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岳岩漢字屋

甲辰年 새해 하시는 일들이 日就月將하시고 乘勝長驅.하시고 萬事亨通 하세요!!!

반응형

결말 미리 알려서 보는 재미 크게 떨어뜨리는 스포일러 서평에 대하여


스포일러(spoiler)란 영화나 연극 따위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에게 주요 내용, 특히 결말(結末)을 미리 알려서 보는 재미를 크게 떨어뜨리는 사람, 또는 그런 내용의 말이나 글입니다. 평소 소설을 즐겨 읽지만 서평(書評)을 쓰는 건 쉽지 않습니다. 스포일러를 싫어하는데 스포일러 없이 재미난 이야기를 소개하는 게 은근 까다롭습니다. 소설을 읽을 때는 그저 독자로서의 즐거움에 집중(集中)합니다. 그렇게 읽다가, '아, 이 재미난 소설을 혼자 읽고 마는 건 너무 나빠!' 싶을 때 머리를 쥐어뜯으며 글을 씁니다. 최근 전율(戰慄)하면서 읽은 책이 있습니다. 

테세우스의 배를 검색하면 나무위키에 이런 글이 뜹니다. “미노타우르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歸還)한 테세우스의 배를 아테네인들은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保存)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 낡은 판자(板子)를 떼어버리고 더 튼튼한 새 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던 것이다.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수리(修理)한 배에서 다시 다른 판자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時點)부터는 테세우스가 있었던 원래의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테세우스의 배는 그리스 신화(神話)에 등장하는 역설입니다. 
테세우스와 아테네의 젊은이들이 탄 배는 서른 개의 노가 달려 있었고 아테네인들에 의해 데메트리오스 팔레레우스의 시대까지 유지 보수(補修)되었습니다. 부식(腐蝕)된 헌 널빤지를 뜯어내고 튼튼한 새 목재를 덧대어 붙이기를 거듭하니 이 배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자라는 것들에 대한 논리학적 질문’의 살아있는 예가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배가 그대로 남았다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배가 다른 것이 되었다고 주장(主張)하였습니다. — 플루타르코스 

이는 “배의 모든 부분이 교체(交替)되었더라도 그 배는 여전히 ‘바로 그 배’인가?”라는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 “배의 부품(部品)을 교체하면서 원래 부품은 모두 창고에 두었다가 모두 교체한 뒤 창고에 모인 부품으로 배를 하나 조립(組立)했다면 무엇이 진정 ‘원래 배’인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되기도 합니다. 

단순히 조합만을 따지자면 가능한 답은 네 가지지만 각 답 모두 일견 설득력(說得力) 있는 반론에 부딪히는 것처럼 보입니다. 

1) 배1이 테세우스의 배다. 
예시: 테세우스가 살아있는 상황에서 그가 스스로 배의 널판자를 하나씩 교체(交替)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부품을 얼마만큼 바꾸더라도 테세우스가 그 배를 소유하고 있는 한 그 배는 테세우스의 배로 남으며, 반대로 테세우스가 버린 부품으로 누가 테세우스의 배와 같은 모양의 배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건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게 된다. 이제 테세우스가 죽음이나 양도로 소유권(所有權)을 아테네시에 넘겼다고 가정해보자. 이제 아테네시에 넘어간 테세우스의 (배였던) 배는 테세우스가 한때 소유했었기에 테세우스의 배로 여전히 불리겠지만 소유권은 아테네시에 있을 터이고 부품이 교체되어도 테세우스의 배는 테세우스의 배로 남는다. 

반론: 이건 테세우스의 배를 어떻게 정의(定義)하느냐에 따라 얘기가 다르다. 만약 테세우스가 소유하고 있는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경우 테세우스는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수리한 배1을 테세우스의 배라고 주장(主張)할 수 있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실제로 사용한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정의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테세우스가 수리한 배1은 분명 자기 소유지만 자신이 미노타우로스를 잡을 때 실제로 사용한 배는 아니기 때문이다. 

