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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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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유명한 참모 제갈량과 의기투합 다재다능한 아내 황월영


중국 삼국 시대의 유명한 참모 제갈량(諸葛亮)은 풍채도 당당하고 씩씩한 남자였다. 하지만 아내의 추함은 역사서에 기록(記錄)될 정도였다. 제갈량 아내 황씨는 제갈량의 은사 황승언(黃承彦)의 딸로서 이 둘의 결혼은 당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됐다. 심지어 제갈량의 고향(故鄕)에서는 “제갈량처럼 신부(新婦)를 고르지 마라, 아승(阿承-황승언)의 못난 딸을 얻을 것이니”라는 속담(俗談)이 유행했다. 

황씨는 피부가 검고 머리칼은 붉은 보기 드문 흉한 여자였지만 기인 제갈량과는 궁합(宮合)은 좋았다. 제갈량(諸葛亮)이 처음 황씨를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천재성(天才性)이 드러났다. 

어느 날 제갈량은 인사차 황승언(黃承彦)의 집을 방문했다. 문을 연 순간 사나운 개 두 마리가 정면에서 달려들어 제갈량(諸葛亮)은 깜짝 놀랐다. 곧 여종이 달려 나와 개의 머리를 쓰다듬자 이 두 마리 개들은 즉시 온순(溫順)해졌다. 제갈량이 자세히 보니 이 개들은 정교(精巧)하게 만들어진 나무인형이었다. 

제갈량(諸葛亮)은 꼭두각시 개를 만들어낸 황승언을 크게 칭찬(稱讚)했다. 그러자 황승언(黃承彦)은 말했다. “이것은 우리 딸이 한가(閑暇)할 때 만든 놀잇감에 지나지 않네.” 

제갈량은 또 벽에 걸려 있는 ‘조대가궁원수독도(曹大家宮苑授讀圖)’라는 그림을 보고 그 정밀함에 찬탄을 금하지 못했다. 그러자 황승언(黃承彦)은 또 말했다. “이것도 내 딸의 서투른 작품일 뿐이네.” 제갈량은 다재다능(多才多能)한 황씨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황씨는 제갈량(諸葛亮)에게 시집간 후 집안일을 모두 도맡아 처리했으며 제갈량은 그 후부터 아무 걱정 없이 국사에 전념(專念)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각종 일을 적절히 처리했으며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매우 친절하고 상냥했다. 제갈량의 친구들도 황씨의 따뜻한 접대(接待)를 받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세월이 지나자 그녀의 ‘추녀(醜女)’ 이미지는 점차 존경심(尊敬心)으로 바뀌었으며 모두 제갈량의 탁월한 안목(眼目)에 감탄했다. 

송나라의 시인 범성대(范成大)의 ‘계해려형지(桂海虞衡志)’에 의하면, 황씨는 갑자기 많은 손님이 들이닥쳐도 기다리게 한 적이 없고 식사를 매우 빨리 준비(準備)할 수 있었다. 손님들이 그 빠른 몸놀림에 놀라 가끔 부엌을 들여다보면 나무인형 몇 개가 황씨를 돕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녀의 이 발명품(發明品)은 제갈량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 발명품에 근거해 발명된 ‘목우유마(木牛流馬)’라는 새로운 수송 수단은 십 수 만 대군의 식량을 옮기는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제갈량이 위(魏)나라를 공격하는 ‘북벌(北伐)’을 펼칠 당시에도 이 발명에 근거해 ‘연노(連弩)’라는 살상력 높은 신무기(新武器)를 발명했으며, 위나라 장수 장합(張郃)도 이 무기로 죽음을 맞았다. 

황씨는 남편의 건강도 무척 배려(配慮)했다. 제갈량이 여름에 남방으로 출정할 당시 전염병에 걸릴 것을 우려해 ‘제갈행군산(諸葛行軍散)’과 ‘와룡단(臥龍丹)’이라는 약도 조제했다고 한다. 

