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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甲辰年 새해 하시는 일들이 日就月將하시고 乘勝長驅.하시고 萬事亨通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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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된 선입견과 협소한 안광으로 고집불통인 나의 글쓰기 진면목

인간이 생존(生存)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술(技術)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분야(分野)가 있겠지만 저는 글쓰기라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잘하기 위해서 자기의 생각이 분명(分明)해야 하고 지식적으로 풍부(豐富)해야 합니다. 글쓰기는 한 가지 기능이 아니라 다양한 것을 통합하고 융합(融合)하여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창조적(創造的)인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잘한다는 것은 자신의 분명한 의견과 생각을 보여주는 지표(指標)이기도 합니다. 

글쓰기에 미흡(未洽)한 건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글 쓰는 연습(演習)을 시작해본 적이 없어서 아닐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글쓰기란 시간이 풍족(豐足)해서 여유가 많기 때문에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 모두가 여유시간(餘裕時間)을 쪼개가며 글을 쓴답니다. 없는 시간을 쪼개고 없는 여유를 쪼개어서 일상을 탈출(脫出)하는 이것이 바로 글쓰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글이란 비행기 타고 유학(留學)가서 외국물을 좀 먹은 사람 글이 제대로 된 문장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고유말이 아름답고 최고라는 사실(事實)을 왜 부정하는지 그저 아쉽기만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아름다움을 모두 본 후에 바깥세상의 아름다움과 비교(比較)하는 것은 좋을 듯합니다. 

습관적(習慣的)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습관적으로 하는 거짓말을 본인은 진실인 듯 받아들이는 성격장애(性格障礙)랍니다. 이런 것도 치료를 받아야 하는 망상증(妄想症)의 일종이라지만 정상인들도 필요에 따라 거짓말을 합니다. 근데 성격장애는 습관적으로 필요사항(必要事項)인지 불필요한 사항인지 구분 못하고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일종의 병 종류로 구분(區分)된답니다. 듣다가 웃기는 건 자세히 따지고 보면 병 아닌 게 없다는 생각에  허구픈 웃음이 나옵니다. 

보지 않았거나 보지 못했는데 보았다고 우기지 말고 듣지 않았거나 듣지 못했는데 들었다고 고집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릇된 선입견(先入見)이 나의 눈을 멀게 하고 요망한 세치 혀가 나의 입을 갉습니다. 겉이 화려(華麗)하다고 그 사람 생활까지 요란한 게 아니며 차림새가 남루하다고 그 사람 지갑까지 빈곤(貧困)한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과 말 한 마디 섞어보지 않았다면 나의 협소(狹小)한 눈으로 그의 점수를 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 또한 그리고 당신 또한 완벽(完璧)하지 않은 인간들입니다. 즉 남의 얘기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경고(警告)입니다. 세치 혀가 나의 인격(人格)을 가늠합니다. 

내가 사노라면 모든 것을 죄다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現實)입니다. 지금은 말하고 있는 것이 다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함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사회에 대한 책임적 입장(立場)입니다. 나의 판단(判斷)만이 옳다고 절대 생각하지 말 것이며 더욱이 언론 상 부여된 권한(權限)이 나의 것인 줄 알고 경솔히 오해(誤解)하지 말아야 합니다. 

글을 잘 쓸 줄 아는 사람이 능력(能力)이 있습니다. 글은 쓰는 사람 따로 있고 글을 읽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글을 잘 쓰는 사람과 못 쓰는 사람을 살펴보면 글의 주인(主人)은 '잘 쓰는 사람'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과 글을 못 쓰는 사람 중에 '글을 잘 짓는 사람'이 주인인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글은 잘 쓰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그러나 글을 아무 생각 없이 쓰는 사람은 글쟁이 아니라 허풍쟁이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정신적(精神的), 물질적 에너지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참 주인이지 정신적 물질적 에너지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은 주인이 아닙니다. 사람도 사람을 이끌고 잘 쓸 줄 아는 사람이 '주인'입니다. 사람들이 착각(錯覺)하는 것 중 하나가 자신이 열심히 노예(奴隸) 짓을 하면서도 자신은 '노예'인줄 모른다는 점입니다. 요즘은 글의 노예들이 많습니다. 이 지구는 힘의 원리에 의해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평등사상(平等思想)'은 이론상 맞지 않는 논리(論理)입니다. 그 예를 몇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나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반드시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본능(本能)이 추구하는 수많은 욕망(慾望)을 억제하면서 살아야만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어릴 때부터 내 맘에 드는 여자(女子)보다는 대중의 환영을 받을 수 있는 여자를 이상형(理想型)으로 정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감정보다는 타인의 시선이나 인정(認定)과 평가 이런 것들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런 여자를 소유(所有)할 수 있다면 내 감정 따위는 얼마든지 희생(犧牲)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내가 이루려는 바를 위해서라면 결혼(結婚) 같은 건 안 해도 괜찮은 나였습니다. 여자들이 선망(羨望)하는 남자란 뭔가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뛰고, 대중의 환영(歡迎)을 받는 조건들을 속속들이 갖추어야 합니다.  