2) 배2가 테세우스의 배다. 
예시: 테세우스의 소유권이 사라진 후에 배에 인위적으로 널판자 하나를 가하거나 감한 순간부터 오리지널리티가 손상 받게 된다. 그것은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르스를 죽이고 돌아올 때 탔던 그 배라는 유물(遺物)로의 가치를 잃게 된다. 원래 있던 널판자와 같은 형태와 재질의 널판자로 갈아끼운다 할지라도 그건 복원품(復元品)에 지나지 않게 된다. 

반론: 테세우스의 배의 판자를 하나씩 떼어 배2를 건조(建造)하는 과정에서 배2는 어느 순간에 테세우스의 배가 되는가? 배 판자 하나만을 뗀 상태에서 그 판자 하나짜리 배2가 테세우스의 배인가? 아니면 배1은 원래 테세우스 배의 최후의 판자를 떼기 직전까지는 테세우스의 배였다가 마지막 판자를 떼는 순간 다른 배가 되는 것인가? 두 대답 모두 지나치게 극단적(極端的)인 것으로 보이며 만약 그 ‘중간’이라면 기준(基準)을 알기 어렵다. 

3) 배1과 배2 모두 테세우스의 배다. 
반론: 테세우스의 배는 하나였는데, 배1과 배2는 둘이다. 1≠2이므로 테세우스의 배는 배1과 배2 모두가 될 수는 없다. 

4) 배1과 배2 모두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다. 
반론: 다음 두 시나리오를 고려하라: 
(i) 테세우스의 배를 그냥 분해(分解)했다 다시 조립해서 배2만이 있다. 
(ii) 테세우스의 배에서 뗀 판자들을 그냥 불태워서 배1만이 있다. 
(i)와 (ii) 양 시나리오 각각에서 배2와 배1은 테세우스의 배였다고 볼 개연성(蓋然性)이 높다. 그런데 (i)와 (ii)에 있는 것들은 모두 현 시나리오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어째서 현 시나리오에선 (i)와 (ii)와 달리 되려 '테세우스의 배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대안적(代案的)인 대답도 가능하다. 
테세우스의 배라는 것 자체는 우리가 부여(附與)한 의미일 뿐이다. 따라서 현실이 이러한 부여된 의미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은 당연(當然)한 일이다. 

예시: 누군가 테세우스의 배라고 인식(認識)하면 그 사람에겐 그것이 곧 테세우스의 배다. 판자를 교체한 사실을 모르고 전시(展示)된 배를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그것이 곧 테세우스의 배다. 반대로 판자가 교체되어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에겐 테세우스의 배가 아닌 것이다. 즉, 생각하기 나름이며 애초에 정답(正答)이 없는 이야기다. 

예시: 테세우스가 배에서 내린 순간 이미 테세우스의 배는 사라졌다. 이 논의(論議)에서는 사람의 손에 의해 판자가 교체되는 경우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미시적(微視的)인 시각에서 보면 마모(磨耗)되거나 산화(酸化)되거나 혹은 미생물이 증식(增殖)하거나 먼지가 쌓이는 등 굳이 사람의 손으로 판자를 교체하지 않더라도 비슷한 종류의 일들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엄밀(嚴密)하게 보면 테세우스가 타고 있던 배와 내린 후의 배는 설사 인위적(人爲的)으로 판자를 교체하지 않더라도 물리적(物理的)으로는 완전히 똑같은 존재가 아니다. 다만 인간의 직관(直觀)에 같은 존재로 여겨질 뿐이다. 

예시: 무지개에서 빨강색과 주황색의 경계가 모호(模糊)한 것처럼 얼핏 명확히 구분(區分)되는 것처럼 보이는 개념(槪念)들을 원론적으로 엄밀하게 정의하고 구분하려 들면 그 경계가 모호하고 불분명(不分明)한 경우가 많다. 판자가 한두 개 바뀌었을 때는 여전히 그때 그 테세우스의 배이며 대부분의 판자가 바뀌었을 때는 원본이 아니지만 양쪽의 경계선(境界線)은 존재하지 않고 불분명한 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해석: 의미와 개념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해버리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되지만 필연적(必然的)으로 더 복잡한 질문(質問)들을 낳게 된다. 예를 들어 ‘그렇다면 우리가 테세우스의 배라 인식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준(基準)을 제시함으로서 정의를 명확히 할 수는 없을까?’ 등등이다. 이 역설(逆說)이 한두 마디 정답을 구하려는 의도(意圖)가 아니라 이렇게 다양한 철학적 문제들을 생각해보라는 의도로 나온 것이라 생각해야 맞을 것이다. 

