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岳岩漢字屋

甲辰年 새해 하시는 일들이 日就月將하시고 乘勝長驅.하시고 萬事亨通 하세요!!!

반응형

우리 민족의 전통의상 한복에 대한 기원과 개량에 대하여

[사진 = 조선일보]


한복(韓服)은 한민족의 전통의상(傳統衣裳)을 말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형태가 변하고 있는데 현대에는 주로 조선의 말기 양식과 그의 개량형(改良型)이 한복의 이미지로 인식된다. 현대에는 붕어배래, 조끼허리풀치마, 조끼, 마고자 등 구한말(舊韓末) 이후에 변형(變形)된 형태 위주로 입는다. 

여자 한복뿐만 아니라 남자 한복 역시 구한말 이후 변형된 양식(樣式)이 흔한데 이러한 양식을 전통이라 착각(錯覺)하는 경우도 많다. 후술(後述)하겠지만 이러한 양장(洋裝)들은 실용 의복으로써의 가치(價値)가 낮다. 현대의 한복은 소재의 다양성과 새로운 디자인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한복이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구려(高句麗)의 벽화에서였다. 기본적인 형태는 상의와 끈, 하의, 그리고 모자에 두건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이후 차츰 변화하여 상의가 짧아지고 허리에 매는 끈이 고름으로 간소화(簡素化)되었으며 두건이 다른 형태의 모자로 대체되었다. 이후 만주족(滿洲族)의 복식에 영향을 받은 마고자(馬褂子)와 서양 복식에 영향을 받은 조끼가 추가되어 현대의 한복 형태가 완성되었다. 여기에 한복을 크게 간소화한 생활한복(生活韓服)은 고름이 단추로 대체되고 소매가 줄어들어 일상생활에도 입기 편하게 만든 형태이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고도 많다. 나는 그중에서도 꽃을  많이   사랑해왔다. 누가  조물주(造物主)인지는 몰라도 꽃들은 시종 어여쁘게 그 모양대로 피여 향기(香氣)를 풍기다가 열매를 맺고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그런  꽃들은 항상 내 마음에 일시적인 행복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그러나 한복은 자연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먼 옛날부터 우리조상 할머니들의 손부부리에서 정성(精誠)을 다하여 만들어져왔다. 이렇게 손으로 만들어진 한복은 지금의 세상에서 둘도 없는 아름답고 화려(華麗)한 꽃과 같은 옷으로 부각되고 있다. 

나이 이순(耳順)에 셈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우리 민족(民族)의 뿌리를 찾아보려는 염원일수도 있고 또 직업적 사명(使命)인지는 몰라도 하여간  집요하게 한복을  반평생을 “연구(硏究)”해 왔다. 그러하기에 나는 때론 명상(瞑想) 속에서도 그 “꽃”을 해부(解剖)하듯이 한복의 각 부위를 무시로 속속들이 “해부”해기도 한다. 

깃: 깃은 저고리의 영혼(靈魂)이다. 깃은 사람의 용모를 떠받들어 주는 “화판(花瓣)”과도 같다. 우리 민족의 속담에 “마음이 고와야 깃이 바로 선다.”라는  말이 있듯이  옷깃이 바른 우리 민족은 마음과 얼굴도 아름답다.  저고리의 깃은 우리 민족의 “선(善)”을 고집하는 지성으로 비폭력 저항(抵抗)의 정신을 갖고 탁류(濁流)에 휩쓸리지 않는 결백한 정신과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지조를 품고 있다. 

동정: 한복의 생명(生命)이다. 깃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날빛처럼 새하얗고도 날카롭게 서 있으며 또 우리 민족의 정결(淨潔)함을 상징하고 있다. 

섶과 섶코; 흉부(胸部)를 자연스럽게 덮어 주며 주인의 신분을  떳떳하게 표명해 주고 있다. 여자 저고리의 앞섶은 젖가슴을 편안히 덮어 주면서도 깜찍하게 앙증스러울 만큼 둥글고 뾰족하게 섶코를 이루어 주며 한옥(韓屋) 지붕의 처마 끝처럼 살포시 들려 섶과 도련의 눈과 코로 되고 있다. 

