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岳岩漢字屋

甲辰年 새해 하시는 일들이 日就月將하시고 乘勝長驅.하시고 萬事亨通 하세요!!!

반응형

천년의 논쟁을 불러온 만고의 걸작인 유종원(柳宗元)의 명시 ‘어옹(漁翁)’

图片信息 : 漓江老渔翁


어옹(漁翁) 

어옹야방서암숙(漁翁夜傍西巖宿), 효급청상연초족(曉汲淸湘燃楚竹) 
연소일출불견인(煙銷日出不見人), 애내일성산수록(欸乃一聲山水綠) 
회간천제하중류(回看天際下中流), 암상무심운상축(巖上無心雲相逐) 
                                                               - 유종원(柳宗元) 

직역(直譯) 
고기 잡는 늙은이가 밤에 배를 서산의 자락에 정박시키고 유숙한다. 
날이 밝은 후에 그는 맑은 상수의 물을 마시고 초죽을 태운다. 
해가 떠오르자 안개가 걷히고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그저 ‘애내가’가 청산녹수의 사이에서 흘러나올 뿐이다. 
되돌아보니, 고깃배는 이미 하늘 끝에서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가고 있다. 
바위 위에는 무심한 구름이 서로 쫓아가고 있다. 

논쟁(論爭) 
유종원이 영주(永州)로 좌천된 지 칠년 째 되던 해 이 육구소시(六句小詩)를 지었다. 역대시인과 시평가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북송 때의 소동파(蘇東坡)는 이 시가 기취(奇趣)로 충만하다고 크게 찬양한다. 그는 ‘서유자후어옹시(書柳子厚漁翁詩)’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는 '기취(奇趣)'를 종(宗)으로 하고, 반상합도(反常合道)를 취(趣)로 한다. 이 시를 음미해보면 기취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의 두 구는 없어도 된다." 이 말에 숨은 의미는 마지막 두 구는 삭제해도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남송의 유진옹(劉辰翁)은 반대의견을 표시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시의 기택(奇澤)은 만당(晩唐)의 류가 아닌데, 바로 뒤의 두 구 때문이다." 그후 ‘어옹’의 마지막 두 구를 삭제해야하는가, 아닌가를 두고 역대 이래로 두 가지 의견이 대립(對立)했다. 

남송의 엄우(嚴羽), 명나라의 호응린(胡應麟), 청나라의 왕사진(王士禛), 심덕잠(沈德潛)등은 소동파의 의견을 지지했다. 그들은 "애내일성산수록(欸乃一聲山水綠)"에서 끝내버리면 끝없는 언외지의(言外之意)를 남길 수 있어 좋다는 것이다. 두 구를 더하면 말을 다 해버리는 것이 되어 여운이 남지 않는다고 본다. 엄우(嚴尤)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했다. "동파가 후 2구를 삭제했는데, 자후(유종원)이 다시 태어난다면 분명히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것이다."(‘창랑시화’) 

반대파진영에는 남송의 유진옹, 명나라의 이동양(李東陽), 왕세정(王世貞)등이 있다. 그들은 삭제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만일 마지막 두 구를 삭제해 버리면, 이 시는 만당의 '기취' 시가들과 마찬가지일 뿐이라고 본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마지막 두 문구를 삭제(削除)하면 독자들은 쉽게 중점을 시의 예술적인 취미(趣味)에 두게 되고, 유종원(柳宗元)의 당시 처지나 마음속의 울분을 배출(排出)하려는 본뜻은 읽지 못하게 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마지막의 두 구는 삭제하는 게 좋을까 놔두는 게 좋을까? 

고시(古詩) 
고시는 중국당나라 때에 발생한 근체시(近體詩)와 구분하기 위하여 수나라 이전의 시체를 통칭하는 말로 쓰였다. 그리고 근체시 성립 이후의 근체시 형식에 부합하지 않은 시를 가리키기도 한다. 

