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책을 즐겨 읽습니다. 그런데 어련히 서평(書評)을 쓰지 않습니다. 스포일러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스포일러’는 영화나 연극 따위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에게 주요 내용, 특히 결말을 미리 알려서 보는 재미를 크게 떨어뜨리는 사람. 또는 그런 내용의 말이나 글입니다.
위에서 알다시피 스포일러 없이 작가나 책을 소개하려면 웬만한 글 솜씨를 가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는 그저 독자로서의 즐거움에 심취(心醉)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웬 영문인지 이 위대한 작가를 소개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後悔)할 것 같아 이 컴퓨터에 마주앉았습니다.
검색창에 ‘레프 톨스토이‘라고 치면 이런 글이 뜹니다. “레프 톨스토이는 사실적인 소설의 거장(巨匠)이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 한 명인 러시아 작가이며 세계적인 대문호(大文豪)이자, 도덕적, 종교적 사색가이며 기독교적 아나키스트이다.” 그럼 아래에 감히 이 위대한 작가의 생애와 작품을 알아봅니다.
톨스토이는 1828년 제정 러시아의 툴라 근방의 톨스토이 가문 영지인 야스나야폴랴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2세 때 어머니는 막내 여동생을 낳고 사망하여 '숙모(叔母)'라고 부른 먼 친척 아주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숙모라 불린 친척 에르골스카야 아주머니는 어머니와 다름없어 톨스토이의 훗날 성장과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사실 '숙모'는 아버지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으나, 톨스토이의 조부가 집안을 말아먹고 빚을 남겨서 부유한 여성을 만나기 바라는 마음으로 청혼(請婚)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아는 톨스토이의 생모와 관계가 오히려 나쁘지 않았습니다. 톨스토이의 생모(生母)가 사망하자 톨스토이의 아버지가 다시 청혼하지만 아이들과의 사이가 어색해질까봐 다시 거절하고 대신 평생 아이들의 엄마 노릇을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런 가정사는 1836년경 아버지의 유품(遺品)인 편지를 정리하다 톨스토이가 발견했다고 합니다.
톨스토이는 1844년에 외교관(外交官)이 되려고 카잔 대학 동양어학과에 입학했다가 다시 농민을 위해 일하려고 법학부로 전과. 하지만 학업에 열의(熱意)가 없고 자기 관심분야의 책만 보던 터라 수업태도 불량으로 유급했고 결국 자퇴(自退)합니다. 1847년에 야스나야폴랴나로 돌아온 톨스토이는 위의 형 셋과 달리 당시 귀족들의 진로(進路)인 문관이 되거나 군인이 되거나 중에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고 농촌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캅카스 지역을 병탄(倂呑)하기 위해 그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톨스토이는 호전적인 소수민족인 체첸인을 상대하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깁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입대하여 당시 귀족들처럼 유년 군사학교나 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포병 하사관부터 시작하여 공을 세워 현지 임관(任官)합니다. 복무 중 틈틈이 그의 성장기가 반영된 반자전적인 소설을 썼는데 ’유년 시대(1852)‘, ’소년 시대(1854)‘, ’청년 시대(1857)‘가 그것입니다. 이때쯤부터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서려고 전역신청(轉役申請)을 했는데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전역이 거부당하고 크림 전쟁에도 참전한 톨스토이는 세바스토폴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공을 인정받아 성 게오르기 훈장(勳章)을 받고, 중위로도 진급합니다.
이때부터 문필생활을 시작하여, 1855년에는 세바스토폴 전투에 관한 짧은 글들을 잡지에 실었습니다. 이것이 ’세바스토폴 이야기‘입니다. 이런 군 경험은 여러 작품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잔혹한 체험 때문에 톨스토이는 평화주의(平和主義)로 기울게 됩니다. 톨스토이는 1856년 군에서 제대하고 1857년부터 1861년까지 서유럽을 두 차례 여행했습니다. 그곳에서 교육방법(敎育方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톨스토이는 영지로 돌아와 농민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열고 신문 ’야스나야폴랴나‘를 발간해서 자신의 교육관(敎育觀)을 설명했습니다.
