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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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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들이 황위를 쟁탈하기 위해 무술(巫術)로 살인하는 주살법(呪殺法)

图片信息 呪殺法

무사(巫士)는 도사의 일종으로, 방술 외에 무술(巫術)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의 이해득실(利害得失)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나, 의뢰(依賴)를 받아 누군가를 암살(暗殺)하는 술자도 있었던 듯하다. 이런 무사(巫士)는 무고(巫蠱)라는 무서운 술법을 자주 사용했다. 

무고(巫蠱)의 고(蠱)는 '피 위에 벌레가 올랐다'는 문자로, 그대로 해석하면 벌레를 부리는 술법이다. 그러나 이 술법(術法)을 이용하면 벌레 외에 뱀, 개구리, 새, 개, 고양이를 조종(操縱)할 수도 있다. 도사(道士)의 소귀법(召鬼法)과 비슷하지만, 귀가 아니라 작은 동물을 사역하는 점이 다르다. 술자는 이들 동물을 사역(使役)해 재산을 얻거나, 증오(憎惡)하는 상대에게 해를 끼칠 수 있었다. 

무고(巫蠱)에서는 아주 평범한 생물을 피소환체(被召喚體)로 이용하지는 않았다. 특정한 생물에게 주력(呪力)을 부여하거나, 혹은 동물의 영을 불러내 사역했다. 물론 이는 도교의 정통적인 술법(術法)이 아니라 서양에서 말하는 흑마술적(黑魔術的) 측면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무고(巫蠱) 중에서도 가공할 만한 주살법(呪殺法)이 고독(蠱毒)이다. 우선 지네, 도마뱀, 개구리, 뱀, 전갈 등 독을 가진 다섯 종류의 동물(動物)을 모은다. 그리고 이것들을 하나의 병에 넣어 밀봉(密封)한 다음 흙에 묻어둔다. 며칠 후에 병을 열면, 자기네끼리 서로 잡아먹고 한 마리만 살아남아 있다. 살아남은 한 마리는 독충(毒蟲) 중에서도 최강의 고(蠱)이며, 이것을 저주의 매개로 삼는 것이다. 

살아남은 고(蠱)를 병에 넣은 채로 저주하는 상대의 집에 묻거나, 이것을 죽여서 탄생(誕生)시킨 악령을 상대에게 홀리게 한다. 그 강력한 주력에 의해 상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만다. 만일 자신이 고독의 저주에 걸린 것을 알아챈 경우에는 고의 종류를 간파(看破)해 저주를 풀기 위한 특정한 주술의식(呪術儀式)을 행하거나, 또 다른 고를 사용해 대항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고독(蠱毒)에 의한 주살(呪殺)에 실패한 경우에는 이것을 시행(施行)했던 술자에게 저주(咀呪)가 되돌아온다고 한다. 

인류가 나타난 때로부터 여러 가지 원시종교신앙(原始宗敎信仰)이 있었고, 무술(巫術)과 이를 담당하는 무(巫, 남성무당)와 무정(巫靚, 여성무당)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무당에게 하늘이 평안하게 잘 살게 해달라고 비는 동시에 어떤 경우에는 무당(巫堂)으로 하여금 보통사람들이 갖지 못한 능력인 염승술(厭勝術)을 이용하여 적대적인 사람이나 종족(宗族)을 없애줄 것을 빌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지은 손무도 여기에서 영감(靈感)을 받아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상책(上策)이라고 말하게 되지 않았을까? 옛날 황자들이 황위를 쟁탈(爭奪)하기 위해 ‘남의 칼을 빌어 사람 죽이는 방법’을 많이 썼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무술(巫術)을 이용하여 사람을 잡는 방패(防牌)로 삼았습니다. 

염승술(厭勝術)을 이용하여 적수를 없앤 것으로 기록된 최초이자 유명한 사람은 바로 주나라의 강태공(姜太公)이다. ‘태공금궤(太公金櫃)’에 따르면, “주무왕(周武王)이 은주왕(殷周王)을 정벌(懲罰)할 때 천하가 모두 귀순(歸順)하였는데 오로지 정후(丁侯)만이 주무왕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강태공은 정후의 모습을 그린 다음 이 화상에 화살을 쏩니다. 그러자 정후는 병이 듭니다. 그는 강태공이 염승술(厭勝術)을 써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자 바로 사신을 주무왕(周武王)에 보내어 항복합니다. 강태공이 화상의 화살을 뽑아내자 정후의 병은 나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황자쟁위(皇子爭位)에서 쓰인 것은 아닙니다. 염승술(厭勝術)이 흥성한 것은 서한(西漢) 초기 삼제방사(三齊方士)가 활발하게 활약한 이후의 일입니다. 

