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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岩漢字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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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지 양산박 두령 지괴성(地魁星) 신기군사(神機軍師) 주무(朱武)

[圖片信息  지괴성(地魁星) 신기군사(神機軍師) 주무(朱武)] 


중국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인 수호전(水滸傳)은 중국 송대(宋代)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등장인물(登場人物)이 다양하고 방대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으며 기존 사회에서 이탈(離脫)된 사람들이 모여 그들만의 공동체(共同體)를 꾸려나간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수호(水滸)란 말은 중국의 삼경(三經)중 하나인 시경(詩經)의 ‘면(緜)’이라는 시에 등장하는 말인데 기존 사회를 의미하는 ‘물(水)’에서 살짝 벗어나 그 언저리(滸)를 맴도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부패(腐敗)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떠돌 수밖에 없던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은유적(隱喩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수호전(水滸傳)이라는 이름보다 ‘수호지(水滸志)’를 더 익숙해한다. 하지만 원래 명칭(名稱)은 수호전이 맞다. 우리나라에 수호전이 전래(傳來)될 때 이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수호전보다 좀 더 유명했던 삼국지(三國志)의 영향으로 수호전이 아닌 수호지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호전 작자(作者)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 중 가장 유력한 세 가지 설로는 시내암(施耐庵)이라는 설과 삼국지(三國志)의 작자인 나관중(羅貫中)이라는 설, 시내암과 나관중의 합작설(合作說)이 있다.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는 만큼 누가 수호전의 작자인지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시내암’과 ‘나관중’, 두 사람은 수호전의 대표적인 편집자(編輯者)라는 것이다. 

수호전의 저술시기(著述時期)는 명나라이지만 수호전의 시대 배경은 송나라이다. 송나라 시대는 대체로 상류 계급의 사람들은 살기 좋았던 시대였다.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없었으며 학문(學問)이 크게 발전하였고 중국의 4대 발명품 중 나침반‧화약‧인쇄술이 발명되었다. 또한 송나라의 수도인 개봉부(開封府)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전국의 물류가 모여들었다가 흩어져 중국 경제의 중심지(中心地) 역할을 했다. 서아시아의 대상 및 지방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금은보화(金銀寶貨)와 비단, 도자기, 그 밖의 많은 상품들이 활발하게 거래되었고 부유한 집안의 사람들이 비싸고 귀한 물품을 사들이며 상류사회(上流社會)를 이루었다.  

그러나 도시 사람들이 사치와 향락(享樂)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에 비해 개봉부를 벗어나 지방의 시골로 가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개봉부(開封府)에서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부유층(富裕層)이 늘어갈수록 지방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 희생양(犧牲羊)이 되어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며 심지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지방의 서민들이 이처럼 고달픈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북송(北宋)은 이민족인 금나라의 침략을 받아 얼마 버티지 못한 채 멸망했다. 결국 ‘수호전’에 등장하는 휘종(徽宗)은 160년 이상 지속된 북송 왕조(北宋王朝)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부덕한 군주(君主)라는 비판을 받았다. 

수호전(水滸傳)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은 실존(實存)했던 인물들로 수호전을 대표하는 ‘송강(宋江)’이라는 인물 자체가 송나라 시절 산동(山東)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도둑이었다. 이것은 송사(宋史)라는 역사책에 간략하게 언급이 되어있는데 송강과 그가 이끌었던 무리는 당시 백성들에게 큰 호소력(呼訴力)을 가졌고 북송시절부터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전설처럼 공유되고 구전(口傳)되었다. 점차 이야기가 부풀려지고 원래 없었던 인물들이 추가되면서 마침내 송대(宋代)에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遺事)’라는 책에 모여지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원대에 이르러서 통속작가(通俗作家)의 사회적 위치는 높아졌고 문자가 없는 몽골족(蒙古族)의 영향으로 인해 구술문학(口述文學)이 발달하였다. 그래서 원대의 대표적인 문학 장르는 희곡(戱曲)이 되었는데 수호전은 희곡의 소재 중 하나로 수용이 된다. 그리고 관객의 호불호에 따라 인물이 정형화(定型化)되게 된다. 이처럼 수호전은 송대(宋代), 원대(元代)를 거쳐 형성, 발전되어 명대에 이르러 시내암(施耐庵)과 나관중(羅貫中) 두 사람에 의해 완성되게 된다. 

중국이라는 땅덩어리에 송나라가 들어서 있던 시절에 여러 호걸들은 양산박(梁山泊)이나 이룡산 등에 모이게 된다. 그리고 이룡산(二龍山)의 호걸들은 모두 양산박에 모여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부패 관군이나 그 외의 여러 적들과 싸우게 된다. 여러 호걸(豪傑)들이 모여든 양산박에는 어느덧 108명의 호걸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하늘을 대신해 의를 행하겠다는 맹세를 한다. 연청(燕靑)이라는 자가 인맥을 통해 황제(皇帝)를 단독으로 알현(謁見)하게 되면서 황제에게 양산박 호걸들의 뜻과 그동안의 사실들을 모두 올바르게 전해주자 황제는 기뻐하며 양산박 호걸들의 귀순(歸順)을 허락한다.  