톨스토이는 당시 34살 되던 해에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아내로 고른 여자가 하필이면 18살밖에 안 된 친구의 딸 소피아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였습니다. 어쨌든 나이차에 관계없이 톨스토이는 소피아와 뜨거운 사랑을 나눴습니다. 소피아의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은 톨스토이를 매료(魅了)시켰고 그의 걸작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에 소피아를 모델로 한 주요 인물을 등장시키게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1869년의 필생의 역작 ’전쟁과 평화‘를 완성시켰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의 러시아 원정을 소재로 한 이 역사 소설에서 톨스토이는 실제로 특출난 사람이나 영웅(소설에서는 나폴레옹)은 역사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역사관을 내세우며 '위대한 사람'을 중요시하는 역사관을 강력히 부정해 뭇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7번이나 격전지를 답사하고 생존자들을 직접 찾아 인터뷰를 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전쟁과 평화‘는 소련시절에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공산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인원동원이 간편했기에 보조출연자로 연인원 총 75만을 동원해 거대한 전투 장면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기네스북에도 오른 기록입니다.
톨스토이는 1875년부터 1877년까지 그의 두 번째 걸작 ’안나 카레니나‘를 연속물로 출간했습니다. 겉보기에는 단순히 불륜(不倫)을 다룬 것 같아 보이는 이 소설은 1870년대의 귀족계급과 러시아의 사회, 도덕, 철학에 대한 문제,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들, 특히 간통(姦通)에 대한 상류계급의 위선적(僞善的)인 태도와 개인의 삶에 있어서의 종교적 신념의 역할 등을 강하게 고찰한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이 작품은 2007년 노턴출판사에서 조사한 영어권 작가 125명이 선정한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뽑혔습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보다는 안나 카레니나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있던 해에 톨스토이는 갑자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의문(疑問)에 사로잡혔습니다. 톨스토이는 도덕적 자기 점검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고통스런 물음을 ’고백(1879)‘라는 에세이에서 하고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정신적 위기와 함께 급격하게 변화했습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교의 권위(權威)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교회 사상을 발전시켜 ’신의 왕국은 그대 안에 있다(1894)‘라는 에세이에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톨스토이는 그 에세이에서 어떤 폭력(暴力)이나 무력의 사용은 해로운 것이며 폭력에는 비폭력으로 맞서야 하고 정부로 대표되는 무력이나 종교, 사유재산, 맹세 등 모든 형태의 강제적인 힘에 반대하는 사상을 펼쳤다. 이는 후세에 '톨스토이주의'라는 사상형태로 발전되었다.
종교와 일치하는 삶에 강한 열정을 느낀 톨스토이는 거름통 들면서, 나도 농부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할 정도로 농민들의 생활을 동경(憧憬)했던지라 ’인생론‘, ’참회록‘을 저술하고 스스로 재산과 영지를 포기하고 스스로 농부처럼 일하는 금욕적인 삶을 선택했습니다.
부인 소피아는 농민으로 돌아가겠다는 톨스토이의 폭탄선언(爆彈宣言)을 듣자 톨스토이와 대판 다투었습니다. 물론 톨스토이 개인에게 있어서는 분명 고뇌에 찬 결단이겠지만 이제껏 귀족으로 살아 온 소피아에게는 어처구니없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고매(高邁)한 이상이라 하더라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소작농(小作農)들도 톨스토이에 동조하지 않고 되려 그를 비웃었습니다. 톨스토이는 1881년 이전에 쓴 모든 소설의 저작권을 소피아에게 양도(讓渡)했지만 소피아의 화는 풀리지 않았습니다.