고시의 시체는 근체시(近體詩)에서와 같이 자수(字數)나 구수(句數)의 제한이 없다. 평측법(平仄法: 구절 안의 글자소리의 높낮이를 고루 맞추는 방법으로 염(簾)이라고도 한다.)도 없다. 다만 각운(脚韻)을 다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오언고시에는 둘째 구 끝에 운자(韻字)를 달기 시작하여 한 구씩 건너 운자를 단다. 칠언고시는 제1·2구 끝에 운자를 달고, 그 이하는 한 구씩 건너 운자를 단다. 근체시에는 통상 평성(平聲)의 운자를 단다. 그러나 고시에는 상성(上聲)·거성(去聲)·입성(入聲)의 글자로도 운을 단다. 
환운·전운(換韻·轉韻 : 시 한 편 중에 여러 성에 속하는 운자들을 섞어 다는 것)을 하기도 한다. 통운(通韻)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 편 가운데 동일한 글자를 몇 번이고 거듭 사용할 수도 있다. 오언고시는 중국 후한 말(後漢末)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를 시초로 한다. 

삼조(三曹: 조조(曹操)·조비(曹丕)·조식(曹植)의 부자형제)·칠자(七子: 공융(孔融)·진림(陳琳)·왕찬(王粲)·서간(徐幹)·완(阮)·응창(應瑒)·유정(劉楨))의 작품이 뛰어났다. 위진시대(魏晉時代)에는 완적(阮籍)·혜강(嵇康) 등과 삼장(三張: 장재(張載)·장협(張協)·장항(張亢) 형제)·이륙(二陸: 육기(陸機)·육운(陸運) 형제)·양반(兩潘: 반악(潘岳)·반니(潘泥) 숙질)·일좌(一左: 좌사(左思)) 등이 뛰어났다. 

그 뒤로는 사령운(謝靈運)·도잠(陶潛)·사조(謝朓)·심약(沈約) 등이 활약하였다. 당나라 때에 이르러 위징(魏徵)의 ‘술회(述懷)’, 이백(李白)의 ‘고풍(古風)’, 두보(杜甫)의 ‘북정(北征)’, 왕유(王維)의 ‘송별(送別)’ 등이 걸작(傑作)으로 꼽힌다. 

우리나라의 오언고시는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이 당나라 고종(高宗)에게 화친책의 일환으로 보낸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이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고구려 승려 정법사(定法師)의 ‘영고석(詠孤石)’이나 고구려의 장군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장(隋將) 우중문(于仲文)에게 전략적으로 지어 보냈다는 ‘우중문(于仲文)’도 오언고시이다. 

을지문덕의 시는 “동문선”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시선집(詩選集)에서 오언절구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적으로 중국에서 근체시가 성립되기도 전에 오언절구(五言絶句)를 우리나라에서 먼저 수용(受容)하였다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또한 그 평측법(平仄法)에 있어서도 근체시의 규격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시는 우리나라 오언고시로서는 초기의 작품이 될 것이다. 신라 말과 고려 초의 작품으로는 최치원(崔致遠)의 ‘강남녀(江南女)」’, 김부식(金富軾)의 ‘결기궁(結綺宮)’, 최유청(崔惟淸)의 ‘잡흥(雜興)’ 등이 모두 명편으로 꼽히는 것들이다. 칠언고시는 그 발달이 오언고시보다 뒤늦어 육조말기(六朝末期)에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조비(曺丕)의 ‘연행가(燕行歌)」’, 육기(陸機)의 ‘백년가(百年歌)’, 심약의 ‘백저무가(白紵舞歌)’, 양무제(梁武帝)의 ‘동비백로가(東飛伯勞歌)’, 양간문제(梁簡文帝)의 ‘오야제(烏夜啼)’를 비롯하여, 초당사걸(初唐四傑)의 우두머리격인 왕발(王勃)의 ‘등왕각(滕王閣)’, 이백이 악부체(樂府體)를 취하여 지은 ‘오야제(烏夜啼)’·‘양보음(梁甫吟)’·‘촉도난(蜀道難)’·‘장진주(將進酒)’ 등과 두보의 풍자적인 서정의 세계와 아울러 서사를 주로 하는 영물시적(詠物詩的)인 작품들이 뛰어난 것들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오언시보다는 칠언시가 늦게 나타나고 있다. 원효(元曉)가 지었다고 하는 “태어나지 말지라, 그 죽음이 괴롭도다. 죽지 말지라, 그 삶이 괴롭도다.(莫生兮其死也苦 莫死兮其生也苦).”(三國遺事 권4 蛇福不言)와 수로부인(首露夫人)의 설화에 나온 ‘해가(海歌)’ 등에서 그 초기 모습을 볼 수 있다. 

