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공성(天空星) 급선봉(急先鋒) 삭초(索超)의 별호는 급선봉(急先鋒)이고 성질이 급해 전쟁터에서 다투듯 앞장선다고 붙어진 별호다. 금잠부라는 대부를 잘 쓰고 명마 오화룡마를 가진 인물이다.
북경 대명부(大名府) 정패(軍官) 출신으로 자신이 가르친 제자인 대명부의 주근(周謹)를 발라버리는 죄수인 양지(楊志)를 보고 무술시합에서 패하자 설욕(雪辱)을 위해 도전을 했다. 대명부의 실추(失墜)된 위신에 격분하여 그와의 일대일 대결을 양중서(梁中書)에게 청하게 되고 이를 허락받자 양지와 격돌(激突)한다. 하지만 무승부로 결판을 내지 못하자 이를 지켜본 양중서가 삭초와 양지의 무예를 높이 사서 두 장수를 모두 관군제할사(官軍提割使)로 진급시켜주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삭초(索超)는 양지의 무예를 높이 평가한다.
그 후에 뜻하지 않게 모함(謀陷)에 빠져 처형당할 위기에 놓인 북경의 대부호 노준의(盧俊義)를 구하기 위해 양산박 군사들이 몰려오자 삭초(索超)는 이를 막기 위해 북경성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나 오히려 함정(陷穽)에 빠져 투항한다. 이후 양산박이 조정에 귀순(歸順)한 뒤에는 요의 교아유강을 죽이고 전호(田虎)의 장수 오성과 대미, 방납(方臘)의 장수 노안, 미천 등을 살해하는 공적을 세웠으나 항주(杭州)에서 적장 석보(石寶)에게 의해 전사하고 만다. 큰 도끼를 휘두르며 말을 탄 채 앞장서서 전투에 뛰어드는 삭초의 모습은 개성 면에서 충분히 매력(魅力)이 있다.
대명부(大名府)로 유배 온 양지(楊志)가 대명부 유수사(留守使) 양세걸(梁世傑)의 신임을 얻어 승진을 위한 연무대회(演武大會)가 열린다. 삭초(索超)의 제자인 주근(周謹)이 양지에게 패하자 그는 직접 나서서 양지와 겨루었다. 양지(楊志)의 창과 삭초의 대부가 불꽃을 튀기며 맞붙었지만 50합이 넘도록 승패(勝敗)가 나지 않았다. 이에 양세걸은 크게 기뻐하며 삭초를 양지와 함께 제할사(提割使)에 임명한다.
양산박이 노준의(盧俊義)를 들이고자 노력했으나 시종 이고(李固)가 밀고하는 바람에 노준의가 옥에 갇히는 신세에 처하였을 때였다. 송강(宋江)은 즉시 북경으로 출전하였고 삭초(索超)는 북경을 지키던 대도(大刀) 문달(文達), 천왕(天王) 이성(李成)과 함께 양산박군과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관승의 양산박 침공으로 한숨 돌렸으나, 이후 관승(關勝)마저 합류한 양산박과의 두 번째 싸움에서 패한 뒤 함정에 빠져 사로잡힌다.
이후 양산박과 대명부(大名府) 간의 전투에서 이성(李成)의 지휘를 받아 출전하지만 양산박의 계략에 걸려 패퇴(敗退)하고 관승(關勝)이 양산박을 공격하고 양산박군이 퇴각할 때 기습(奇襲)하려고 하다가 부상을 입었다. 그 후 관승이 양산박에게 투항하고 선봉(先鋒)으로 쓰자 삭초(索超)는 부상에 당한 것도 있고 그 성질(性質)을 억누르지 못하여 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출전한다. 그리고 양산박군이 파놓은 함정(陷穽)에 빠져 양산박에게 잡히게 된다. 그 다음은 송강의 인재포섭묘략과 더불어 양지(楊志)의 권유에 힙 입어 양산박(梁山泊)에 합류하게 된다.
양산박에선 팔표기 기병두령(騎兵頭領)으로 활약하였다. 금잠부로 여러 적장들의 목을 두 동강 내었다. 그러나 성질이 급해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하여 급선봉이라 불린다. 대명부(大名府) 유수사의 정패(正牌)로 있을 때 귀양 온 양지(楊志)와 무예 시합을 벌여 오십여 합을 싸웠으나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다. 한 자루 도끼를 잘 쓰며 송강(宋江)이 군사들을 이끌고 대명부를 쳤을 때 맞서 싸우나 함정에 빠져 사로잡힌다. 그 후 양산박에 투항(投降)하여 마군의 대표기(代表騎) 겸 선봉을 맞는다. 조정에 귀순(歸順)하여 방납(方臘)을 칠 때 북관문에서 적장 석보(石寶)의 유성추(流星鎚)를 맞아 죽는다.