제갈량의 아내 황부인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인물인 황승언의 딸은 제갈량의 아내이고, 제갈근(諸葛瑾)에게는 제수, 제갈첨(諸葛瞻)의 어머니이다. 이름은 불명인데 민간전승(民間傳承)에 의하면 월영(月英)이라고 한다. 

서주에서 형주로 이주해 온 제갈량(諸葛亮)의 가족은 형주의 토착민(土着民)이 아니었음에도 혼인으로 맺어진 인척(姻戚)들을 통해서 강력한 인맥을 갖추게 되었다. 우선 제갈량의 큰 누나는 괴기와 결혼했다. 참고로 괴기의 집안은 괴월, 괴량의 집안으로 양양의 명문가(名門家)였다. 또한 제갈량의 작은 누나는 양양의 명사 방덕공의 아들 방산민과 결혼했다. 

한편 채모의 집안은 형주의 유력 호족(豪族)으로 무척이나 번성했다. 채모의 고모는 태위 장온과 결혼했고, 채모의 큰 누나는 황승언과 결혼했고, 채모의 작은 누나 채부인은 유표와 결혼했다. 만약 제갈량이 황승언(黃承彦)의 딸과 결혼한다면 명사 황승언의 집안, 형주의 유력 호족 채모의 집안과 동시에 인맥(人脈)을 걸치게 된다. 

황승언의 딸 황부인은 부모님까지 인정한 추녀(醜女)였다. 하지만 제갈량은 황부인의 외모에 상관하지 않고 그녀의 재능(才能)에 반해 결혼했다. 사람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제갈량은 이 결혼을 통해서 얻은 엄청난 인맥으로 명사(名士)가 되었다. 

황승언(黃承彥)은 고상(高爽)하고 개열(開列)하여 면남(沔南)의 명사였다. 제갈공명(諸葛孔明)에게 말했다. 

"그대가 부인을 고른다고 들었소. 내게 못난 딸이 있는데, 노란 머리에 얼굴이 검지만 그 재주가 서로 배필(配匹)이 될 만하오.“ 

공명이 허락(許諾)하자 곧 그녀를 실어 보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웃음거리로 삼고 향리인(鄕里人)들이 속어(俗語)를 지어 말했다. 

"공명이 부인 고르는 것은 배우지 마라. 아승(阿承)의 못난 딸을 얻으리라." -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제갈량의 집에 갑자기 많은 손님들이 들이 닥쳐도 황부인은 언제나 초고속(超高速)으로 식사를 준비해왔다. 손님들이 이를 궁금해 해서 주방(廚房)을 들여다봤더니 목각 자동인형(木刻自動人形)들이 맷돌을 돌리고 절구를 찧고 있었다. 제갈량이 만든 목우유마(木牛流馬)는 황부인이 전수(傳授)한 것이다. 

제갈량은 늦도록 아들이 없어서 형 제갈근의 아들 제갈교를 양자로 입양(入養)했지만 제갈교는 요절(夭折)했다. 이후 황부인이 제갈첨을 낳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諸葛亮)이 살아있을 때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백성들이 외모를 놀리는 노래에서만 언급(言及)되다가, 최후반부에서야 제갈첨(諸葛瞻)이 등장하면서 제갈첨의 어머니로 황부인이 소개된다. 

황부인은 못생겼지만 천문, 지리, 병법에 능했고 제갈량이 남양(南陽)에 있을 때 황부인의 재능을 듣고 결혼했다. 제갈량의 학문(學問)을 도왔고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사망한 후 뒤를 따르는 듯이 숨을 거두었다. 죽으면서 아들 제갈첨에게 오로지 충효(忠孝)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외모에 관한 논란이 가장 유명하다
사서(史書)의 기록에 따르면 머리카락이 누렇고 피부가 검은 인물금발태닝가루이라고 했는데, 정말 이 묘사가 정확하다면 일반적인 순혈 중국인(純血中國人)으로는 보긴 힘들고 인도아리아계 혼혈일 가능성이 높다. 군웅할거(群雄割據)의 난세가 벌어지기 100년 전부터 한나라는 서역길을 개척해 실크로드를 통해서 외국과 교역(交易)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국적 외모의 혼혈이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는 상황이다. 다만 황승언(黃承彥)의 정실은 채씨가 맞지만 이 채씨가 황부인의 생모(生母)라는 기록이나 형주 채씨가 외국계라는 기록은 없다. 즉 첩실이 낳았거나 입양한 딸일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 된다. 