도련: 젖가슴이 들어날까 말까 살짝 덮어 주면서 연한 곡선으로 만곡선(彎曲線)을 외돌면서 또 섶코를 떠받들어 주고 있다. 

고름, 눈물고름(향대香帶): 가슴위의 오른쪽에 나비봉접처럼 매듭을 맺으면서 한 쌍의 쌍둥이처럼 아래로 길게 내리 드리워 치마 주름과 동행(同行)하면서 직선의 강직(强直)한 미를 과시하면서도 바람에 휘날릴 때면 아름다운 춤사위와 같다. 또 수줍어하는 여인(女人)들이 만지작거리는  말동무이며 슬퍼하는 여인의 눈물 찍는 손수건과도 같다. 

소매활기: 고대 중심에서 소매부리까지 직선(直線)으로 내리뻗은 활기찬 선. 어깨마루에서 태연스럽게 소매산의 몇 개의 주름을 남기면서 끝에 가서는 살짝 열린 소매부리를 선(線)이 두드러지게 열어 준다.  

소매배래: 어류의 복부호선(腹部弧線)처럼 휘어지면서 또 한옥의 추녀 처럼 먼 하늘을 쳐다보면서 옷의 날개가 되여 움직여 준다. 

치마: 짧은 저고리에 긴 치마,  “긴 상체에 짧은 하체”를 이룬 동방여인(東方女人)의 생리적 결함을 미봉(彌縫)해 주는 긴 치마, 미학착각법칙(美學錯覺法則)에 잘 어울린다. 허리에서 겹겹이 입은 속치마로 하여 여인의 허리는 엎어놓은 구리종 같고 내리 드리운 초롱꽃과도 같다. 또 발끝에서 사뿐사뿐, 발뒤축에서는 살랑살랑 끌리는 치마 자락은 생명력(生命力)이 또한 흘러넘친다. 짧은치마자락은 신근(辛勤)한 여성들의 생기 발발한 활동력을 과시(誇示)한다. 

우리민족의 한복은 저고리, 허리띠, 고름, 바지, 모자류(건이나 갓 등), 귀고리 등이 기본 구성이다. 기본적으로 상유하고(上襦下袴) 양식을 띠고 있다. 북방(알타이)계 호복(胡服)을 근간으로 상의와 하의가 나누어져 있어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바지, 남자는 저고리와 바지로 구성된 활동적인 복식(服飾)이다. 또한 아한대성(亞寒帶性) 기후조건 탓에 몸을 감싸는 형식(形式)으로 되어 있다. 

원래 성별과 상관없이 귀고리까지 착용(着用)하는 것이 기본 착장(着裝)이었다. 고분 발굴(古墳發掘)을 통해 신라 등 삼국시대 때부터 그랬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조선 초기에도 성별 불문(性別不問)하고 귀를 뚫고 귀고리를 착용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3권, 세종 1년 1월 6일 신해 4번 째 기사를 봐도 알 수 있는데 사대부 자손들이 귀고리를 착용(着用)했으며 금이나 은을 써도 법에 저촉(抵觸)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선조 5년(1572)에 젊은 남자에 한해 귀고리를 금지(禁止)시킨다.  