톨스토이는 에세이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해 회심(悔心)하기 전에 쓴 모든 작품을 부정했습니다. 이 글에서 톨스토이는 모든 예술은 사람들의 윤리적(倫理的)인 교화를 도와 사람들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습니다. 또한 예술이 가진 사상은 어떤 무지한 사람에게라도 전파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기준에 따라 톨스토이는 이전에 쓴 자신의 모든 작품들이 보통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헛된 목적으로 쓴 '귀족의 예술'이라고 흑역사 취급했습니다. 이 에세이는 러시아 문학계에 엄청난 파장(波長)과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을 시작으로 다시 소설 쓰기로 돌아갔습니다. 이 작품을 읽고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톨스토이는 동서양 최대의 작가"로 극찬(極讚)합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찬미자는 나보코프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가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부터 성욕(性慾)이 비정상적으로 강했는데, 그 영향으로 노년에는 성적인 욕망을 비판하는 작품들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은 ’크로이체르 소나타(1890)‘와 ’악마(1889)‘입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에서 톨스토이는 섹스를 비정상적이고 불결한 행위로 비판하고, 인간이 성욕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기독교(基督敎)에서 말하는 지상낙원(地上樂園)은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와 ’악마‘는 둘 다 자신의 성욕을 절제(節制)하지 못한 주인공의 파멸로 끝납니다. 둘 다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톨스토이 역시 젊은 시절 아내 소피아와 결혼식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를 마차 안에서 강간(强姦)한 적이 있었고 결혼 후에는 하녀들이나 농부들과의 관계를 즐겼습니다. 섹스에 대한 그의 비판은 과거의 방탕했던 생활에 대한 고해성사(告解聖事)입니다.
한편 톨스토이는 사회 운동가들의 구명을 위한 자금 모금을 위해 장편소설 연재도 시작했는데 이 소설이 바로 톨스토이의 마지막 걸작인 ’부활‘입니다.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나 전 작품들을 고려하지 않고 '부활' 그대로의 작품만 본다면 절대 졸작(拙作)이라 평할 수 없습니다. 대귀족인 신분으로서 하층민들의 삶을 이해해가며 구체적인 대안(對案)을 제시하는 내용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어지간한 내공 아니고선 쓸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완성된 '하지 무라트(Хаджи-Мурат)'는 자신의 군복무시절(軍服務時節)에 만난 무슬림 아바르인 전사, 하지 무라트의 이야기로, 톨스토이 최상의 작품에 속하며 해럴드 블룸에 의하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말년이 되면서 톨스토이와 부인 소피아와의 갈등(葛藤)은 점점 격해져만 갔습니다. 소피아는 특히 톨스토이의 추종자(追從者) 중 한 명이었던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와 사이가 나빴습니다. 그 갈등의 근원이 톨스토이는 모든 저작권과 판매료(販賣料)를 사회에 환원하고자 했고 소피아는 이를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대판 부부싸움을 벌인 이후 나이 80이 넘어가는 늘그막에 농민과 같은 삶을 살겠다고 막내딸 알렉산드라를 데리고 가출(家出)을 시도하였으나 기차역인 아스타포보역에서 폐렴(肺炎)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아스타포보역은 톨스토이를 기리기 위해 1918년 '레프 톨스토이'역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이 역은 2014년 폐쇄(閉鎖)되었지만 역사는 여전히 남아 있고, 이 역사에는 톨스토이가 사망한 시간인 6시 5분으로 맞춰진 시계가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내 소피아와 끝내 화해(和解)하지 않았고 죽기 직전 유언에 아내는 절대로 장례식장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소피아는 장례식(葬禮式)조차 참석할 수 없었고 죽어서도 남편과 합장(合葬)되지 못한 채 톨스토이 묘지에서 3km 떨어진 작은 시골마을 묘지에 묻혀야 했습니다.
1980년대 위인전(偉人傳)에선 비참하게 겨울 날씨 역에서 동사(凍死)했다고 나온 바 있었는데, 그건 아니고 역장 숙직실로 옮겨져 눕혀진 상태에서 다음의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둡니다. 82세에 폐렴으로 사망한 것과는 별개로 엄청나게 건강했고, 70세에도 젊은이와 다름없는 근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막내딸인 알렉산드라를 56세의 나이에 얻었으며, 막내아들인 이반을 얻은 것도 나이 60살 때 일입니다. 다만 이반은 7살 때 병으로 죽고 맙니다.