당시 여성의 미적기준(美的基準)은 일단 닥치고 희고 고운 피부에 머리가 검고, 발이 작고, 몸매는 마르고 가냘픈 전형적인 황인계(黃人系) 미인상이었다. 황월영(黃月英)이 정말로 금발에 피부가 검었다면 말할 것 없이 추녀로 평가됐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미의 기준은 당시와는 다르기 때문에 현대인의 관점(觀點)에서는 아름다워 보이는 용모(容貌)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해서, 삼국지를 주제로 하는 문화매체(文化媒體)에서는 인도풍 또는 서구풍의 미인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액션 게임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 이쪽을 채택하는데, 매 시리즈마다 적갈색 머리+크고 또렷한 눈+이마의 빈디로 서구적인 느낌과 인도계의 느낌을 동시에 내고 있다. 또한 널리 퍼진 이야기는 아니지만 '원래는 전형적(典型的)인 한족 미인이었는데, 딸이 권력자의 노리개로 끌려갈 것을 우려한 황승언(黃承彥)이 일부러 딸을 추해 보이도록 꾸미게 했다'는 구전도 존재한다. 반삼국지가 이쪽을 채택했고, 진삼 시리즈와 같은 회사에서 나오는 시뮬레이션 게임 삼국지 시리즈도 오랫동안 이쪽을 택했다가 최근에는 전자의 '인도풍(印度風), 서구풍 미인설'에 맞춘 듯한 일러스트도 내놓았다. 

예문류취(藝文類聚)에 기록된 제갈량이 이엄에게 보내는 답신에서 '나는 팔십만 곡(斛)의 녹을 받았으나, 지금 모아놓은 재산은 남은 것이 없고 첩은 여벌의 옷이 없소.(吾受賜八十萬斛,今蓄財無馀,妾無副服.)'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제갈량(諸葛亮)이 첩이 없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첩(妾)'은 말 그대로 첩실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본처를 겸손(謙遜)하게 부르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단 전승(傳承)에는 제갈량이 황부인 외의 다른 여자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제갈량이 추녀와 결혼한 까닭은? 
역사서에 제갈량은 “팔척장신(八尺長身)으로 마치 송백처럼 용모는 매끈하면서도 컸다”고 했고 ‘출중한 재능’과 ‘웅대한 도량’을 겸비(兼備)했다고 묘사돼 있다. 이런 절찬(絶讚)을 받을 정도라면 그에게 구혼(求婚)을 하는 여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그렇게 명성이 자자한 미남자는 현지 면남(沔南) 명사인 황승언(黃承彦)의 여식 ‘아추(阿丑)’와 혼인한다. 그녀는 “마르고 새까맸으며 머리카락이 누렇다”고 전한다. 당시에도 “공명이 아내를 고른 것은 배우지 마라, 추녀만을 고를 뿐이니”라고 웃음거리가 됐다. 

그렇다면 제갈량(諸葛亮)은 왜 추녀를 아내로 맞이했을까? 여러 가지 다른 관점(觀點)이 존재한다. 전통적인 관점은 제갈량이 재능(才能)을 중시했지 용모(容貌)를 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아추’는 비록 예쁘지는 않지만 재능과 식견(識見)이 남달랐다고 한다. 명문가 출신이라 제갈량과 의기투합(意氣投合)했다고도 하고. 두 사람이 결합한 후 아추(阿醜)는 남편을 위해 적극적으로 계책(計策)을 마련해 줬다. 이는 제갈량에게 영감을 주는 등 도움이 됐다. 제갈량은 아추와 같은 현모양처(賢母良妻)를 맞이하려 했었기 때문에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고 했다. 