이 역설이 함축하는 의미 
일반적으로 테세우스의 배는 다음과 같은 보다 일반적인 철학적(哲學的) 문제들이 얽혀 생겨난 역설이라고 해석된다. 

질적으로 다른 대상들이 수적으로 동일할 수 있는가? 
이는 동일성에 관한 설득력 있는 원리 중 하나인 ‘동일자의 구별불가능성 원리’에 어긋나지 않는가? 이는 가능세계 관련 논의에서도 ‘통세계적 동일성(通世界的同一性)’ 문제라는 형태로 재현된다. 

물리적 사물의 정체성은 오직 그 물리적 부분에 의해 결정되는가? 
즉 사물의 물리적 부분은 그 사물의 본질적 요소인가? 즉 부분이 바뀌면 그 사물은 필연적으로 다른 것이 되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물의 정체성(正體性)을 형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형이상학에서의 물질적 구성(物質的構成) 문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사물이 변화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파르메니데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질문(質問)이다. ‘어떤 사물 a가 b로 변한다’는 것은 곧 ‘b는 더이상 a가 아니다’는 것을 함축(含蓄)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떤 사물이 변화하지만 여전히 그건 그 사물이다’라는 것은 어떻게 말이 되는가? 형이상학(形而上學)에서의 ‘인내력(忍耐力) vs. 지속주의(持續主義)’ 논쟁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지속주의 혹은 4차원주의에 따르면 물리적 사물은 시간적 부분(時間的部分)들, 혹은 3차원 시간 단면들의 합이다. 즉 '사물 a가 b로 변했다'는 말의 의미는 곧 a와 b가 시간 축에서 연장된 대상 a+b+...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이 된다. 내 눈과 내 손가락이 내 몸의 일부분일 뿐인 것처럼 말이다. 데이빗 루이스가 이런 4차원주의(四次元主義)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사례들 
다양한 응용 사례들이 존재한다. 특히 사람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들이 주목(注目)을 많이 받으며 이는 형이상학에서 인격 동일성(人格同一性) 문제로 불리는 주제와 연관된다. 기술의 발전으로 트랜스휴머니즘이 점점 공상(空想)에서 현실로 바뀌어가는 상황(狀況)이라 앞으로도 사이보그 문제나 복제인간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논점(論點)이 될 요소 중 하나다. 

생물체의 순환 
생물체의 경우 실제로 테세우스의 배와 비슷한 기적(奇蹟)이 일어난다. 

(1)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몸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2) 세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죽는다. 
(3) 세포가 죽은 만큼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 재생된다. 
(4) 세포 하나가 죽고 새로운 세포로 바뀌어도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다. 
(5) 세포 백 개가 죽고 새로운 세포로 바뀌어도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다. 
(6) 그러나 6개월만 지나면 당신 몸의 세포는 대부분 바뀌게 된다. 
(7)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6개월 전에 존재했던 당신과 같은 사람인가? 

요점(要點)은 6개월 전과 6개월 후의 당사자의 피부와 살을 이루는 세포는 싹 다 바뀌게 되는데 그럼에도 그 사람을 같은 존재(存在)로 볼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언뜻 생각해보면 쉽다고 여길 수도 있다. 신경세포(神經細胞)는 죽을 때 까지 물갈이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보다 미시적(微視的)인 관점에서 보자면 신경세포는 죽지 않는다고 해도 신경세포(神經細胞)를 이루는 분자와 원자들은 매순간 교체(交替)되고 있으므로 결국 자세히 살펴보면 테세우스의 배 문제와 별 차이가 없다. 