“전당시(全唐詩)”에 전하는 우리나라 한시의 대부분이 칠언고시이다. 칠언고시는 고려 초기부터 명작이 쏟아져 나왔다. 김극기(金克己)의 ‘취시가(醉時歌)’, 이규보(李奎報)의 ‘칠석우(七夕雨)’, 홍간(洪侃)의 ‘난부인(嬾婦引)’, 이숭인(李崇仁)의 ‘오호도(嗚呼島)’ 등이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한말 황현(黃玹)의 ‘종어요(種菸謠)’도 대작으로 꼽힌다. 우리나라의 한시가 일반적으로 고조장편(古調長篇)에서 중국보다 뒤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시가 근체의 율시(律詩)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적다. 이러한 현상은 시를 숭상(崇尙)하는 정도가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음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우리나라 초기의 시선집인 “동문선”과 “청구풍아(靑丘風雅)”, 그리고 조선 중기의 “국조시산(國朝詩刪)”에 있어서는 고체의 비중이 결코 가볍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숙종 때에 편찬된 “기아(箕雅)”에 있어서는 고시의 대부분이 기존 시선집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 싣고 있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의 고시작품은 거의 뽑아 싣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위항인(委巷人)의 시집인 “소대풍요(昭代風謠)”와 “풍요속선(風謠續選)”·“풍요삼선(風謠三選)”에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 고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 최후의 한시선집인 “대동시선(大東詩選)”에서도 고시의 비중은 격감(激減)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작품은 뚜렷이 감소(減少)되고 있다. 이는 근체에 치중한 조선시대의 습상(習尙)을 반사적(反射的)으로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고시는 그 형식의 자유로움 때문에 시수업(詩修業)의 초기단계에서 대개는 거치는 과정이다. 그리고 장편을 필요로 하는 서사시(敍事詩)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편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 구사력이 함께 수반(隨伴)되어야 하므로 후세에도 걸출(傑出)한 작품은 흔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고체시(古體詩) 
고체시(古體詩)는 중국 성당(盛唐) 이전에 널리 쓰인 시의 형태로, 형식에 제약이 없는 자유로운 시의 형태를 말하며, 고시(古詩) 혹은 고풍(古風)이라고도 한다. 고체시라는 말은 육조 시대(六朝時代)와 그 이전 시대의 시를 말하며. 당대에 근체시가 완성된 이후에는 근체시에 대한 고대의 시, 즉 태고 때부터 수대(隋代)에 이르는 모든 시를 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체시 성립 이전의 시라 하더라도 악부체(樂府體) 시는 일반적으로 고시에 포함(包含)시키지 않고 따로 분류하고 있으며, 또 근체시 성립 이후라도 근체시의 형식에 따르지 않고 고체시의 형식을 따라서 지은 것은 여전히 고체시라고 명명(命名)한다. 

고체시의 규칙은 근체시에 비해 자유롭다. 시의 길이와 압운(押韻)이 자유롭고, 각 장의 구수(句數)도 일정하지 않으며 구성상의 규칙도 없다. 4언(四言), 5언(五言), 6언(六言), 7언(七言) 등의 형식이 있으며, 오언과 칠언을 섞은 잡언(雜言)도 있다. 
고체시는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를 거치면서 현언시, 유선시, 산수시, 전원시, 궁체시 등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되었으며 조식(曹植), 도연명(陶淵明), 사령운(謝靈運), 포조(鮑照) 등 수많은 문인들의 노력에 의해 표현 역량이 극대화되었고, 압운과 평측, 대구와 구성 등 각 방면에서 고도로 세련된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근체시가 나타난 당대 이후에도 이백(李白), 두보(杜甫) 등의 문인들에 의해 계속 창작되었으며, 청 말에 이르기까지 근체시에 못지않게 높은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필자는 비록 소동파(蘇東坡)의 팬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편을 들 수가 없다. 이건 먼저 육구시(六句詩)라는 형식부터 얘기를 시작해야겠다. 

육구시(六句詩)의 유래 
육구시(六句詩)는 일종의 고시체제(古詩體制)이다. 당나라 때의 절구(節句)나 율시(律詩)보다 육구시(六句詩)는 더 오래되었다. 그것은 ‘시경’에 자주 나타나는 것이고, 위진 남북조 때 성행했었다. 당나라에 이르러 비록 육구시(六句詩)도 엄격한 운율규정(韻律糾正)이 형성되었지만 이미 주류는 아니게 된다. 통상적인 격식(格式)을 따르자면 앞의 4구는 보통의 오언절구(五言絶句) 혹은 칠언절구(七言絶句)의 격률로 써야 한다. 그리고 대다수는 장면을 서술하거나 의경(意境)을 나타낸다. 마지막의 두 구시는 결론과 귀납(歸納)이다. 심정을 표시하거나 의지를 드러낸다. 