수호전(水滸傳)은 중국 최초의 백화문(白話文)으로 쓰인 장회 소설(章回小說)이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형성, 발전하였다. 남송(南宋) 때 양산박 영웅호걸들의 얘기가 널리 유행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모두 즐겨 들었기 때문에 이것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소재로 거리 연극(演劇)을 하고 문자로 기재하였다. 그 중에서 ‘대송 선화 유사(大宋宣和遺事)’ 중에 오늘날 ‘수호전’의 대략적인 줄거리와 인물이 갖추어졌다.
송말(松末)에 이르러서는 양산박의 영웅들을 주재로 한 극본(劇本)만도 33종이었으나 지금은 극본의 이름만 남아있으며 이후 많은 문인들이 수호전을 편역 개작(編譯改作)하였으나 그중에 시내암(施耐庵)과 나관중(羅貫中)에 의해서 오늘날의 수호전으로 완성되었다고 전해진다.
‘수호전’에는 무려 108명의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 등장(登場)한다. 그런데 그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들 각 개인은 사회에서 도태(淘汰)되어 죄인이 되었거나 암흑가(暗黑街) 출신이거나 관료 생활(官僚生活)을 했지만 죄를 지어 도망 다니는 사람이든 문인 출신이든 하층 출신이든 하나같이 불합리한 사회 질서에 반항(反抗)하는 용감한 싸움꾼들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민중의 탄성을 자아내는 영웅 칭호(英雄稱號)를 받았고 민중의 가슴에 친구처럼 각인(刻印)되었다.
반면에 이러한 요소는 지배층(支配層) 관료와 문인들이 ‘수호전’을 금서(禁書)로 낙인찍고 수호전의 내용을 수정해서 조금씩 다른 내용으로 변형(變形)시켰다. 즉 조정에 투항하고 황제(皇帝)를 위해 반란 전쟁에 참여한다는 설정이다. 그로인해 ‘수호전(水滸傳)’은 중국 4대 기서 중 가장 복잡한 판본(板本)을 지닌 작품이 되어 버렸다.
‘수호전’은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가? ‘수호전(水滸傳)’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삼국연의(三國演義)’가 '실제가 70% 허구가 30%' 라면 ‘수호전’은 '허구(虛構)가 70% 실제가 30%'에 해당한다고 한다. 즉 수호전의 중심인물인 송강(宋江) 등 36인에 대한 기록이 ‘송사(宋史)’에도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는데 "송강은 36인과 함께 제(齊)와 위(魏)의 지역을 횡행(橫行)하였다. 관군 수만이 감히 대항(對抗)하지 못했으며 그 재주는 뛰어났다"라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그럼 36명의 역사적 결말(結末)은 어떠했는가? 설이 분분하지만 1119년 양산박 호걸들은 조정에 귀순 상소(歸順上訴)를 올렸지만 최종 실패하고 다음 해에 군사를 이끌고 산동(山東), 하북(河北), 강소(江蘇) 북쪽 일대를 점령(占領)하였으며 동시 시점에 남쪽에서는 방납(方腊)이 기의하여 정국이 어려워지자 당시 호주 지현이 조정(朝廷)에 상소를 올려서 송강의 투항을 받아들이고 송강(宋江)으로 하여금 방납을 진압(鎭壓)하도록 건의했으나 성사되기 전에 호주 지현이 병사하여 무산(霧散)됐다.
이후 1121년에 조정은 해주 지현 장숙야(張淑夜)를 송강군 진압 대장으로 임명하고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나섰으며 송강 군은 대패했으며 투항(投降)했다. 이후 송강에 대한 설은 분분하다. 일설(一說)은 장숙야에 의해서 피살(被殺)되었다고 전해지나 역사적 기록은 없으며 일설은 송강이 거짓 항복하였으며 이후 다시 봉기했고 실패하여 피살되었다고 했다. 민간전설에서는 송강이 소설 수호지(水滸志)에 나오듯이 방납 진압군으로 동원되었다고 하나 당시 주변 여건을 감안 시 신뢰성(信賴性)이 낮다고 한다.