한무제(漢武帝)의 황후 진아교(陳阿嬌)는 금옥장교(金屋藏嬌)로 유명하지만 나중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질투(嫉妬)를 심하게 부려 한무제가 점점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새로 후궁으로 들어온 위자부(衛子夫)가 임신을 해서 한무제의 총애(寵愛)를 독차지하는 것을 보자 자신이 다시 한무제의 사랑을 차지할 계획(計劃)을 세우게 됩니다.  

그녀는 경성의 유명한 여자무당 초복(楚服)을 궁안으로 불러 한편으로 그녀가 부인미도(婦人媚道)를 써서 한무제의 사랑을 회복(回復)하고 아들을 임신할 수 있도록 빌면서 다른 한편으로 염승술(厭勝術)을 써서 목각인형에 위자부의 이름을 쓰고 땅에 묻음으로써 하루 빨리 위자부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기를 기원(祈願)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법은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사실이 들통 나면서 초복은 시장에서 참수(斬首)당하며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주살(誅殺)당한 자만 3백여 명에 이릅니다. 한무제는 진아교(陳阿嬌)를 폐위(廢位)시킨 다음 장문궁에 유폐(幽閉)시킵니다. 

한무제가 나이 들어 병석에 눕자 강충(江充)은 황후(衛子夫) 소생인 태자 유거(劉據)와 원한이 있어 나중에 한무제(漢武帝)가 죽고 태자가 황제(皇帝)에 오르면 자신이 살아남기 힘들다고 보고 간계(奸計)를 꾸밉니다. 그는 한무제에게 “황궁에 고(蠱)의 기운이 많습니다. 이를 없애지 않으면 황상의 병이 나아지지 않는다”고 고합니다. 한무제(漢武帝)는 그 말을 믿고 강충(江充)에게 이를 철저히 조사(調査)하도록 명합니다.  

강충(江充)은 태자궁의 땅속에서 오동나무로 만든 인형을 파내고 고(蠱)를 파냅니다. 그러자 유거는 도저히 결백(潔白)함을 밝힐 도리가 없다고 보고 강충(江充)을 붙잡아서 친히 참수(斬首)해버립니다. 그러자 강충(江充)의 일당은 감천궁(甘泉宮)으로 도망쳐 황제에게 태자가 이미 반란(反亂)을 일으켰다고 보고합니다.  

한무제는 승상 유굴리(劉屈嫠)에게 반란을 평정하도록 명하고 양군은 장안에서 5일간 혼전(混戰)을 벌여 죽은 자만 수만에 이릅니다. 결국 태자는 패배(敗北)하여 도망치고 장안 동쪽의 호현(湖縣)에서 목을 매어 자결(自決)합니다. 황후 위자부도 역시 자결합니다. 역사에서 “무고(巫蠱)의 화”로 불리는 사건입니다. 태자의 아들들도 모조리 죽임을 당했는데 정위감(正尉監) 병길(丙吉)이 강보에 싸인 황손(皇孫)을 한명 숨겨둡니다.  

그 황손이 나중에 한선제(漢宣帝)가 됩니다. 한무제는 나중에 태자에게 반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강충의 삼족(三族)을 멸하고 소문 등 사건에 연루(連累)된 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주살합니다. 그리고 호현에는 “사자궁(思子宮)”을 지어 아들을 그립니다. 

이런 일이 미신(迷信)이 성행한 한나라 때 나타난 것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천칠팔백 년이 흐른 후에 강희제의 아들들이 황위(皇位)를 놓고 다툴 때, 이 수단이 다시 사용된다. 강희14년에 강희제(姜熙帝)가 이미 적자이며 효성인 황후 소생인 황이자(皇二子) 윤잉(胤礽)을 태자로 삼았으므로, 다른 황자들은 황위(皇位)를 포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만주족들은 한족과는 개념이 달랐다. 아마도 만주족은 태자를 세우지 않는 전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황장자 윤지(胤禔), 황삼자 윤지(胤祉), 황사자 윤진(胤禛), 황팔자 윤사(胤禩), 황십사자 윤제(胤禵)등등이 차례로 황태자와 황위를 놓고 공공연히 다투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이들 황자(皇子)들의 1차 목표는 힘을 합쳐서 황태자 윤잉(胤礽)을 끌어내리는 것이었다.  