‘플루타르크’ 그러니까 이 소설은 원본과 복제본(複製本)의 이야기입니다. 재벌그룹 회장인 석진환이 불의의 사고(事故)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훼손(毁損)된 신체와 장기를 사이보그 기계 팔과 인공장기(人工臟器)로 개조하면서 겨우 살아납니다. 온 몸이 기계가 된 석진환 앞에 그룹의 경영권(經營權)을 두고 음모가 펼쳐집니다. 온 몸이 로봇이 되어버린 그는 자신이 재벌회장(財閥會長)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소설을 읽는 내내 터미네이터가 된 인간의 액션 활극(活劇)이 펼쳐집니다. 흥미로운 주제를 박진감(迫進感) 있게 풀어냈습니다. 주제의식(主題意識)도 좋고 작가의 입담도 대단합니다. 언젠가 SF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작품인데 일단 활자(活字)로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머릿속에 펼쳐지는 상상만큼 멋진 영화(映畫)도 없습니다.   

미래에는 돈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복제품을 만들어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꿈꿀 수 있을까요? 내 몸이 사라지고 정신 또한 데이터화된다면 그게 진짜 나일까요? 돈은 없어도 시간은 풍족(豐足)한 저는 저의 복제품을 블로그에 구축(構築)합니다. 블로그는 나만의 기억 아카이브입니다. 나의 또 다른 인격을 온라인에 배양(培養)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블로그에 오는 독자들은 마치 저와 수다 떠는 기분으로 글을 읽고 댓글을 남기지 않을까요? 

책에는 감금상태(監禁狀態)에 놓인 주인공이 데이터베이스에 올려놓은 과거의 기억을 복기(復記)하며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저 기계적으로 흡수하기만 했던 책들을 기억의 서랍에서 다시 꺼내 음미(吟味)하는 행위는 상상 이상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어루만지며 다시 여유(餘裕)를 갖고 바라보게 되자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던 의미가 보다 명료(明了)하게 정리되는 것 같았다. 지루한 고전(古典)들이 지닌 위대한 가치도 예전엔 표면(表面)만 겨우 핥고 말았던 철학의 감추어진 심연(深淵)도 어른이 되어서야 이해할 수 있는 문학의 재미도 모두 엄청난 지적 쾌감(知的快感)으로 다가왔다.’ 

순간이동을 본체의 죽음으로 볼 수 있을까? 
순간이동은 테세우스의 배처럼 관찰자(觀察者)의 기준에서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무생물(無生物)이야 인격도 의식도 자아도 없으니 관찰자의 기준에 따라 원본이냐, 원본이 아니냐와 같은 문제만이 남지만 순간이동(瞬間移動)은 의식이 있는 생물인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관찰자가 아닌 순간이동 당사자의 기준을 적용(適用)해야 합니다. 

먼저 출발점(出發點)의 사람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예를 들어 테세우스의 배를 모조리 갈아서 톱밥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이 톱밥은 더 이상 테세우스의 배라고 볼 수 없습니다. 톱밥을 합판으로 만들어서 테세우스의 배를 재현(再現)했다고 해도 다시 만들어진 그 배는 이미 갈려버린 테세우스의 배와 같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순간이동 역시 사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자화(粒子化)되어 이동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톱밥과 배의 관계처럼 입자 역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출발점에 있던 사람은 입자화된 순간 죽었고 도착점에 나타난 사람은 그 복제인간(複製人間)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순간이동 장치에 이상이 생겨서 도착점(到着點)에 당신의 복제본이 나타났지만 출발점에 있던 당신이 분해(分解)되지 않은 사고가 생겼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렇다면 출발점에 남겨진 당신은 도착점에 내 복제본이 나타났으니 여기 있는 나는 분해해달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저 복제본과 나는 별개의 존재(存在)이니 자신을 죽이지 말라고 말할 것인가? 당신과 도착점의 복제인간을 두고 둘을 동일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같은 윤리적 논쟁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들이야 당신이든 복제인간(複製人間)이든 아무런 차이도 못 느끼니까 동일성에 대한 논쟁을 하겠지만 당신만은 복제인간과 자신을 동일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복제인간은 감각(感覺)이나 자의식을 공유하지 않는 완전한 타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계에 이상이 생기지 않은 경우에는 당신이 순간이동 과정에서 소멸(消滅)해버렸기 때문에 당신과 복제인간이 다른 사람임을 남들에게 주장할 수 없게 되었고 이로써 도착점의 사람이 원본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論爭) 즉 테세우스의 배 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이러한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복제인간을 본인과 동일한 존재로 놓는 것만큼 불합리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종합(綜合)하자면 스타트렉식 순간이동은 원본을 소멸시키는 복제과정(複製過程)이며 도착점의 인간을 함부로 출발점의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원본을 이루는 분자와 원자를 보존(保存)하여 직접 이동하여 원본의 정보 그대로 재구성한다고 해도 인간의 의식(意識)을 이루는 물리적-화학적 요소가 분해와 재결합 과정에서 어떻게 될지 설명되지 않을 겁니다. 뿐더러 물체의 정체성(正體性)이 분자 단위로 원료만 보존한다 해서 유지가 되는 게 아니므로 저렇게 한다 해서 테세우스의 배 문제가 적용(適用)되지 않는다고 보기에는 논란(論難)이 따릅니다. 