꽃이 없는 강산에 새소리가 사라졌다면 그 얼마나 한산하고 적막(寂寞)할까요. 거기다 인적마저 끊겼다면 그야말로 황폐(荒廢)하고 쓸쓸할까요. 나는 하찮은 일로 수가 틀려 적수(敵手)와 말다툼을 하다가 나중엔 손찌검까지 날 번했습니다. 물론 너 죽고 나 살기로 말입니다. 그런데 덩치가 장대(壯大)하고 날파람 있는 내가 왜소(矮小)한 상대에게 모욕(侮辱)을 당하면서도 참고 또 참았습니다. 유행어로 말하면 내가 큰 ‘손해(損害)’를 본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눈이 오던 어느 날,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옛날 모욕(侮辱)당했던 그 자리에서 그 상대와 조용히 마주쳤는데 나는 너그럽게 용서(容恕)해 주었습니다. 이 일을 안 친구들은 나를 "밸이 없고 쓸개 빠진 놈이다"라고 온갖 벼라별 줄욕을 다 퍼부었습니다. 과연 앙숙(怏宿) 간이면 평생 척지고 서로 시기하고 반목(反目)하며 살아야 할까요? 

요즘 이런 여자가 인기(人氣)가 좋습니다. 우리나라 여인들은 사치를 좋아하는 화려한 꽃이 아니요, 부귀에 탐욕스런 요염한 꽃이 더욱 아닙니다. 우리나라 여인들은 정으로 아름다움을 가꾸는 아담한 꽃이요, 사랑으로 향기를 풍기는 조촐한 꽃입니다. 분위기(雰圍氣) 잡고 어울리는 중에 눈높이를 맞출 줄 아는 그런 여자는 남자들에게 인기가 아주 좋습니다. 왜냐 하면 이런 여자는 지성, 수양, 지체, 품위를 두루두루 갖춘 숙성(熟成)한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면 자기를 모르고 상대만 나무라며 조건과 인품(人品)을 따지지 않고 모든 것을 부모의 권세와 재물로 인격(人格)을 계산하는 여자는 모르고 볼 때는 조금 사랑스러운지는 몰라도 이런 여자는 명색(名色)이 여자일 뿐이지 그 이름을 떠나서 아무 것도 취할 것이 없는 속이 텅 빈 인형(人形)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성과 미모와 학력을 갖춘 이런 여성을 만나기 드뭅니다. 게다가 몸 날씬하고 얼굴 눈, 코 다 봐줄만 하다면 대뜸 인기 만점일 것입니다.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 대학원까지 나온 머리 좋은 여자라면 배우자로 적격(適格)일 테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을 살면서 나를 진정으로 모른다는 겁니다. 자신을 완벽(完璧)하게 안다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 하면 사람의 마음은 조석(朝夕)으로 변합니다. 잘빠진 여대생들은 모두다 하늘이 내려준 지성인(知性人)들입니다.  

그렇다면 지성인이란 무엇인가요? 인성을 함양(涵養)한 교양인입니다. 그렇다면 교양은 무엇인가요? 상대에 대한 배려, 예의와 이해심, 따뜻한 마음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지성인이고 교양인입니다. 과연 지성을 겸비(兼備)한 여성과 지식과 지성은 엄연히 다릅니다. 

무식한 사람들은 곧잘 텃세합니다. 마치 뒷사람을 업신여기는 특권(特權)이 없다면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의 기강(紀綱)이 크게 흔들리듯이 말입니다. 소위 '다문화족'들 흔히 그 화풀이 대상 되어 온갖 스트레스를 다 감수(感受)해야 합니다. 심지어 정상적으로 출근(出勤)할 수 없게 됩니다. 하여 스스로 회사를 사퇴(辭退)하는 일들이 비일비재로 일어납니다. 물론 이것은 한국사회의 보편적 현상(現象)입니다. 사회, 군, 대학, 학원, 심지어 일반 초중고학교에서까지 말입니다. 참으로 이런 갑질 현상은 근절(根絶)되어야 합니다. 

속담(俗談)에 이르기를, '어릴 때 기억(記憶)이 천 년 간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내가 반백이 넘었어도 어찌 그날의 일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있으며 그다지 쉽게 그날의 일들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농담이 진담(眞談)으로 되지 말아야 했는데 부질없이 던진 농담(弄談)이 후에는 진담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남을 저주하거나 불길(不吉)한 말은 절대 삼가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녀의 눈에는 추파(秋波)라든가 강파라든가 라는 것이 알른거리며 꼬물만치 수줍음이라도 없습니다. 달변(達辯)인 아내와 달리 나는 쉬운 말로 어렵게 표현(表現)합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을 무척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재주 아닌 재주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표현능력 미달(未達)이라고 했던가요? 

사람들은 옛날이야기가 나오면 당장 잡아먹을 상합니다. 물론 케케묵은 진부(陳腐)한 것들도 많지만 지금도 간직(看直)되어야 할 좋은 점도 많습니다. 특히 미량풍속(美良風俗)이나 예의범절(禮儀凡節)은 앞으로도 계속 지켜나가야 할 과제입니다. 