선조실록(宣祖實錄) 6권, 선조 5년 9월 28일 신해 두 번째 기사 조선대에 들어 귀를 뚫는 귀고리가 아닌 귓바퀴에 거는 귀걸이가 등장(登場)했다. 선조실록 186권, 선조 38년 4월 19일 계해 두 번째 기사에 '귀고리를 건 노파'가 언급되므로 여자까지 귀고리를 금지당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선조 30년(1597)에 남자의 귀 뚫은 자국을 보고 조선인인지 왜적(倭敵)인지 구분(區分)한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5년에 남자들의 귀고리를 금지시켰음에도 오랜 풍습(風習)을 쉽게 바꿀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법으로 금지(禁止)되기 전에 귀를 뚫었던 사람이거나 남녀노소(男女老少)를 불문하고 하의를 크고 풍성하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 양반가는 3~5 정도의 치마를 껴입었고 그 이상도 가능하다. 다른 건 몰라도 미의식(美意識)만은 복식사에서 한민족만큼 동형성(同形性)을 지킨 민족도 드물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東亞細亞) 국가들의 전통 의상은 기모노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자의 옷을 아담한 가슴에 적합(適合)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 왔고 그 때문에 가슴을 압박(壓迫)하는 형태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은 편이었으며, 한복의 경우에도 아래쪽은 크고 화려하게 만들고 위쪽은 작고 간소하게 만드는 것을 여성용(女性用) 한복의 기본적인 디자인 양식으로 삼고 있었기에 딱히 예외는 아니었었다고 한다. 다만 이는 전통적(傳統的) 원형을 지킨 한복의 이야기이고, 현대에 들어 제작되는 개량한복(改良韓服)이나 퓨전한복은 현대인들의 생활 방식(生活方式)과 편리하게 맞추기 위해서 면 소재나 블라우스 소재 등 현대의 소재와 결합하여 다양한 형태(形態)로 제작되는 경우도 많은 편이다. 

한복이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구려(高句麗)의 벽화에서였다. 기본적인 형태는 상의와 끈, 하의, 그리고 모자에 두건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이후 차츰 변화하여 상의가 짧아지고 허리에 매는 끈이 고름으로 간소화(簡素化)되었으며 두건이 다른 형태(形態)의 모자로 대체되었다. 이후 만주족의 복식에 영향을 받은 마고자와 서양 복식에 영향(影響)을 받은 조끼가 추가되어 현대의 한복 형태가 완성되었다. 여기에 한복을 크게 간소화한 생활한복은 고름이 단추로 대체되고 소매가 줄어들어 일상생활(日常生活)에도 입기 편하게 만든 형태이다. 

여성용 저고리는 짧아지고 치마는 반대로 길어져서 가슴 바로 아래까지 치고 올라갔다. 

제주도(耽羅國) 지역은 육지와 떨어진 섬이라는 지형적 특색으로 인해 상당히 오랫동안 독자적이고 원시적인 복식문화(服飾文化)를 간직하고 있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과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마한 서해에 있는 큰 섬에 주호국(州胡國; 제주의 옛 명칭)이 있는데 가죽옷을 입은 사람들은 윗도리만 걸치고 아랫도리는 입지 않으며 소와 돼지를 기르며 배를 타고 한(韓)과 교역한다"는 기록이 있다. 제주 전통 모피·피혁류 복식 연구라는 논문에서는 '제주 중간 산간지역에서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는 1900년대 출생 제주도민들의 증언(證言)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아 상당히 최근까지도 가죽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이전(東夷傳) 등의 기록을 통해 남방계의 영향이 짙었음을 알 수 있다. 4세기 한반도(韓半島)에서 북방계 복식을 받아들이기 이전의 일본 복식과도 유사성(類似性)이 있으며, 일각에서는 호복, 한푸의 영향을 받기 이전 한국의 원시 복식의 형태를 제주도 복식을 통해 추론(推論)하기도 한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입었던 고대 여성용 한복. 우리가 아는 보통의 한복보다 상의가 훨씬 길다. 고구려(高句麗)는 평상시에도 전투복(戰鬪服)과 같이 활동성이 좋은 옷을 입어 전쟁(혹은 비상시)을 대비했다고도 한다. 신분이 높을수록 바지와 치마의 폭이 넓어진다. 이 시대의 치마는 세로로 여러 색을 넣거나 치마 전체에 주름을 잡기도 했다. 