러시아에서도 명문귀족(名門貴族)이었던 톨스토이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영지는 야스나야 폴랴나(밝은 숲의 빈터)라고 불립니다. 모스크바에서 남방 200km 떨어져 있는 툴라 시의 근교에 있습니다. 외조부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볼콘스키 공작(公爵)의 영지로 외동딸인 그의 어머니 마리야 니콜라예브나가 물려받고 아버지와 결혼한 후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백작작위(伯爵爵位)를 가졌던 톨스토이는 장년기 이후 이곳에 정주(定住)하며 작품 활동을 했고, 자신의 자택을 이용하여 학교를 만들어 소작농들의 자식을 가르쳤습니다. 이 저택은 작은 도서관도 딸려 있는데, 장서수는 2만 권을 넘는다고 합니다. 톨스토이가 사망한 후에는 이 영지(靈地) 내의 묘지에 묻혔다.
톨스토이가 사망한 후, 미망인 소피아는 정부에 이곳을 국가가 관리해 줄 것을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請願)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1917년 집권한 공산정부는 집권(執權)한 후 바로 이곳을 사적지(史跡地)로 지정하고 국가가 관리했습니다. 1919년 소피아가 75세로 세상을 떠나자 이곳의 관리를 톨스토이의 막내딸 알렉산드라에게 맡겼는데, 그녀는 공산정부(共産政府)가 싫어서 이후 해외로 망명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모두 9남 4녀(다만 이 중 4남 1녀는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다)를 얻었을 만큼 자손(子孫)이 많았으므로 다른 자손들 중 한 명씩을 골라서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큰아들 세르게이를 제외한 톨스토이의 자식들은 모두 소련을 떠나 타국으로 망명(亡命)했습니다.
큰 아들인 세르게이는 작곡가, 둘째 아들인 일리야 르보비치는 작가, 셋째 아들인 레브 르보비치도 작가, 조각가가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라는 미국으로 귀화(歸化)하여 미국에서 톨스토이 재단(財團)을 세우고 톨스토이 책자(冊子)를 냈는데 1979년 95세라는 장수(長壽)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정 러시아가 붕괴(崩壞)되고 소련이 건국된 이후에도 톨스토이는 제국시대(帝國時代)의 귀족출신 문호였음에도 오히려 더 높이 평가받는 기묘한 현상이 생겼습니다. 톨스토이가 특히 소련 체제에서 높이 평가받은 이유에는 농민의 현실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이 공산 세력의 '프롤레타리아 정신'과 연결된다는 점도 있었습니다. 한 예로 블라디미르 레닌은 "톨스토이 이전에는 진정한 농민의 모습이란 없었다"라고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다만 톨스토이만 이런 높은 대접(待接)을 받은 것은 아니고 러시아의 문학애호 경향은 소련에서도 유유히 이어져서 알렉산드르 푸시킨, 니콜라이 고골, 안톤 체호프 등의 대부분의 문호들은 소련에서도 존경을 받았습니다.
소련에서 적어도 문학에서 만큼은 중국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과 같은 대대적인 문화탄압이나 과거부정은 벌어지지 않았고 그저 구체제적 경향이 농후(濃厚)한 작가들이 개별적으로 비판받은 정도였습니다. 대폭 평가 절하(切下)된 인물은 혁명운동을 악령(惡靈)으로 디스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정도이고 그도 흐루쇼프 시절에 복권(復權)되었습니다. 오히려 러시아 문학의 전통은, 막심 고리키, 알렉산드르 헤르첸, 투르게네프 등의 작품을 유년시절부터 읽고 열광하며 혁명과 인민해방의 꿈을 꾸며 자라 결국 나라를 얻게 된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 이오시프 스탈린 등 볼셰비키의 지도자들을 통해 소련 체제의 성립(成立)과 연결되었다는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입니다...