마음을 꽁꽁 닫고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무정해 보이지만 마음을 활짝 열고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유정해 보입니다. 요즘은 남이 잘 되면 배 아파 죽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趨勢)입니다. 하긴 남이 잘 되면 제일처럼 좋아서 신나게 춤을 출 사람이 몇이나 되랴마는 인심이 점점 식어서 차갑고 점점 가물어 메마르는 현상(現象)을 여실히 알려주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는 ‘다쳐 보지 않은 사람은 남의 흉터를 보고 웃는다’고 하였습니다. 논객(論客)들이 내 글을 선동(煽動)이라고 말하며 인신공격(人身攻擊)까지 서슴치 않으며 공격합니다. 여기서 선동이란 허위사실(虛僞事實)을 진실처럼 속여서 믿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허위사실을 진실처럼 꾸미고, 인신공격까지 서슴치 않고 상대방(相對方)을 죄인이나 범죄자, 혹은 그와 유사(類似)한 시각으로 몰아붙여 그 사람의 말을 믿지 않게 합니다, 때로는 마녀사냥처럼 대중(大衆)이 그 사람에게 욕을 던지고 돌은 던지고 주먹을 던지는 행위로 몰아가는 것을 우리는 선동이라고 합니다. 선동이 판치는 세상에 선구(先驅)를 선동이라고 표현하는 거짓된 세상에 정말 선동하는 자들은 살아남았고 선동하는 자들의 앞에 나서서 꾸짖던 지성인(선구가)는 먼저 가셨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현실의 환경에 순응(順應)하고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 인생 지혜의 근본(根本)입니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데서 모든 불행(不幸)과 과오와 비극(悲劇)과 실패가 생깁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데서부터 행복과 성공과 지혜(知慧)가 시작됩니다. 

나는 내 생명의 존엄성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목숨은 유일하며 나의 생애는 일회적(一回的)입니다. 일생일사(一生一死)는 생명의 철칙입니다. 천상천하에 한번 밖에 없는 생명을 낭비(浪費)하거나 생애를 무책임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생명의 고귀(高貴)함을 아는 사람만이 인생에 대해서 성실한 태도를 취하고 일에 대해서 책임 있는 행동을 취합니다. 그리고 다음 나 자신을 안 다는 것은 나의 분수와 실력과 밑천과 천분(天分)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에는 분수(分數)가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분을 알고 자기의 분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자기의 분수를 모르고 제 분수를 어기고 제 분수에 겨운 행동과 생활을 할 때에 무리가 생기고 파탄(破綻)이 일어나며 비극이 찾아옵니다. 분수란 바로 몫이라는 뜻입니다. 

한문에 천분(天分)이란 말이 있습니다. 즉 하늘이 우리에게 나누어 준 몫이란 이야기입니다. 천분을 많이 타고 나는 사람도 있고 적게 타고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크든 작든 간에 세상 모든 사람들은 천분을 가집니다. 때문에 우리는 자기의 천분을 바로 알고 자기 분수에 맞게 무리하지 말고 살아야합니다. 인생은 자아실현의 노력(努力)이요. 자아의 실현은 곧 자기의 천분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나의 분수를 아는 것이요, 나의 밑천을 아는 것이며 나의 실력을 알고 나의 천분을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즉 나의 직분이 무엇인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가 맡은 자리가 있고 자기가 해야 할 구실이 있습니다. 

제자리와 제구실을 바로 아는 것이 나 자신을 아는 근본(根本)입니다. 인생은 먹고 마시고 놀고 춤추는 흥겨운 향락의 놀이터가 아닙니다. 공부하고 일하고 정진(精進)하고 창조하는 성실한 건설의 일터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사명의 자각(自覺)입니다. 일생동안 몸 바쳐 일할 수 있는 자기의 사명(使命)을 깨닫는 자가 인생의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에 나의 생애를 바치려고 하는가? 인생의 보람을 나는 어디에서 찾으려고 하는가? 이러한 질문(質問)에 대해서 확고한 대답을 갖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내 생명의 존귀(尊貴)함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분수(分數)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사명(使命)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곧 나 자신을 아는 근본(根本)입니다. 

제목과 다르게 너무 멀리까지 왔습니다. 다시 원점(原點)으로 돌아가면 그릇된 선입견과 협소한 안광으로 고집불통인 나의 글쓰기 진면목(眞面目)은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달라졌습니다. 예전에 한두 명이 보던 글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볼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쓴 글에 책임감(責任感)이 필요해서 몇 가지를 적어봤습니다. 남이 어렵게 터득(攄得)한 방법을 쉽게 익히는데  책만한 것이 없습니다. 책을 읽었다고 잘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책이 스승이란 말이 제일 적절한 것 같습니다. 지금도 책 내용을 생각하면서 내 글이 못난 글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더 글을 쓰다보면 조금 더 나아지길 바라며 내가 쓴 글 중 도움이 되었던 단견(短見)을 이 지면을 빌어 두서없이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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