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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사전 - 정보(程普)

[삼국지 인물사전 - 정보(程普)] 


정보(程普)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덕모(德謨)이며 유주(幽州) 우북평군(右北平郡) 토은현(土垠縣) 사람이다.

행적
본래는 지방의 하급 관리로 손견(孫堅)이 하비승일 때 그의 부하로 처음 들어왔으며 그것을 계기(契機)로 평생 손씨 일족을 섬겼다. 손견을 따라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진압했고 양인 전투에 참전해 동탁(董卓)을 격파하고 부상을 입었다.

정보(程普)는 “여정 장수들 중 가장 먼저 나와서 정보의 나이가 제일 많았기에 당시 사람들을 모두 정공(程公)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므로 황개, 한당, 조무보다도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손견이 죽은 후 손책(孫策)을 따랐다. 손책이 원술(袁術)의 명령을 받아 여강(廬江)을 함락하는 데에 종군했으며 손책이 장강을 건너 유요(劉繇)와 그 수하들을 공격하고 단양군의 속현들을 전전하면서 많은 공을 세워 병사 2천과 말 50필을 받았다. 또 손책이 회계로 들어가자 오군도위(吳郡都尉)가 되었으며 당시 손책은 오군태수로 주치를 임명(任命)했고 단양도위(丹陽都尉)로 옮겼다. 손책이 조랑을 치다 대군에 에워싸이자 정보(程普)는 자신의 무용에 의지해 손책이 빠져나오게 했다. 이후 탕구중랑장을 지내고 영릉태수를 겸했다. 건안 4년(199년)에 손책이 원술의 잔당을 규합(糾合)한 유훈을 공격해 몰락시키고 강하를 다스리는 강하태수 황조의 치소 사이(沙羡)를 공격할 때에 종군했다. 손책이 허공을 주살(誅殺)한 일로 인해 허공의 식객들에게 기습을 당하자 부상당한 손책을 업고 진중으로 와서 치료했다.

손책 사후 장소 등과 함께 손권을 보좌(輔佐)하고 오, 회계, 단양 3군의 불복종자들을 토벌(討伐)했다. 또 손권의 황조 토벌에도 종군(從軍)했다. 태사자를 대신하여 해혼의 수비를 맡았다. 적벽대전(赤壁大戰) 때는 주유(周瑜)와 함께 좌우독으로 임명되어 오군을 통솔하며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후에도 주유와 함께 남군에서 저항하던 조인(曹仁)을 축출했다. 비장군(裨將軍)이 되었고 강하태수(江夏太守)를 겸임했다. 주유 사후 남군태수(南郡太守)를 겸임했으나 손권이 남군을 유비(劉備)에게 빌려 주었으므로 다시 강하태수를 겸임했다. 탕구장군(湯寇將軍)으로 승진하고, 죽었다. 위요의 "오서(吳書)"에 따르면 반역자(叛逆者) 수백 명을 불태워 죽였다가 날이 밝은 후 발병(發病)하여 백여 일 안에 죽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정보
손견이 반동탁 연합군의 선봉장(先鋒將)이 되었을 때 화웅과 겨루기도 했으며 화웅의 부장인 호진을 죽였다. 손견이 죽을 때 손견(孫堅)을 죽인 유표의 부하를 사살(射殺)하기도 했으며 허공의 식객에게 기습당한 손책(孫策)을 구출하기도 했다.

정보(程普)는 철등사모(鐵脊蛇矛)의 명수이다. 그러나 사모가 진나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철등사모는 나관중(羅貫中)의 각색 또는 후대 사람들의 과장인 것으로 보인다.

관직은 탕구장군이다. 손견(孫堅), 손책(孫策), 손권(孫權)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황개(黃蓋), 한당(韓當)등과 누차 전공을 세웠는데 철사모(鐵蛇矛)창이라는 무기의 명수(名手)였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 사리판단이 언제나 바르고 사람들에게 매력(魅力)이 있었고 전한다.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부(副)도독을 지내며 정도독 주유에게 협력(協力)하여 조조의 대군을 쳐부수었으며 장수하다 병사했다.

오나라 장수중에서 가장 연로(年老)하고 인물 등용이 뛰어나 존경(尊敬)을 받았다. 손견을 따라 황건적(黃巾賊)을 무찌른 후 더욱 신임(信任)을 받고 그가 죽자 손책과 함께 거의 모든 전투에 참가했다. 또 손책(孫策)이 죽자 그의 아들 손견(孫堅)을 잘 보좌했다.

손견(孫堅) 막하의 용장이다. 우북평(右北平) 토은(土垠) 사람으로 자는 덕모(德謀)이며 원소(袁紹)를 맹주로 하여 동탁(董卓)을 칠 때 사수관(汜水關) 싸움에서 화웅(華雄)의 아장(亞將) 호진(胡軫)을 찔러 죽여 사기를 떨친 명장(名將)이다.