현 러시아 공화국(共和國)의 블라디미르 푸틴집권 후에는 정책적으로 "푸"대접을 받는 듯합니다. 톨스토이 사망 100주년인 2010년에도 아무 행사도 없었다고 합니다. 되려 해외에서 더 화제(話題)였고 한국에서도 사망 100주기 기념이라고 행사를 가지고 그에 대한 책자나 완역판이 홍보된 것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2010년은 공교롭게도 체호프의 탄생 150주년 기념해 인데, 체호프에 대한 행사는 성대히 열린 반면 톨스토이에 대한 행사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체첸과 같은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책(彈壓策)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가 톨스토이의 평화주의를 부담스럽게 느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게다가 톨스토이는 현재 국교의 레벨로 재등극한 러시아 정교회(正敎會)에서 파문당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과목에 그의 작품이 여전히 포함(包含)되어 있기도 하고 그의 후손들 중 잘나가는 인사도 있기에 정책적으로 그렇다 쳐도 여전히 러시아인들에게 거장 작가로 존경(尊敬)받는 그를 마냥 푸대접받는다고 보기엔 좀 그렇습니다. 그의 후손 중 한명인 볼리마디르 톨스토이는 박물관(博物館)을 운영하고 동시에 푸틴정부 하에서 문화 고문직(顧問職)을 맡는 등 제법 잘나가고 있고, 표트르 톨스토이는 아예 러시아 채널1의 메인뉴스 프로그램인 브레먀를 7년 정도 진행한 유명 방송인입니다. 톨스토이 직계후손(直系後孫)만 약 400명...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약(活躍) 중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2016년 러시아 여론조사 결과에선 도스토옙스키나 푸시킨, 고리키, 체호프, 고골리 같은 역시 걸작작가(傑作作家)들로 부족함 없는 다른 러시아 작가들을 제치고 역대 러시아 최고 작가로 톨스토이가 꼽혔습니다. 톨스토이는 여전히 러시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가 중 한명이라는 증거(證據)입니다.
아내 소피아와의 사이에서 13명의 아이들을 두었고 그 중 다섯은 어린 시절에 죽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톨스토이에겐 또 다른 아이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하녀였던 아크시니야 바지키나가 낳은 사생아 아들이었지만, 어쨌든 자식은 자식이었습니다. 티모페란 이름의 이 아이는 마구간 지기, 산지기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이 사실은 톨스토이가 부부 사이에 비밀(祕密)은 없어야 한다며 자신의 옛 여자관계를 비롯한 자신의 15년간의 과거(過去)를 적은 일기를 아내에게 보여줘서 아내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도박으로 수많은 재산을 날렸고 온갖 여자들; 집시, 창녀, 어머니 친구들의 농노(農奴)들과 관계한 사실은 물론 사생아(私生兒)까지 있다는 사실들이 낱낱이 적혀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안나 카레니나 속 레빈이란 인물에 투영(投影)합니다. 레빈이란 인물 역시 자신의 더럽고 방탕(放蕩)한 과거와 무신앙(無信仰)을 고백한 일기장을 키티에게 건네고 용서받습니다. 그외에 톨스토이는 자신의 젊은 시절의 방탕과 무신앙에 대해 처절하게 회개(悔改)한 참회록을 남겼고 그의 참회록(懺悔錄)은 성 어거스틴, 루소의 참회록과 더불어 세계 3대 참회록으로 꼽힙니다.