고구려 고분 벽화(古墳壁畵) 속 한복들을 봐도 당시 당나라의 홍장분식(紅粧粉飾)과 다른 연지 화장을 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일반적으로 통용(通用)되던 복식들의 도식화(圖式化) 출처는 천손의 시대이다. 데포르메가 되긴 했지만 현존(現存)하는 자료들 중에는 삼국시대 복식과 악세서리를 한눈에 보기에 가장 좋다. 의복은 저고리, 두루마기, 바지, 치마, 가늘거나 넓은 허리띠(조대, 대대)를 기조로 하며, 관모(절풍, 조우관, 조미관, 갓, 책 등) 신발(짚신, 갖신, 나막신) 등의 완전한 구성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남녀노소 귀고리를 필수적으로 착용한다. 

신라 귀족 여성의 한복은 상의로 소매가 넓은 포를 입었고 그 위에 반소매 끝에 장식선(粧飾線)이 달린 반비를 입었다. 상의가 땅에 끌릴 정도로 긴 경우도 있다. 마무리로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숄이나 목도리에 해당하는 표를 둘렀는데 이 역시 보온보다는 장식성(粧飾性)이 강하다. 또 가슴 아래에서 끈을 묶고 그 끝을 길게 아래로 늘어뜨렸다. 당의 문물(文物)을 들여온 후에는 당나라의 영향으로 귀족(貴族) 여성들 사이에는 저고리를 먼저 입고 치마를 저고리 위에 입는 방식이 유행했다. 다만 귀족 여성과 달리 서민 여성은 여전히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입었고 예복(禮服)으로는 포를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여성용 한복은 고대의 한복과 기본 형태는 비슷하다. 고려 여성들은 노란색 치마를 즐겨 입었으며 치마가 길고 풍성(豊盛)할수록 좋게 여겼다고 한다. 중국풍(中國風) 의상일 경우 치마는 저고리 위에다 입으며 가장 위에는 포를 둘렀다. 허리에는 금방울이나 향낭(香囊)을 차 장식하기도 하였다. 머리에는 몽수(蒙首)라는 일종의 베일을 썼는데 이 역시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었다.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로 저고리 길이가 점차 짧아짐에 따라 허리띠 대신 옷고름의 원형이 되는 여밈 끈을 달기도 했다.  

고려 복식(高麗服飾)은 불화 덕분에 이전 시대에 비해 복식 재현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편이다. 문화 컨텐츠닷컴에서는 고려 복식 카테고리를 따로 만들어 그래픽 재현(再現) 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복식은 고려 초는 삼국시대와 유사하며 원 간섭기(干涉期)에는 상류층(上流層; 관리나 귀족)은 원의 복식을 따르게 된다. 옷에 고름이 생기고 저고리와 치마를 연결하여 철릭이 만들어졌다. 고려 말의 복식은 조선 초기 복식을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기존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말에 전통 한복은 평민의 옷이자 귀족의 일상복(日常服)으로 중국 복식은 공복이자 예복으로 쓰였다면 고려는 여기에서 상류층 예복조차 시대에 따라 중국의 장복과 적의, 혹은 몽골 복식(蒙古服飾)으로 나뉜다. 왕조차 일상에선 평민들과 같은 저고리와 바지 차림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포가 변형되었다는 백저포(白苧布)를 신분과 성별을 막론하고 즐겨 입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상류층 부녀자들의 의복이 서민과 다를 바 없었으며 어떤 사람에게 '왕이 올 때에야 비로소 왕족들이 비단 옷을 입는다'고 들었다 언급된다. 

조선 초기부터 임진왜란(壬辰倭亂) 전후 때까지 약 200년 간 입었던 치마저고리로, 저고리가 무척 크고 길었다. 그리고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부터 기존의 크고 긴 저고리를 조금씩 줄여 입기 시작하는 동시에 이때부터 노리개가 애용(愛用)되기 시작한다. 

한복(韓服)은 자연의 꽃보다 더 생동하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꽃과  같다.  하기에 나는 한복을 더 사랑하고  언제나 우리민족의 고유 한복을 예찬(禮讚)하고 싶어 이 글을 정리한다.

반응형
반응형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