허나 4대간신(四大奸臣)은 이들을 시기(猜忌)하여 그들에게 벼슬을 주는 것을 방해한다. 허무하게 세월을 보내던 양산박 호걸들은 많은 토벌(討伐)을 하게 되는데 동경(東京)으로 양산박 호걸들이 귀환(歸還)했을 때 그들의 수는 처음 108명에서 27명으로 단번에 줄어들게 된다. 살아남았던 장수들 중 대부분은 관직(官職)과 벼슬에 회의(懷疑)를 느끼고 결국 모든 걸 버리고 고향으로 떠난다. 

4대간신은 음모를 꾸며 양산박 호걸들의 두령(頭領)이었던 송강(宋江)과 노준의를 죽이려 한다. 결국 노준의(盧俊義)는 음모에 빠져 사망했고 송강 또한 독주(毒酒)를 마시게 된다. 독주를 마시고 죽음을 앞둔 송강은 혹시나 이규가 반란을 일으키고 공적과 충성심을 무너뜨릴까 두려워 이규(李逵)를 불러 같이 독주를 마시고 죽어 요아와(蓼兒洼)에 묻히게 된다. 송강(宋江)은 죽기 직전 오용(吳用)과 화영을 만나고 싶어 했고 결국 송강과 이규의 혼령(魂靈)은 오용과 화영(花榮)의 꿈에 나타나 자신들이 묻힌 요아와(蓼兒洼)에 찾아와 달라고 한다.  

요아와(蓼兒洼)에 혹시나 해서 찾아온 오용(吳用)과 화영(花榮)은 모두의 의리를 위해 같이 죽어 깨끗한 이름을 세상에 남기고 떠나리라 마음먹고 그들 또한 자살(自殺)을 한다. 요아와(蓼兒洼)에는 그리하여 4개의 무덤이 생겨났고 그 후 요아와(蓼兒洼) 근방의 초주성(楚州城) 백성들은 그들의 인덕(仁德), 충성심에 감격하여 사당(祠堂)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이렇게 중국의 사대기서 중 하나인 ‘수호전(水滸傳)’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았다. 수호전은 한국에서 유명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나 서유기(西遊記)와는 달리 만화나 영화로 쉽게 접하기 어렵고 수많은 등장인물(登場人物) 때문에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읽게 되면 어려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럼 아래에 지괴성(地魁星) 신기군사(神機軍師) 주무(朱武)를 소개하련다. 

수호전에 나오는 신기군사(神機軍師) 주무(朱武)는 원래는 도간호(跳間虎) 진달(陳達), 백화사(白花蛇) 양춘(楊春)과 함께 소화산(少華山)의 산적으로 소화산의 첫째두령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한 벌 쌍검(雙劍)을 잘 쓴다 라고는 하지만 애시 당초 도술(道術)과 지략(智略)이 뛰어난 인물이기 때문에 쓰는 장면은 거의 없다. 

산채 근처 사가촌(史家村)에 사는 호걸 구문룡(九紋龍) 사진(史進)에게 진달(陳達)이 포박 당하자 사진이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인 것을 이용해 애걸복걸하며 비는 통해 진달을 풀어주게 하고 사진과 친교(親交)를 맺게 된다. 이후 사진은 도적으로 몰려 결국 소화산의 우두머리가 된다. 별명에서 보여주는 듯이 여러 가지 계책(計策)들을 잘 짜내기로 유명했지만 소화산 패거리가 양산박에 들어오고 거기에 있는 오용(吳用) 덕분에 한쪽으로 밀려났다. 

군사 위치이긴 하지만 주무(朱武)는 계략보다는 진법(陣法)이 특기다. 중반까지는 특기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요나라 원정 때부터 각종 진법으로 활약하고 요나라의 진법을 간파(看破)하기도 한다. 양산박의 부군사로서 노준의(盧俊義) 부대의 참모로 종군(從軍)한다. 신기군사(神機軍師)라는 별호대로 책사(策士)의 인물이라 할 수 있지만 산적이라는 전직 때문인지 만화나 아동용 수호지(水滸志)에는 그의 특기가 전혀 부각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부군사라는 직책을 보면 지살성(地煞星)의 수석이라는 것이 허세가 아니다. 

방납(方臘) 토벌 전에서는 정찰용으로 소화산(少華山) 옛 동료들과 석수(石秀), 이충(李忠), 설영(薛永)을 욱령관(昱嶺關)으로 보냈는데 이 두령들이 모두 방만춘(方萬春)의 화살에 맞아 죽어버렸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옛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셈인지라 그들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다. 그래도 계략으로 통해 방만춘을 사로잡아 죽여서 복수(復讎)를 했다. 방납 토벌 후엔 번서와 함께 공손승(公孫勝)의 문하로 들어가 도술(道術)을 배운다. 

지괴성(地魁星) 신기군사(神機軍師) 주무(朱武)의 별호는 신기군사(神機軍師)이며 지괴성(地魁星)에 상응한다. 지살성(地煞星)의 으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는 사실상 양산박(梁山泊)의 부군사로 활약하는 인물이다. 