육구시(六句詩)의 유래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어옹(漁翁)의 마지막 두 구를 쉽게 삭제할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두 구를 삭제한다면 형식이 당나라 때 유행한 절구로 바뀌게 될 뿐 아니라 유종원(柳宗元)이 표시하려는 본뜻이 사라지게 된다. 

유종원의 이 시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유종원은 관료가정(官僚家庭)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유학(儒學)을 숭상했으며, 모친은 불교(佛敎)를 믿었다. 유종원은 어려서부터 유학과 불학(佛學)의 이중영향을 받는다. 그는 어려서 뜻을 이루어, 21살에 진사가 되어 관료사회에 들어간다. 그리고는 적극적으로 왕숙문(王叔文) 집단에 가담하여 정치혁신을 꾀하고 예부원외랑이 된다. 영정혁신(永貞革新)이 실패하자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된다. 정치적 이상이 깨져버리고 관료로서의 앞날도 막혀 버린다. 그리하여 고독과 울분을 발산(發散)하는 것이 바로 유종원(柳宗元)의 영주10년 간 작품의 주제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아가성자통(我歌誠自慟), 비독위군비(非獨爲君悲)" "폐축인소기(廢逐人所棄), 수위귀신기(遂爲鬼神欺)"(’곡연주능원외사마‘) 
"고신루이진(孤臣淚已盡), 허작단장성(虛作斷腸聲)"(’입황계문원‘) 
"금조불용임하별(今朝不用臨河別), 수루천행변관영(垂漏千行便灌纓)(’형양여몽득분로증별‘) 

’어옹‘도 마찬가지로 고독과 울분(鬱憤)에서 온 것이다. 다만 이 시는 직접적으로 표현(表現)하지 않고, 다른 모습을 보였다. 

유종원(柳宗元)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영주에서의 일거일동(一擧一動)을 누군가 수집하여 조정에 보고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자신을 탄압(彈壓)하고 배제하는 정적들에게 보라고 이 시를 썼다. 나는 영주에서 잘 지내고 있다. 영주라는 곳은 비록 편벽한 시골구석이지만, 나는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잘 지낸다. 마시는 물은 너희들 것보다 맑고 깨끗하며(上水), 밥할 때는 것도 너희들 보다 훨씬 더 따져서 좋은 것으로 쓴다(楚竹).보는 풍경도 너희들 보다 훨씬 기묘(奇妙)하고 환상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곳은 하늘도 높고 땅도 넓어서 내가 인생과 자연의 진정(眞正)한 의미를 깨닫고 있다는 것이다. 

소동파의 기취해독(奇趣解讀) 
비록 소동파의 ’어옹‘의 마지막 두 구에 대한 평가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필자는 소동파(蘇東坡)의 '기취(奇趣)'설은 숭상한다. 시작부분의 '어옹야방서암숙(漁翁夜傍西巖宿)'은 비교적 평범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급청상(汲淸湘)'과 '연초죽(燃楚竹)'은 아취가 넘친다. 거기에는 초범탈속(超凡脫俗)의 의미가 숨어 있어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기이한 것은 이어지는 구절이다. '연소일출불견인(煙銷日出不見人), 애내일성산수록(欸乃一聲山水綠)' 이런 장면은 정말 남다르다. 남다른 수법은 원래 구름이 걷히고 해가 떠야 사람이 보이는 것이고, 청산녹수(靑山綠水)가 보이는 법이다. 유종원(柳宗元)의 붓끝에서는 청산녹수에 사람이 있는데, 마치 노래로 그를 불러낸 것 같다는 것이다. 

당연히 유종원은 '기취(奇趣)'라는 층면에만 머물지 않았다. 고풍(古風)에 따라 뒤의 구는 자신의 본뜻을 나타냈다. 본뜻을 나타내는 것과 부합되도록, 유종원은 형식적으로 일부러 당시 유행하던 절구와 율시를 피했다. 오래된 육구체제(六句體制)를 쓴 것이다. 평측(平仄)도 아주 마음대로 썼다. 이는 동류합오(同流合汚)하지 않겠다는 자태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반응형
반응형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