최근에 곡량(谷亮)과 진청(陳靑)과 같은 학자는 다른 각도에서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제갈량이 아추와 결혼한 것은 심사숙고(深思熟考) 끝에 내린 남다른 일이라 본다. 정치적(政治的)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고 봤다. 여자 쪽의 명문세력(名門勢力)이 자신의 출세를 도울 것이라 판단했다는 것이다. 

제갈량은 살림살이가 빈한했다. 문벌도 별로였다. 어릴 적에 아버지를 잃고 남창(南昌)에서 예장(豫章)태수를 지내는 숙부 제갈현(諸葛玄)을 따라가 살았다. 소년 시기에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호족의 압제를 경험(經驗)했다. 14세 때 숙부는 관직을 빼앗기고 유표(劉表)에게 의탁했다. 제갈량이 17세가 됐을 때 숙부(叔父)가 죽자 양양(襄陽)성 서쪽 20리에 있는 융중(隆中)에 자리를 잡는다. 

제갈량은 시골에 있었으나 하는 일 없이 평범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조용하게 평생 은거하며 살고 싶지도 않았다. 입신출세(立身出世)할 포부를 가지고 있었고 큰 공을 세울 원대한 꿈도 있었다. 정치무대에 올라 공을 세우려는 뜻을 가지고 국가의 성쇠(盛衰)에 대해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목적(政治的目的)을 위해 제갈량은 여러 가지 곤경(困境)을 헤쳐 나갔고 적극적으로 사회활동도 했다. 

먼저 그는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삶을 유지하는 것 이외에 많은 책들을 읽었으며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당시 중원(中原)은 전란에 휩싸였고 강동은 분쟁이 일어났다. 형주(荊州)는 위로는 파촉(巴蜀)과 통하고 아래로는 강동(江東)과 이어져 정치적 전략적 요지(要地)였다. 역사적으로 반드시 점령해야할 요충지(要衝地)였다. 당시에는 전란에 휩싸이지 않고 있어 피난처(避難處)가 됐다. 중원의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자 젊은 제갈량은 그들과 광범위하게 교류했다. 남양군(南陽郡)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한 왕실을 중흥시킨 발상지였다. 그곳에 거주하는 것이야 말로 바로 황제의 고향에 머물면서 제업(帝業)을 생각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제갈량(諸葛亮)은 계통적으로 경사자집(經史子集)을 공부했다. 더불어 어릴 적부터 황제의 은혜에 충성을 다한다는 전통적 관념(傳統的觀念)을 가지고 있었다. 점차 충군보국의 정치 주장을 세워나갔다. 온힘을 다해 형주의 지주계급(地主階級)과 관계를 맺으면서 “조조(曹操)는 나라 도적이고 손권(孫權)은 정권을 뺏으려 한다”고 보고 그들을 섬기려 하지 않고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갈량은 공경(恭敬)한 태도를 가지려고 했다. 그리고 재능과 학식(學識)도 남달랐다. 그래서 형주 지주 집단 중 거물인 방덕공(龐德公), 황승언(黃承彥) 등에게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제갈량은 이러한 정치적 고려(考慮)에 의해 결혼을 모색(摸索)한다. 그는 자기뿐만 아니라 집안의 혼인에도 고심했다. 먼저 그는 누나를 방덕공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냈다. 방덕공은 형주의 지주 집단 중 상양 지역의 명망 있는 수령(首領)이었다. 제갈량을 극진하게 대했고 높이 평가했다. 제갈량을 ‘와룡(臥龍)’이라 부를 정도였다. 제갈량은 그렇게 형주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이후 제갈량은 동생 제갈균(諸葛均)을 위해서도 명문 규수를 간택(揀擇)하는데 남양 명가 임(林) 씨의 여식이었다. 