분해(分解)된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원료가 아니라 다시 원본(原本)을 만들 수 있는 정보이며 똑같은 정보로 완벽하게 재구성을 했을 때 기존의 정체성이 지속되느냐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따지면 결국 인간의 몸은 과거에 초신성(超新星)이나 공룡 따위를 이루고 있던 분자로 만들어진 것이니 그 인간은 공룡(恐龍)이며 초신성이기도 하다는 소린데 애초에 모든 물질은 빅뱅 때 탄생했으니 결국 정체성(正體性)을 따지는 것 자체가 아예 무의미해집니다. 또한 언제부터 그 분자(分子)와 원자가 ’나‘가 되는지도 모호(模糊)하므로 결국 똑같은 문제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게다가 사실 정보로 원본 그대로 재현(再現)했다 하면 원료는 사실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같은 원료로 재조합을 하건 다른 원료로 재조합(再組合)을 하건 결국 똑같이 원본으로부터 비롯된 정보로 조립한 것이기에 결과의 차이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이는 논리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위의 생물체(生物體)의 순환 항목에서 언급했다시피 어차피 사람은 6개월마다 신체 전체의 세포가 교체(交替)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불교에서의 화두 
불교의 핵심은 견성오도(見性悟道) 즉 스스로 깨닫는 것이고 그 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화두는 '이뭐꼬'라고 불리는 현재 '나'라고 정의(定義)할 수 있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사례와 관련하여 '나'를 이루는 존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답을 찾는 것입니다. 

팔이 나인 것인가? 
팔을 잘라도 다른 팔을 이식해도 나라는 존재(存在)는 그대로 있으므로 팔은 '나'가 아닙니다. 

심장이 '나'인 것인가? 
심장을 떼어 내고 인공심폐기(人工心肺器)에 연결하거나 다른 심장을 이식(移植)받아도 나라는 존재는 그대로 있으므로 심장은 '나'가 아닙니다. 

뇌가 나인 것인가? 
뇌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手術)을 하더라도 과거의 기억이 사라지거나 말을 잘 하지 못하거나 할뿐 여기서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심지어 뇌가 죽은 뇌사상태(腦死狀態)가 되더라도 내 나머지 신체는 심장(心臟)을 비롯해 모든 부분이 살아 있으므로 뇌도 '나'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이렇게 생로병사를 겪는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여기에 답을 찾는 것이 불교(佛敎)의 핵심이고 이러한 답을 찾으면 깨달음을 얻은 것이고 깨달음을 얻으면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고통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나 더 높은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우리보다 먼저 깨달음을 얻은 것이 ’석가모니(釋迦牟尼)는 부처‘라는 것이 불교의 교리입니다. 

테세우스의 배는 이와 같이 존재에 대한 의문이 동서양(東西洋)에서 동시에 나타났음을 알려주는 문제입니다. 

‘테세우스의 배’는 그래비티 픽션 9번째 책입니다. 최근 빠른 속도로 성장(成長)하는 한국 SF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처음 읽은 책이 이렇게 재미나니 다른 8권의 책들도 기대됩니다. 하나하나 찾아 읽어야겠습니다. 읽고 싶은 책이 늘어나서 독서광(讀書狂)은 오늘도 행복합니다.

반응형
반응형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