후에 주유(周瑜)가 대도독이 되어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 못마땅해 첫 번 모임에 아들 정자(程咨)를 대신 보냈었으나 아들의 복명(腹鳴)으로 모든 것이 법에 맞은 것을 알고 자신 달려가 잘못을 빌고 그에게 심복(心服)하였다.

서성(徐盛)과 짝이 되어 싸움 때마다 등장하여 활약(活躍)한다. 손권까지 삼대에 걸쳐 봉사한 노장(老將)으로 벼슬아 탕구장군( 寇將軍)에 이르렀으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나라 개국공신(開國功臣)이며 손권 3대를 나란히 섬긴 무장 정보(程普)이다. 정보는 손권3대의 초대인 손견의 대표적(代表的)인 무장들 중에 한 명이다. 당시 무장들이 전투에만 능했던 것과 달리 정보는 지장(智將)으로서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계략(計略)도 능히 쓸 줄 아는 무장이었던 것이다.

손견 때는 황건적 토벌(黃巾賊討伐)을 하는데 일조(一助)했고 손책을 섬기면서 오나라의 초석(礎石)을 다지는 굵직굵직한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정보(程普)가 가장 크게 활약한 전투라면 단연 적벽대전(赤壁大戰)이다. 이 당시 좌도독이였던 주유와 나란히 우도독으로 참여하게 된다.

사실 여기에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당시 손권(孫權)은 늙은 무장들(손견 시대의 무장)보다 신진세력의 젊은 무장들을 중용(重用)하게 된다.

이를 정보(程普)는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동안의 공적(功績)과 연륜을 봐서라도 중신들이 대우해줘야 하지만 주유라는 새파란 무장(武將)을 비롯하여 어린 무장들을 자신들보다 더 높게 대우(待遇)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에 주유와 갈등(葛藤)이 생기지만 대의를 위해서 사적인 감정을 접게 되고 적벽대전을 승리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이런 모습(模襲)을 보면 확실히 정보는 공과 사는 구분(區分)할 줄 아는 지장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오서(吳書)”에 이르길 '정보가 반역자(叛逆者)를 죽인 것이 수백 명으로 모두 불속에 내던지게 했는데 날이 밝자 병이 심해져 백여 일 만에 죽었다.'라는 기록(記錄)이 있다. 여기에 병이 문둥병이라는 말도 있는데 정확(正確)한 것은 알 수 없다.

우직한 모습의 정보(程普)는 철등사모를 잘 다뤘다는 기록을 참고(參考)했는지 모르나 사모라는 무기가 진나라 시대(진시황이 아닌)때부터 등장(登場)했던 무기라 이 기록은 잘못되었다는 평도 있다.

정보(程普)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오나라 무장(武將)이다. 성품은 베풀기를 좋아하고 사대부(士大夫)들을 아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철등사모(鐵脊蛇矛)라는 무기를 사용한다. 그러나 사모가 서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철등사모는 나관중(羅貫中)의 각색이다.

젊은 시절 손견(孫堅)이 큰 뜻을 이루고자 몸을 일으켰을 때부터 따라 다닌 4명의 공신 중 한 사람이며 이후 손책(孫策), 손권(孫權)까지 3대를 받든 오나라의 원로(元老)가 되었다. 같은 시기에 손견을 모시기 시작한 황개, 한당, 조무와 함께 손견의 사천왕(四天王)이라 불리는 경우도 있다.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한 손견의 군사로서 동탁군과 싸웠으며 사수관 전투(汜水關戰鬪)에서는 호진을 쓰러뜨렸다. 낙양 상경 후 손견과 함께 옥새(玉璽)를 발견하는데 정보, 한당, 황개, 조무 중 가장 학식(學識)이 뛰어났던 정보(程普)가 옥새를 알아보고 '수명어천 기수영창'(受命於天, 旣壽永昌)'이라는 글자를 읽고 "하늘로부터 명을 받았으니, 오래 가고 멀리 뻗으리라."라며 해석(解釋)한다.

양양전투에선 어린 손책(孫策)을 지키는 와중에도 손견을 죽음으로 몬 여공을 찔러죽였고 오군평정전에선 태사자(太史慈)와 30합으로 비겼다.

이후 손책(孫策), 손권을 보좌해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는 조조(曹操)와의 교전을 주장하는 개전파(開戰派)의 중심이 된다. 젊은 주유(周瑜) 밑에 놓여지자 처음에는 불만(不滿)을 품었으나 주유의 지휘가 훌륭하다는 것을 알고 감복(感服), 이후 주유를 따라 적벽, 남군을 연전(連戰)했다.

여러 장수(將帥)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아 정공(程公)이라고 불렸다고 하니 동기인 황개, 한당보다 연상인 오나라 최연장자(最年長者)였던 걸로 보인다. 사망은 215년 이전으로 보이는데 손교가 215년에 죽은 손유의 병사를 가져가는데 손교전(孫皎傳)에서 그 전의 기록이 정보(程普)의 뒤를 이어 하구를 다스린 기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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