‘수호전’ 저자, 시내암(施耐庵)과 나관중(羅貫中)은 어떤 관계인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수호전(水滸傳)’의 저자는 시내암(施耐庵)이며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저자는 나관중으로 알려져 있으나 ‘수호전’은 시내암이 기초로 한 내용을 나관중(羅貫中)이 문장을 다듬고 재정리하여 완성했다고 알려졌다. 그럼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최근 중국 인터넷상에 발표된 내용을 활용하였다.
시내암(施耐庵)은 1296년 강소성(江蘇省) 출신으로서 원나라 말기 19세에 수재에 합격하고 36세에 유백온(刘伯温)과 함께 진사에 합격하여 잠시 관직에 몸담았으나 혼란한 시기에 소주(蘇州)를 근거로 한 반란군 수장 장사성 (張士誠) 휘하에 합류하여 막료로서 역할을 하다 장사성에 실망하여 관직을 고사하고 소주에서 은거하며 ‘수호전(水滸傳)’을 집필하였다.
나관중(羅貫中)은 1330년생으로서 14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서 소주(蘇州), 항주(杭州) 지역을 바탕으로 장사를 하다가 타고난 문학적인 재능으로 인근 지역 문인들과 교류를 하고 작품을 썼다. 나관중이 30세를 넘었을 즈음에 당시의 명사였던 시내암(施耐庵)을 존경하고 스승으로 모시고 사사했으며 시내암이 장사성(張士誠)의 막료로 활동할 때 나관중을 추천하여 합류하고 같이 근무했다고 했으며 장사성의 몰락으로 고향으로 귀향하여 ‘삼국 연의’, ‘수당 연의’, ‘잔당 오대사 연의’ 등을 저술(著述)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시내암(施耐庵)은 70여 세에 자신의 작품 ‘수호전(水滸傳)’을 집필할 당시 34살 아래인 나관중(羅貫中)은 스승의 원고 집필을 도왔으며 76세에 사망한 시내암의 뒤를 이어서 ‘수호전’에 대해 재가공(再加工) 및 자신의 생각을 추가 보충하여 ‘수호전’을 완성했다고 한다. 사실 최종 ‘수호전’은 나관중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誇言)이 아니다.
‘수호전’에서 민중에게 가장 사랑받고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 최근 중국 인터넷에서 ‘수호전’ 108명의 영웅호걸 중 가장 민중에게 사랑받는 인물을 인터넷 투표로 선정했는데, 순위는 1위는 화화상(花和尙) 노지심(魯智深), 2위는 행자(行子) 무송(武松), 3위는 군관 출신 표자두(豹子頭) 임충(林冲)이라고 했다. 노지심은 불의를 못 참고 의리에 투철(透徹)하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정의를 위해 싸우는 스님의 모습이 만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행자 무송은 술 취한 상태에서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호기(豪氣)와 두주불사의 호걸 정신이 민중에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임충은 그야말로 당시 송대(宋代)의 부정부패의 희생자(犧牲者)다. 무예가 뛰어나서 80만 금군의 무술 지도자였으나 당시 실세 고태위(高太尉) 아들에게 모함을 당하여 미인 아내가 죽고 유배지에서 핍박(逼迫)을 당하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영웅의 뒷모습이 안타깝기 때문일 것이다.
‘수호전(水滸傳)’은 이 세 사람 말고도 매력 있는 호걸은 많다. '급시우(及時雨)' '때맞춰서 비가 온다'라는 미명에 맞게 남을 위해서 할 것 다하는 송강(宋江), 다소 거칠고 무뢰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이규(李逵), 피리와 무술로 거친 세상을 낭만적으로 살아가는 연청(燕靑), 멋진 귀공자 전형이지만 화살의 달인 화영(花榮) 등 많고도 많다.
중국에서 가장 많은 드라마, 영화 소재 중의 하나가 ‘수호전(水滸傳)’이다. 지난 98년에 방영(放映)된 43편 ‘수호전’, 2011년에 방영된 2탄 86편 ‘수호전’, 수많은 행자 무송(武松)의 영화, 드라마, 노지심(魯智深)의 영웅담을 담은 드라마 영화, 나머지 인물들에 대해서도 영화의 소재(素材)는 끊이지 않고 있다. 아마도 ‘서유기(西遊記)’는 손오공(孫悟空) 일인 천하지만 ‘수호전(水滸傳)’의 인물은 108명이나 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