결국 강희47년과 강희50년 황태자 윤잉(胤礽)은 두 번이나 폐위된다. 이 과정에서 황장자 윤지는 강희제가 한족의 방식대로 적자인 황이자 윤잉(胤礽)을 황태자로 세운데 대하여 불만이 가장 컸다. 그리하여 가장 격렬(激烈)하게 각을 세우고 싸웠다. 그는 집에 나무로 인형(人形)을 깎아 윤잉(胤礽)이 평소에 입던 모양의 옷을 입히고, 윤잉(胤礽)이라는 이름을 쓰고 낮에는 불에 굽고, 기름에 튀기고, 거꾸로 매달아 놓으며, 강철바늘로 심장을 찔렀다. 

아마도 이것이 효과가 있어서인지 강희제는 점점 황태자 윤잉(胤礽)을 멀리하고 결국은 폐위시킨다. 황삼자 윤지의 고발로 강희제는 황장자 윤지가 염승술(厭勝術)을 행한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윤잉(胤礽)이 여러 가지 나쁜 짓을 저지르게 된 것은 황장자 윤지(胤禔)가 염승술(厭勝術)을 행하여, “미친 것(瘋癲)”이므로 참작(參酌)할 점이 있다고 조서에 적게 된다. 결국 윤잉이 한 나쁜 짓의 모든 책임은 황장자 윤지(胤禔)가 뒤집어쓰게 되어 그는 황위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런 염승술(厭勝術)은 지금 보자면 그저 심리적인 위안이나 일종의 바람일 뿐이다. 그들이 하늘에 무언가를 얻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비록 경건(敬虔)하긴 하지만 마음속으로 다 믿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을 이렇게 쉽게 죽일 수 있다면, 자신의 적(敵)에 의하여 자기도 이미 죽었어야 하지 않겠는가. 누구도 피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중국역사를 뒤져보면 이 방법을 쓴 경우가 적지 않다. 그만큼 시장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로 인하여 패가망신(敗家亡身)을 하게 된다. 결국 염승술(厭勝術)을 쓴다는 것은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는 격이다. 

무고(巫蠱)는 옛날부터 사람들의 혐오(嫌惡)를 받았기에, 대개 경우에는 사람들 모르게 행해졌다. 그러나 때로는 중국의 정식 역사서에 등장(登場)한 경우도 있다. 수(隋)의 역사를 기록한 ‘수서(隋書)’에는 고조 문제의 시대(589~604년)에 궁중에 '묘귀(猫鬼)'가 들어왔던 사건이 기술되어 있다. 

어느 날 황후가 병이 나자, 그것을 진단한 의사는 "이는 묘귀(猫鬼)가 일으킨 병"이라고 왕에게 고했다. 묘귀(猫鬼)는 사역된 고양이의 영이며, 술자의 명령에 따라 타인을 해치고 그 재산을 뺏는다. 그런데 쓰러진 황후의 이복동생인 독고타(獨孤陀)에게는 예전부터 묘귀를 사역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곧바로 잡혀가 심문(審問)을 받게 되었다. 독고타(獨孤陀)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자세히 조사하자 그의 집에서 일하는 아니(阿尼)라는 하녀가 묘귀(猫鬼)의 술자라는 것이 밝혀졌다. 

아니가 자백한 바에 의하면, 그녀에게 독고타는 "황후에겐 재물이 많이 있으니 묘귀를 이용해 내게 가져오라"고 명했다는 것이다. 주인의 명령에 거역(拒逆)할 수 없었던 아니는 묘귀(猫鬼)를 소환했다. 그런데 그 묘귀가 궁중 안으로 들어간 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황후는 묘귀(猫鬼)에게 홀려 병이 났다. 

이윽고 황제의 명령을 받고 아니는 묘귀를 소환했다. 그녀가 주문을 외자 묘귀(猫鬼)가 되돌아오고 황후의 병이 나았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묘귀(猫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뒤 갑자기 아니가 새파랗게 되더니 비틀거리며 궁 밖으로 나가버렸다. 독고타(獨孤陀)가 술수를 벌인 것이다. 

이 사건에 분노한 황제는 독고타(獨孤陀)를 당장 사형에 처하려 했다. 그러나 황후가 필사적으로 탄원(歎願)한 덕분에 목숨을 건진 독고타(獨孤陀)는 신분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했다. 그 뒤로 황제는 무고를 행하는 자를 모두 추방(追放)했다고 ‘수서’에서는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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