이런 독특한 남편 때문에 소피아는 대단히 힘든 삶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유모(乳母)도 없이 혼자서 13명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물론 톨스토이의 글을 일일이 읽고 필체를 교정(矯正)하는 작업을 맡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노년에 겨우 대문호(大文豪)의 아내로서 편안하게 사는가 했더니 위에서 언급(言及)한 것처럼 갑자기 남편이 모든 재산(財産)을 버리고 뛰쳐나가려 하니 분통(憤痛)이 터질 만도 했습니다. 또한 톨스토이가 지나치게 대문호로 추앙(推仰)받은 나머지 소피아는 소크라테스의 아내인 크산티페처럼 '위대한 남편을 이해하지 못한 악처(惡妻)'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톨스토이의 유명한 일화(逸話) 중의 하나로 그가 여인숙(旅人宿)에 머물고 있을 때 소녀가 톨스토이의 가방을 보고 그 가방을 갖고 싶다고 하자 그는 일이 있어서 나중에 가방을 주겠다고 약속한 다음 그 여인숙을 나왔습니다. 나중에 그 여인숙을 찾아왔더니 그 소녀는 병(病)으로 이 세상에 없었으며, 그는 여인숙 딸의 무덤에 가서 그 가방을 걸어 주었고 그 뒤 어느 사람이 그 무덤에 돌 가방을 조각해 돌 십지가에 건 다음 프라우다(사랑을 다음으로 미루지 마라)라는 글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통 톨스토이의 작품을 감상하는 독서가들의 케이스는 세 가지로 갈립니다. 하나는 기존에 다른 고전 문학들을 감상하며 또 다른 영감(靈感)을 받기 위해서, 또 다른 하나는 고전 문학과는 거리가 있는 글을 읽어왔으나 고전문학(古典文學)을 새로이 접하는 이들, 마지막으로 아예 처음 글 읽기를 톨스토이로 시작하는 이들입니다.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읽기에 어려운 난이도(難易度)는 아닙니다. 다만 기본적으로 장편 소설로 갈수록 작품 자체의 커다란 스케일과 그 스케일들을 완벽하게 채우는 인물과 배경의 묘사에 적응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글의 묘사방식(描寫方式)이나 전달하는 기법자체도 현 시대의 글쓰기와는 다른 문체를 사용하기에 난이도는 높지 않지만 이해가 쉽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문에 보통 기존의 다른 고전 문학을 감상해본 케이스라면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를 바로 시작해도 무난한 감상을 할 수 있습니다. 고전문학을 접해본 이들에게는 톨스토이의 문체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전문학(古典文學)을 새로이 접하거나 글 읽기가 처음이라면 글의 묘사방식이나 전달하는 기법(技法)의 문제로 인하여 장편은 비추천(非推薦)입니다. 물론 작품이 명작(名作)이기에 오랜 시간을 들이며 천천히 감상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으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나 하지 무라트 등 중단편도 굉장히 높은 성취의 문학작품(文學作品)인 만큼 부담 없이 시작하는 편이 좋습니다.
톨스토이 인생독본은 합본 전 12권입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세상에서 단 한 권의 책만을 가지라 하면 주저 없이 톨스토이 인생독본이라는 위대한 책을 선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同感)입니다. 톨스토이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깨달음을 담은 필생의 대작이며, 인류 최고의 지성(知性)들과 만날 수 있는 ’인생독본‘은 시대와 시간이 흘러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삶의 진리를 이끄는 인류의 위대한 지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조상이 보던 책을 내가 받고, 내가 본 다음 또 후손(後孫)에게 권할 수 있는 책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한 번 보고 버려야 하는 책이 수두룩한데 혼자 보기에는 너무 아까워 이웃이나 후손에게까지 읽을 것을 권할 수 있는 양서(良書)가 바로 이 책이 아닌가 합니다. 요즘 서점에는 톨스토이 단편선의 점유(占有)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톨스토이에 대해서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톨스토이 인생독본 완역본(完譯本)은 그의 풍부한 철학(哲學)과 보다 좋은 사상과 감정을 일깨워주기 위하여 매일 매일의 금언(金言)을 제공하는 데 빈틈이 없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의 행복은 재미난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함께 즐기는 것입니다. 이 책은 톨스토이의 주옥(珠玉)같은 단편들이 그 날, 그 달의 주제(主題)에 맞게 중간 중간 자리 잡고 있어 더욱 흥미롭게 톨스토이에 접근(接近)할 수 있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저 역시 톨스토이의 책을 하나하나 찾아서 끝까지 정독(精讀)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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