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뜻하는 정합을 만족시킬 때 진리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실용설(實用說)로서, 한 명제가 진리라는 것은 그것에 관심(關心)을 둔 사람의 의도를 결과적으로 만족시키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명제가 본래의 기대대로 기능(機能)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진리임을 입증(立證)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