원래 부군사 자리는 공손승(公孫勝)이 꿰차고 있지만 공손승은 군사라기보다는 도술수행자인지라 책략(策略)을 짜내거나 수를 읽는 귀찮은 일은 하지 않는다. 그냥 법술(法術) 한방으로 통해버리는 인물이다. 

오용(吳用) 역시 지다성(智多星)이란 별명으로 불리우며 많은 책략을 짜내긴 하지만 말 그대로 그는 책사(策士)에 가깝고 군대의 일을 돌보는 군사의 일은 주무(朱武)가 떠맡고 있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특히나 진법에 능해 요나라에 비밀리에 전수되는 태을삼재진이니 하락사상진이니 혼천상진이니 하는 것도 다 알아볼 정도로 실력(實力)이 뛰어나 일개 산적 출신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이다. 

본래 정원(定遠) 사람으로 한 벌 쌍칼을 잘 썼으며 진(陳)을 치고 꾀를 쓰는 일에 능하였다. 진법(陣法)에 능하기 때문에 신기군사(神機軍師란 별호를 얻었다. 화주 화음현의 소화산(少華山)에서 첫째두령에 있다가 의제 진달(陳達)이 사진과 싸우다 사로잡히니 달리 구할 방법이 없어 양춘(楊春)과 함께 사진(史進)에게 의기로 호소하여 사진을 감동시키고 진달을 구한 뒤 왕래가 잦아졌다. 후에 사진의 머슴 왕사의 실수로 그들 간의 왕래가 관아(官衙)에 알려지게 되자 함께 어려움을 벗어난 뒤 사진에게 산채에 들 것을 권하였으나 사진이 마다하자 산채로 돌아갔다. 후에 사진이 갈 곳이 없어 소화산 산채로 오자 그를 산채의 우두머리로 모셨다. 사진이 화주(華州)의 태수를 죽이려 잠입했다 잡혀가고 양산박에서 온 노지심(魯智深)도 잡혀가자 양산박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구한 뒤 양산박에 들었다. 108인이 모두 모인 뒤 군무를 관장하는 일을 맡았으며 부선봉 노준의(盧俊義)를 도와 요나라를 치고 사방의 반란군들을 쳐부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방납(方臘) 토벌 후에 무혁랑(武奕郞)을 받고 도통령이 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번서(樊瑞)에게로 가서 법술(法術)을 배운 뒤 그와 함께 옳은 도사(道士)가 되어 강호를 떠돌다가 공손승(公孫勝)에게로 가서 일생을 마쳤다. 

주무(朱武)은 중국의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인 “수호전(水滸傳)”의 등장하는 인물로 108성 중 37위이자 지살성(地煞星)의 으뜸인 지괴성(地魁星)에 해당한다. 신의 재주를 가졌다 하여 신기군사(神機軍師)라는 별호로 불리며 쌍도(雙刀)의 명수이다. 

진달(陳達), 양춘(楊春)과 의형제를 맺은 뒤 소화산(少華山)의 산적의 두목으로 있었으며 진달이 사가촌(史家村)을 습격할 계획을 꾸미자 사가촌에 있는 사진(史進)의 소문을 들은 주무(朱武)는 진달(陳達)을 만류했다. 하지만 진달은 습격을 강행해 결국 사진에게 붙잡혔고 주무는 사진(史進)의 의협심을 이용해 진달을 구출(救出)할 작전을 구상했다. 이후 양춘(楊春)과 함께 아무런 무기 없이 단 둘이서 사진에게로 가 진달의 석방(釋放)을 요청하였고 이들의 의협심(義俠心)에 반해 진달을 석방해 준 사진과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이들의 친분이 관원에게 발각되어 결국 관원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여 사가촌(史家村)을 불태웠으며 주무(朱武)는 진달(陳達), 양춘(楊春)과 함께 사진을 두령으로 삼으려 했으나 사진(史進)은 이를 거부하고 방랑의 길에 나섰다. 

그 뒤 전국 방랑(放浪)을 끝내고 다시 돌아온 사진을 두령으로 맞아들였으며 이후 사진에게 양산박(梁山泊) 합류를 권유하러 온 노지심(魯智深)과 만났다. 하지만 사진은 화주(華州)의 태수(太守)에게 붙잡혀 있어서 노지심(魯智深) 등 양산박의 호걸들과 함께 사진을 구출했으며 이후 사진(史進), 양춘(楊春), 진달(陳達)과 함께 양산박(梁山泊)으로 들어갔다. 

108성 집결 이후에는 오용(吳用)과 공손승(公孫勝)을 보좌하고 군무 및 기밀을 담당하는 부군사(副軍師)로 임명되었으며 오용에 비해 진형(陣形)에 대한 지식이 뛰어나 적장(敵將)이 쓰는 진형(陣形)을 잇달아 간파했다. 방납(方臘)의 난을 평정한 뒤 양산박 군이 해산한 이후에는 무혁랑(武奕郞)·도통령(都統領)에 천거되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번서(樊瑞)에게 도술을 배운 뒤 공손승(公孫勝)에게 입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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