후일을 도모(圖謀)하는 게 중요했다. 자기 자신도 부인을 선택하면서 형주에 머무르는데 후광(後光)이 있어야 했고 명망 귀족과 사귀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達成)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제갈량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황(黃) 씨의 추녀와 결혼을 한다. 알아 둬야 할 것은 황 씨의 아버지인 황승언(黃承彥)은 면남의 명사였다. 또 형주 지주 집단에 영향력(影響力)이 있는 인물이었다. 
  
추녀를 처로 맞이한 제갈량(諸葛亮)에게는 최소한 3가지 이점이 있었다. 첫째, 장인인 황승언(黃承彥)은 현지에 상당히 명망이 있어 제갈량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 둘째, 장모 채(蔡) 씨와 유표의 후처는 자매였다. 황 씨 집안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유표라는 황족(皇族)과 친척이 되는 것이다. 공훈(功勳)을 세우고 업적을 쌓기를 바라던 제갈량이 그런 이점을 놓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셋째, 두 명의 누나를 시집보낼 때 제갈량은 남녀의 감정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의 외모(外貌)는 따지지 않았던 것이다. 황승언(黃承彥)이 제갈량에게 결혼에 대해 물을 때 즉석에서 장인어른이라 부르며 감사를 드렸다. ‘아추’의 얼굴도 보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부터 제갈량이 지주 집단에 들어서는데 ‘파란 등’이 켜지게 된다. 한 명사(名士)의 “결혼은 정치적 행동(政治的行動)이다. 새로운 온인 관계를 핑계로 자신의 세력을 확대(擴大)하는 기회로 삼는다”고 한 말과 똑 같다. 

제갈량의 혼인 관점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은 사람도 있다. 정치적 이익 이외에 풍속습관(風俗習慣)도 제갈량의 혼인 태도와 동기를 탐구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예부터 ‘현모양처(賢母良妻)’는 짝을 구하는 전통적 중심 관념이었다. 남편이 집안을 세우는데 처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성이 재덕(才德)을 갖추었냐는 것을 중시(重視)하고 용모는 다음이었다. 재능과 미모를 겸비할 수 없을 때 재능이 우선인 셈이다. 

미모를 본다면 처보다는 첩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첩이 남자로써 좋아하는 여성의 유형(類型)인 것이다. 처 이외의 여성들은 용모가 남자를 이끄는 ‘무기’가 되는 셈이다. 제갈량(諸葛亮)도 나중에 첩을 두었다. 그렇다면 처는 재능이 우선이요 첩은 용모가 있으면 된다는 중국 전통 관점(傳統觀點)을 제갈량도 가지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이 점을 사람들은 도외시하는 경향(傾向)이 있다. 흠모(欽慕)하는 제갈량이 일반적 관념으로 세상을 살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갈량도 사람이다. 성인군자(聖人君子)라고 추앙만할 필요가 없다. 추녀와 결혼을 했다는 것은 여성의 외모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일면도 있으나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단(手段)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속인의 면모(面貌)도 드러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추녀와 결혼을 한 동기(動機)가 무엇일까에 대해 의론이 분분하다. 다만 제갈량(諸葛亮)은 혼인이라는 방법을 이용해 자신의 앞길을 열었다는 것은 부정(否定)할 수 없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추녀도 마다하지 않은 제갈량을 그저 자신의 장점(長點)인 정치인으로써의 지혜라고 보면 어떨까? 사실 여성은 외모(外貌)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이요 마음이요 재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제갈량의 아내처럼 사람의 아름다움은 외관(外觀)이 아닌 내면에 있는 것은 아닐까. 총명(聰明)하고 내면이 아름다운 아내 황씨, 지금까지 제갈량과 가장 잘 어울리는 여성(女性)은 그녀 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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